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3
0023 / 0284 ———————————————-
6. 노란 샤쓰 입은
임치로 향하면서 나는 시종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죽어가는 이들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왕왕 울렸다. 사람의 살이 불에 타면서 풍기는 노린내와 망루의 오래된 나무기둥이 타면서 뿜는 매캐한 연기와 그리고 비명, 비명, 비명.
나는 우연히 광화문 앞 대규모 시위현장을 지나간 적이 있는데, 그곳의 비명을 들어본 적이 있다. 차벽을 넘어 희미하게 울리는 그들의 소리를 나는 무심코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그것과 유사한,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처절한 절규를 나는 정면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목적 없는 싸움에 동원되어 몰가치하게 죽는 사람들.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나에게 힘든 일이었다.
나와 말 머리를 나란히 하던 노구는 나를 흘끗 보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너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구한 것이다. 악인을 벌하여 무고한 자들의 생을 건져냈으니 너는 떳떳해야 한다. 고개 들고 똑바로 나아가라. 네가 너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나와 우리들 또한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나는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노구를 바라봤다.
“대장……”
노구는 말을 던져놓고 나에게 시선 한 줌 던져주지 않은 채 말의 속도를 높여 앞서나갔다. 영자도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네가 없었으면 낭야는 진작 도겸과 궐선의 놀이판이 됐을 것이고 동평릉의 처녀들은 오늘도 사마구의 문드러진 자지에 놀아났을 거야. 화평자, 잘하고 있어.”
나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그래, 떳떳해지자.
제남에서 제군까지는 지척이었다. 오랜 행군을 할 것도 없었다. 발 없는 말은 우리보다 빠르니, 벌써 제군의 임치에는 우리의 진공 소식이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삐를 더욱 단단히 쥐었다. 멀리 희끄무레하게 임치성이 보였다. 공성을 개시하기 전 우리는 막사를 치고 휴식을 취했다.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그대로 임치를 뒤집는 거다. 임치성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차게 굳은 주먹밥을 씹는데, 동쪽에서 흙먼지가 일며 일단의 군마가 몰려왔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나도 모르게 주먹밥을 덩이째 삼켜버렸다. 내가 가슴을 두드리며 컥컥거리니 영자가 급히 와서 물을 먹여주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를 표할 겨를도 없이 동쪽에서 몰려오는 군단을 예의주시했다. 나무등치에 몸을 기댄 채 눈을 붙이던 노구도 일어나 말에 올라탔다.
“백기를 들고 있습니다!”
적의는 없다는 말인가.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했다. 군세는 종잡아 천 여는 되어보였다. 노아가 멀리 나서서 그들을 멈추니 그들이 그대로 따랐다. 뭐야, 순한 놈들이었네. 나는 주먹밥덩이가 소화되지 않아 더부룩한 속을 매만졌다. 그들의 선두에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군을 멈추고 말에서 내려 투구를 벗었다. 노구가 다가가니 간단하게 읍했다. 노구도 답례했다.
“군(君, 이 당시 통용되던 2인칭 대명사)은 누구시기에 우리와 접촉하는 것이오.”
“이 몸은 청주별가(別駕, 주자사의 최고 자문역) 유헌이라고 하오.”
노구의 벼슬인 도위보다는 지체가 높은 관위였다. 일단 노구는 말을 높였다.
“유 공께서는 어인 일로.”
유헌은 병가(兵家)의 법도에도 빈객에게 차 한 잔은 대접해야하는 것은 아니냐며 퉁명스레 받아쳤다. 아, 이 인간, 꼰대의 냄새가 느껴진다. 노구의 얼굴에서 잠깐의 불쾌감이 스쳤지만 차 한 잔으로 괜한 분란을 일으킬 정도로 멍청한 인사는 아니었다.
노구는 유헌을 막사로 안내했고, 그다지 좋은 품질은 아닌 차가 올라갔다. 나는 참군의 자격으로 배석했다. 유헌은 차 맛을 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때려주고 싶다. 오랜만에 화가 스멀스멀 오른다. 화평, 화평, 화평.
“본관은 공북해를 섬기는 몸이오.”
별가라면 주자사의 자문역인데 전해를 섬겨야 정상 아닌가. 어쨌든, 우리로서는 전해보다는 공융의 끄나풀인 편이 좋았다. 유헌은 말을 이었다.
“공북해께서는 명공이 출병한 까닭을 여쭙고 오라고 명하셨소.”
“우리는 공손백규(白圭, 공손찬의 자)의 꼭두각시인 전해를 토멸하고 일대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왔소.”
“공손백규가 원본초에게 연패하여 세력이 다소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강자요. 명공이 그런 하찮은 군세로 공손백규에게 반기를 들려고 하는가.”
노구를 대신해서 내가 대답했다.
“공손백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세력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인즉, 어찌 우리가 그를 염려합니까?”
유헌은 눈썹을 치떴다.
“오만한 말이로군.”
“당장 공손백규가 양마와 풍족한 물산을 가졌다지만 이미 공손백규의 총기가 흐려져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니 필시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오.”
공손찬은 몇 해 후 원소에 의해 세력이 멸망하고 처자식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한 수순을 알고 있기에 나는 자신 있게 공언했다. 미약한 방랑군에서 공손찬의 멸망을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니 유헌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지만 내가 워낙에 호언장담을 하니 그도 쭈뼛거리며 더 말하지 못했다. 그는 화제를 돌려 자신이 내방한 까닭을 말했다.
“공북해께서는 공손백규의 허수아비 자사인 전해로부터 심하게 핍박받으셨소. 때문에 공손백규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지. 이번에 전해가 서주로 출병하자 본관은 공북해께 임치를 함락시키자 진언했소. 그러나 공북해께서는 도저히 듣질 않으셨소.”
내가 아는 공융은 전쟁을 즐기는 성정이 아니었다. 공자의 20대 후손으로 학식이 깊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영감의 이미지. 불시의 계략과 돌발적인 파격을 즐기는 계략가의 유형도 아니고 탁월한 전쟁감각으로 군을 지휘하는 무장의 유형도 아니었다.
굳이 내 주변 인물 중에서 공융 같은 사람을 꼽자면, 내 대학 지도교수님을 말하겠다. 너무나도 한문학을 사랑해서 결혼도 안 하고 연구실에서만 틀어박혀 있는, 그러면서도 권력에 의해 불의한 시국이 조성되면 거리로 나서기를 꺼리지 않는. 그러나 현실감각은 기대할 수 없는. 워낙 까다롭고 곧은 성품이라 사람이 꼬이지 않는. 딱 그 교수님의 이미지.
유헌의 말로 미루어 현실의 공융도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융은 그저 북해상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백성들을 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공융이었으면 곧장 청주를 털어먹었을 텐데.
유헌은 차를 삼킨 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태산의 장 공이 동병하여 제남의 서화를 일거에 소탕하고 임치까지 한달음에 육박한 것을 보고 본관은 다소 놀랐소이다.”
당연히 놀랐겠지. 너희들은 서화, 사마구도 잡지 못해서 쩔쩔거리고 있는데 우리는 놈들의 목을 따고 이곳까지 이틀만에 왔으니까. 노구는 침묵을 지키며 유헌의 뒷말을 기다렸다.
“명공이 임치까지 다다르니 공북해께서도 생각을 바꾸신 것 같소. 그대를 도와 청주를 평정하고 공손백규든 원본초든 외인의 침략을 저지하여 천자의 은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소.”
얼레,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실컷 방관하다가 우리가 임치를 먹으려고 하니까 슬그머니 숟가락 하나 얹겠다는 말이잖아. 우리를 방패막이 삼아서 공손찬이나 원소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혼자 호의호식하면서 발 뻗고 자겠다고? 기가 막히다. 우리가 호구냐, 그걸 들어주게. 나는 노구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유헌의 말을 받았다.
“공북해께서는 전해의 세력을 잘라내고 스스로 청주자사에 오르려 하십니까?”
나는 노골적으로 공융이 우리를 호구 잡아 열매를 따먹으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당돌한 물음에 유헌은 적잖이 당혹한 눈치였으나 그는 곧 낯빛을 다스렸다.
“그렇지 않네. 오히려 공북해께서는 천자께 장 공을 청주자사로 천거하고 힘써 돕겠다고 하셨네. 다만 공손백규와 원본초를 제어하고 백성들을 잘 위무한다면 말이지.”
똥 싸기 전에 무슨 말인들 못하랴.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겉으로나마 웃으면서 손을 건네는 공융의 손길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이미 임치도 버거운 적인데 굳이 공융에게 적개심을 심어줄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침묵하고 노구에게 발언권을 넘겨주었다. 노구도 머리 회전이 괜찮은 인물이니 이미 계산을 마쳤을 터다.
“공북해께서 우릴 도우시겠다니 감사천만이올시다. 합세하여 청주의 안정을 이룩한다면 이 이상으로 기꺼운 일이 없습니다.”
“본관이 이끄는 병력은 일천에 불과하나 이어 왕자법과 유공자가 이끄는 병력 사천이 당도할 것이니 명공의 세와 합하면 일만을 상회하는 대군이 되오. 우리는 군략에 서투르니 북해병을 명공의 뜻대로 거두어 쓰시오.”
너무 호의적이다. 나는 왠지 수상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들이라면 누구나 어머니로부터 의심의 조기교육을 받는다. 모르는 아저씨가 사탕 주면서 부르면 따라가지 마, 알았지.
이것은 차 조심하라는 말과 더불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일종의 격언이다. 그 지독한 반복학습이 몸에 밴 나는 유헌의 호의가 불온하게 느껴졌다. 유헌은 나에게 모르는 아저씨였고, 그가 맘대로 부리라고 주는 북해병은 사탕이었다. 아, 이거 뭔가 느낌 싸한데.
나는 거부하라고 진언하려고 했지만 노구는 내가 나설 새도 없이 그 병력을 덜컥 받아들었다.
“귀한 병력, 귀히 쓰겠소.”
유헌은 웃으며 읍한 뒤 우리의 바로 옆에 막사를 쳤다. 이어 그의 말대로 왕자법과 유공자의 병력이 당도하여 유헌의 세와 합쳤다. 나는 노구와 함께 그들을 접견했는데, 그다지 논할 가치가 없는 범부들이었다.
“대장, 뭔가 불안해. 지들이 무슨 자선사업가야? 뭔데 병력을 막 퍼주냐고.”
노구는 나를 흘긋 바라봤다.
“자선사업가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말 뜻은 짐작이 간다. 공북해는 군자로 소문난 인물이다. 청주의 안정을 위해 병력을 떼어주는 것은 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런가. 내가 너무 속물이었나. 그래, 난세에 이런 군자도 있기는 해야 살맛이 나지. 그래도 이건 너무 파격이다. 성분도 모르는 외부 군벌에게 오천이나 군사를 내준다고? 아무리 전해에게 쌓인 것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남에게 오천을 내주느니 차라리 그 군사로 전해를 치는 편이 나았을 터다. 아무래도 내 머리로는 가늠이 되질 않았다. 내 옆에서 비스듬히 누워 과일을 깨물어먹던 영자가 한 마디 얹었다.
“그래, 공북해는 군자야. 내가 예전에 우연히 접견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꾸벅 인사하니까 엄청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거든. 웬만하면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은데.”
얘는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웃으면서 머리 쓰다듬어주는 건 원술도 해주겠다. 훗날 손권의 휘하에 드는 육적이 어렸을 적, 원술이 주최한 잔치에서 귤을 몰래 빼돌린 일이 있었다. 원술이 까닭을 물으니 귤이 달아 어머니를 주려 한다고 육적이 답했다. 그것을 들은 원술이 귤을 박스 채로 육적의 집까지 퀵으로 쏴줬다.
이것이 그 유명한 육적회귤(陸績懷橘)의 고사다. 머리 쓰다듬은 걸로 군자면, 원술은 무슨 예수님이냐? 아무튼 영자는 칼이나 놀리면 그만이다. 나는 괜히 성질이 뻗쳐서 영자가 먹던 과일을 뺏어 마구 베어 물었다.
————————-
삼국지 인물열전 8. 유헌(?~?)
원담이 공융을 몰아내고 청주자사가 되자 수하에서 청주별가를 지냈다. 이 글에서 공융을 섬겼다는 설정은 유헌이 청주 토박이로 호족 노릇을 하며 주인을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유헌은 기록에 딱 한 줄 나오는데, 강직한 왕수를 죽이라고 모함했다는 부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