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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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하후연은 무장한 채로 은왕부에 입성하여 은왕의 국새(國璽)를 챙겼다. 그 다음에는 무장을 풀지 않은 병력들을 우르르 동원하여 원씨가 옹립한 천자 유화의 대전으로 짓쳐들어갔다. 하후연의 당당한 위풍에 그 누구도 천자의 대전에 함부로 칼을 차고 들어오느냐, 그럴 듯한 호통 한번 치는 이가 없었다. 도리어 천자 유화의 환관들은 천자의 머리채를 끌고 하후연의 앞에 대령했다. 하후연은 천자의 면류관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천자, 천자는 폐위되었소.”
유화는 떨리는 눈으로 하후연을 올려다봤다.
“…짐은 목숨을 잃게 되는가?”
하후연은 그를 비웃었다.
“스스로 짐이라고 일컫기 민망하지도 않은가?”
그는 허리춤에 찬 칼자루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업도의 천자가 버젓이 계심에도 그대는 감히 제위를 참칭했다. 그 황망한 대역죄를 죽음이 아니면 무엇으로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후연은 그것으로 폐제(廢帝) 유화와의 대화를 단절했다. 유화는 조왕부의 병사들에 의해 질질 끌려 업도로 압송되었다. 원씨가 대대로 물려받던 금은보화는 조왕부에 의해 갈취되었다. 하후연도 보도 한 자루를 챙겼다.
“하, 원씨의 일가붙이들은 모두 도망을 놓았는가?”
하후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심한 족속들 같으니.”
장군 고람은 승상부에서 조왕부의 병사들에 의해 포박되었다. 이미 난리가 진정된 승상부에 곽가는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전풍의 집무실은 오래된 죽간 냄새가 풍겼다. 곽가는 엎어진 전풍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나지막이 말했다.
“아, 뵙고 싶었습니다. 전풍 공.”
그는 천천히 걸어가 전풍의 탁자 앞에 마주앉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대단한 기략이었고, 훌륭한 충정이었습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전풍의 주검에서는 곰팡내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러면 뭘 합니까. 이렇게 죽어계시지 않습니까.”
곽가는 얌전히 웃으면서 손을 뻗어 전풍의 식은 손을 붙잡았다.
“나는 공의 인생을 알 것 같습니다.”
곽가는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격하게 기침했다. 입을 가린 부채에 피가 뿜어졌다. 그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팔략은 무엇입니까. 승상은 무엇입니까. 원씨는 무엇입니까. 은왕부는 무엇입니까. 부귀는 무엇입니까. 영화는 무엇입니까. 전쟁은 무엇입니까. 화평은 무엇입니까. 백성은 무엇입니까. 선비는 무엇입니까. 군주는 무엇입니까. 장군은 무엇입니까. 창칼은 무엇입니까. 산천은 무엇입니까. 초목은 무엇입니까. 술은 무엇입니까. 사내는 무엇입니까. 계집은 무엇입니까. 늙은이는 무엇입니까. 아이는 무엇입니까. 처는 무엇입니까. 첩은 무엇입니까. 적자는 무엇입니까. 서자는 무엇입니까. 약은 무엇입니까. 독은 무엇입니까. 동쪽은 무엇입니까. 서쪽은 무엇입니까. 사서(四書)는 무엇입니까. 육도와 삼략은 무엇입니까. 건강은 무엇입니까. 질환은 무엇입니까. 예의는 무엇입니까. 정의는 무엇입니까. 잔혹은 무엇입니까. 자비는 무엇입니까.”
곽가는 오래된 죽간 냄새가 풍기는 서가에 몸을 기댔다.
“…천하는 무엇입니까……”
곽가의 눈두덩에서 발원한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저는 아는 것이 없군요. 나는 무엇입니까……”
곽가는 주먹을 쥐어보려고 했지만 손가락은 꿈틀거리기만 했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입니까.”
곽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의 눈꺼풀은 최후의 저항을 하는 듯 파르르 떨렸다.
“내가 이기고 그대가 진 것입니까?”
힘이 풀린 손가락이 부채를 스르르 놓아버렸다. 피 묻은 부채는 바닥에 멋대로 떨어졌다.
“나는 이겼고 그대는 졌는데.”
손가락의 힘이 풀리고 팔뚝의 힘이 풀려 곽가의 팔은 깃발처럼 나풀거렸다.
“우리는 왜 똑같이 죽는 것이죠.”
곽가는 잠깐 웃었다. 그의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우금이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곽가를 찾아 전풍의 승상부에 들어왔다. 그는 서가에 머리를 기대고 편안히 웃고 있는 곽가에게로 다가갔다.
“곽 공, 은왕부의 곳간에 있던 군량을 업도로 전량 보내는 게 옳겠습니까? 아니면……”
기척 없는 곽가가 이상하여 우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곽 공.”
우금의 손이 곽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자 곽가의 몸이 엎어져 그의 얼굴이 전풍과 반대되는 방향을 바라보며 탁자에 처박혔다.
“곽 공! 곽 공!”
우금이 급히 의원을 수배하여 곽가를 보게 했으나 의원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우금은 황망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후연은 곽가의 시신을 오동나무 관에 안치하고 업도로 보냈다. 그는 곽가의 생전 당부에 따라 은왕부의 구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귀부하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특히 하후연의 눈에 드는 인물이 있었다.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가.”
“전예, 자는 국양이라고 합니다.”
“그대가 섬기는 사직은 멸망했다. 내가 조왕께 그대를 천거하겠다. 조왕부에 종사하겠는가.”
전예는 하후연의 앞에 엎드렸다. 그에게는 흘러간 왕조보다 떨치지 못한 이름이 중요했다.
“조왕을 섬기겠습니다.”
하후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아.”
그는 친히 전예의 엎드린 몸을 일으켰다. 하후연은 은왕부에서 중용되지 못한 젊은 관료들을 선발하여 조왕 조조에게 천거했다. 한미한 벼슬일 지내던 가규(賈逵) 등이 새로이 조왕부를 섬기게 되었다.
조왕부는 병주를 포함하여 하내까지 장악했다. 병주를 추스른 조인이 하내로 남하하고, 그에 따라 하후연의 병력이 낙양으로 급히 출진했다. 선봉에 선 우금이 낙양에 먼저 닿았다. 우금은 낙양성의 가까이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은의 깃발이 아니라,
“대장군부……”
제갈찬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영천에 급히 망명의사를 타진한 종요는 그곳을 지키는 장군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것은 예주자사 고순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고순은 즉각 합비에 이 사실을 알리고, 급히 출진하여 낙양으로 향했다. 우금보다 빠르게 낙양에 당도한 고순은 은왕 원상으로부터 낙양의 영유권을 인도받고 그곳을 차돌처럼 지켰다.
“젠장……”
아직 합비공과의 결전을 예비하지 못한 조왕부는 하내까지 점령한 것에 만족하고 북으로 물러났다. 고순은 곽원이 지키고 있는 홍농과 멀리 장안의 장합에게도 원상의 필치로 쓴 서한을 전달하여 투항을 종용했다.
은왕부의 멸망과 원상의 망명 소식은 합비에 빠르게 전달되었다. 온이를 보고 있던 나는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예주(고순)는 원상의 망명을 임의로 승인하였는가?”
전령은 내 물음을 긍정했다. 온이 숙부의 주제로 그를 어르고 있던 량이는 순간 온이의 허벅지를 치며 쾌재를 부르려다가 급히 손의 방향을 바꿔 그녀를 안고 있던 내 허벅치를 내리쳤다.
“옳거니!”
따끔한 충격에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량이를 노려봤다. 나는 내 곁을 지키고 있는 황충에게 명령했다.
“하극상이다! 당장 이놈의 목을 베라!”
시답지 않은 명령에 황충은 반응하지 않았다. 량이는 낄낄거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형님, 이 기쁜 날에 하극상이 웬 말입니까. 결국 은이 멸망하고 금싸라기 같은 낙양이 형님의 품에 날아들었습니다.”
나는 아리아리한 고통이 오르는 허벅지를 매만지며 량이에게 쏘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봐준다.”
내가 낙양에 병력을 출동시킨다고 하여 기실 조조가 다시 출병하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애꿎은 목숨이 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조조는 피를 흘리며 병주를 얻었지만 나는 피를 흘리지 않고 낙양을 얻었다.
원상은 못난 얼굴을 한 채로 합비공부에 당도했다. 낙양태수였던 저수와 원상을 낙양으로 모셨던 광록대부 종요도 그와 동행했다. 원상은 그의 형님 원담, 원희와 함께 나를 찾았다. 지독히도 반목하던 형제가 공히 몸을 망치고 내 앞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나는 그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승상 전풍의 죽음은 애석하게 생각하오.”
내가 원상에게 위로를 건네자 원상은 꾸벅 절을 올렸다.
“합비공의 후의가 감사할 뿐입니다……”
나는 원희를 바라봤다.
“지난날 그대와 나는 예주를 두고 다퉜으나 그 원한은 내 진즉에 잊었으니 두려워 마시구려.”
“예……”
이번에는 원담을 바라봤다.
“귀공과 나는 먼 인척이니 친지의 집에 들렀다 여기고 편히 쉬시오.”
원담 또한 나에게 절을 올렸다.
“감사드립니다.”
나는 원상과 원담을 양팔로 동시에 일으키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대들은 나의 빙부이신 구강공의 질자들이 아니겠소? 나는 원씨의 종중이 나에게 온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오. 그대들이 모쪼록 선대 은왕을 비롯하여 구강공의 제사를 잘 맡아 챙겨주시구려.”
원상은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송경 천자에게 품신하여 원소를 양왕으로(襄王), 원술을 성왕(成王)으로 추증하도록 했다. 시호 양(襄)은 사기 시법해에서 이르기를 인사유공(人事有功), 즉 일을 함에 있어 공이 있었다는 뜻이니 원소에게 알맞았다. 시호 성(成)은 위상극종(爲相克終), 즉 재상을 위하여 일을 마쳤다는 뜻이었는데 이것은 의미가 다소 묘했다. 원술에게 시호 성을 올린 것은 가후였다. 내가 그 의미를 묻자 가후는 이렇게 대답했다.
“상(相)은 합비공을 말합니다. 합비공께 이와 같은 눈부신 왕업을 도모하도록 해주셨으니 이보다 더 가당한 시호가 있을까요?”
분명히 말해두지만 저 시호는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가후가 정한 것이다. 가후가. 어쨌든 원소는 양왕, 원술은 성왕이 되었다.
또한 원소의 적자인 원상에게 원소의 제사를 맡게 하고, 원소의 장자이나 폐출된 원담을 원술의 양자로 입적시켜 그의 제사를 맡게 했다. 원상은 그의 신분에 맞도록 군공의 작호가 더해졌고, 원담은 천자의 공주를 맞아 혼인을 맺도록 했다. 그러니까 천자의 사위, 즉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도록 했다.
원담을 부마로 삼도록 한 것은 내 위신을 높이기 위한 조처였다. 원담은 이제 원술의 적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원씨는 송경 황실의 인척이 되었다. 나는 그 원씨의 인척이므로 천자의 사돈의 사돈이 되는 터. 천자는 이러한 의중을 읽고 태부 공융을 보내 나를 왕에 봉한다고 했다.
“받을까, 말까?”
나는 받지 않았다. 천자의 모처럼의 후의를 사양한 뜻은 이랬다. 나 아직 삐졌어. 여자 친구의 입이 댓 발 나와 있어서 향수를 선물했더니 이런 거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면 남자 친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악어 백을 사주든 구두를 사주든 향수보다는 비싼 것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나한테 왕을 내려준다기에 이런 거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면 내 남자 친구는 나한테 무엇을 선물해줄 것인가? 나야 모르지.
원상과 원담을 물렸다. 역시 부유한 형제는 다투고, 가난한 형제는 돈독하다. 나란히 패가망신한 삼형제의 뒷모습은 나는 저수와 종요를 접견했다. 내 귀에 익을 정도로 이 둘은 당대의 문사였다. 나는 그 둘에게 사관을 권했다. 그러나 하나는 응했고, 하나는 거절했다.
종요가 말했다.
“소인은 합비공을 섬기겠습니다. 은왕부의 유업이 합비공께로 갔으니 선왕께서도 섭섭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웃으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고맙소.”
그러나 저수의 대답은 달랐다.
“원상(元常, 종요의 자)의 뜻을 힐난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합비공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그러지 말고, 저 공……”
내가 그의 손을 잡자 그는 얌전히 뿌리쳤다.
“옛 주군과 옛 벗을 기리면서 살겠습니다. 또 다른 주군을 모시기에 이 몸은 너무나도 고단합니다.”
나는 더 권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유복한 삶을 누릴 만한 재산을 내려주었으나 그는 그것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종적을 감췄다.
곽원이 지키는 홍농에도 은왕부가 멸망했다는 소식이 닿았다. 은왕 원상은 낙양으로 도망갔고, 승상 전풍이 은왕부와 함께 허물어졌다는 전언이었다. 홍농의 곽원은 은왕부의 멸망에 술을 몇 동이씩 대령하게 하여 마구 퍼마셨다.
술을 먹고 불콰하게 취한 곽원은 주먹으로 탁자를 쾅쾅 내리치며 분개했다.
“내가 지금껏 그런 개새끼를 모셨다는 사실이 치가 떨리는군!”
개새끼란 원상을 의미했다.
“죽었어야지! 선왕의 사당을 지키다가 칼을 맞고 뒤졌어야지! 싸우지도 않고 냉큼 제갈찬의 품에 안겨? 밸이 있는 자인가? 쓸개가 있는 자인가? 간이 있는 자인가? 나는 게를 일컬어 무장공자(無腸公子)라고 하는 줄 알았더니 비열한 원상을 두고 하는 말이었군!”
곽원은 좀체 분기를 삭이지 못했다.
“승상이 참으로 안쓰럽다! 욕만 보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참으로 딱하고 딱하다!”
그때 원상의 친필 서한을 지참한 사자가 홍농에 닿았다. 사자는 곽원의 앞에 엎드려 고했다.
“은왕 전하의 명입니다.”
그 말은 곽원의 눈을 뒤집어놓기에 족했다.
“은 뭐?”
예상하지 못한 노기에 사자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으, 은왕 전하의 명입니다.”
“내가 소식을 잘못 들었나? 하내의 은왕부가 종내 귀속장군 하후연의 손에 멸망했다던데? 내가 잘못 들었나?”
사자의 수염 끝에 맺힌 땀방울이 떨어졌다.
“하, 하내는 조조의 손에 들어갔으나 은왕 전하는 살아계십니다.”
곽원은 술잔을 내던졌다. 그것은 사자의 이마에 정통했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은왕부가 망했는데 어찌 은왕이 있는가!”
“자, 장군……”
“너는 누구의 신하냐! 은의 신하냐? 은이 망했는데 어찌 은의 신하가 있는가! 선왕의 사당 기둥에 머리를 찧어 뒤졌어야 온당하지 않으냐? 아니면 이제 은의 신하가 아니라 제갈찬의 신하라고 할 테냐? 입이 있으면 말해봐라, 이 개자식아!”
“으, 은의 사직이 합비공의 손에 들어간 고로……”
“닥쳐라!”
방금은 말하라고 해놓고 이번에는 닥치라고 하니 사자는 황망한 눈동자만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굴릴 뿐이었다. 곽원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곽원은 분노를 더 참지 못하고 발로 사자의 목을 짓밟아 으깨버렸다. 경추가 부숴지는 소리가 나며 사자는 끄어어, 힘겨운 비명을 지르며 죽어버렸다. 곽원은 사자의 품에 있던 원상의 서한을 읽었다.
“합비공 제갈찬이 은의 사직을 보전한다고 하였으니 너는 응당 은의 신하로서 합비공을 섬겨야 옳을 것이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개소리야!”
곽원은 서한을 제멋대로 입에 구겨 넣었다. 그 질긴 종이를 윗니 아랫니로 꼭꼭 씹어 삼켜버렸다. 그는 술을 죽 들이켜고 형형한 눈빛을 뿜었다.
============================ 작품 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