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Shrine RAW novel - Chapter 1208
윤묵이 돌아와 양수와 만났던 일을 말해주자 이적은 웃었다.
역시 승상이라는 자리는 공으로 얻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비현은 지형상 방어에 취약한 현이다.
그와 동시에 숲이나 산이 많아 매복을 할 수 있는 지형도 많다.
압도적으로 공격측이 유리한 지형을 양수는 빠르게 잡아낸 것이다.
‘익주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확실히 보통은 아니군. 만약의 사태를 전부 대비하고 있어…’
이적이 턱수염을 쓰다듬자 윤묵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럼 엄안을 어떻게 뺄 생각인가?”
“그거야 가서 말하면 됩니다.”
“음? 그게 무슨?”
“양수가 판을 만들어줬잖습니까. 그것을 이용하면 되지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믿고 맡기도록 하겠네.”
더 이상 이적과 양수의 수를 읽을 수 없다.
윤묵이 가볍게 두 손을 올리며 항복하자 이적은 싱긋 웃었다.
윤묵의 보고를 받고 이적은 곧장 관청으로 향했다.
자신을 본 진복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이적은 차분히 물었다.
“아직도 생각이 바뀌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별가. 이런 때에 꼭 그리 말씀하셔야겠습니까?”
진복의 난감해하는 어조에 이적은 여유롭게 웃었다.
그를 지그시 응시하던 진복이 몸을 돌리자 이적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놓으시오.”
“내가 저번에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도… 왜 나를 잡으러 오는 이들이 없는거요?”
“그저…그간의 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하하!! 진 부조가 이렇게 정이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군!!”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오?”
“진 부조는 그냥 걱정말고 얌전히 계셔달라는거요.”
“…그럼 저는 일이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진복이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본 것마냥 후다닥 걸어가자 이적은 씩 웃었다.
‘입은 아니라고 하지만 몸은 꽤 안달이 나 있군.’
진복은 백성을 아끼는 자다.
그런만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잘 안다.
관리로서 어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자인 진복이 역심을 보인 자신을 신고하지 않은 이유 정도는 안다.
‘결국 손 안대고 코를 풀고 싶으시다… 이거군.’
오랜시간 유장에게 충성을 해 온 진복으로써는 함부로 그에게 칼을 들이댈 수는 없다.
하지만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라면?
진복 정도로 현명한 자가 지금의 상황을 넘넘길 수 있는 방법을 모를리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는 중에 불과했다.
한번만 모르는 척 하면 된다.
설마 이적이 진짜로 그럴 줄 몰랐다.
그 말을 자신이 받아들이게만 하면 된다.
‘내 입장에서는 좋은 거지.’
스스로 칼을 드는 것은 두렵지만 눈을 돌리는 것은 쉽다.
역겹지만 저것이 일반인이다.
대의를 위해서, 충심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은 위대한 이들이나 가능한 것.
진복은 그저 뛰어나고 현명한 ‘일반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자신의 뜻을 밝힌 것이었다.
예상대로 그가 움직여주는 것에 만족하며 이적은 관청으로 걸었다.
“그래서. 이 별가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무관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이적은 죽간을 올렸다.
현재 성도에 있는 물자 창고의 현황이었다.
그것을 보여주며 이적은 담담히 말했다.
“지금 비현은 습격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물자 운반을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비현? 하지만 물자 수송은 각 현에서 담당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만.”
“그것을 왜 저희가…?”
“물자를 수송하는 도중에 습격을 당하면 어쩌시려고 하는 겁니까?”
이적이 되묻자 오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관의 일이 아닌 것을 우리가 손을 대는 것인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비상시이니… 비현 현령에게 보낼 명령서는 제가 작성하지요.”
이적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오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제가…”
“아니. 엄 도위께서 직접 다녀와주셨으면 합니다.”
“이 가좌!!”
해도 너무한다.
이런 수송 업무를 엄안에게 시키려 하다니.
오의가 소리치자 이적은 전혀 겁먹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엄 장군은 현재 군문의 가장 높으신 분이오. 그런 분께 고작 수송의 임무를 맡기다니!”
“일에 경중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고작이라 하셨습니까?”
“그럼 고작이 아니오?”
“오 도위께서 말씀하시는 그 ‘고작’에 불과한 임무의 성공 여부에 따라 수천에서 수만의 백성들이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고작? 말 다하셨습니까?”
“그건…”
“이런 임무를 맡기 싫으면 싸워서 이겨야 할 것 아닙니까!!”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며 이적이 소리치자 오의는 이만 갈았다.
패장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의를 비롯한 군문의 다른 장수들이 입술만 잘근 잘근 깨물자 이적은 거칠게 외쳤다.
“군문의 일이 뭡니까!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고 또 이겨서!! 승리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문이 도대체 하는 일이 뭡니까! 안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이들의 것을 빼앗아 자기 입에 넣는 것!? 아니면!”
이적은 희번뜩 눈을 뜨며 오의를 노려보았다.
“아군에게 주먹이나 휘두르는 것?”
“…큭.”
오의가 진복에게 주먹을 날린 것은 이미 문관들에게 퍼진 이야기였다.
아무리 진복이 흥분해서 말을 했다고 하지만 무관이 문관을 치다니.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적의 뒤에 있던 몇몇 문관들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오의는 고개를 숙였다.
“그 일에 대해서는 진 부조께 직접 사과드렸소.”
“그렇다고 깨진 병이 원래대로 돌아옵니까?”
오의가 주먹을 꽉 쥐자 이적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의 다툼을 잠자코 듣던 엄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소.”
“엄 장군!”
“엄 도위께서 나서주신다니 다행이군요. 명령서는 바로 써드리겠습니다.”
“병력은 얼마나 데려가야 하오?”
엄안의 질문에 이적은 잠시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넉넉하게 데려가시지요. 한 이만여 쯤 데려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수송 업무를 위해서 병력을 이만이나 데리고 간다?
이건 명백한 비웃음과 조롱에 불과했다.
언제 적들과 조우할지 모르니 엄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정도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엄안을 존경하는 오의가 또다시 눈이 뒤집혀지려고 하자 다른 장수들이 그를 말렸다.
“이 가좌께 질문이 있소.”
“말씀하시지요.”
“그렇게 많은 병력을 데리고 간다면 성도는 누가 지킨단 말이오?”
“다른 장수들이 있잖습니까. 또한 성도의 성벽은 높아 남만인들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텐데. 설마 엄 도위께서도 군문의 다른 장수들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도발.
도발.
또 도발.
이적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군문의 장수들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혓바닥에 날카로운 칼날이라도 달린 것 같다.
그들이 이를 갈았지만 이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비현에서 물자를 수송해 가지고 오신다면 그것을 가지고 군문과 백성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고작 수송의 일이라 얕보지 마십시요. 곡식이 없으면 쫄쫄 굶는 것은 일반 백성이나 군인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알고 있소. 그런 것은…”
엄안은 자신의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끝나고 군문으로 복귀한 엄안이 갑옷을 챙기자 그를 지켜보던 황권은 조심스레 말했다.
“엄 장군께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병이 낫다는 핑계를 댄다면 다른 이를 보낼 수 있었다.
노장인 엄안에게 수송의 임무라니.
이건 명백히 이적을 비롯한 문관들이 엄안을 물먹이려는 수였다.
이번 기회에 무관들의 기를 눌러 두고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 뻔했다.
“공형. 나는 괜찮아. 이 또한 중요한 임무 중 하나야.”
“제가 이 가좌에게 말해보겠습니다.”
황권 역시 문관.
비록 지금은 군문에 들어가 있지만 이적이나 진복과 모르는 사이가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그가 나가려 하자 엄안은 황권을 잡았다.
“그러지 말게. 그들도 오죽 답답했으면 이러겠는가. 그냥 좋게 생각하세.”
“이걸 어떻게 좋게 생각합니까?”
“이 가좌가 나를 믿기에 비현에 다녀와달라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닌가. 그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어. 지금 촉군에는 양수의 군이 움직이고 있고, 또한 남만의 군 역시도 활동하고 있지. 그들을 상대하려면 나 정도가 아니면 힘들텐데.”
“그렇기는 하지만… 병력을 많이 데리고 가라는 것도 엄 장군을 무시하는 처사잖습니까.”
“혹시 모를 교전이 벌어지면 반드시 승리하라는 것이겠지. 이 가좌는 병법서를 많이 읽은 자.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적보다 많은 병력이라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일 뿐.”
황권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누구보다 가슴이 아픈 사람일텐데도 엄안은 문관들을 두둔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 황권은 묵직한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제가 보좌하겠습니다.”
“그래주면 고맙겠군.”
황권의 어깨를 툭 치며 엄안은 말없이 갑옷을 챙겨 입었다.
엄안과 황권, 그리고 유장의 아들인 유순이 이만의 병력을 이끌고 성도에서 나갔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오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성의 방비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예!!”
병사들에게 말하고 오의는 성을 내려갔다.
곧장 관청으로 향한 그는 거칠게 이적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오?”
“엄 장군을 보내셔서. 그래 이제 속이 시원하시오?”
“시원? 장난하시오?”
이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죽간을 보여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물자는 소비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딴 소리나 하다니.
그가 보여 준 죽간을 받은 오의가 이를 드러내자 이적 역시 싸늘히 말했다.
“자신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남을 타박한단 말이오? 제발 생각 좀 하고 사시오.”
“뭐요!? 말 다했소!?”
“왜! 또 치시려고!?”
“큭…”
“아군을 공격할 그 용맹을 적에게 좀 쏟아보시오!!”
그의 도발에 오의는 까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오의가 화를 내며 나가버리자 이적은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분노를 지웠다.
‘상황이 안좋긴 한가보군.’
오의 정도 되는 사람이 고작 이정도 도발에 넘어가다니.
만약 다른 시기였다면 그냥 웃으며 넘어갈 일들에 다들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것에 오히려 만족스럽다.
생각보다 일이 편하게 흘러갈 것 같다는 생각에 이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가좌. 안에 계십니까?”
“들어와라.”
안으로 들어 온 것은 이적과 친분을 갖고, 또 지금 상황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장억과 비시.
그 둘이 인사를 하자 이적은 차분히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게.”
“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나는 이제부터 성도를 빠져나갈 생각이야.”
“예!?”
이적이 유장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가버리려 하다니.
비시는 당황하며 이적을 잡았다.
“아니… 잠깐. 이 가좌께서 이리 가버리시면 익주의 백성들은 어찌 합니까.”
“이 불쌍한 이들을 버리시려는 겁니까?”
둘의 간절한 말에 이적은 고개를 저었다.
“버리려는 것이 아니야. 구하려는 것이지. 자네들이 해줘야 하는 일이 있어. 내 말 잘 듣고 반드시 수행해주게나.”
그렇게 이적은 장억과 비시에게 임무를 내리고 아무도 모르게 성도에서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