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Expenses RAW novel - Chapter 191
제191화
양진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영지와 수선화 문양이 그려진 채색 약그릇을 놓고 까맣고 차분한 눈으로 위라를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그는 내내 이 표정이었다. 자꾸만 창밖을 내다본 채 넋을 잃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생기도 없었다.
그나마 반응이 있다니 다행이었다. 위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렇게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폐하께서 유리의 혼인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끝인 거예요? 요즘 폐하께서 유리를 위한 남편감을 물색하고 계신대요. 정국공부의 공자 고종훈이 마음에 드신 것 같던데,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시집가는 걸 보고만 있을 건가요?”
양진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는 이불 속에 있던 손을 천천히 꽉 쥐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는 제 것입니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위라는 침상 옆에 서서 살짝 미소 지은 채 도도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에?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녀가 뒷짐을 지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유리를 위해서 뭘 했죠?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본 건 유리 혼자만 애쓰는 모습이었어요. 지금 당신은 여기서 한탄만 하고 있잖아요. 유리는 밖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한테 편지를 써서 당신을 잘 보살펴 달라고 하는데, 당신은 뭐예요? 이렇게 무책임하게 외면만 하는 거예요?”
양진이 고개를 홱 들더니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위라는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양진이 한참 만에 낮은 소리로 말했다.
“굳이 절 자극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들켰네. 위라가 코를 문질렀다. 계략이 탄로 나자 꽤 민망했다.
사실 양진은 그녀가 말한 것처럼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그는 회복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녀의 말을 들어 보니 매일 아침 권법 연습을 한 다음 말을 타고 군영에 다녀온다고 했다. 숭정황제는 화가 나긴 했지만 그의 관직을 박탈하진 않았고, 그는 여전히 정이품 총병의 자리에 있었다.
위라가 물었다.
“이제 어쩔 계획이에요?”
양진이 침상에서 일어나 앉더니, 나갈 채비를 하며 단호히 말했다.
“전 단념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문가에 가서 잠시 멈췄다.
“왕야와 왕비마마의 보살핌, 정말 감사합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위라가 말했다.
“유리를 저버리지만 않는다면, 백 번이고 더 도와줄 수 있어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양진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정말 과묵한 사람이었다. 조유리가 도대체 그의 어떤 면을 좋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위라는 문틀을 붙잡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조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라야, 그렇게 계속 쳐다보면 내일이라도 양진을 내쫓을 게다.”
위라가 고개를 돌렸다. 조개가 도철문이 수놓인 짙은 자줏빛 금포를 입고 몇 발자국 뒤에 서 있었다.
조개의 품에 뛰어들어 허리를 감싼 위라가 고개를 들었다.
“양진은 오라버니만큼 잘생기지도 않았는걸요. 전 오라버니면 충분해요.”
조개는 그녀가 일부러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깜찍한 것, 무슨 얘길 했느냐? 관사한테 들으니 요 며칠 네가 쟁영원을 부지런히 오간다던데.”
위라는 대답 대신 콧등을 찌푸렸다. 그녀가 강아지처럼 조개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조개가 말했다.
“왜 그러느냐?”
위라가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다.
“질투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요.”
조개가 그녀를 안아 들고 엉덩이를 두드렸다.
“이 녀석, 아주 혼 좀 나야겠구나.”
위라는 그의 손맛이 얼마나 매운지 알았다. 지난번 그에게 맞은 후 저녁 내내 의자에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그녀는 조개의 목을 감싸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얌전히 말했다.
“유리가 양진을 잘 챙겨 달라고 부탁했단 말이에요. 그러지 않았으면 제가 여기 뭐 하러 오겠어요.”
조개는 그녀의 턱을 잡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 입술을 한참이나 맛보았다.
위라가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뗐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황궁.”
그 말에 위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폐하를 뵙고 오셨어요? 뭐라고 하세요?”
조개가 입궁한 건 청주(靑州)의 가뭄 때문이었다. 청주는 반년이 되도록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둘 곡식이 없어 백성들의 생활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황제가 이 일을 조개에게 맡긴 만큼, 그는 청주의 세금 감면에 대해 의논하러 입궁한 것이다. 황제와 이야기를 마친 후 슬쩍 조유리의 일을 언급해 보았지만, 황제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직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조개는 더 묻지 않고 황궁을 나섰다.
조개가 말했다.
“부황께서 화가 좀 누그러지시면 그때 말해 봐야겠다.”
위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내일 모후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데, 간 김에 모후의 의중을 여쭤 봐야겠어요.”
그녀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동그란 눈을 가늘게 떴다. 눈동자에 선뜩한 빛이 스쳤다.
“칠공주는 정말 한가하신가 봐요. 이런 일에까지 한 다리 걸치려는 걸 보니.”
조임랑만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 * *
다음 날, 위라는 단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섰다.
서쪽 대로에 과자 가게가 새로 문을 열었다. 위라는 진 황후가 민간에서 파는 간식거리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몇 가지를 사서 갔다. 진 황후가 가장 좋아하는 동과 설탕 절임과 산사자 과자도 빠트리지 않았다.
소양전에 도착하니 진 황후는 보이지 않았다. 궁녀의 말로는 지금 보화전에서 염불 수행을 하고 있다기에, 위라는 간식거리를 놓고 보화전으로 향했다.
위라는 진 황후에게 또 걱정거리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무언가 걱정거리가 생기면 보화전에서 염불을 외우는 게 진 황후의 습관이었으니.
보화전 바깥에는 궁녀 두 명만 시중을 들고 있고, 진 황후는 부들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위라가 말했다.
“모후, 접니다.”
진 황후는 약간 의아했지만 일어나진 않았다. 부들방석에 그대로 무릎 꿇은 채 말했다.
“아라야, 네가 어쩐 일로?”
위라는 옆에 있는 부들방석에 무릎을 꿇었다. 진 황후와 함께 합장을 하고 경건하게 눈을 감았다. 그녀는 황후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신불(神佛)의 존재가 있음을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환생을 할 순 없었을 테니.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모후께 드릴 민간의 간식거리를 좀 사 왔습니다.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진 황후가 경서의 한 단락을 다 읽고 나서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음 씀씀이가 곱구나.”
“거리에 새로 문을 연 가게입니다. 드셔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제가 매일 사다 드릴게요.”
그녀의 살가운 말에 진 황후는 기분이 좋아졌다. 잠시 후, 위라가 운을 떼었다.
“모후께서도 유리를 양진에게 시집보내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시는지요?”
진 황후는 그녀가 온 이유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방금 그 말들은 인사말에 불과했음도 잘 알았다. 방석에서 일어난 진 황후는 조칠을 하고 새털구름 문양이 조각된 작은 탁자로 가서 차를 두 잔 따랐다.
“유리가 온갖 핑계를 대길래, 정말 시집을 갈 생각이 없는 줄 알았다. 평생 내 곁에 있으려고 한다 생각했지. 그런데 애초에 다른 마음이 있을 줄이야.”
그녀의 말투에 짙은 걱정이 묻어났다.
위라는 말없이 진 황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진 황후가 위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도 진즉부터 알고 있었겠지? 둘이서 같이 날 속였고 말이다.”
위라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땐 양진이 월동에 갔었는데, 유리는 양진이 돌아오면 모후께 솔직히 말씀드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던 거예요.”
이런 상황에선 작은 거짓말 정도는 큰 지장이 없었다.
진 황후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유리가 진심으로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서 무탈하게 지낸다면, 내겐 그뿐이다. 큰 풍파를 겪지 않고 사는 거, 그게 어미로서 바라는 전부야.”
그녀가 조유리에게 보여 줬던 남편감은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렇다 할 야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진 황후는 현재 상황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했다. 남자의 야심이 크면 아내는 뒷전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겪었던 일을 딸이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랐다.
위라가 말했다.
“그 점은 염려 마세요. 양진은 유리를 정말 진심으로 대합니다. 결코 유리의 신분을 보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위라는 어릴 때 그가 나무로 조각을 만들어 주고 반딧불이를 잡아 왔던 일부터, 커서는 오직 조유리를 위해 반군을 평정하러 간 일에 이르기까지 양진의 진심이 담긴 일들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과연, 마음이 조금 움직였는지 진 황후가 작은 탄식을 흘렸다.
“몰랐는데, 양진도 참으로 사랑밖에 모르는 아이구나.”
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후께선 허락하시는 건가요?”
진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동의한들 무슨 소용이냐? 폐하께서 저리 화를 풀지 않고 계시는데, 나도 방법이 없다.”
그러나 지금 숭정황제가 그녀의 말을 외면할 수 있을까?
위라는 조유리를 통해 최근 숭정황제가 진 황후의 말이라면 무조건 듣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황제로서의 위엄 같은 것은 일찌감치 벗어던지고, 오로지 진 황후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납작 엎드려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 황후는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위라는 진 황후와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늦어져 인사를 올렸다.
그녀가 문가에 도착했을 때, 진 황후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라야.”
위라가 고개를 돌리고 몸을 굽혔다.
“무슨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진 황후가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장생이와 혼인한 지도 꽤 되었는데, 아이에 대한 생각은 하고 있는 게냐?”
위라는 멈칫하다가 이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장생이도 나이가 적지 않아서 말이다. 동갑내기들은 다 슬하에 자식이 있으니, 나도 마음이 급해서 그런다. 너를 독촉하려는 뜻은 없었다.”
그녀가 위라에게 다가오더니 두 손을 잡고 토닥였다.
“아이가 있는 게 좋지 않겠느냐. 나도 손자를 안아 보고 싶고 말이다.”
보화전에서 나올 때, 위라는 약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개와 그녀는 아이 문제를 피한 적은 없었다. 낳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매일 밤 사랑을 나누는 터였다. 그러나 아이가 재촉한다고 세상에 나오던가……. 다만 진 황후가 직설적으로 물어보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