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3
왜 병사들이 쓰러지는가?
···아.
이양이 눈앞에 닥친 풍경을 이해하기까지 걸린 몇 초만에,
병사 수백의 목숨이 피 흘리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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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은 어머니가 우물물을 긷다 낳았다. 그래서 우물 정 자에 사내 남 자를 써서 이름이 정남.
자신이 태어난 그 우물 근처의 마을을 일생에 단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가 나이가 차고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보았다.
강원도의 험한 산세를 보면서 감탄하고, 처음 보는 새와 꽃을 보며 감탄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러나 이번에 본 새로운 건 보면서 감탄할 수가 없겠다.
앞이, 옆이, 뒤가, 살아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피죽이 되어 픽픽 쓰러졌다.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그저 빨리 엎드려서였다. 누가 도망치며 자신을 밟고 가든, 뼈가 부러지고 관절이 뒤틀리든 울음을 참고 누워만 있었다.
딱따구리 같은 두두두두 소리. 죽어가는 사람들이 내는 헛소리. 그것들이 싫어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살며시 떴을 때,
자기 말고 살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저 멀리서,
“Lancez!(발사!)”
팔을 휘저으며 병사들을 지휘하는 어느 늙은 색목인의 모습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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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퇴를 지시해야 합니다!”
이양보다 아주 약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누군가가 외치자 급하게 깃발들이 움직였다.
당연하지만 원래 이렇게 급하게 후퇴 명령을 내려서는 안 된다.
전투의 희생자 대부분은 후퇴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물러날 때 질서정연하게 진을 유지하며 병력을 온존하는 것이 장수의 능력이다.
그러나 병졸들의 목숨이 눈 깜빡할 때마다 봄눈 녹듯 사라지고 있다면? 그런 능력도 아무 의미 없다.
도망치게 해야 한다. 통제되지 않은 누군가가 인근 마을로 새서 도적떼가 되든 뭐가 되든 간에 일단 물려야 한다. 살 수 있는 이들은 살려야만 한다.
“적···적들은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대열을 신경쓰지 말고 군사를 물려라!”
이양은 본능적으로 지시를 내렸고, 그것이 옳았다.
지금 아군을 학살하는 적들의 괴물 같은 총통은 어딘가에 거치되어 쉬이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일단 뒤로 군세를 물리기만 한다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지금 저들이 명령을 따를 수는 있나?
인간과 인간이 뒤엉켜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밟고 도망가려다 사이좋게 탄환에 꿰어져 픽픽 쓰러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체가 다시 산 사람들의 발을 걸고 앞을 막는다.
그런데 방금 저 지옥에 2만이 넘게 달려갔다.
저 중 2,000명만 살아 돌아와도 그것은 기적이라 불릴 만하리라.
그렇게 깃발들이 후퇴를 명하며 흩날린 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피투성이가 된 이들이 겨우겨우 두 발로 아니면 한 발로 걸어서 돌아왔다.
헤아려 보니 1,000명이 조금 넘었다.
나머지는 죽었거나 어디 다른 곳으로 도망했으리라. 그 수가 아마···아니다. 생각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이양은 이제 패장이다.
///
“아군은 얼마나 죽었습니까? 총알은 얼마나 소모되었습니까?”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지도부 회의의 질문은 위의 단 두 가지.
승패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올리버 로는 지도부 회의가 간절히 바라는 정보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아군 오사로 경상자 넷. 적군 사격에 중상자 둘. 전투에 참여한 병력 총원 500명 중에 그렇게 여섯이 다쳤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초조함에 이리저리 서성이던 사람들이, 다들 안도한 듯 편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총알은···?”
“생각보다는 소모가 적었습니다. 적군이 보병 위주로 진군했고, 무겁고 커다란 방패 뒤에 숨느라 진영이 밀집돼서 사격 효율이 괜찮았습니다.”
로의 곁에서 전장을 감독했던 빌 에드워즈가 담담히 답했다. 그의 곁에 서있던 프랑스군 출신 자문들도 조금씩 말을 얹었지만 에드워즈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정도면···괜찮은 성과다.
“아, 적군은 시신을 추려보았을 때 약 3, 4천여 명 정도 사살했습니다.”
로가 무심히 덧붙였지만, 사실 그 자리의 모두는 그 숫자에 혼절할 지경이었다.
이들은 근대인이다. 또한 상당수는 식민제국의 시민들이었다.
소위 ‘야만인’들과의 싸움에서 본국이 얼마나 성대한 승리를 거두었는지 누누히 들어왔던 만큼 근대적 화력무기의 압도적 위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500명 대 30,000명의 전쟁에서, 교환비가 0 대 수천이라는 결과는 눈으로 보지 않고서야 실감이 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군세가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으니, 그들을 다시 규합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자원이 들어갈 것입니다. 사실상 이제 2만은 군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 감당키 어려운 숫자들을 헤아리고서 한참 뒤에야, 메리먼이 의견을 낼 수 있었다
“저기···그렇다면 전쟁은 이 전투로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소.”
대답을 한 것은 트로츠키. 전장을 직접 지휘한 지도자.
“일본학과 중국학 전공자들이 있어 미리 물어보았으나, 조선이라는 국가의 병사 동원력은 40,000이라는 숫자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소.
그 중에 우리가 무력화한 것이 2만이라고 한다면. 아마 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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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을 증파해야 할 것입니다.’
이양의 장계 속 한 구절이었다. 이를 읽고 대신들이 모두 한탄을 금치 못한 것은 당연지사.
“아니···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결과요. 적들의 수효는 수천이고, 우리의 수효는 수만에 이르니··· 순리를 따져보더라도 둘이 부딪혀서 하나가 깨진다면 적도들 쪽이어야 할 것이고.
만일 장수들이 무능하여 이리 참패할 수 있다 치더라도 이양은 결코 무능한 이가 아니오!”
영의정 황보인이 마치 항변하듯 읊조렸다. 그의 표정은 하늘에다 대고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따지고 드는 듯 허망해 보였다.
그러나,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 아니겠소? 참패는 참패이고 수천이 죽은 것은 수천이 죽은 것이오. 2만 명을 잃었다고 하령군(이양의 군호)이 이야기했다면 2만 명이 잃은 것이고. 우리는 얌전히 군졸이나 더 보내주면 될 일.”
“우상(右相), 정말 그리 쉽게 끝날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정분이 슬며시 따지고 들자 대범하게 답하던 김종서는 말을 잃었다.
그렇다. 방금 보고된 패배는 단지 20,000이라는 숫자를 메꾸는 처치로 해결되지 않는다.
우선 집현전에 도사리고 있는 소장파 관료들이 득달같이 들고 일어나 대신들의 허물을 꼬집을 것이다.
이양이 실제로 무능한 인물이든 아니든, 그를 독단적으로 임명해 패배를 초래했다며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할 것이고 결국 정치적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그것도 싸움을 나가 병졸의 반 이상을 잃어버린 대패이니···.
“···그리하면 결국 패배하지 않은 것으로 하면 되지 않겠소?”
“그게 무슨 말이오?”
황보인이 묻자 김종서는 다시 말했다.
“장수가 싸움에 나가 한 번 패함은 허물이 아니고. 결국 승과 패를 쌓아 나라를 평안케 하면 오히려 공이 되는 것이니. 이양에게 4만의 군사를 더 내리는 것은 어떻소?”
“4만···4만···.”
손실이 2만, 그런데 보탬이 4만. 그 막대한 수효에 황보인과 정분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4만을 더하여 이긴다면 잃어버린 판돈까지 온전히 되찾아오고. 만약에 진다면 위험부담을 짊어진 보람도 없이 더 큰 손실이 찾아올 것이다.
그런 도박. 만 단위의 목숨과 이 나라에 셋 밖에 없는 정승, 그리고 그들을 따르거나 반하는 수많은 신하들의 운명이 오가는 도박···
해볼 만하지 않을까?
“이양은 이미 적졸들의 무장과 전술을 파악한 상태요. 이기는 싸움을 만들어보겠다고 증파를 요청하였으니 물심양면으로 지원함이 옳을 터.”
“그렇다면, 나 또한 그대로 주상께 아뢰겠소. 영상(領相)께서 함께 나아가 주시오.”
“···알겠소, 자유(정분의 자). 그리하면 이대로 진행하는 것으로 알겠소.”
마지막으로 망설이던 황보인까지 결국 승낙했다.
이제 하늘과 이양을 믿는 수밖에는 없다.
‘부디, 이길 수 있는 도박이었기를.’
황보인은 눈을 감고 그렇게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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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잠을 깨우는 폭탄 굉음 (4)
신숙주, 그는 어떤 사람인가.
30대의 소장파 관료, 세종이 총애한 젊은 문신, 집현전의 직제학이자 실질적인 좌장.
많은 수식어가 붙을 수 있지만 두 글자로 요약될 수 있다.
천재.
그리고 이 천재가 바라보기에 대신들의 결정은···
‘돌아버린 건가?’
그렇다. 미친 짓이다.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뜻은 아니다. 누구든 저 자리에 있었다면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택하지 못할 선택지이기도 하다.
새로 동원하겠다는 병력이 4만이다. 그리고 이미 패배하고 사방팔방 흩어진 것이 2만이다, 2만. 어느 날 평양이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숫자.
그런데 그러고도 그 두 배를 적도들의 시커먼 아가리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이런 짓을 저 능구렁이 대신들이?
물론 저들도 믿는 바가 없는 것을 아닐 테다. 수십 년 전부터 이양과 같이 굴러본 김종서인 만큼, 그 실력과 품성을 잘 알 터.
그토록 신뢰가 두텁다면 그 많은 병력을 이런 상황에서도 맡길 수 있다···지만 물론 이유가 그뿐만은 아닐 테다.
저들은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있는 것이다.
대행대왕(大行大王, 죽은 뒤 시호를 아직 받지 못한 왕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문종)께서 급사하고 생긴 권력의 공백. 저들은 그 사이를 비집고 조정의 중심에 섰다.
특히 김종서, 저 치는 외관직을 전전하면서 지금껏 변두리에 놓여 있던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세종대의 대신들이 하나씩 은퇴한 뒤에야 재상의 자리에 앉았으니 어찌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2만 병력이 증발했다니. 개국 이래 이런 참패가 없다. 이 책임을 뒤집어쓰고 탄핵이라도 당하기에는 막 혀끝만 대본 권력의 맛이 아아주 달콤했으리라. 그걸 포기할 바에야 죽어버리고 말 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허허! 아무튼 따서 갚으면 되지 않겠소!’라고 외치는 듯한 이런 글러 처먹은 일처리라니.
이 따위 일을 저지르다니 정말 갈 때까지 갔다. 사실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이라면 행실을 노름쟁이마냥 함부로 해서는 아니될 진데···.
일단 소식을 듣고 길길이 날뛰던 박팽년이나 성삼문에게는 적당히만 따지라고 해 놓았다. 사헌부나 사간원의 측근들에게도 이양의 탄핵상소를 올리되 한두 번 거절당하면 그냥 물리라고 작업을 쳤다.
왜? 대신들이 예뻐서? 당연히 아니다.
지금 힘을 빼놓으면 안 된다. 만일 4만 병력을 데리고 이양이 승전보를 올리면 난처해지는 것은 이쪽이다. 아무리 많은 장졸을 죽였어도 일단 승장을 탄핵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일 터.
그렇다고 지금 이양을 탄핵해버린다면, 그리고 소장파가 다른 장수를 천거했는데 패배한다면, 결국 대신들과 소장파가 한 대씩 번갈아 때리고 무승부로 끝날 테다.
하지만, 이대로 4만을 더 데리고 간 이양이 다시 패한다면?
그때 대신들은 정말 감당키 어려운 파도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물론 그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신숙주 자신일 테고··· 그 중요한 순간을 위해 정치적 역량을 아껴 두어야 한다.
용을 잡을 때는 역린이 보이기 전까지 비수를 숨겨두어야 하는 법.
결코 저 늙은 구렁이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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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규모 전투 이후, 원산의 풍경은 조금 달라졌다.
우선 착호병들이 정식으로 척후의 임무를 겸임하게 되었다는 게 첫번쨰.
호랑이나 쫓던 이들이 이제는 적 병사까지 살펴봐야 하냐며 볼멘소리를 냈지만 별 수 없다. 까라면 까는 수밖에. 그래도 식량 분배에서 우선권을 줬더니 불만이 쑥 가라앉았다.
둘째로, 원산으로 가는 길목이나 곳곳의 요충지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지나는 사람마다 무기를 지니진 않았는지 몸수색을 받았으며, 산성마다 반자동소총을 든 이들이 사방을 주시했다.
“나는 적들이 지난번처럼 대규모 회전을 원하리라 생각하지 않소.
적장은 그 혼란 속에서도 빠르게 병사들을 후퇴시키려 애썼고, 조급하지 않았소. 만일 후방의 기마병과 지휘부가 곧바로 전장을 떴다면 진격해온 적병 중 생존자는 없었을 것이오.
결국 우리가 기관총과 참호를 끼고 인력 소모를 극도로 피한다는 사실을 간파했기에 지휘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런 장군이 다시 다수의 군세로 우리를 압도한다는 생각은 하기 어렵소. 아마 당분간 적들도 몸을 사릴 것이고. 절대로, 정공법으로 나오려 하지 않을 거요.”
트로츠키가 말하자, 프랑스군 장교들도 동조하는 듯한 눈치였다. 군사 전문가들이 그렇다 확언하니 나머지도 다들 크게 반대하지 않았고. 결국 적들의 기습과 침투를 차단한다는 생각으로 병력을 배치하는 것이 지도부의 결정으로 굳혀졌다.
그러나 물론 적에게도 선택권이 많을 리는 없었다.
각개격파를 하든, 뭘 하든 일단 머릿수가 많은 것은 조선 측이다.
장비에서의 심각한 열세를 보았으니 믿을 것은 오직 그 압도적인 병세. 그러나 사실 그조차도 의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쪽수 많은 쪽이 유리한 대규모 회전은 오히려 트로츠키와 의용군 측에게 우세할 뿐임이 드러났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택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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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병졸들에게 경계만 시켜두게.”
미루기.
이양에게 뭔가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물러나면 더 큰 재앙이 올까 봐 병력 증원을 요청한 것뿐.
새로 온 장수가 뭣도 모르고 회전 한 번 더 치르면 정말 수만의 목이 달아날 것이다.
또한 여기서 물러나면 자신을 지원해 준 김종서나 다른 대신들에게도 정치적 피해가 갈 테니···.
그러나 이 상태로 계속 대치만 하면 그저 파국을 최대한 미뤄 놓는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전해야 한다.
“결국 적들의 약점은 두 가지일세.
첫째, 병력과 물자가 아군에 비해 크게 열세히다는 것. 그리고 둘째, 그 때문에 흩어지거나 무리한 공세를 진행할 수 없다는 것.
만일 이러한 취약함이 없었더라면 지난 전투에서 적졸들이 우리 모두를 참살하였을 걸세.”
다른 무장들도 동의의 의미로 침묵만을 보내왔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억이다. 숱한 피가 흐르고도 적군의 진영에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던 압도적인 패배.
“그렇기에 적들의 약함과 아군의 강함을 살피고. 지난 전투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방안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일단 웅거하여 적들의 동향을 살펴야 할 것이야.”
그러나,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곳에 눌러앉아 있을 수 있을까?
살아남은 1만,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온 1만, 증파되는 4만. 더하면 6만이다. 인구가 6만을 넘는 도시가 한양 말고 더 있던가?
그렇게 막대한 머릿수의 병졸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울 여유가 얼마나 있을까?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결국 적들이 가시 돋힌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만 있다면, 조정은 두 손을 피투성이로 만들어서라도 움켜쥐라고 종용할 수밖에 없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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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소강상태가 이어진 일주일 동안, 원산의 주민들은 산성을 대피소로 꾸리고 곳곳에 경계를 세우니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갑자기 색목인들이 시퍼런 총통을 들고 이리저리 급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불안에 떨었다.
딱 한 번, 기마병들이 어떻게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민가 근처까지 나타난 적이 있었고. 그때 조선인들은 소총이 어떤 무기인지, 얼마나 사람이 순식간에 죽을 수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다행히 여느 전란처럼 농기구를 놓고 창칼을 쥘 필요는 없었다. 또 군포나 전세를 바치던 습관대로 소비에트 지휘부에 없는 살림살이를 뜯어다 척척 쌓아 놨더니, 색목인들은 크게 당황하여 되돌려주지 않던가?
덕분에 긴장되는 나날을 보낼지언정 농사를 망치거나 집안기둥을 뽑아 먹을 일은 없었으니 다행인 듯싶었다.
그러나 스페인 의용군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