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6
“가까이 옵니다!”
“Feuer(발사)!”
그렇게 총알들이 날아가 말과 사람의 몸에 박혔다.
말들이 주저앉았고 사람들은 어딘가가 부러져 바닥에서 비틀거리며 신음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한 사람이 비틀비틀 일어나 참호로 걸어왔다.
나이 든 외모에, 한눈에 보아도 다른 이들보다 화려한 갑옷.
적 지휘관 급 인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참호의 병사들은 총 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그가 칼을 빼 들고 뛰어오자 다시 반자동소총들이 불을 뿜었다.
그렇게 이양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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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결국 하령군이 죽었다고?”
“부사로 따라갔던 일녕(허후의 호) 선생이 올린 장계를 보면, 병사들이 흩어지니 마병만 끌고 참호로 뛰어나갔다고 하더군.”
“그러면, 사실상 자결인가? 씁···안타까운 죽음이야.”
성삼문의 말에 다들 구태여 대꾸하지 않았지만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표현의 속뜻은 알고 있었다.
하령군이 살아 돌아왔다면? 그를 비호하느라 김종서 일파가 정치적 영향력을 훨씬 낭비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김종서와 대신들에 대한 책임론도 더욱 높아졌을 것이고.
정말 ‘안타까운 죽음’이다.
그러나 결국 하령군이 남기고 간 커다란 문제에 비하면, 그의 생사 여부 또한 사소한 세부사항에 불과하다.
수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임시 지휘관이 된 허후는 적들에게서 서찰을 받았다.
‘포로 반환 및 양측의 평화협상을 제의한다.’
원산에서 양측의 대리인이 만나, 협상하여 평화를 약속하고 전쟁의 대가를 치르자는 제안.
졸지에 수만의 목숨을 담보로 잡힌 조정 측에서는 이 제안을 꼼짝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이상의 정벌은 불가능하다.
단 두 번의 전투였다. 처음에는 2만이 자빠졌고, 그 다음에는 4만이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세번째, 네번째까지 끌고 갈 때에는 10만이, 20만이 죽어야 할까?
조정은 그런 손실을 감수할 수 없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무릇 변방의 외적을 쳐서 안으로는 백성과 강역을 지키고 밖으로는 나라의 위용을 떨침이 국체를 보존하는 큰 근본입니다.
그런데 지난 날 병마도통사 이양과 부사 허후가 수도 없이 많은 목숨을 벌판에서 죽이고, 적졸들에게 패하여 달아났으니 이는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고 나라의 근본을 흔든 것과 같습니다. 하령군은 전투에서 목숨을 잃어 그 죄를 물을 수 없으니, 부사로서 싸움에 나가 하령군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허후만이라도 치죄하소서.”
“허후의 죄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문죄해야 합니다. 하오니 부디 그를 파직하고 외방으로 귀양보내소서.”
“저 말이 옳습니다. 허후의 직첩을 회수하고 귀양 보내소서!”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탄핵과 상소들. 끊임없이 가해지는 압박에 결국 대신들은 허후를 경상도장기현(오늘날의 포항시)에 귀양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실현되는 것도 이제 초재기만 남았고.
김종서나 황보인 같은 대신들도 파직과 귀양이 머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시국에 누가, 어떻게 정벌의 재개를 논할 수 있겠는가? 또한 정벌을 재개한다면 누가 감히 앞장서서 군대를 이끌고 가겠는가? 관료들은 저마다 입을 아끼고는 납작하게 엎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도 이 초유의 사태를 앞에 두고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는 남은 일이 있다는 것.
“···그리하면 누가 적도들과 협상을 진행할 것인가?”
“···”
어린 임금의 말에 대신 중 누구도 감히 입을 놀릴 수 없었다. 저 독배를 마시는 이는 반드시 몰락할 테니 말이다.
누가 감히, 국토의 일부를 적들에게 떼어주고 패전의 대가를 치르겠노라 약속하겠는가?
누가 감히, 국가의 재산을 침략군에게 바치며 더 이상의 전쟁은 멈춰 달라고 애원하겠는가?
결코 유리하게 맺어질 수 없는 협상. 그러나 불리하게 끝나면 그 책임자는 반드시 문책당할 협상. 이 때문에 협상을 진행하는 문제는 패전 소식이 들려온 지 한참이 지나도록 보류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를 회피할 뿐 답은 정해진 상태.
대신들은 결국 자기들 선에서 처리해야 함을 알았다. 대신들의 책임론이 불거지는 가운데, 이 일을 회피하려 해도 오히려 책임을 떠넘긴다는 비난의 화살을 맞을 뿐이다. 그렇다면···
“허후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하옵니다.”
김종서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옳습니다. 적들의 전력을 보고 그 형세를 파악한 이에게 협상을 맡기소서.”
황보인도, 다른 의정부의 관원들도 결국 찬성했다.
허후 또한 이미 자신이 짊어지게 될 책임을 짐작하고 있으리라.
부사로 임명된 그의 선에서 매듭짓지 못한 일이니, 결국 마무리도 허후의 몫인 것이다.
허후는 그 결정을 전해 듣고는 하루 종일 끼니를 걸렀다.
그리고 몇 일 뒤, 400인의 호위병력만 대동한 채 허후는 원산을 향해 떠났다.
출정 때에 비해 한참이나 못 미치는 초라한 위세.
아주 짧았던, 대신들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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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 오직 이 나라의 도시 중에서 한양만이 그렇게 많은 인구를 좁은 곳에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원산은 4만이 넘는 포로가 바글거리고 있다.
급하게 천막들이 지어지고, 울타리가 세워졌다. 수많은 인구를 수용할 방법이 없어 일단 무장해제만 시켜 두었다. 지휘관이나 장수급들부터 급하게 RMS 게르마닉 호의 남는 선실들에 격리했고 남는 선실이 있으면 되는대로 포로들을 집어넣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거···손실이 꽤 큰데 말입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식량.
4만이라는 인구가 식량을 거침없이 먹어 치우고 있다.
2만 명 정도로 간당간당하던 원산의 인구가 포로들 때문에 6만을 한참 돌파한 상황.
그렇다고 굶게 놔둘 수도 없고, 그냥 풀어줄 수도 없으니 일단은 가둬 놓고 기본적인 식사량만 제공하며 먹이고 있다.
물론 수지타산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
“저···병사들에게 일은 안 시키오?”
사로잡힌 조선군 지휘관 중 하나가 머뭇거리다 말을 던지자 소비에트는 ‘아, 지금은 제네바 협정이 없었지!’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게 포로들에게 이런저런 육체노동을 시키게 된 것. 물론 그들이 살던 1930년대에도 협정을 제대로 지키는 나라는 없다시피 했지만.
안변도호부에 흐르는 남대천에 수차를 짓는 데 자재를 옮기게 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데 나가도록 하고. 또 게르마닉 호와 켈틱 1, 2호를 가동시킬 때를 대비해 문천에서 석탄을 채굴하도록 하고···.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 결국 이들이 축내는 식량을 감당하기에는 어렵다.
“음···아무리 아껴도 한 달.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급하게 물자 관리를 맡게 된 바빌로프 박사나 다른 이들도 한 목소리로 외치자 원산 곳곳에서 걱정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 상황이 몇 주나 뒤에야 도착한, 백기를 내건 소규모 무리.
바로 허후의 항복사절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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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잠을 깨우는 폭탄 굉음 (7)
허후는 가만히. 숨을 죽인 채로 초소의 경계 어린 시선을 받아냈다.
색목인들 사이에서 낯선 언어로 대화가 오가고, 조선군이 든 백기와 허후의 차림새를 가리키며 한참이나 서로 고래고래 외치다가,
경계가 풀렸다.
허후는 꿈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초소를 지났다. 초소 양쪽으로 파여진 참호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늦장마가 내려 참호는 거의 메워지고 질척한 흙탕물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전란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장마가 내리니, 가을장마로 벼 이삭이 모두 휩쓸려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다. 그리고 죽을 것이다. 비참하게.
마치 지난 전투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수없이 뒹굴던 이들처럼.
이 적은 수의 경비를, 이 조잡한 진영을 뚫지 못해 수만이 죽었다. 수만의 시체가 아직도 전부 치워지지 못한 채 벌판에서 썩어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이렇게나 쉽게 건넜다.
그토록 넘고 싶어했던 적병들의 진지를 두 발로 걸어서 지나쳤다.
잠시 척추에서 저릿저릿한 소름이 올라오다가 가라앉은 뒤로, 허후의 가슴속에는 회한뿐이었다.
패배하여 항복하는 자의 회한.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계를 서던 병사 중 한 명이 그에게 낯선 질감의 종이를 내밀었다. 그 위로는 한문으로 간단히 적혀 있었다.
‘항복 사절이 맞다면 병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일 것.’
허후가 적혀있는 그대로 행하자 적 병사들은 좌우로 갈라져 그에게 길을 텄다. 안내역으로 몇몇이 나와 그들을 어느 기와집으로 이끌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피부색도, 머리색도 다양한 한 무리의 군중들.
그 속에서 애체를 쓴 염소수염을 기른 남자가 나타나 그에게 외쳤다.
“조선에서 온 손님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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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조선어를 한 음절 한 음절 내뱉으며 트로츠키는 조선 사절단의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지켜보았다.
이 멘트를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고작 한 문장이지만 발음이 이상하게 들릴까 봐 원산 선주민 몇몇을 앞에다 세워놓고 발음 코칭까지 받았다.
물론 일반적으로 승자가 패자에게 구태여 잘 보일 이유는 없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입장에서 보자면, 굳이 나쁘게 보일 이유 또한 없다.
결국 이 땅의 지방정권으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조선 정부와의 적대적인 관계는 언젠가 청산되어야만 했다. 어쩌면, 언젠가는 조선으로 편입되어야 할지도 몰랐다.
어느 한적한 작은 마을만을 점령한 소규모 군벌이 수백만 인구를 다스리는 국가로부터 생존할 수 있을까? 지금은 근대의 기관총이 있었기에 승리했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조선정부와의 협력은 필연이었다.
아무튼 그 뒤의 소통은 결국 필담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고대 중국어 문어체로 서로 대화하는 데 익숙하다. 전해듣기로는 몇 년 전에 언어학자 왕이 개발한 표음문자도 있다지만, 교양 있는 소통을 위해서는 ‘한문’이 필수적이었다.
“자, 그럼 정식 회담장으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전해주게.”
트로츠키의 말에 통역이 준비된 종이를 허후와 사절단에게 건넸다. 허후와 사절단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는 다시 붓으로 뭔가를 끄적여서 돌려준다.
“왜 굳이, 여기서 이동하는지 묻습니다.”
트로츠키는 의도적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조선의 관료들이 약간 눈살을 찌푸리는 것 같았지만 트로츠키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여기가 너무 좁으니 넓은 곳으로 옮기자 하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절단을 이끌고 해안으로 향했다.
준비된 보트에 올라타니 병사들이 노를 저었다.
“우리는 아주 먼 곳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바다는 거칠기 때문에, 저런 게 필요하죠.”
그렇게 말하고 트로츠키는 먼 바다를 가리켰다.
조선인 사절단이 다시 경악에 빠지는 모습을 즐겁게 구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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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맙소사, 저 배가 뭐라고 생각하오?”
“선체 길이가 못해도 600척은 한참 넘는 것 같습니다! 족히 수천 명은 태우고도 남을···아니···.”
허후를 비롯한 사절들은 대경실색하며 체통도 잊고 일제히 일어나 RMS 켈틱 1호의 선체를 구경했다. 그리고 보트가 가까워지면서 그런 배가 세 척이나 늘어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트가 선체 곁으로 다가가 인양될 때도 선체 벽을 콩콩 쳐보고 그 재질이 금속이란 사실에 놀라거나 팔을 벌려 배의 크기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트로츠키는 목적한 바를 이뤘다.
기선제압.
저들에게 상상하게 해야 한다. 중세에는 상상조차 힘들 이 거대한 배를 건조한 강대국이라든가, 자신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기술력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상상의 결과, 자신들이 의용군에 맞서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라고 단념하게 되어야 한다.
배에 대해 조금씩 설명해줄 때마다 그들의 신경이 집중되는 것을 보면서 트로츠키는 협상의 승리를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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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연하지만, 협상이란 적어도 대등한 관계에서야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측은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고 수만의 인질을 사로잡힌 상황. 게다가 심리적인 위축감도 컸으니 무어라 더 제안하거나 고집 부릴 수 있는 것이 없다.
트로츠키와 의용군의 제안에 무리가 되는 예상밖의 요소는 없었고, 조정에서 이미 결정한 상한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첫째, 우리 측이 이미 점령한 영토들의 지배권을 인정할 것. 그 영역은 이와 같소.”
허후는 적도들이 조선의 강역에 대한 상세한 지도를 갖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금 대경하였다. 한강의 흐름과 같은 부분은 일부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작은 개천의 흐름이나 산세까지 세세하게 기록된 조선전도를 보고 속으로 겁에 질렸다.
물론 그 차이조차도 수세기에 걸친 지형 변화의 결과였지만 허후는 그 내막까진 알 수 없었다.
‘언제 저들이 조선의 강역을 파악했다는 말인가?’
심지어 세종대왕조에 개척한 북방영토에 이르기까지도 기록이 상세한 것을 보아 아주 최근에 정탐이 이뤄졌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번 침공은 아주 예전부터, 매우 강력한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들이 원산을 점거한 것이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과정이라면? 적도들의 후속병력이 끊임없이 쏟아진다면?
그런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지만 결국 허후의 선에서 할 수 있는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색목인들이 바라는 영토는 진명(원산)과 덕원 전체, 안변, 용진, 학포, 서곡의 일부에 이른다. 색목인들의 수괴로 보이는 자의 말에 따르면, 이미 이들 영토는 저들이 실효지배 중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원산과 그 인근만 떼 주는 정도를 상정한 조선 측의 안배와 크게 충돌하지 않았다.
물론 조선의 강역 일부를 통째로 적도들에게 할양한다는 생각에,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결국 동의할 만했다.
“두 번째는···포로의 반환과 그 대가에 관한 것이오.”
그렇게 투로···추기? 라는 자가 말을 이었을 때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평화를 돈 주고 사려면 옛 북송(北宋)의 진종이 거란족에게 그러했듯 해마다 조공을 바쳐도 모자랐다. 하물며 지금처럼 나라의 주력군을 대부분 잃고 자비를 구걸하는 상황이라면야···
의외였던 것은 포로를 반환한다는 부분이었다. 장정 4만명을 사로잡았더라면 죽이든지, 노동력으로 부리는 것이 장차 조선의 힘을 빼앗고 집어삼키는 데 유리할 것이다.
허후가 한참 머리를 굴려본 결과, 저들이 앞서 걱정한 것처럼 조선을 정복하려는 세력의 선봉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분명 저들은 지금 강대하나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난다.
만일 그 생각이 맞다면, 언젠가 힘이 소모된 색목인들을 조선이 다시 품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항복조약은 이방인들을 조선의 품으로 귀순시키는 시발점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런 허후의 희망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은 저···‘투로추기’가 제안한 포로들의 몸값이었다.
“많은 것은 바라지 않소. 포로들을 먹이고 재우는 데 든 자원들에 대한 보상 정도면 충분할 것이오. 물론 그 외에도 이 인근의 석탄 등 다양한 자원들을 요구하는 바이지만 조선 측에 큰 부담이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오.”
역시, 저들은 조선에 적대적이지 않다. 기본적으로 생존 보장과 우호 관계 유지가 목적이다. 분명, 조정과의 충돌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일 터.
만일 조정이 이들을 품었더라면 수만의 목숨이 아깝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허후 자신과 대신들의 정치적 생명이 끝장나는 일도 없었으리라···.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구조건에 대한 합의가 끝나고 그 외 세부사항에 대한 합의가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허후는 생각했다.
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어느 나라에서도 건조하기 힘들 이 거대한 함선을 주조한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러나 가장 궁금했던 것은 결국.
‘이들은 앞으로 무엇을 할까···’
조선의 옆구리에 낯선 이들이 또아리를 틀고 앉았다.
개국 이후로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피를 흘리기도 하였고, 또 성군을 만나 융성하기도 하였던 나날이다. 누군가는 이제 조선 개국 이후에 태어나고 자라나다 죽었을 것이다. 그의 삶에서는 아마 조선이 곧 천하였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 천하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은 이들이 있다. 낯선 얼굴, 낯선 말, 낯선 문물을 가졌으되 그 강성함은 이족(夷族)의 것이라 무시할 바가 아니다.
그들은 폭탄과 총성으로 이 땅에 왔다. 마치 지난 태평성대의 꿈결에서 조선의 머리채를 잡아 깨우는 듯한 충격을 주며 도래하였다.
현덕한 대왕들의 가르침 아래 수십 년간 행복한 꿈을 꾸며 웅크리던 조선이다. 그러나 대행대왕의 붕어(崩御)와 함께 들어온 이들이 그 깊고 깊은 잠을 깨웠다.
마치 저들이 들고 온 폭탄의 굉음처럼.
이제 이 나라가 어찌 되어갈지, 허후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선창에 부딪혀 오는 바람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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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름 놨다!
허후와 사절단을 환송한 뒤 치러진 지도부 회의, 아니 원산 소비에트 총회의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가득했다.
4만이다. 이들이 빵 한 덩이씩만 베어 물어도 4만 덩이를 준비해야 하고. 물 1리터씩만 마셔도 4만 리터다.
4만이나 되는 포로를 몇 주나 부양하느라 다들 위기감에 빠져 있었다. 만일 조선 측에서 아무 연락도 없었다면? 이렇게 포로들과 방치되었다면?
어쩌면 원산 소비에트는 세워지자마자 자멸했을지도 모른다.
4만이나 되는 인구를 노동력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공기에서 쌀과 밀이 쏟아지는 게 아닌 이상에야 당장 다음달까지 버틸 식량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포로들이 송환을 택했고, 잔류하기로 결정한 3,000여명을 제외하면 사절단을 따라 떠나서 인근 관아에 맡겨졌다. 곧 조선에서 저들을 어떻게든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