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7
여태까지 포로들을 먹이느라 축낸 식량 또한 조선측에서 부담해주기로 했다. 파산 직전에 놓여 있던 원산의 재정상황은 이제 호전될 일만 남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낙관적 전망과 앞으로 이어질 원산 개발 계획을 그리며 제1회 원산 소비에트 총회의는 끝났다.
회의장을 나서며 밥 에드워즈는 곱씹었다.
‘원산 소비에트.’
트로츠키가 제안한 명칭이 지난 회의에서 빠르게 가결된 뒤 이 땅에 들어선 사회주의 정부의 이름은 ‘원산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었다.
아마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가 되리라.
하지만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그 사실에서 밀려오는 감동을 누리는 동안, 밥 에드워즈는 다른 생각을 했었다. 항복해오는 조선군들에게 ‘원산 소비에트’라는 이름을 꺼낼 때까지도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마 이 땅에 영원히 머무를지도 모른다.’
조선과의 전쟁이 마무리된 이후 두 목소리가 지도부 회의 안팎에서 들려왔다.
하나는 예전부터 있었던 스페인으로 돌아가자는 정신병자들. 뭐, 이건 신경 쓸 바가 아니고.
다른 하나는 ‘어, 우리 생각보다 강한데요? 그냥 다 밀어버리죠?’ 파. 비공식적인 명칭으로는, 우습게도 ‘영구혁명파’라고 불리고 있었다.
“조선의 봉건왕국을 아예 무너뜨리고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과거로 보내진 섭리이고, 우리가 받은 숙명 아니겠습니까!”
지난 회의에서 프랑스 쪽 노조 지도자가 그렇게 말했었다. 섭리? 숙명? 허, 참도 유물론자스러운 말이다.
그러나 그 말들이 주는 호소력 때문에 꽤나 지지세를 모으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트로츠키는 거기다 대고 이렇게 말한 셈이다. ‘좆까’라고.
정부의 명칭이 원산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니. 원산 바깥으로는 나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절대로! 절대로 조선을 정복한다느니 스페인으로 돌아간다느니 하는 헛소리는 꺼내지 말라는 뜻이다.
만일 그런 대규모 전쟁을 실시한다면 승리도 장담하기 어려울뿐더러 손실만 막대할 뿐이다. 명분도 없는 이민족의 침략이니 토착 지배세력과 인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은 뻔하고.
그냥 조선과 친선관계를 유지하거나, 아예 조용히 조선에 편입되는 것이 생존의 길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될까? 조선이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둘까? 굴욕적인 패배를 안긴 ‘도적떼’를? ‘오랑캐’를?
그리고,
트로츠키는 거기에 만족할까?
트로츠키는 조선인들에게도 굳이 낯선 외국어인 소비에트를 사용하라고 고집했다. 소비에트라는 말을 조선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은 무슨 핑계를 대서든 물리쳤다.
그때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소련을 잊지 못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트로츠키는 언제든 이 땅에 소련을 건설할 것이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로버트 밥 에드워즈는 타들어가는 담배 끝이 입술에 닿을 때까지 빨아들였다. 이게 마지막 남은 담배였다.
남은 꽁초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에드워즈는 낯설고 푸른 바다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제 담배도 없는 땅에서 어떻게 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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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은 원산에 머무르기로 했다. 고향 가까이에 산다는 친구들이 돌아간다고 할 때는 그냥 가다가 들르는 김 해서 집에다 죽었다고 전해 달라 얘기해 뒀다. 다들 대체 이유가 뭐냐고 물어봤을 때 순간 정남은 말문이 막혔다.
이유를 대라면 뭐, 이것저것 들 수는 있었다.
집안이 안 그래도 먹을 게 없었는데 입 하나 줄이면 낫지 않겠나?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인데 여기는 적졸을 사로잡아도 먹을 것을 주니 여기 붙어 있으면 입에 풀칠은 하고 살지 않겠나?
그러나 이렇게 준비해둔 답변들을 하나도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다 거짓말이었으니까.
어수룩한 정남이 그냥저냥 둘러 댔다가는 외려 의심만 더 살 뿐이었다.
고향 친구들은 결국 정남이 파란 머리 여자랑 정분이 났다느니, 애를 뱄다느니 하는 이상한 말만 궁시렁대고는 떠났다.
그렇지만 정남은 아직도 답변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때 그 포테토를 먹여준 노인이 말했던 ‘사회주의’란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서는, 강원도의 거친 산세도, 이렇게나 커다란 바다도, 싱싱한 물고기나 고깃배도 처음 만나보았다. 그 중에서도 사회주의라는 것이 가장 신기했다.
“정말로, 나랏님이 없어진답디까?”
“고럼. 무지렝이 농사꾼들이 나랏님이 된다드라.“
“내가 나랏님이 된다. 내가 나랏님이 된다···”
실감이 나지 않는 그 문장을 정남은 끊임없이 되뇌었다.
아직도 그 말의 의미는 모르겠다. 뭔가 이상한 회의 같은 데 참석하고, 난생 처음 투표란 것을 하면서 그 뜻을 배워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직도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난데없고 어색한 말이다.
하지만, 역시 고향을 떠나 본 것 중에선 이게 제일 신기하고 좋다.
그렇게 생각하며 정남은 감자를 만지작거렸다. 멀리서 증기선의 낯선 경적 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쇠로 만든 거인이 울부짖는 듯하다. 잠에서 일어나라고. 이제 동쪽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니, 그립고도 아늑한 어둠을 찢고 새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알리는 것만 같았다.
그 세상에는 방향을 알려주는 별자리도 없으니, 저 마음에 따라 낯선 길을 헤쳐가야 하리라.
문득 정신이 들어 동녘을 바라보니 박명이다.
세상은, 정말 신기한 것투성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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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라는 바람 (1)
회담이 끝나고 허후가 조정으로 돌아가자 예정된 단두대 매치가 벌어졌다.
물론 결과는 빤했다.
“허후, 김종서, 황보인 등을 파직하고 귀양 보내소서!”
“전하! 허후, 김종서, 황보인 등이 무능한 장수에게 병사를 맡겨 국체를 뒤흔들었으니 반드시 치죄해야 하옵니다!”
그렇게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허후, 민신 등은 각자 영호남과 평안도, 함길도에 흩어져 귀양가게 됐다.
새롭게 영의정으로 뽑힌 사람은 정인지. 좌의정에는 한확이, 우의정에는 박종우가 제수되었다.
그 외에도 각 6조와 각 관서의 인사들이 빠르게 갈아치워지면서 대신파들의 공백을 채워 나갔다.
여기서 약진한 것은 역시 소장파 신료들.
신숙주는 승정원 동부승지로 당상관이 되었으며 성삼문 또한 사간원의 좌사관으로 임명됐다. 그 외, 소장파에 속하며 간을 보던 이들도 당상관 바로 앞 문턱까지 밟으며 발빠르게 승진했다.
그리고 소장파 신료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수양대군과 연락망이 열려 있다.
당연히 이런 시국까지 오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바로···
“···붓을 더 가져오라.”
안평대군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겸 오랜만에 붓을 들었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붓을 꺾어버리고 종이는 찢어버렸다.
안평은 먹물이 튀어 지저분해진 벽을 노려보았다. 마치 검은 피가 튄 것처럼 참혹한 광경이다.
권좌를 향한 안정된 계단.
조선의 문인이라면 무릇 ‘안평대군’이라는 네 글자만 들어도 흠모의 마음을 품는다. 수많은 문필가들, 시서화에 능한 풍류인들, 명망 높은 학자들. 안평은 그들을 후원했고 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렇게 대신들의 호감을 샀고, 느슨한 동맹세력으로 안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안평의 야심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권력을 키우기엔 최적의 상황.
안평은 홧김에 새 종이를 꺼내 휙휙, 부러진 붓으로 획을 몇 개 긋는다. 황량한 벌판 위로 부러진 대나무들이 몇 대 서 있을 뿐인 쓸쓸한 풍경이 종이 위로 펼쳐졌다.
그런데 8만, 8만이 증발했다. 안평대군 자신과 김종서의 연맹으로 안정되어 있던 정국에 순식간에 공백이 생겨버렸다.
한때는 안평과 친했지만 이제는 수양에 붙어먹은 소장파들이 슬그머니 승진해 있다. 거기다 좌의정이 된 한확은 수양의 사돈이다.
이번엔 창백하게 솟은 달을 그렸으나, 아직 여리고 게슴츠레한 달빛은 헐벗은 황야를 덮지 못한다.
“···젠장.”
보이는 것은 오직 만인지상의 보좌뿐.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는데···.
그렇게 한참 붓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상황을 돌이켜보았다.
갑작스레 격변을 맞이한 것은 수양이나 안평이나 마찬가지.
결국 정권을 쥔 것은 수양도, 자신도 아니다. 갑자기 자리를 떠맡게 된 원로들이다. 거기에 김종서파 탄핵을 주도한 소장파 신료들이 여론을 흔들 뿐이고.
그 중에서 수양의 ‘야심’을 충족시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소장파는 필요에 따라 잠시 수양과 교류했을 뿐 승진가도를 달리는 지금은 슬슬 수양이 필요 없어질 상황.
애초에 종친이 합법적으로 권력을 손에 쥘 상황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인척관계나 신료들과의 친분 같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입지를 넓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수양이든 자신이든 목적을 충족시킬 방법은 단 하나.
그 ‘정상’적인 상황을 뒤집는 것.
지금은 갑작스럽게 조정이 뒤집어진 상황. 왕은 어린데 여론을 주도하는 소장파들은 아직 권력의 중심에서 한참이나 멀리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안평대군은 급하게 서찰을 써야 할 이름들의 목록이 떠오른다. 주로 주위의 은퇴한 무신들이다.
칼. 칼을 모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안평은 풍경의 구석에 새어 나오는 햇빛과 먹구름을 표현한다. 매우 파격적인 구도의 그림이 완성됐다.
곧 구름을 뚫고 붉은 태양이 솟아올라, 이 황야의 주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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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신료들이 대거 갈아치워진 격변.
생각이 없는 이들은, 멋모르고 경쟁자가 사라졌다고 좋아할 뿐이다. 누구는 승진했다고 기뻐하고, 누구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한탄하지만 모두 똑같은 수준이다.
하지만 생각을 할 줄 아는 이들은,
“수양대군일세.”
줄을 댄다.
순간 권람은 오랜 친우의 뜬금없는 한 마디에 당황했다.
그저 날씨 얘기나 하던 와중에 갑자기 치고 들어와서 건넨 말에 설명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렇게 멍하니 있길 1초, 2초, 3초··· 아. 맙소사, 이 미친 새끼.
“자···자네 설마.”
권람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부르르 떨린다. 친우가 감히 무엇을 입에 올렸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말을 이어간다.
“요새 서울에 이상할 정도로 활쏘기 시합이 자주 열리지 않나? 수양대군은 그렇다 쳐도 평소에는난을 치거나 서예 공부하나 하던 안평대군까지 사람을 모아 사냥을 나가는 일이 잦아지지 않았나?
한양이 어느새 소란스러워지지는 않았나?
지금 정국을 이끄는 이들이 누구지? 갑작스레 의정부에 들어앉은 대신들이 주도하나? 아니면 하루가 멀다 하고 김종서의 탄핵상소를 내밀던 신숙주와 그 모리배들?
금상(今上) 전하께서 나이 어리신데, 누가 그 분을 보좌하고 있나?
자네도 이제 알지 않나? 시간이 없어. 다음···이 올 때까지.”
‘다음··· 임금’.
권람은 그가 생략한 부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도성 곳곳에서 느껴지는 이상하게 들뜬 기운. 왠지 모르게 시끌벅적한, 기묘하게 외지인이 많아진 풍경.
이상한 낌새는 곳곳에 있다.
그러나 정말로? 정말로 안평과 수양 두 대군이 불궤(不軌)를 꾀할 정도로 상황이 심상찮다는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들을 통제할 수단이··· 수단이···
없나?
그들을 누가 견제하겠는가? 사돈이 수양대군인 한확이? 미묘하게 대군들의 움직임에 관대한 정인지가? 그것도 아니면 그나마 여론을 주도하지만 당상관은 신숙주밖에 없는 소장파가?
새로 자리에 오른 대신들은 아직 황보인이나 김종서만큼의 강력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또한 행정 인력의 한 축이 뿌리째 뽑혀 나간 상태일지라도 소장파가 득세하기에 그들은 너무 어리다.
견제하려 하더라도 수단이 없다.
갑자기 자신이 출퇴근하던 궁이, 육조의 건물들이, 지금의 평화로운 도성이 모두 종이로 만든 모형처럼 허무하게 느껴졌다.
지금의 안정과 평화란 모두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이다. 그저 위정자들의 안이함에 기댄 허상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수양대군을 택하였는가?”
“수양대군께서는 본래 영명하고 강단하며 정직하고 사심이 없으신 분이 아닌가? 이 난세를 평정할 이는 그 분뿐일세.”
겉치레만 가득한 말에 권람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자 친우는 헛기침을 켰다.
“···물론 수양대군께서는 자네와 친분도 있고. 그분의 주위에는 믿을 만한 이들이 없어. 반면에 안평대군의 주위에는 구름떼처럼 선비들이 모여 있지.
만일 안평이 꾸리는 흉측한 음모를 막고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한다면 우리는 수양대군의 최측근이 될 것이야.”
“그렇다면, 만일 정말 자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진심일세.”
“내가 대군을 알현하여 보겠네. 그리고 자네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지.”
“그래, 고맙네.”
“자네도 참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이··· 어찌 이런 일을···.”
“자네는 장원으로 급제했지? 지금 직책이 집현전 교리였던가? 나는? 고작해야 경덕궁직이지. 과거는 보는 번번이 낙방해서 겨우 집안 도움을 받았고.”
“···”
“못난 놈은··· 원래 못난 길로 나아가는 걸세···.”
권람의 오랜 친우, 한명회는 가만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권람은 괜시리 바람이 차가워지고,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한명회의 저 미소 속 자리잡은 미로 같은 계략을 감히 읽어낼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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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정세가 바삐 돌아가고, 신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원산 소비에트 공화국도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였던 파리 코뮌이 탄생하기 무려 419년 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소! 지금은 1452년이오!”
조선과의 협상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을 알리자 대중들은 수백 년이나 되는 시간의 간극에 전율했다. 그러면서도 트로츠키가 굳이 파리 코뮌을 언급한 데 대한 기대감에 차 있었다.
1871년, 프랑스의 무능한 황제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배하자 파리의 시민들은 분노에 차 궐기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가 세워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2달 남짓한 시간 동안 정부군과의 처절한 시가전과 학살을 거쳐 파리 코뮌은 무너지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섰다. 그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파리 코뮌, 모두가 기억하는 그 순간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대중들은 기대에 들떠 연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그 기대감을 충분히 채워줄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는 파리가 아닌 이곳 원산에 세워지게 될 것이오!”
‘”와아아아아아아! 원산 소비에트 만세!”
“트로츠키 만세! 원산 만세! 혁명 만세!”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 엉뚱한 타지로 날아와 고향으로부터 고립됐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졌던 의용군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대중들은 트로츠키의 이름을 연호하고 원산을 연호했다.
그렇게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 수립을 발표하고, 박수치고, 리본 자르고, 새 헌법의 간략한 요지를 설명하는 등 자질구레한 식순을 마치자 총회의에서는 곧바로 원산 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우선 쌀, 밀, 각종 채소류의 경우, 신 품종을 되는대로 보급하고 있으며, 현지 품종과의 교배를 꾸준히 시도하려고 합니다.
이 지역은 애초에 쌀이 잘 나오지 않으니 강변 저지대를 중심으로만 논농사를 진행하고, 나머지는 밀과 감자 등을 중심으로 재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빌로프가 발표하는 농경 근대화 계획을 모두들 주의 깊게 들었다. 바로 몇 일 전에 만장일치로 농업인민위원에 선출되어 아직 공무에는 미숙했으나, 그를 빼고 적임자를 찾을 순 없었다.
원산의 개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 생산량의 증대. 급증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식량을 확보하고 경제적 상황을 안정화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비료 공장을 뚝딱 지어서 돌릴 수는 없으니, 일단 지금으로서는 품종 개선과 황무지 개간, 그리고 수리시설 확충에 집중한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원산 남쪽, 안변의 가운데를 흐르는 남대천 강변. 그곳에는 이미 몇 개의 수차가 돌아가고 있었으며, 밀알들이 그 아래로 쉼없이 날라지고 있다.
물론 지금 돌아가는 것들은 작고 허접한 모습이지만, 새로 건설되는 수차들은 그 부지의 크기부터 남달랐다.
“이전에 포로들을 동원해 수차나 다양한 구조물들을 건설한 결과, 일의 진행이 조금 더 빨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연말이 되어가니 농업 근대화의 결실은 내년에야 보게 되겠지만, 벌써부터 이뤄지는 대규모 공사에 주민들의 호기심이 집중되고 있고요.
특히 수차의 건설은 다양한 분야에서 도움이 될 예정입니다. 수차를 통해 밀가루를 만들 제분소를 돌리고, 수차에 망치를 달면 제철에도 이용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산업 분야에 동력원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수차입니다!”
바빌로프의 말에 트로츠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회의 참석자들도 바빌로프와 농업위원회 의원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관심을 보였다.
수차, 그리고 수차로 돌아가는 다양한 원시적 산업기계들. 그 중에서도 제분소는 절구로 온종일 밀알을 빻던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있다. 저 제분소 하나로 수만 명의 수효를 감당하기는 어려웠지만, 수차가 하나 둘 늘어난다면 이제 절구로 빻아 만든 허접한 밀가루는 안녕이다.
안타깝지만, 이 개발계획 때문에 켈틱 1호와 2호, 게르마닉 호의 수리작업은 전면중지. 각 배의 선장들이 이 소식을 듣고 울상을 지었지만 선박 수리에 들어가는 인력과 선반실의 각종 시설들을 다른 목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소비에트 대표들은 이제 제철소 부지를 지나 미리 구획된 논 건설 부지, 그리고 제방과 수로 건설을 위한 기획지를 둘러보았다.
소비에트 대표들 중에는 이제 조선인도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 옆에는 아직도 통역들이 붙어있었지만 몇 달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통역 없이도 조금씩 말이 통해가고 있다.
조선인 소비에트들이 건설되고, 슬슬 소비에트의 투표 시스템이나 자치 정부라는 개념에 농부들도 점차 익숙해졌다. 애초부터 전근대 농업사회란 국가에 세금만 바칠 뿐 어지간한 일은 지역사회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했으니 크게 낯선 개념도 아니었고.
다만 근대적이고 민주적인 선거와 회의 체계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듯 보였다.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인 소비에트 대표들도 기존의 나이 든 원로들이다.
그러나 조직가들이 지역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사회주의적 요소를 전파한다면, 이러한 상황 또한 타개될 것이다. 원산 곳곳에서 민주적 선거의 방법론을 가르치고, 사회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