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68
“…사회노동당원 일동 역시 해당 안 상정에 찬성하오.”
“자네들까지 대체 왜 그러나? 다들 바보같이! 트랙터 대여 신청은? 수리 시설 점검은?”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고만고만한 것들 사이의 상호 합의에 의해 일어나는 가장 밍숭맹숭하고, 무의미하고, 무내용한 통치.
그런 것이 저 너머 뉴스 속의 일이라면 차라리 낫다.
그러나 내가 매주, 매달 참가해야 하는 직군별 소비에트 정기 회의 중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라면?
“저 새끼 쳐!”
“의장석으로 진입 못 하게 막아!”
“제기랄, 환장할 노릇이군. 대체 회의가 제대로 진행된 게 언제적 일인지….”
“언제까지 이 거지 같은 구형 작업복만 입고 있어야 하나? 내가 상정한 안건은 언제 처리하나?”
지겨움과 환멸이 슬슬 온 인민들의 기본 정서로서 자리 잡아 갈 때쯤, 지금껏 소련을 이끌어 온 그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원산 공산당 창당!”
그 한 가지 소식이 림보 상태에 대한 구원의 단초로서 다가온다.
―“세계보건연대의 연정 제안. 트로츠키, ‘뜻이 맞는다면 누구와 손을 잡지 못하겠나?’”
그리고 의료인들의 대표격으로 노먼 베순과 에드워드 바스키가 트로츠키와 함께 악수하는 그림(아직 사진이 널리 보급될 기술력은 없었으니)이 온갖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올라감과 함께,
―“원산 문화예술인동맹의 공산당 지지 100인 선언!”
―“소련교육자동맹의 트로츠키와의 연대 천명!”
―“피혁노동자동맹의 당수 최금옥 동지, ‘합당 빼고 모든 걸 함께하겠다.’”
직군별, 의제별로 모여 있던 정당들은 자신들의 적체된 요구를 성취해 줄 구심점을 찾아 트로츠키의 발 앞에 우르르 몰려 들어온다.
물론 개중에 반수 이상은 이미 트로츠키가 포섭해 놓은 곳들이지만.
이제는 뭐 큰 상관도 없다.
“트로츠키! 트로츠키!”
“여, 여러분! 우리 프랑스계가 단결되어야 정규 교육 과정에 프랑스어가 포함될 수….”
“빌어먹을! 너희 다 꺼져! 더 이상 공산당 말고는 안 뽑을 테다!”
“맞아! 좆 같은 프랑스어! 대체 탁자랑 의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왜 따지는 거야!”
이미 게임은 끝났으니까.
트로츠키는 승리를 향한 확신 속에서 발을 내딛는다.
커튼 너머에서는 어느 위대한 군사 지도자! 불세출의 혁명가! 천재적인 정치가의 이름을 목놓아 연호하고 있다!
저들이 그토록 나를 원한다면, 나는 저들에게 나를 선물로 주리라.
“동지들! 오래 기다리셨소!”
“우와아아아아아!”
그렇게 순식간에 소비에트 대회에서 40% 넘는 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트로츠키는 다시금 신문의 정치면의 표제로 화려하게 귀환했다.
“흠… 동지?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건가?”
“우리 사이에 왜 ‘동지’라고 격식을 차려 부르겠나?”
스피리도노바가 안경 줄을 만지작거리다, 곧 손을 떼고 탁자 위로 올려놓는다.
“차라리 서로 악을 쓰고, 욕을 할지언정. 료바, 그대에게 동지라고 불리고 싶지는 않군.”
수십 년 걸쳐 배배 꼬인 원한이 잠시 불을 뿜다가 사그라든다.
스피리도노바는 한숨을 내리 쉬고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헛되이 튀어오른 감정을 가라앉힌다.
뭐, 정치인이라면 자기가 십수 년 감방살이하는 데 일조한 일생의 원수들도 용서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정치란 게 그렇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정치가 뭔지 잘 안다.
“어떻게 하겠나? 우리가 수십 년 전 1918년에 못 다 이룬 꿈이라네?”
“하… 맙소사. 자네는 내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네.”
스피리도노바는 두 손가락을 치켜든다.
“다 잃거나, 조금만 잃거나. 이런 건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운명일세.”
“그렇게 느낀다면야. 누군가는 모든 걸 잃고 싶어하기도 하는 법이라네.”
트로츠키가 천역덕스레 어깨를 으쓱이자 다시금 스피리도노바는 한숨을 쉰다.
공산당과 그를 지지하는 군소 정당들을 모두 합하면 소비에트 대회 내에서 아슬아슬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다.
애매한 일당 우위제. 이걸 불안을 유지할 바에야 트로츠키는 아예 2할 정도의 의석을 차지한 사회혁명당에 손을 내민다.
“…좋네. 연정 파트너가 되겠네.”
“잘되었네! 모두에게 잘한 선택일세!”
“다만 무장상선을 우리 측에서 준비했으니, 그걸 활용할 수는 있게 해 줬으면 좋겠군.”
“무장… 아, 최금옥 동지가 말하던. 그거라면 보장하지. 아주 재미있는 물건을 마련했더군.”
지금 그가 스피리도노바와 사회혁명당에 그 정도 ‘아량’ 하나 베풀어 주지 못하겠는가?
마침내 트로츠키는 승리했다.
* * *
―“작금의 조선은 매우 독특한 정치적 과도기를 맞이하고 있다. 전제 군주제와 더불어 공론의 조직화와 제도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으로, 작금의 비정상적으로 강대한 군주권이 대중 정치의 고도 발전과 병행하며 상호 작용한다.
―펄럭.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
살짝 긴장된 분위기.
―“이러한 상황에서 각 정당이 다른 정당과, 그리고 강대한 군주권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나마 비교 대상 삼을 만한 독일의 제2 제국 하에서의 정치 구도와도 판이하게 다르다. (…) 앞으로 각 정치적 주체들의 움직임이 어떻게 성숙한 정치 제도를 완성해 나갈 수 있을지는….”
“흠….”
“어떻소, 트로츠키 동지?”
“흐음….”
트로츠키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야를 좁힌다. 진서(眞書, 한문)와 정음을 섞어서 써낸 글줄 한 자 한 자를 천천히 소화한다.
잠시 후, 초조해하던 이홍위의 앞에 정중히 연구지를 되돌려 놓은 뒤 트로츠키는 돋보기안경을 벗는다.
볼록렌즈 뒤로 고양이 눈처럼 커다래 보였던 트로츠키의 두 눈이 다시 줄어든다.
“좋습니다.”
“다행이구려.”
이홍위가 한숨을 퓨, 하고 내쉰 뒤 안심이라는 듯 웃자 트로츠키 역시 마주 웃는다.
“초고라서 아직 손봐야 할 부분이 많지만서도 어느 정도는 틀이 잘 잡혀 있는 논문입니다. 헌데….”
“헌데?”
“조선에서의 정당제 도입은 결국 원산에서의 정치적 ‘사고’가 빚어낸 결과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원산에서 벌어진 정치적 투쟁과 조선에서 일어난 그것은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저희 원산 공산당과 국제 공산당을 보십시오.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놀랍게도 신숙주와 조선의 공산당이 주도하는 국제적 흐름에 트로츠키가 동참하는 형세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표 및 창립자: 신숙주
감탄스럽다.
“참… 꼼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 인재입니다. 국제 공산당을 조선에서 창설할 줄은… 아니, 생각해 보니 인재라 하기에는 이제 신숙주 동지도 한참이나 늙었군요.”
인재라니, 50대 중반에게 그 무슨 소리를. (물론 트로츠키 눈에는 새파란 놈이지만.)
물론 두 사람 모두 몰랐으나 원래 신숙주는 몇 년 뒤, 성종 6년이어야 했을 1475년에 이승을 떠난다.
물론 지금 조선의 근대화와 함께 본래 역사보다 더한 호의호식을 누리며, 더 나은 의술의 혜택을 받을 그로서는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게다가 아직 더 얻을 것도, 채워야 할 야심도 많은 인간이 그리 쉽게 죽지는 않으리라.
“잡설을 집어치우자면, 원산과 조선의 상황이 상호 작용하는 모습도 보여 주고, 그리고 두 나라가 도출해 낸 상이한 결과에 대한 약간의 분석 역시 곁들여 주면 좋겠습니다.”
상이한 결과.
그렇다. 나름 사회주의 형제국이며 최우방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왕국과 공화국에서, 똑같은 정치 제도의 도입이 완전히 다른 방향의 출력값을 내놓았다.
“공산당 일당 우위제라….”
“엄밀히 말하자면 사회혁명당과 연정했으니 양당 우위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실상 1.5당 체제나 다름없지요.”
이홍위는 날마다 면도하여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트로츠키의 첨언과 함께 원산의 현주소를 되새겨 본다.
기실 당연한 결과였다.
이미 구성원들의 의사가 정치에 즉각적으로 내리꽂히는 소비에트 체제 내에서, ‘인민의 대변자’로서 정당은 그저 잉여일 뿐.
부르주아 의회 정치에서와 같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는 없다. 이렇게 되돌아갈 것임은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허나 정당을 폐하지 않음은 의외라 할 수 있겠소. 개헌선도 확보하였고 공민들의 여론도 잘 조성되었으니, 적당한 때를 보아 공민 투표를 진행했더라면 빠르게 무용한 정당제를 무력화할 수도 있었을 것을.”
“전하, 지금의 상황에서도 나름 저 조직들에게는 역할이 있습니다.”
트로츠키가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이야기를 잇는다.
직군별로 나눠진 소비에트가 담당하지 못하는 대의, 정체성들을 묶어 낼 수단이 필요하기야 하다.
예를 들어 인쇄 노동자로 근무하는 한 미국계 흑인 여성이 아프리카 진출에 대하여 의견을 피력하고 정부에 압력을 넣고 싶다?
그렇다면 인쇄 노동자 소비에트 내에서의 움직임만으로는 부족하리라. 대신 올리버 로 동지가 주도하는 ‘흑인 권익 향상을 위한 듀보이스 연대’에 입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공산당과 사회혁명당 외에는 거의가 의제 정당만 남은 이유 또한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소비에트 체제 내에서도 생명력을 발휘하며 나름의 기능을 수행한다.
해당 정당에 대한 지지세와 득표수를 통해 해당 의제에 대한 인민들의 의사를 파악할 수 있으니 정부 입장에서도 경제적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소비에트 체제 내에서 일당 중심으로의 수렴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대강의 결론을 내린 뒤, 이홍위의 관심은 이제 다시 원산에서 떠나 돌아온다.
반대로 조선은 어떠한가?
“아직 의회조차 없음에도 3당제가 굳건히 섰소. 당분간은 이들 사이의 경쟁으로 계속 정국이 이어질 듯하오.
가끔씩 정쟁 구도가 불안해질 때마다 그대의 말대로 군부와 정부 기능을 떼어 낸 것이 잘한 듯하오. 저 셋 중 하나가 군권을 쥐고 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전하께서 올바른 처신을 하신 것이지요.”
빈 다과 그릇이 치워지고, 다시 대강 설탕과 조청으로 버무린 과자들이 상에 올라온다. 이제 잇몸이 시큰시큰해지는 트로츠키로서는 부드러운 것부터 먼저 집어 먹는다.
그 모습을 보던 이홍위는 픽, 하고 웃다가 다시 생각에 잠긴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저 동지가 겪었을 고초가 생각이 났소.”
이홍위는 머릿속의 책들을 다시 펼친다. 그 속의 구절구절들을 뒤지며 자신의 말을 정리한다.
마르크스는….
“결국, 마르크스는 믿었소. 사회에 대한 국가의 전제적 지배가 소멸하고 오롯이 민주주의적인 세계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지. 자본주의적 토대가 그를 가능케 할 것이라고.”
“잘 알고 계시는군요.”
“동지가 나보다 더 잘 알 거라 생각하오. 내 아무리 공부해도 동지에 비하면 초출이 아니오? 나보다 햇수로만 수십 년은 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어 오지 않았소?”
그게 사실이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도래 이후, 국가와 시민 사회가 분리된다. 국가가 사회로부터 독립될 수 있는 기초는 바로 잘 정비된 관료제와 상비군이다.
마르크스는 언젠가 발전된 자본주의가 이를 해체하고, 이 뒤를 이을 공산주의가 국가의 소멸을 이뤄 낼 수 있으리라 보았다. 물론 아주 단순화한 것이고, 실제 논의는 훨씬 섬세하여 이리 단언할 수 없지만.
“헌데, 트로츠키 동지. 재미있지 않소?
투철한 사회주의 혁명가의 이명이 ‘붉은 군대의 건설자’라니.”
그러나 근대로 제대로 진입조차 하지 못한 제국. 볼셰비키들은 밑바닥에서부터 나무 쟁기를 들고 강철처럼 얼어붙은 농토를 깨뜨리려는 러시아의 농부처럼 안간힘을 썼다.
근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서.
“참으로… 재미있는 역설이 아니오? 국가의 소멸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강력한 국가를 건설해야 했고,
누군가는 언젠가 이뤄질 군대의 폐지를 그리면서 가장 강력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수백만 대군을 벼려 내었소.”
‘그리고 민족이 지양되리라 믿었던 스탈린도 민족 국가들을 건설했고.’
트로츠키는 속으로 덧붙였고, 이홍위는 말을 잇는다.
“우리는 모두 그렇소이다. 조선에 자라나던 직접 민주주의적 공동체들에서 힘을 빼앗아 정당 조직들의 손에, 관료 조직들의 손에 쥐여 주었소. 스스로 사회주의자라면서!
웃기게도 나의 치세 동안 여느 때보다도 강고한 왕권이 구축되었소. 부왕께서 급사하시고 보위에 급히 올라 피바람을 겪었던 나의 치세에 말이오.”
기묘한 아이러니.
우리는 모두 역사의 장난이 빚어낸 잔여물들이다. 자본주의가 존재조차도 하지 않는 땅에서 공산주의를 빚어내고자 미답의 길을 걷는 모험가들이다.
모순 속에서 칼끝을 걷듯 조심스레, 때로는 발이 그 날에 찢기고 피 흘리더라도 과감히 나아간다.
이곳은 혁명의 기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될 곳이기에.
트로츠키가 잔을 가볍게 들어 올리자 이홍위는 짠하고 그에게 부딪혀 준다. 술도 아니고 차가 든 것을.
역사의 전진을 위하여.
진보를 위하여.
초원을 뒤덮는 숲 (1)
사라이(Sarai). 페르시아어로는 ‘궁정’.
몽골에는 본래 여름과 겨울마다 다른 곳에 거주하는 풍습이 있다.
이는 정주 민족들에 비하여 이동이 자유로운 유목 민족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여름에는 북쪽의 시원한 땅에서 머무르다가, 겨울이 오면 남쪽의 바다 가까이로 자리를 옮겨 주둔한다.
그렇게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철새처럼 계절 따라 오가는 것이 유목민의 한 해였다. 초원과 하늘 사이를 살아가는 것이 유목민의 삶이었다.
이는 그들이 제국을 건설하고도, 거대하고 화려한 성채와 도시를 건설하는 나날이 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름과 겨울의 거처마다 도시를 건설하고 그 사이를 교역로로 연결했다.
유럽의 정복자로 이름을 떨친 바투(Batu) 역시 아버지 주치(Juchi)의 영지를 물려받은 뒤, 위대한 교역 도시를 건설한다.
그곳이 바로 첫 번째 사라이였고, 아들 베르케가 그 북쪽에 다시 새로운 도시, ‘사라이 베르케(Sarai Berke)’를 건설하니 다시금 칸국의 중심지는 이동한다.
그러나 여전히 두 도시는 모두 유라시아의 혈관을 움켜쥔 비단길의 가장 빛나는 도시들이었고, 그곳의 사치와 화려함은 야만인들에게 전설과도 같았다.
그 전설이 불탄다.
주치인 울루스의 심장들이 잿더미가 된다.
“아으… 으아으….”
자신이 기거해 온 위대한 도시가, 200년 하고도 다시 30년을 거쳐 건재하게 맥동해 온 심장이 불꽃 속에서 녹아내린다.
견고하던 성채는 도리어 화염과 열기의 악마들이 죽음과 함께 열어젖힌 무대의 장이 되고, 부유하던 시민들은 모두 그 잔혹한 연극의 관객 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
비단이, 향신료가, 새하얀 모피와, 매끄러운 양털로 짜인 양탄자와, 금칠로 장식된 경전이 모조리 한낱 장작으로 화한다.
그 비단으로 몸을 두르고, 향신료로 입과 코를 즐겁게 하며, 모피와 양탄자로 집을 장식하고, 경전으로서 마음의 구원과 알라의 지혜를 구하던 이들 역시 자신들이 귀중히 여기던 재물과 뒤엉켜 한낱 단백질 덩어리로서 불타올랐다.
남은 것은 오로지 실체 없는 것들.
무언가 고기가 구워지는, 섬뜩하게도 입에 군침을 돌게 만드는 냄새.
그리고 악마들의 비웃음 소리처럼 들리는 비명 소리.
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포박당한 채 짐승처럼 울었다.
“너는 반역자다.”
어리석은 이의 앞에, 가장 위대한 정복자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의 곁에는 한때 만주의 통치자였던 총사령관 아락투무르와 제국의 적장자 호루크다슨이 충직하게 버티고 서 있다.
“폐하! 제가 어찌… 어찌 반역자입니까? 저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폐하께서 설치하신 총관부라 할지언정 저의 고유한 권리를 앗을 수는 없습니다! 루스는 제 조상들의 영지입니다!”
“200년 동안 세상이 바뀌었다.”
쿠춤 무함마드 칸이 악다구니를 질러 대는 와중에도 그저 카간은 예사로이 칼날을 닦았다. 혈액의 잔향이 조금 남았을 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첫눈과 같이 깨끗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