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57
천리가 거꾸로 돌아가고 만민이 고통받은 그 세월을 짐이 이제 끝내려 한다!”
어느 황제도 변방에 평생을 머무를 수는 없는 법이다.
성화제 주견심은 북경으로 돌아가야 했다.
칼을 빼 들고 만세성을 외치는 병졸들에게 연설을 마친 뒤 그는 곧바로 장수들을 만나 군략을 논하고, 각지에서 북경으로 몰려오는 군세들을 점검했다.
단기 결전이다. 길어도 2년에서 3년 안에 저 주첨선의 목을 베어 버리고야 말겠다. 그뿐이랴, 지금쯤 땅밑에서 잠자고 있을 경태제 주기옥은 그 시체를 꺼내어 다시 육시를 하리라.
아버지의 위패를 북경에 다시 모신 뒤 두 역적의 목을 올려 그 앞에 술을 따라 올린다면… 그 어찌 효가 아니랴.
그동안 형성해 놓은 세력권에서 끊임없이 남경으로 상경해 오는 병력들을 보며 성화제는 생각한다.
애초부터 지역 토호들을 잔인하게 제압해 가면서 이루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광경이었다.
세폐와 인력의 독점적인 지배. 그를 통해 이끌어 내는 막대한 군세.
천하의 주인으로서 황제가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이거늘, 감히 방자한 것들이 저마다 지역에 틀어박혀 사사로이 백성들에게서 세폐를 수탈하고 제멋대로 역(役)을 동원하였다.
아버지의 대부터 찬찬히, 자근자근 밟아 준 결과 적어도 이 주견심의 치하에 놓인 땅에서는 백성을 수탈하는 도적 떼 같은 토호들은 줄었고 천자에게 오롯이 땅과 사람의 힘이 모인다.
이제 그를 휘두를 때다.
“지금 주첨선의 군대는 얼마나 되는가?”
“아무리 많이 치더라도 5만을 넘지 않사옵니다. 역적 첨선은 대가한에게 허락을 받지 아니하면 한 줌 병사조차 일으킬 수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북조의 병졸이라 하여 봤자 각지에서 들고일어난 성주들의 사병일 뿐입니다! 폐하의 지엄한 명을 받든 아조의 강건한 군세에 마치 얼룩이 씻겨 나가듯 사라질 잡졸들이옵니다!”
갑옷을 입은 환관들이 그에게 당당히 외치자 주견심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그의 뒤에 조심스럽게 서 있던 한계란이 조용히 묻는다.
“허면 폐하, 친정하실 것입니까?”
“물론이오.”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말한다.
“가(家)가 모여 국(國)을 이루고 다시 국(國)이 모여 하나의 천하를 이루니. 천자가 솔선하여 가정에서 양친을 섬기기를 임금 뫼시기처럼 하지 아니하면 어찌 백성들이 충군하고 애국하는 도리를 알겠소?”
성화황제 주견심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한낱 필부가 아버지 섬기기를 소홀히 해도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데 하물며 천하를 호령하는 천자이겠소? 갑옷을 가져오라. 부황께서 품고 가신 한을 내 직접 역적 모리배의 피로 씻겨 드리겠다.”
용이 새겨지고, 황칠이 되어 번쩍거리는 갑옷이 성화제의 온몸에 입혀진다. 이미 서른을 넘겼건만 한계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절을 올린다. 마치 멀리 나가는 자식을 보는 듯하다.
그를 보고 성화제는 노파(老婆)의 겁 많은 탓이라 생각하여 웃으며 말한다.
“내 무사히 다녀오겠소. 아니, 곧 북경으로 뫼시겠으니 자금성에서 다시 보겠소.”
그렇게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는 떠난다.
그의 삶 절반을 넘게 살아온 남경을.
* * *
“카간 폐하께서는 언제 답이 올 것 같은가?”
“카간 폐하께서 이미 대식국(大食國, 아랍)을 치러 가셨으니 아마 카라코룸에 계신 것은 대원 태상황 폐하이실 겁니다. 어찌어찌 연락이 이뤄졌다면 분명 답신과 지원군이 올 터인데….”
지금껏 홍치황제 주첨선의 앞에서 이것저것 유창하게 줄줄 읊어 대던 학사들조차도, 오늘만큼은 말꼬리를 급히 흐릴 뿐이다.
몽골로 몇 번이나 사절을 보냈는데 아직까지도 답이 없다. 조선에서는 이를 두고 함흥차사라 한다던가.
몇몇 돌아온 이들의 보고에도 역시 대원의 태상황 폐하께옵서 몸이 편찮으시다는 핑계로 제대로 만나 주질 않으셨다는 하소연만 가득하다.
암만 보아도 에센이 고의적으로 연락을 무시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비, 빌어먹을….”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번에 조선에서 왕호를 바꾸고 직제를 일신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네. 자칭인 줄로만 알았는데 남경의 주견심이 제멋대로 허락한 것이라 하였지.”
“허면 폐하, 그때 이미 조선과 소련을 통하여 몽골과도 소통이 된 것은 아닐는지요? 조선이 몽골과 교린한 지도 오래이니 조선의 설득이라면 카간 폐하와 대원 태상황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셨을지도 모릅니다.”
학사라는 놈들이, 절망적이기 그지없는 추측들을 내놓고 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남경의 역적들 탓에 중원이 도탄에 빠지고 조선의 위세가 강성해진 지가 얼마나 지났소? 만일 조선이 칭제를 하고 싶었다면 언제든 할 수 있지 않았소?
남경의 눈치를 볼 것이 무어가 있고, 또 남경을 위하여 그런 어려운 부탁을 들어줄 것이 무어가 있다는 말이오!”
“맞습니다! 만일 실로 그러한 제안이 들어왔다면 분명 제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조선의 조정이 천조(天朝)에 그 소식을 어떻게든 전하였을 것이오!”
다행인 것은 그러한 추측들에 근거가 없다는 사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주첨선이 얼마나 조선에게 호의를 보이었는가? 또 양국의 무역이 트이고 소위 ‘자유 무역’이란 것을 하게 된 지도 또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이렇게 일언반구 없이 조선이 북경의 천조를 버릴 리 없다는 확신이 서니 주첨선의 마음이 겨우 가라앉는다.
그래, 지금 당장 소련의 대규모 육군이 그 무시무시한 증기선을 타고 북경으로 상륙해 올 일은 없다. 소련에서 받아 온 역사서에서의 그 무시무시한 ‘아편 전쟁’을 기백 년 빠르게 재현… 아니, 현실화할 일은 없을 게다.
“하오나 당장 몽골의 도움이 없다면 아조의 군력이 너무도 약소하오니….”
물론 조선이나 소련의 입장과 상관없이 ‘형님’ 소리는 꼬박꼬박 듣던 에센이 이렇게 모르쇠로 나오는 미치고 환장할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 작자가 받아 처먹은 연공(年貢)은 어디에다 내다 버리고 지금 배를 짼다는 말인가?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또 카간의 이름을 대고 시원하게 욕설을 퍼붓기도 뭣하다. 이 봉천전(奉天殿)에도 카간이 심어 놓은 인사들이 얼마나 될 줄 알고 그따위 짓거리를 하겠는가?
겨우 절망에 찬 머리와, 분노로 터질 듯한 가슴을 억누르고는 다시 일으켰던 몸을 옥좌에 기댄다.
“…동원할 수 있는 수는 얼마나 되는가?”
“당장은 3만에서 5만 정도가 될 듯하옵니다.”
“허면 적도들은?
“30만에서 50만으로 헤아리고 있습니다.”
단순 비교로만 10배.
애초에 상대부터 되지를 않는다. 장정 1, 2천 명만 훈련해도 두 눈에 쌍심지를 켠 다루가치들이 와서 따져들었으니 이게 당연한 결과일까?
게다가 그 무장의 상태 역시 지금껏 복수의 칼을 갈아 온 주견심의 쪽이 월등하리란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북조의 전력은 남조와 다르게 중앙의 정규군만 있는 게 아니다. 이쪽은 정원이 10명만 늘어나도 다루가치에게 사정사정을 해야 하니 홍치제 주첨선은 다른 길을 찾았다.
북조에는 각지의 토호와 자칭 성주들이 남아 있다.
그들이 ‘자체적인 질서 유지’와 ‘자위권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들 갖춰 놓은 사병… 아니, 치안대나 자경단들이 있다.
여기저기서 얼기설기 모아 놓은 그런 병력들로 거점 방어 이외에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댈 데가 거기밖에 없지 않은가?
주첨선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각지의 성주들에게 명을 내린다.
―“각자 자리를 지키라. 남조의 역적들이 오면 그대들의 가산과 자치가 어찌 될지는 알고들 있으리라 믿노라.”
너희들한테 뭐 대단한 걸 바라지는 않는다.
그냥, 자기 깔고 앉은 자리들만 재량껏 지켜 주고 시간을 끌어 주면… 적들에게 피해만 어떻게든 강요해 주면 되니. 제발, 버티기만 해라….
그렇게 결국 북조의 주된 전략은 몽골을 향한 읍소와 성주들을 향한 기도로 가닥이 잡힌다.
그동안 어떻게든 아등바등 북경 인근의 병력을 모아 보려 애쓴다.
여전히 몽골에서 지원군이 올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쥐고서 놓지 못한 채로. 기댈 구석이 이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북경 조정 모두의 희망과 염원을 한 몸에 받는 에센은.
“폐하, 명나라 황제 주첨선으로부터의 서신이 또….”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오스만과의 전선에 대해 먼저 보고하라.”
가볍게 그를 무시했다.
천하대세 분구필합 (2)
성화황제의 군대는 남경에서 봉양(鳳陽)으로, 다시 영벽(靈璧)으로 점차 북상해 올라간다.
영벽은 남조의 영향력이 미치는 경계선 중 하나였다. 이 위로 얼마간 더 올라가면 조정에 세폐를 바치기는 하나 어느 정도 반(半)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서주(徐州)가 나왔다.
서주의 지주(知州, 주의 수장)는 대군을 끌고 온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성문을 열고, 막대한 물자들을 내놓았다. 여태껏 성화제가 혼란 속에서 자치와 제 잇속을 챙기던 이들을 어떻게 뒤집어 놓았는지 생각한다면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주를 지나면 황하(黃河)와 산동성(山東省)이 나온다.
그 너머 여러 중립 지역의 성주들은 대강의 상황을 짐작하고 성문을 열었다. 몇몇은 수십만 대군 앞에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들 수성을 시도하였으나 당연히 성화제가 공성추로 문을 뚫고 성주의 목을 베었다.
그런 머리 대여섯 개를 들고 진군한 다음부터는 저항하는 영주가 없었다.
이들 대오의 최종 목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북경. 그 너머 북쪽 땅은 대부분 경태제가 몽골에게 내다 바쳤으니 북경만 장악하면 오갈 데가 없는 주첨선은 패배다.
그리고 북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제남(濟南)과 덕주(德州)를 함락시켜 교두보를 마련해야 하리라.
중원이 거대하니만큼, 북쪽으로 갈수록 자라는 꽃과 나무가 달라지고 기온 역시 변화한다. 그들은 별자리를 통해 하늘의 방향을 가늠하듯, 군데군데 박힌 성과 마을을 통해 자신들이 있는 위치를 계산하였다.
대군의 진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황제는 구태여 독촉하지 않았다. 그가 요구한 것은 확고한 승리였기에.
그렇게 마침내 황제의 친정군이 북조의 세력권 남단에 자리 잡은 동창(東昌)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동창성은 요새화된 채였다.
“동창성은 견고하여 깨뜨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우회하는 것은 어떨는지요?”
“아니 되옵니다. 우회할 길은 없습니다. 동창에 적을 남기고 북진한다면 필히 성내의 적당들이 때를 보아 아군의 등 뒤를 칠 것입니다!”
“허나, 저 동창성의 군세는 주첨선의 것이 아니라 동창지부(知府, 부의 수장)의 것이 아니오? 그 누가 자신과 충성도 않는 역적을 위해 일신의 안위와 목숨을 바친단 말이오?”
남조의 인사들이 보기에 북조의 영주들은 봉건의 예를 다하며 세폐나 조금 바치고는 저들끼리 노는 것이 몹시도 불충해 보였으리라.
북조에서는 옛 주나라의 천자를 모욕하던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의 공후들처럼 영주들이 날뛴다.
주첨선은 허수아비처럼 북경에 초라하게 웅거할 뿐이고, 곳곳의 토호들이 제 영지를 틀어쥐고 갖은 행패를 부리지 않는가?
기왕 역적 무리에 가담했더라면 역적 우두머리에게라도 신의를 다하기라도 할 것이지. 북조의 토호들은 북조에 입조해 놓고는 제 주군을 업신여기니 남조에서는 더욱더 주첨선과 그 주위의 역적 패당들을 낮게 보았다.
“우회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견심은 동창을 우회하지 않았다.
지금껏 잘라 낸 토호들의 목이 얼만데, 북조와 가담했다고 육시를 한 이들이 몇인데. 저들이 주견심의 승리를 두고 보고만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떻게든 북상하는 주견심의 군대를 막아 세우려 수를 쓸 수도 있다. 위험 요소를 지고 갈 수는 없다.
“에워싸라. 처음으로 주첨선의 무리를 베어 보겠구나.”
“명을 받잡겠사옵니다, 페하!”
20여 년 동안 일어난 남과 북의 첫 전면전이다. 지금껏 해 봐야 수백 정도가 오가며 다툰 견제와 국지전이 있었을 뿐 이러한 대규모 군세를 이끌고 황제가 직접 나선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주견심의 곁에 서 있는 장수들이든, 저 동창성 안에서 대군을 내다볼 장수들이든 하는 생각은 똑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중원이 일통되는구나.’
어느 쪽이 이기든 마찬가지였다.
남조는 가진 역량의 전부를 쏟아붓고 있었다.
“발사하라! 발사하라!!!”
“당장 불 붙이고 뒤로 빠져!”
지난 수년 간 모아 온 화약이 수십수백 근씩 아낌없이 퍼부어진다.
견고해 보이던 성벽은 무슨 물렁해진 노인의 이빨마냥 흔들거리고, 그 위의 병사들은 폭발음에 귀를 막고 파편을 피해 몸을 숙이느라 정신이 없다.
“이쪽도 쏜다!!!”
“당장 쏴 재껴! 있는 거 없는 거 다 쏟아부어!”
물론 동창성 내부에서의 반격도 만만찮다.
―쾅!!!
―쾅! 콰콰쾅!
비록 남조 전체가 모아 놓은 총포의 수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더라도, 북조의 장수들은 동창성에 모인 화약과 화포의 규모에 감탄한다.
포위 측 보병 방진 몇 개가 쉴 새 없는 포화에 우그러진다. 머리 위로 날아들어 오는 석환(石丸)에 겁에 질린 병사 몇몇이 도망가다 아군 장졸들의 칼에 목이 잘린다.
생각보다 만만찮은 승부가 되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지만…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적들의 화약이 다 떨어졌나 봅니다!”
딱 일주일이 되자마자 동창성에서 더 이상의 포격은 없었다.
잠잠해진 하늘을 보며 포위군들은 드높아진 기세로 공성탑과 공성추, 사다리차를 앞세운다.
둥, 둥, 둥, 둥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수만의 병세가 우르르 몰려 나가자 식겁한 동창성의 병사들이 알아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내, 내가 제일 먼저 성벽을 넘었다!”
“황제 폐하 만세!”
남조군의 본격적인 첫 싸움이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가는 듯싶었다.
그야말로 성문이 열리기 직전. 이번에 밀리더라도 다음 날이면 사기가 떨어지고 지친 동창성의 병사들이 알아서 성을 바쳐 올 분위기다.
그리고, 그때 척후가 들어온다.
“폐하, 적군이 북동쪽에서 몰려옵니다!”
“규모는 얼마나 되는가?”
“밥 짓는 솥의 수만 보면 약 15만이 넘는 것 같았습니다!”
“뭐라?”
“서쪽의 관도(館陶)에서 역시 13만 정도가 되는 병사가 동진해 옵니다.”
“폐하, 모두 합하면 28만이 아닙니까? 분명 북조의 군세는 보잘것없다 들었는데….”
주견심과 함께 다른 장수들 역시 놀란다.
분명 받아 들었던 첩보와는 한참이나 다른 수효의 군세들이 쳐들어온다. 몽골 쪽에서 결국 군사 지원을 감행했나 싶지만 그럴 리는 없다. 절대로.
“…일단 우리 군의 우위가 확고하니 결코 패배하지 않을 걸세.”
평정을 되찾은 주견심이 말한다.
“적군이 뭉치기 전에 군을 셋으로 나누어 15만은 서쪽에서 오는 군사들을, 또 15만은 북동쪽에서 오는 군사들을 막는다. 나머지는 계속 동창성을 공략한다. 아마 저들이 동원한 군세는 해 봐야 지방 토호들이 모은 것일 테니 오합지졸일 것이다.”
다행히도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대강 파악이 가능했다.
북조가 각기 분열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각각의 영주들이 지닌 부와 성세를 더하면 결코 남조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몽골의 간섭을 피하면서 국력을 키운 방도였으리라.
황제는 직접 군의 일익을 담당하여 북동쪽으로 나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른 평야에서 적의 군세를 맞닥뜨리게 되니, 예상처럼 차림새도 깃발도 각양각색인 대군세가 나온다.
성화제 주견심의 예상이 옳았다는 증거다.
“어찌해야 좋겠나?”
“일단 저들의 머리가 여럿이라면, 분명 각각의 군세가 군율을 지켜 합일하여 움직이지 못할 터입니다. 제각기 군공을 노려 팔다리가 따로 나설 테니 약한 점을 보여 적을 방심케 하고 전열을 흐트러지게 하다가 그 틈을 타 치는 것이 병법에 옳을 듯합니다.”
환관 왕직(汪直)이 그리 말하자 고심하던 주견심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그리 따르겠다! 약병(弱兵)들을 앞세우고 중심의 병력을 얇게, 좌익과 우익의 병력을 두텁게 배치하면 되겠느냐?”
“예, 폐하! 그리 따르겠습니다!”
깃발들이 움직인다. 나팔과 북이 요란스레 울리면서 남조의 15만 대병의 진형이 조금씩 형태를 바꾼다. 멀리서 보면 마치 고래같이 큰 짐승이 몸을 뒤집듯 하는 것 같다.
이제 적들이 어떻게 나오나를 지켜보자는 듯 남조군은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금군과 함께 어기(御旗)를 휘날리며 주견심은 잠시 대오의 앞으로 나선다. 장졸들의 환호 소리가 멎을 때 주견심은 적진을 향하여 외친다.
“짐이 이제 역당을 토벌하려는데 짐의 백성인 너희가 어찌 짐의 길을 막아서느냐! 보건대, 분명 너희 순박한 백성들은 수괴들의 혹언에 속아 넘어갔거나, 겁박당하여 억지로 끌려온 듯하다!
이제부터 만일 도망하거나 투항을 한다면 목숨을 귀히 여겨 살려 줄 터이나 싸움에 들어간다면 너희 겁먹은 양민인지 사악한 역적인지를 알 수 없으니 허망히 죽을 터다!”
적 진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아군의 황제는 한 번도 본 적 없을 텐데, 역적이라고 하던 적군의 황제는 눈앞에서 그들을 구슬리니 흙 파먹고 살던 농군들로서는 상황을 알 수 없이 혼란하리라.
“살고자 한다면 지금 군영을 떠나라! 아비가 어찌 자식을 베며 임금이 어찌 사랑하는 백성을 베겠느냐?”
“웃기는 소리!”
그리고 주견심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반대편에서 또 다른 외침이 들려온다.
“역적 견심은 들으라! 온 천하가 네놈이 죽인 숱한 양민들의 혈루를 기억하는데 어찌 말 한마디마다 거짓을 섞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려 하느냐! 내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 유대하(劉大夏)가 너를 죽이고 남경에 있는 네 아비의 목까지 베어 홍치황제 폐하께 바치겠다!”
유대하의 어쭙잖은 도발에 주견심은 코웃음을 칠 뿐이다. 그러면서도 저 스스로를 정로대장군이라 선언한 자를 중심으로 적진을 살핀다.
확실히 중심에 선 유대하의 주위 군세만 창끝이 가지런하고 병사들의 늘어선 오와 열이 깔끔하다. 걸친 갑옷 역시 다른 이들에 비해 유난히 튼튼해 보인다.
역시나 중앙에서 사령관과 소수의 군대를 파견하고 인근 영주들의 군세를 모아 호령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모습을 본 남조의 장수들은 다시 진을 바꾸는데,
갑자기 북조의 군세가 돌격해 들어온다.
적진에서는 신호용 깃발이 보이지도, 악기 소리나 구호가 들리지도 않았는데.
급작스러운 적의 동태에 당혹한 장수들이 병사들을 재촉한다. 몇몇 병졸들이 실수로 넘어져 동료들에게 압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어떻게든 제시간 안에 진을 구축한다.
다시 안전한 후방으로 돌아가며 성화제가 칼을 뽑자, 15만이 그리한다.
방패들이 일어선다. 대오가 정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