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48
그리고 그렇게 쫓겨난 트로츠키가 한참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의자와 탁자를 쾅쾅 두드린 뒤에야 겨우 상황이 정리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소련의 상황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객관적인 시각에서는, 신숙주의 일본 사행 이후로 꾸준한 소련의 대외적 이득만이 관찰될 것이다.
우선 수양대군에게는 일본 수십 개 지방정부에서 밀려오는 공무역 요구를 강제로 떠밀었다. 아마 전쟁 중인 시국에 일본 각국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등골이 휘어나갈 지경일 것이 뻔했다.
그와 동시에 한명회와 권람의 이의 제기를 박살내는 데도 성공했고.
더하여 일본의 정부들이 진행하는 공무역과는 별개로, 사사롭게 행해지던 무역들 역시 그 창구를 소련으로 한정지어버렸다.
후자의 전략은 신숙주가 일본 현지에서 즉석으로 고안해낸 것인데, 쓰시마의 상인들이 부산에 다량의 금속과 화약 원료를 공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를 쓴 것이었다.
아마 지금쯤 영호남의 대신파들은 무기 확보에 상당한 차질을 겪고 있을 터. 소련에 일본의 사치품과 전략물자가 흘러 들어오는 것은 덤이다.
마지막으로 보고에 따르면 일본 각지에서 착실하게 공산주의 조직들이 건설되고 있는 듯하였다. 재부를 쌓은 서민계층이나, 기존의 기득권적인 일본 불교에 환멸을 느낀 승려들, 불안한 정국과 높은 세율에 신음하는 농민들까지.
일본의 공산주의는 다양한 계급에 걸친 인사들을 포섭하며, 점차 사회에 불만을 가진 제세력을 통합할 중심 이데올로기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그것도 단 몇 달만에.
트로츠키로서도 솔직히 말하자면 감탄할 만한 성과였다.
사실 신숙주가 맡은 바가 외교적 곡예에 가까운 과업이기도 하다. 수상쩍은 배를 끌고 가서는 자신이 조선왕국의 ‘통신사’라고 믿게 만드는 일부터 각 지역에 지하조직들을 심어 놓고 그를 지도, 유지, 관리하는 작업까지.
어느 하나 쉬운 작업이 없다고 생각했거늘, 그리하여 모두가 신숙주에게 계획의 변경을 물리고 공산주의 전파 하나 정도만 해내도 성공이라고 설득했거늘···. 이렇게나 멋지게 성공시켰다.
마치 손가락으로 접시를 돌리면서, 공중 제비돌기를 해내며, 그 모든 과정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서커스의 한 장면과도 같은 경이감이 들 정도다.
소련과 조선국왕 이홍위의 이해관계에 맞게 외교적 상황을 뒤틀어 놓는다는 공적인 목표.
그리고 자신을 물 먹인 반란군 세력들에게 더 큰 엿으로 보복한다는 사적인 목표.
신숙주라는 인간은 자신이 설정한 이 두 가지 목표를, 걱정하던 사람들더러 보란듯이 동시에 성취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화려하게 말이다.
헌데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면···
“업무 떠넘기기 한 번을 갖고 이렇게까지 돌려준다고!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쿨럭···.”
“트로츠키 동지? 료바? 진정, 진정하십시오.”
“진정 못하겠네, 르네! 으아아악!!”
그 사적인 목표의 대상으로 소련이 끼어 있었다는 것.
신숙주는 자기에게 이 거대한 업무를 떠맡긴 게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다 정치적 굴레를 씌워 제 머리 위에서 상전 노릇하려 든 인간이 누군지도 또렷이 기억했다.
만일 신숙주가 떠넘긴 거대한 엿, 일본과의 이 비대한 무역량이 오롯이 트로츠키의 부담이었더라면 다른 인민위원들도 트로츠키가 당할 만했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엿을 먹은 것 여타 인민위원들, 아니 소련의 행정체계에 속한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의류공장 노동자 소비에트의 간부부터 농업인민위원 바빌로프까지, 다종다양한 분야의 인사와 단체들이 모두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 강행군 끝에, 더 이상 누구도 신숙주를 옹호하려 들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힘들 거라고 얘기라도 제대로 해줬다면 대신파 견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생각했겠지만. 지난 전보에서 신숙주가 ‘아주 조금’ 부담이 늘 거라고만 언급한 바는 모두가 아는 사실.
“이 시발! 신숙주 같은 새끼가!”
“뭐, 너 말 다 했어?”
“자네가 말이 좀 심했네. 어떻게 사람을 그런 악마에게 비유할 수가!”
결국 신숙주는 여기서도 배반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이 불평하든 말든 간에 업무량은 줄지 않으니.
“트로츠키 동지? 지금 바깥에 일본 상선단의 단주가 와있습니다.”
“···들라 하게.”
트로츠키의 얼굴에 영업용 미소가 장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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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의 신료들도 바쁘기는 마찬가지.
일단 일본인들이 알기로는 ‘조선에 신속한 색목인들이 세운 항만에 교역 허가가 떨어졌다’라는 쪽이 진실이기에, 얼굴마담으로 내세울 지방관이라도 필요했다.
그렇게 조정에 있던 모든 제신들(4명)의 천거와 동의를 받아 박팽년은 정3품 원산대도호부사(元山大都護府使)로 파격적인 승진을 이루어내었고, 이 또한 조선의 정당한 왕에 의해 옥새가 찍힌 임명장을 받으면서 적법성을 획득했다.
물론 원산현(縣) 또한 이제 5만 명이 넘게 살아가는 고을이 된 바, 즉석에서 대도호부(大都護府)로의 승격이 이뤄진 것은 당연지사.
원산에 주둔하는 조선군(소련)을 통솔할 책임자 또한 필요하였기에 역도 무리에 가담한 이징옥을 대신하여 성삼문이 문무백관(무관 0명)의 한 목소리 아래 역시 종2품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의 자리에 제수되었으니···
실로 개국 이래 60년 간 가장 파격적인 승진가도로 뭇 제신들의 부러움과 경탄을 산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비록 바지사장 격이기는 하나 불려다닐 곳도 많고 위신을 세워야 할 자리도 많았다.
‘색목인들을 관리하는 지역 유지 겸 원산의 향리(鄕吏)’ 트로츠키의 수행을 받는 두 고관대작이 눈썹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일도 부지기수.
마찬가지로 다른 2명, 이개와 하위지 역시 차즘 함길도 수군 도절제사(관할 선박 2척)와 함길도 관찰사(관할지역 1부)를 역임하며 마찬가지로 높으신 몸이 되었다더라.
그리고 당연히 업무량도 그 지위에 걸맞았다.
네 사람이 자신을 당상관으로 만들어준 신숙주에게 고마워했는지는 불명이다.
이들 역시 능력이 검증된 인재들이 아니었더라면, 밀려 들어오는 업무량에 고사해버렸으리라.
그리고 이렇게 모두를 정신 나가도록 바쁘게 만들어 놓은 신숙주와 이명민은,
“크허어어! 좋구나!”
“합하, 한 잔 더 받으시지요.”
“허허허, 지지당(知止堂, 이명민의 호) 들었나? 내가 합하 소리를 다 듣게 되었다네?”
“아무렴, 좋지 않겠습니까! 정사 나으리께서는 제 잔도 받으시지요?”
“으하하하, 이거이거 술이 들어가니 말을 할 틈 없구만!”
···뭐 그랬다.
그러나 이들의 극락 구경도 차즘차즘 마무리가 되어간다.
바로 교토(京都)에 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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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한자로 쓰자면 서울 경(京) 자에, 도읍 도(都) 자를 쓰니 그 이름부터가 도시의 지위와 위엄을 보여주었다.
만세일계의 조정이 자리한 곳.
그 조정을 섬기며 일본 66국을 다스리는 쇼군의 막부가 자리한 곳.
이 도시에 켜켜이 쌓여온 역사와 전통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 들어서기 직전의 신숙주와 이명민 또한 소련의 일본학자들에게 온갖 세부사항을 전달받아 달달 외우고 있었다.
물론 기본적인 예절이나, 어느 관직에 어떤 인사가 앉아 있는지, 어떤 인사가 요주의 인물인지와 같은 정보는 신숙주로서는 이미 일본통으로서 숙달되어 있는 것이었다.
오히려 몇 군데에서는 먼 미래의 일본학자들보다 해박할 터다.
하지만 알아야 할 정보는 그뿐만이 아니다.
본래 역사에서는, 막부의 2인자 간레이(管領, 관령) 직을 맡은 하타케야마(畠山)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일어난 분쟁이 지금쯤 격화되기 시작했을 터이다.
그리고 여기서 일어난 갈등이 유력가문인 호소카와(細川)와 야마나(山名) 사이의 분쟁으로 번져, 결국 10여년 뒤 오닌의 난(応仁の乱)이라는 거대한 전란으로 불거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센고쿠 시대(戰國時代)의 시작이다.
100년이 넘도록 화마가 일본열도 전역에서 타오르고, 그 난세가 마무리될 때쯤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희대의 기인이 나와 조선과의 장구한 전쟁을 시작한다.
7년 간의 전쟁에서 조선과 명나라가 힘을 소진하자, 어느 여진족 일파가 힘을 키워 북방을 평정하고 마침내 중원을 차지하니, 그 국호를 청(淸)이라 하였다.
앞으로 기백 년의 기나긴 전란이 눈앞에 있다.
그 역사의 분수령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라 생각하니, 모두가 떨리는 가슴으로 초조하게 앞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그리고 마침내.
“조선통신사 입시이옵니다.”
“환영하오.”
쇼군을 알현하였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오. 조선의 통신사가 이리 연락도 없이 일본으로 건너오다니.”
“아국(我國)이 병화(兵禍)를 겪고 있는지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참으로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려.”
사실 신숙주와 이명민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일본에서 먼저 요청하지도 않았고, 조선에서 앞서 예고하지도 않았는데 이리 급히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그 사실은 일본인들에게 ‘조선국왕의 사정이 급해 일본을 끌어들여야 하나?’와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뿐이었으니.
그리고 그 착각은 다시 조선국왕을 참칭하는 수양대군에게서 무언가 하나라도 더 뜯어갈 속셈들을 낳았다. 수양대군 엿 먹이기가 사행의 주 목적이던 신숙주로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일 수밖에.
헌데, 쇼군은 그 사실을 주지하면서도 별 생각이 없는 듯 멍하니 수긍하고 앉았다. 조선측에서 뭘 더 얻어내거나 하려는 정략적인 모습이 엿보이지 않는다.
이 인간, 맹하다.
쇼군의 거처 곳곳이 그 주인의 기묘하고, 아름답고, 고아한 취향을 반영하듯 훌륭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이 자는 고매한 풍류인(風流人)일지는 몰라도 훌륭한 위정자는 아니다.
“주군, 그리하여 조선 측에서 우리 사정을 보고 이리 수 개월 동안 천천히 상경(上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렇군.”
오히려 옆에서 그를 보좌하는 간레이 호소카와 가쓰모토야말로 난세의 영웅에 걸맞은 풍모가 엿보인다.
신숙주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긴장한다.
‘분명, 저 자가 오닌의 난을 주도한다는 그 권신이다.’
저 자가 지금은 유력자 야마나 소젠과 동맹을 맺고 있지만, 머지 않아 그 관계가 깨지고 둘 사이의 전쟁이 일본을 피로 물들이리라. 이전부터 쇠퇴해가던 무로마치 막부는 그제야 완전히 허울만 남고 무너지게 된다.
작금의 막부의 붕괴를 불러올 무능한 쇼군과 능수능란한 권신이 바로 한 장면에 담겨 있다.
앞으로의 역사가 달려있다는 압박감에 신숙주는 모든 정신력을 소진하고는 힘겹게 쇼군과의 알현을 마쳤다.
그렇게 건물을 나서다 문득 신숙주는 뒤돌아 쇼군의 저택인 무로마치도노(室町殿)를 마주보았다.
일찰나, 머릿속에서 불길 속에 재로 사그라드는 이 대궐 같은 저택의 잔상이 스쳐간다.
12년. 이 영화로운 저택의 수명도 앞으로 12년이다. 그 뒤로는 전란에 불타 사서의 한 줄 이름으로만 남게 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렇게 잠시 감상에 잠겨 머뭇거리던 신숙주는 옆에서 보채는 이명민의 목소리에 문득 깨어난다.
“우리는 가야 할 곳도 있고 만나야 할 사람도 있소. 여기서 주춤거릴 시간이 없소.”
“미안하네. 순간 정신을 놓아서 그만.”
그러고는 낯선 이국의 거리, 처마마다에 곡선이 없어 어색하리만치 낮고 평평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거리를 걸어간다.
안다. 지금부터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말을 나누고, 누구와 차를 마시며, 누구에게 눈을 마주칠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첨예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하나하나 도화선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 도화선이 어떤 폭탄을 점화할지, 그 폭탄이 쥐새끼 하나 잡아죽일 콩알일지, 태산을 쓰러뜨릴 천둥일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든 우려와 걱정을 무릅써서라도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아, 아니! 어쩐 일로 이렇게 귀한 분들께서 소승(小僧)을.”
“올바른 불도를 찾아 행하려는 선사(禪師)가 계시다기에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시고···. 일단 변변치 못하지만 먼저 안으로 드시지요.”
“그럼 염치 불구하고.”
누가 일본 내 공산주의 조직을 관리할 것인가?
그는 분명 일본 현지에 머무르는 자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일본의 기존 종교집단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할 것은 당연하고.
아울러 정치와 조직에 능수능란해야 한다.
렌뇨(蓮如).
잇코슈(一向宗)의 차기 지도자.
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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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 말기 마륵신앙의 형성과 전개 (2)
천태종의 쇼렌인(青蓮院), 그 구석에 위치한 작은 일부로서의 정토진종(淨土真宗, 타칭 잇코슈)의 사원 혼간지(本願寺).
퇴락해가는 정토진종의 7대 법주 존뇨의 맏아들 렌뇨는 그곳에서 나이 40줄이 되어가도록 머물러 있었다.
야심이 있었다. 쇠락한 교단의 사정 때문에 어릴 적부터 끼니를 거르는 삶이었더라도, 비록 다른 종파의 세간살이에 끼어사는 처지라 할지라도.
헌데 벌써 나이가 불혹(不惑)을 바라보니 더는 희망이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도화지 같은 세상은 화백을 기다리건만 손에 들린 붓과 먹이 없어 단지 구경꾼 신세로 남으리라는 처연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어떻게 내 앞에 찾아오게 되었나? 그리고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던지려는가?
“선사님, 요사이 교(京, 교토의 준말)에서 나도는 소문 같은 것은 없습니까?”
“소문이라··· 아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군요.”
“뭡니까?”
신숙주라는 사신이 되묻자 렌뇨는 무언가 곰곰히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 대답하였다. 신숙주와 이명민 또한 길게 고른 말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공산주의라는 것에 대한 소문입니다.”
“공산주의 말입니까?”
“예, 뭔가 마나(真名, 한자)로 적힌 서책이 돌아다니고 농군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퍼지는 새로운 종파 같던데··· 저도 승려인지라 관심이 가서 한번 알아보았지요.
그저 불법을 잘 모르는 요승들의 헛소리 같더이다.”
“푸훅.”
“아, 괜찮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국물이 조금 뜨거워서.”
“어이쿠 저런. 손님을 대접하는 데 실수가 있었군요.”
이명민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다시 렌뇨는 말을 잇는다.
“그건 그렇고 이상하더이다.”
“···뭐가 말입니까?”
“주로 소식이 들려오는 곳들이 쓰시마, 그리고 세토 내해(瀬戸内海, 혼슈, 시고쿠, 규슈 사이의 바다)에 인접한 지역들이니.
우연찮게도 모두 통신사가 다녀온 경로와 겹치는 것 아닙니까?”
‘허?’
신숙주는 이명민과 재빠르게 눈짓을 나누었다.
전초전이든, 간보기든 집어치우는 편이 낫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셨다면 저희가 찾아온 이유 또한 선사께서는 미루어 짐작하고 계시겠군요.”
“허허, 저는 그저 궁벽한 사찰의 승려일 뿐인데요.”
“이제부터 아니게 될 겁니다.”
그 말에 렌뇨의 표정이 잠시 흔들리다가 곧바로 가면을 쓴 듯 온화한 미소로 돌아온다. 그 능수능란함에 어수룩한 보통 사람이라면 모두 속아 넘어갈 것이었다.
역시 사람을 잘 골랐다.
“여기, 이 서책을 받으시지요.”
“무언가 빌려주시더라도 여러분은 조선으로 돌아가실 터이니 돌려드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냥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금까지 이룬 조직까지 얹어서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래봐야 단 몇 달만의 짧은 성과요. 그것으로 기반을 다졌다 생각한다면 위에 지을 건물은 간단히 무너지겠지.”
“알고 있소. 그러니 당신이 필요한 것 아니겠소? 모래사장 같이 흩어지기 쉬운 조직일지라도 일단 거대하오.
그대가 무언가를 도모하기에는 썩 괜찮을 터.”
‘합쇼’에서 ‘하오’로. 두 사람의 경어가 바뀌어 간다.
그럴수록 이야기의 내용도 깊어진다.
“헌데··· 저 멀리 조선 땅에서 이 소승과는 어찌 연락하려 하시오? 여러분과 소승 사이에는 산이 있으며, 또 바다가 있지 않소?“
“아, 그는 걱정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