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51
“감사합니다.”
민신의 말을 듣고도 한계란은 놀랍도록 태연했고, 민신 또한 그 비인간적인 태도에 얼굴 근육을 찡그렸다. 거기에 한계란은 모르는 척하며 씨익 웃음을 지어주고는 작별 인사를 한 뒤에 방을 나섰다.
민신이 있던 방을 나서며 종이 치는 것이, 딱 2각이 지난 뒤였다.
후, 괜찮다.
오라버니라고 하나 있던 것이 죽었구나.
하! 하기사 그깟 게 무슨 오라버니인가? 남들은, 사이가 좋다던 오누이들은 누이가 시집가면 아쉬워서 손에 패물이라도 하나 더 쥐여서 보내고 싶어하고, 또 혹여나 시부모 시형제가 못살게 굴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을 한다더라.
그런데 그 인간이 한계란 자신이 사는 데 무슨 보탬을 주었느냐는 말인가? 세간 사람 모두가 손가락질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싫다고 가기 싫다고 애원하는 누이동생 손목을 억지로 쥐고서 이 머나먼 이국으로 끌고 온 천하의 냉혈한이다.
재물과 권력에 눈이 멀어 제 누나 목숨을 잡아먹고, 그것으로 모자라 누이동생까지 팔아 부귀를 누리려던 자다. 그런 자가 그 아끼던 재물들 쥐고서 죽지도 못하고 비명에 삼도천을 건넜으니 제 업보일 뿐 안타까울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며 한계란은 발을 옮겼다.
어느새 걷다 보니 다시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있다. 조선의 어느 반가(班家)보다도 화려한 곳이다.
그곳에서 기왕 주견심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많이 심심하셨지요? 그래도 저기 다른 궁녀가 대신 옛날 이야기라도 들려드리진 않았습니까?”
주견심은 고래를 절레절레 젓는다.
“나는 중요하지 않소. 그대는 그대의 오라버니가 걱정되어 그 소식을 물으러 간 것이 아니오? 그 일은 잘 해결되었소?”
갑자기 한계란의 숨이 턱, 하고 막힌다.
언제 어디서 들었지? 아마 방금 전에 환관과 말씨름하고 있을 때 엿들었던 것일 터이다.
“걱정해주시니 감사하옵니다. 하오나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보이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오래 해묵은 짐이 사라졌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한계란은 와르르 무너져 울었다.
그것이 경태 연간 5년, 1454년 음력 정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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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복벽 (3)
하루가 지났다.
황상(皇上)의 기침이 멎지 않았다.
또 하루가 지났다.
폐하의 용안이 조금 수척해졌고 눈 밑에 그늘이 졌다.
며칠이 지나자 황상께서는 이마에 적신 천을 올리지 않으면 정사를 돌보기 힘들어 하셨다.
다시 시간이 지나니 분명 춥지 않은 날씨에도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계셨다.
그리고, 지금은.
더 이상 정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황제가 직접 조회에 나가 신하들을 맞이한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대소신료들은 황제 폐하의 문안을 갈 뿐이고, 경태제에게 그럴 만한 기력이 없으니 정사에 관한 이야기를 더 나누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북방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요동의 몇몇 성과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조선국에서는 슬그머니 내전의 향방이 중앙군 측의 우세로 기울어가는 듯하다.
사세는 급박한데 황제가 앓아 누워 있으니, 대명이라는 광활한 국가는 뇌사 상태에 빠진 듯 조용했다.
물론 의식이 없는 이의 몸에서도 머리카락이 자라나고 심장이 뛰듯, 여전히 거대한 제국은 그 생명을 위해 맥동하고 있었다. 허나 그 육체에 방향성과 목적을 불어넣어줄 조정이란 수뇌부가 작동하지 않고 있으니 급변하는 정세에 대응하기는 역부족이다.
처음에는 불안감이 모두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더니, 그 다음으로는 공포가, 마지막으로는 의심이 뿌리박는다.
‘폐하께서 곧 거동이 가능하신 것이 맞는가?’
‘언제쯤 다시 깨어나 정사를 돌보실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무슨 독한 병이기에 옥체를 저리 괴롭힌다는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폐하께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불경스러운 생각을 차마 누구도 입밖에 낼 수 없었으나, 차즘차즘 ‘혹시나···’, ‘만약에···’, ‘어쩌면···’과 같은 말머리가 붙어 곰팡이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런 겉포장이 사라지고, 물음표가 떨어져 나가니 신하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문장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폐하께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나라에 가장 간절히 필요한 것은 하나.
“마땅히 후계자를 결정하여야 합니다.”
어사 소유정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조용히 모여든 신하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누구를 지정할 것인가?
여기서부터는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바는 기왕 주견심.
그러나 그를 페태자시킨 것은 다름 아니라 지금 병석에 누워 계신 황상이시다. 만일 황상께서 병세를 털고 일어나시어 다시 신하들을 선 채로 맞이하게 된다면 그런 주청을 올린 이는 결코 무사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를 세우자 말하기에도 불안하였다. 누군가는 양왕을, 누구는 양왕의 아들을, 또 어딘가의 아무개는 회남왕을 황태자로 거론하고 있다.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를 않으니 누가 보아도 명백히 계승에 있어 우선순위에 놓여야 할 기왕을 제하고는 큰 목소리로 누구를 옹립하자 이야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결국 다시 애매하게 흩어진 의견은 다시 한 문장으로 뭉쳐 황상의 침소로 올라가게 된다.
-‘엎드려 청하오니 부디 황통(皇統)의 후계를 세워 주시옵소서.’
이에 고열로 바싹바싹 말라가는 입술이 오랜만에 움직여 그 뜻을 전하였다.
“불가하다.”
不可. 단 두 글자가 다시금 모든 논의를 가로막았다.
다행히 황제는 그 뒤에도 말을 이어나갈 기력이 있었다.
“짐은 단순히 감기몸살에 걸린 것뿐이니라. 정월 열이렛날이 오면 마땅히 다시 조회에 나갈 터이니 대소신료들은 경거망동하지 말라.”
그 말에 많은 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이 음력 정월 14일. 황제 폐하께서 다시 조정에 나오시겠다 예고하신 날짜가 17일이니 고작 사흘 뒤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분명 건강이 호전된 것이리라, 여태껏 배포가 작은 이들의 기우에 놀아난 것이리라, 모두가 자기 최면처럼 뇌까렸다.
그 날까지 황상께서 회복되지 않았을, 그 만일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의 눈과 귀를 막았다.
그런데 정월 15일에는 천자(天子)가 직접 제사를 지내야만 한다.
바로 다음날이다.
그러나 경태제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몇 걸음을 걷지 못하고 쓰러질 것처럼 머리가 뜨겁게 끓고 있다.
제사는 치러지지 못 했다. 상정 외의 상황에 모두가 급히 황제를 대체할 인사를 구하려 하였으나 이미 일자가 지나버린 뒤였다.
그리고 다시 16일.
누구도 경태제가 다음날 조정에 복귀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기둥 뒤에서, 벽 사이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17일.
불길한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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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이 아침부터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워낙에 흉흉한 시국이라 말입니다.”
“이 노구는 홀로 외로운 방안에 머물다 보니 명국의 일은 잘 알지 못합니다.”
“다 아시면서.”
“무슨 말씀을.”
민신의 표정을 보아하니 어떻게든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한 나라의 대신쯤은 해먹은 인간이니만큼 눈치 하나는 빠르다.
“결국 후계를 세우는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습니다.”
“기왕의 이름이 자주 들리더이다. 아마 그리 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 그 청을 물릴 명분이 사라졌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만은···.”
민신의 말마따나 가장 유력한 것은 기왕 주견심.
허나 8살이라는 나이가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불안한 정국을 어린 황태자가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그것도 언제 금상이 붕어하실지 모르는 상황이니, 신료들은 아직도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가시지 않은 황제를 모시게 될 그 위험까지 고려해야 했다.
결국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1각 전까지는.
“저, 저기 큰 일이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궁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태상황께서 복벽하셨습니다!”
17일. 황제가 바뀌었다.
석형, 조길상.
경태제의 곁에서 가장 신임받던 이들이다.
오이라트에 패배해 몰락했다가, 우겸의 추천을 받아 다시 승진가도를 달린 석형.
환관의 몸으로 내정시위와 금군을 관장하는 몸이 된 조길상.
그렇기에 그 두 사람이 찾아왔을 때, 유폐되어 있던 태상황 정통제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었다.
“경들은 나의 목숨을 거두러 왔는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오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곧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리자, 정통제가 머무르던 전각 안팎으로 만세 소리가 울린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수도의 군사들을 움직여 태상황을 앞세우고 자금성 남문으로 향하니, 누구도 감히 막아서질 못했다.
조회에 나선 신하들은 도착하고 나서야 용상에 올라앉은 이가 정통제인 것을 알아봤을 뿐이다.
“복벽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그렇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황제가 바뀌었다.
그러나 앞으로 피 흘릴 일이 많음은 무엇보다 자명하였다.
“화···황태자 전하. 경축 드리옵니다.”
“아바마마께서 풀려나셨다고 하였느냐?”
“예, 이제 폐하께서 마땅히 자리를 되찾으시고 폐주(廢主, 폐위된 임금) 주기옥(경태제의 본명)을 가두셨습니다.”
어딘가 얼떨떨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주견심이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무엇이 잘되었다는 것인지, 자신이 황태자 지위를 되찾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저 주위 어른들이 축하드린다, 경하드린다 말씀들 올리니 그에 맞춰서 웃어주는 것이 분명한 상황.
차라리 그들을 응대하는 데 겪고 있는 피로함이 더 커보였다.
“전하께서는 이제 곧 바쁜 일이 많으실 터이니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제 폐하와 사직을 위해 전하의 몸을 아낌도 충이자 효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소! 나는 이제 침상으로 돌아가겠소!”
그러고는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에게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총총총 들어가버린다. 한 씨의 손을 쥐고서.
다시금 차기 황제로서의 자리를 되찾은 황태자에게 잘 보이려던 이들은 그 순간 모두 눈치들을 챌 수밖에 없었다.
이제 기존의 권력관계가 증발하고 새로이 권신과 역신의 관계가 짜맞춰질 터이니, 모두가 권력의 새로운 축이 어디로 이동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는 참이다. 그런 이들이니만큼 그 짧은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한계란. 조선에서 온 저 여인이 이제 동궁을 꿰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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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다시 3개월이 흘렀다.
남과 북으로 나뉜 전장, 그 중에서도 남쪽 충청도에서의 싸움은 점차 중앙군의 우세로 기울어 간다.
한때 기세 좋게 천안과 진천의 인근까지, 경기도 문턱까지 나아갔던 지방군은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왜구라는 불안요소를 견제하느라 병사 충원이 늦어지고 게다가 병장기의 수급까지 불안해진 결과라고 모두가 수근거렸다.
충원하기 어려워진 병력, 부족한 병기라면 반드시 초장부터 몰아쳐 승기를 잡아야 했을 터인데. 빠르게 한양 인근이 안정화되다 보니 그 기세가 꺾여 어떻게 하더라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이제 삼남에서의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다. 북방에 있는 김종서와 민신이 최대한 잘 해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쉬는 이들도 많았다.
“이곳을 빼앗기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도절제사 영감! 피하십시오!”
-쾅.
도절제사가 서 있던 곳 바로 옆의 망루로 포탄이 날아들었고, 포알인지 피격물인지 어딘가에서 나왔는지 모를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경상좌도 도절제사 조석강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다가 급히 왼쪽 뺨을 훑어보았다.
피가 흐른다.
아마 아까의 파편 중 작은 것이 얼굴 근처를 스치고 지나간 듯싶었다.
“일단 몸을 피하십시오! 성벽을 내려가야 합니다!”
“···알겠네.”
보좌하는 이들의 말에 급히 내려왔으나 여전히 사방에 신음과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가득한 아수라장이니 안전한 곳으로 온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휘부로 들자, 청주목사 황보공 이하로 이런저런 이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확연하게 가라앉아 있다.
하나둘씩 피 흘리는 조석강의 얼굴에 눈치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고, 모두의 시선이 조심스레 황보공에게 쏠린다. 분명, 그가 무언가 말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황보공 역시 조석강의 기분을 살피며 망설이는 듯하자, 조석강으로서는 재촉할 기운도 없어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청주를 버려야 하오.”
“불가한 말이오. 청주를 버리면 당장 회덕군을 거쳐 전라도로 향하는 길이 뚫리며 경상도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오.
또한 그렇게 되면 충청도 서쪽에 있는 전라도 측의 군세와 완전히 분리가 되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빤히 보이오. 그런데 어떻게 군사를 물릴 수 있겠소?”
조석강이 곧바로 부정하자 다들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다. 스무 개쯤 되는 눈이 간절하다는 듯 그 자신을 향하니 조석강으로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하오나 도절제사 영감···”
황보공은 그렇게 조석강의 마음이 흔들리는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군사를 물리고 물리지 않고는 우리의 바람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사세가 우리를 몰고 가는 것이지.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으니 어쩔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세에 끌려 다니는 것은 패장(敗將)의 행실이오. 만일 싸움을 이기려 한다면 당장은 불리하더라도 그 사세를 뚫고 나가야 하는 법 아니겠소?“
“···드릴 말씀이 하나 있어서 이리 말하는 것이외다.”
결국 황보공은 망설임 끝에 품고 있던 소식을 전한다.
“저들이 상주를 치려 한다는 소식이 들리오. 충주 쪽을 경유하여 군세가 움직이고 있다 하오.
제발, 이대로 가다간 모두 포위당할 거요. 결단을 내려야만 하오!”
그제야 조석강은 뒤통수를 철퇴로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눈을 꿈뻑인다.
상주를 잃으면 적들이 경상도를 누빌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 있는 본대가 크게 포위되는 형세가 되니 전라도 쪽으로 크게 후퇴할 수밖에 없을 터.
그렇다면 왜구를 막기 위해 근해의 진들에 포진한 병력들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경상도가 무주공산이 된다.
“···그렇다면 원래 답은 결정되어 있지 않았소? 어찌하여 결단을 내리라 청하였던 거요?”
“미안하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