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58
-깡, 깡, 깡, 깡.
“적도들이 왔다! 적도들이 왔어!!”
“당장 총통들을 쏴제껴라!”
이제 배는 고가도와 글음섬, 강화도 사이의 좁은 수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눈대중으로 거리를 가늠했을 때는··· 한 10리(약 4km) 정도?
총통이 제대로 맞으려면 적어도 300보(약 400m)쯤 되어야 하고, 닿기라도 하려면 800보(약 1km 이상) 안으로 다가와야 하니 그저 위협사격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말로 고작 수백 명이 2만 명을 이겼다는 저 무시무시한 이족(夷族)들을 마주했다는 공포감에 병사들도, 한대형도 그저 있는 포환을 최대한 쏘아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족들의 배가 딱, 사정거리 바깥에서 멈춘다. 적들을 조금이라도 주춤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안심한 찰나,
-우우웅, 우우우우웅.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바람이 금속으로 만든 거대한 폐 속을 통과하는 소리 같다.
그리고···
-“아, 아, 이거 제대로 소리가 나나 모르겠군”
-“예, 제대로 나고 있으니까 말씀이나 제대로 하시죠.”
-“그래. 알겠네.”
진에 서있던 모두가 경악감에 뒷걸음질 친다. 천지 끝까지 퍼지는 크기의 말소리, 뱃속까지 울려오는 깊은 음파.
저 야만족들 사이에는 거인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당연히 ‘전관방송’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 리가 없는 조선인들이니, 그 일대의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린 것은 당연지사.
마침내 쓰잘데기 없는 잡담과 울림이 멈추고, 가다듬어진 목소리가 방송된다.
-“나는 원산의 지도자 트로츠키다.”
-“적법한 조선국왕이 이 배에 승선해 계신다. 조선국왕 전하의 명에 따라 지금부터 이 선박을 공격하는 자는 조선국에 대한 반역자다.”
‘이,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
-“아, 들리는가? 아국에 역적들이 창궐하니 마음이 참괴하다. 허나 이 또한 과인이 연소하고 부덕한 탓이 아니겠는가?”
-“과인이 죽었다 생각하여 역적을 역적인 줄 모르고 섬겨온 자들은 투항하면 그 목숨을 살려주고 이전의 허물을 묻지 않겠다.”
한대형은 저 목소리를 안다. 어떤 관리가 부임 직전, 임금을 인견(引見)하던 그 떨리는 순간을 잊어버리겠는가?
“어어?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저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이 웅성거린다. 소문에 따르면 철로 만들고 불로 움직인다는 저 배 앞에, 고작해 봐야 작은 창칼로 무장한 촌부들뿐이다.
“···모두 무기를 버리라.”
그렇게 곧 강화도는 무장해제되었다.
///
-“통신 접속. 현 상황은?”
-“. . . 금일 오전, 중간 목적지 도착. 내응을 준비하라.”
-“지금 당장은 곤란. 한양으로의 도착 시간은?”
-“. . . 약 사흘 뒤.”
-“그렇다면 내응은 사흘 뒤 시행하겠다.”
-“. . . 확인. 앞으로는 상시 전신기를 켜 놓을 것. 통신 중단.”
통신음이 끊기자 권람은 헤드셋을 벗는다.
깊이 숙이고 있던 어깨를 쭉 펴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피로감에 찬 눈꺼풀이 내려오기 시작하니, 한 3경(새벽 1시경)쯤인 듯했다.
평소라면 건전지를 뽑아서 마치 보석처럼 소중히 보관해 두었겠지만, 앞으로 거사까지 남은 날이 사흘이고 남아있는 건전지는 전신기를 일주일 내내 켜놓아도 괜찮을 분량이니 굳이 아껴 쓰지 않아도 되리라.
지난번에 사우당(한명회의 호) 그 친구가 피리소리니 뭐니 한 뒤로는 믿을 만한 이들에게만 새벽 경비를 맡기고 이리 오밤중에 통신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 아침 즈음에 도착을 했다라··· 왜 봉화가 울리지 않았을까?’
본래 그 성능이 월등하고 애초에 원양으로 향하는 선박이라 하였으니,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조선의 강역을 빙 둘러 왔다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
헌데, 일단 강화도에 ‘도착’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곳에서 순찰을 돌던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았을 리 없다.
애초부터도 소련으로부터의 침공은 두려워할 만한 상황이었으나, 주상께서 암살 위협을 당하신 이후로는 더더욱 편벽적으로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원산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주요한 길목에 목책을 두른 진이 짜여지고, 곳곳의 산성에는 병력들이 들어찼다.
그리고 저들이 원래 바다를 통해 온 자들이라 하여 경기좌도의 해안가 주위도 나름대로 방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려조 때 쌓은 고성들에 군량을 비축하고, 진마다 총통을 새로이 배치하였으며, 그 수령들에게는 방비를 단단히 하라 엄명을 내려 놓았거늘···.
‘어쩌면 이미 그쪽의 수령들도 나처럼 내통하고 있었나?’
그런 가정을 하다가 권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양과 경기 일대는 바로 자신의 벗인 한명회가 직접 관리하며 저들의 지하조직을 부숴 놓았다. 그리고 만일 한양 지척의 지방관까지 포섭할 정도라면 이미 내란은 끝장나 있었으리라.
무엇보다도··· 권람의 내통도 이쪽에서 먼저 접근했던 것이 아닌가?
안 그래도 벗이었던 한명회에게 밀려 공신으로서 지위가 애매해진 권람이다. 그런데 슬슬 심 씨 형제들은 기어오르고, 그나마 자신을 봐주던 정인지 대감마저 요사이 유행하는 역병에 걸려 골로 가버렸다.
사실상 한명회와 주상을 연결한 것 외에는 크게 해낸 바가 없지 않은가? 도리어 전하께서는 점점 권람 자신을 내놓고 꺼려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어차피 집안 좋고 인맥 넓은 이들로는 심 씨들이 있고, 능력면에서 채워줄 인사로는 한명회가 있다.
즉, 주상은 이 권람이 더 이상 필요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뻗치던 순간, 권람은 도성 바깥에 보험을 들어놓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렇게 몸종들을 소련으로 보내어 놓으니, 올 때는 사람이 한 사람 더 늘고, 요상한 기기가 커다란 보따리 속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건전지’라는 것도 곁들여서.
도성 안으로 들어올 때의 수색은, 그래도 엄연히 공신인 권람의 이름을 댔으니 수월하게 통과했다.
처음에는 구명줄 가져 오랬더니 이상한 짐덩이를 가져왔다 역정을 냈으나, 이 ‘전신기’라는 요물의 기능을 알고 나선 한양에 박힌 소련의 세작으로 콱 붙잡혀 버린 것이다.
‘뭐, 이것도 보험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권람은 눈앞에 놓인 전신기를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이제 한양 코앞까지 소련군이 당도했으니, 그만큼 이놈의 가치도 올라간다.
신숙주와 다른 관료들이 소련을 향해 도망갔다는 바는 이미 모두에게 사실상 공인된 사실.
그러니 저들이 한양을 점령하고 그 작자들이 앞잡이 짓을 한다면 주상 전하의 최측근인 권람 자신은 아마 살생부 맨 첫 줄에 자리잡아 있었으리라.
그 사실을 되새기니 새삼 간담이 서늘해진다.
방금 전신으로 들려온 소식이 맞다면, 저들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한양의 코앞으로 당도해왔다. 저런 자들에게 대적하면서 어찌 살아남기를 바라겠는가?
“하여간에··· 신숙주나 성삼문이나 그 놈들도 머리는 팽팽 돌아가서는···.”
신숙주 외의 다른 사라진 시해자들도 대강 소련으로 갔겠거니 짐작하는 권람이었다.
아무튼 이제는 안심이다. 소장파 신료들에 비하면 늦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전에 줄을 잡았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처세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투로추키 의장이 조선으로 오면 어떻게 될까? 지금 온 사방으로 도망쳐 숨어있는 종친 중 한 사람을 옹립할까? 아니면 금성을? 어쩌면··· 흠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본인이 보좌에 오를지도?
권람은 투로추키 의장이 대례복을 입고 양손에 청옥규(靑玉圭)를 쥔 모양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 꿇고서 “투로추키 대왕 천세 천천세!!”를 외치는 자신의 모습까지.
아마 마루쿠수인가 레닌인가 뭔가 하는 귀신들을 이제 종묘에 모셔다 놓지 않을까?
아무려면 어떤가!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었지!
그리 생각하며 창고 문을 열고 나오니 달이 손톱 만하게 이지러졌다. 몇몇 아랫것들이 밖으로 나온 권람에게 고갯짓을 하고, 권람 또한 조용히 그들을 물리친 뒤 침소로 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조회, 부평에서 올라온 급한 소식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저, 저, 전하! 저들이··· 단종대왕 전하를 뫼시고 있다 주장하며 한양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소련이 이겨 놓은 판이었구나.
머리가 윙, 하고 울리는 충격.
권람은 흔들리는 시선을 숨기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신료들도 공황상태를 견디기 위해 저마다 마음을 굳게 다지고 있었다.
“···단종대왕(端宗大王)의 거룩한 이름을 팔아 더러운 일을 꾸미니 과연 문명하지 못한 족속의 협잡이로다.“
돌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주상은 말한다.
단종, 단명한 임금에게 올리는 묘호.
“내가···이 내가 선왕(先王)의 시신을 직접 보았다. 그 찬 강물에 불어터진 살과 참혹하게 짓이겨진 용안을 모두 눈에 담고서 곡하였거늘 누가, 누가 감히 그런 망발을 지껄인다는 말이냐!!”
“전하, 이는 분명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이개, 성삼문의 사악한 무리들이 꾸민 흉계이옵니다. 저들이 단종대왕을 시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마침내 조종(祖宗)의 마음을 어지러이 하고, 종사를 욕되이 하니 참으로 입에 담을 수 없이 더러운 역적들이옵니다!
청컨대 적도들을 물리치시고 저들이 비호하는 역적의 패당을 멸하소서!”
진노하는 주상 전하의 앞에 한명회가 빠르게 나아가 절하며 말한다. 그러자 신료들 중 다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하는 말을 입에 올린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역적을 멸하며 종사를 지켜야 한다며 주상께 주청(奏請)을 올렸다.
말로만.
바쁘게 돌아가는 신료들의 시선이 서로의 안색을 확인한다. 좌승지가 영의정을, 영의정이 부제학을, 부제학이 참찬관을, 참찬관이 상호군을, 상호군이 동부승지를.
그리고 동부승지 권람은 은밀히 주상의 안색을 살핀다.
그리고 모두가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의 것과 같은 감정을 발견한다.
의구심.
이렇듯 문무제신들의 시선, 서로의 속내를 들여다보려는 당혹감 어린 시선이 서로 얽히고 설켜 근정전을 감싸는 의심의 그물이 짜여진다.
그 모습을, 주상은 훑는다. 그리고 우연히 권람과 시선이 마주친다. 순간 권람은 공포감을 느낀다.
‘이곳에서 나 혼자만 다른 빛을 띠고 있다.’
권람의 아래턱이 달달 떨려온다.
‘나 혼자만 의심을 품지 아니한다.’
그 속내가 들킬까 두려워 권람은 주상의 영혼 없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다. 다행히도 주상은 별 생각이 없었던지 다른 곳으로 눈길을 옮겨간다.
권람은 모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얼음 얼어가던 그 한강의 시신이 과연 전하의 것이 맞았던가?’
‘분명 용포를 입고는 있었으나 그는 박팽년이나 성삼문 같은 이들이 환복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하필, 시신에는 얼굴만이 훼손되어 있었던 것인가?’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 없으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권람의 척추를 타고 소름이 올라온다.
신숙주와 그 무리들이 어느 아이의 시체에다 용포만 입힌 뒤 던져 놓고 소련으로 도망갔을 수 있다.
아니 그쪽이 가장 가능성 높다.
주상께옵서는 안평과 협력하며 흉모를 꾸미던 소장파들이 단종대왕 전하를 암살한 것이라 누누이 주장하셨으나,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증좌는 단 하나도 나온 적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신숙주와 박팽년 등이 안평을 도와 선왕을 시해한다 하여 얻을 것이 무엇으로도 씻기 어려운 죄목 외에 또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대관절, 그들이 안평의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아니 지시를 받았다 하더라도 시해의 동기가 없다.
권람은 그제야 어제의 통신에서 나왔던 알쏭달쏭한 부분을 이해하였다.
어째서 저들은 그리 서둘러 내응을 준비하라 명령하였는가?
권람이 이미 전달했듯 그에게는 병권(兵權)도 없으며 병권을 가지고 그에게 동참할 동지도 없다. 한명회? 그놈에게 고하면 아마 가장 먼저 자신을 주상에게 팔아넘기리라.
그렇다면 권람이 내응을 시도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헌데, 이런 상황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권람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이 중대한 사실을 그에게 알리지 않았음은 무엇에서 연유하는 것인가?
어차피 바로 곧 있으면 알게 될 일이라?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 권람은 소련에 믿지 못할 사람이었다 이거로군.’
저들은 당연하지만 주상 전하의 최측근이자 정난공신인 권람의 이반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를 했더라도 혹시 그가 주상 전하의 이중첩자는 아닐지, 이 투항 또한 배후에 계략이 숨은 것은 아닐지 그 여부부터 고민해 봐야 했으리라.
특히 권람의 변절, 아니 줄 갈아타기가 이뤄진 시점이 소련으로의 사행길 직후였음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조선 조정의 간계라고 의심할 만했다.
허나 권람은 한명회를 따라나선 뒤 보았다.
그 거대한 배, 기나긴 철조망, 허리춤에 찬 작은 총통들까지.
누구든 조선의 패배라는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한명회는 애써 그들을 포섭하지 못한다면 명국과 연계해 토벌할 수 있으리라 호언장담하지만 권람은 그 역시 믿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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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돌아오고 보니 한명회가 어떻게 보고해 뒀는지는 모르겠으나, 투로추키 의장 앞에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꺼내고 더듬거린 머저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정확한 보고였다.)
그 이후로 주상이 자신을 보는 표정은 더욱 못 미더운 빛이 가득하고, 그나마 한명회 정도가 앞으로도 안고 갈 인재로서 안배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면 권람 자신은?
어쩌면 자신이 수양대군을 위해 정변 중에 가담한 이런저런 악덕을 뒤집어 씌우고 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쓸모가 떨어진 공신은 군왕에게 걸림돌이니 어떻게든 제거될 지도.
바로 40여 년 전에도, 태종대왕께서 정사공신이었던 이거이, 민무구를 외방으로 귀양 보내셨고 민무구는 끝내 죽여버리지 않으셨던가? 그리 생각하면 권람의 공포감은 결코 헛된 망상에서 비롯된 바가 아니었다.
모시던 주군을 두 번이나 팽개치자니 마치 아비만 셋인 여포가 된 것 같아 켕기지만, 생각해보니 이건 역적 수양대군을 버리고 원래의 주군께 돌아간 것이 아닌가?
‘어찌되었건 나는 충신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니 권람의 마음이 편해진다.
물론, 근정전 안에서 권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음이 불편할 터.
권람이 그 면면들을 둘러보니, 주상 전하의 최측근이던 한명회와 심 씨 형제, 그리고 대신들의 표정이 특히 복잡미묘한 게 아주 보기가···
좋다.
권람은 속에서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온 힘을 다했다.
난 간다, 머저리들아.
///
“주, 주, 주상 전하 천천세!”
“조선 천세! 소련 천세!”
마주하는 조선군마다 얼떨결에 무기를 내려놓고 제발 살려만 주십사, 아니 죽여 주십사 머리를 조아리니 전투란 것이 있을 수가 없었다.
RMS 켈틱 2호는 육중한 철선이기도 하여, 수위가 한강에 진입하려면 진흙뻘에 갇혀 좌초되기 딱 좋았는데 그 문제도 빠르게 해결되었다.
“여봐라! 지금 당장 강화부(江華府)의 모든 선박을 징발해서라도 은인의 군대를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
“흑흑, 제가 주상 전하께옵서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이리 역적의 밑에서 종사하였으니 어찌 이 목숨 구차하게 살리기를 바라겠습니까! 아이고··· 아이고···.”
조선국왕 이홍위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전략무기에 가까웠다.
정신공격이라도 감행한 양, 이홍위가 모습을 비추기만 하면 조선의 무관들은 모조리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했다.
보통은 투항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다.
“으아아아악!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종묘에 이미 신위가 모셔져 있으신데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귀신이란 말이냐!!”
부정.
“이이이, 더러운 오랑캐 같은 놈들! 어찌 돌아가신 단종대왕 전하를 이리 능멸한다는 것이냐! 신숙주, 박팽년 이 개새끼들아!!”
분노.
“내, 내가 전하께서 돌아가셨는지 아닌지는 애초부터 몰랐었고, 내가 역적이라 할 수는 없지도 않은가? 응? 자네들도 다 똑같으니 나와 같은 처지나 다름없지. 그냥 나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생각하면 되지 않는가?”
협상.
“다··· 다··· 틀려 처먹었어. 난 역신이야···히힉! 나는···나는···.”
우울.
“죄많은 미신(微臣)이 주상 전하를 감히 뵈옵니다. 무조건적으로 투항하며 바라신다면 전하를 위하여 칼을 들고 당장이라도 한양도성으로 뛰쳐 들어가 저 역적도당을 베어버릴 것이오니···”
마침내, 수용.
그렇게 소련과 조선국왕 측은 진격을 하면 할수록 군세가 점점 늘어나는 역사상 가장 기묘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자네가 아까 날 더러 무어라 했었지?”
“도, 동부승지 영감. 제가 영감을 감히 몰라뵈옵고···”
“아니 그건 됐고 뭐라 불렀었냐니까?”
“그···그··· ‘망할 역적, 오랑캐에게 붙어먹은 시해자’?”
“크하하하하하!!”
“으히히힉!! 으힉! 자네들 들었나? 나한테도, 나한테도 뭐라 했었는지 다시 말해보게!”
“으으, 그것만은···”
트로츠키는 옆에 서서 가만히, 조선에서 온 신료들이 강화 부사(江華府使) 기질(奇質)을 붙잡고 이리저리 놀리는 꼴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와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조선의 무관과 지방관들이 수두룩했다.
트로츠키가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그들이 사정없이 금칠을 해대니,
이제 트로츠키의 이름은 레프 ‘동방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푸신 아름다운 자, 그 은혜가 바다처럼 넓으시고 자비심은 태산보다 후덕하신 자‘ 다비도비치 트로츠키였다.
그러나 신료들이나, 트로츠키 자신보다도 더 바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전하! 죽여 주시옵소서!”
“죽여 주시옵소서!!”
마을마을마다 갓 쓰고 글 읽는다 하는 선비들은 모조리 소식을 듣고 몰려와 조선국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통곡하고 있다.
이홍위는 그들에게 무언가 당혹감과 다른 여러 이상야릇한 감정이 섞인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 가운데···”
응? 어째서 ‘나는 용서하였노라’로 운을 떼지 않으시는가?
이런 궁금증이 얼굴 전면으로 드러난 선비들이 절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역적 무리에 가담한 자가 있느냐?”
“히, 히힉!”
“저자입니다! 저자가 수양대군과의 연줄로 이곳에 부임해온 역적 놈의 새끼입니다!”
“저희가 죽여 놓겠습니다! 일로 와! 이리로 오라고!!”
“저어언, 저어어언하아. 몰랐사옵니다! 참말로 몰랐사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끄아아아악!”
···뭔가 트로츠키가 처음 봤을 때와 성격이 달라진 듯한데.
에이, 설마. 고작 반 년 조금 넘게 같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사람이 바뀔 리가.
“트로츠키 의장··· 나는 이제 혼자 있고 싶구려. 이곳까지 데려와 주어서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뿐이오.”
“아, 아닙니다. 여기! 조선국왕 전하께서 숙소로 돌아가신다!”
“아니 그것이 아니오···. 저 역겨운 것들을 다 죽이고, 나 혼자 있고 싶다는 의미였소···.”
역시 충격적인 경험을 겪으면 사람이 망가진다.
아무튼 이렇듯 매끄러운 과정을 거쳐 강화도를 장악한 뒤, RMS 켈틱 2호를 뒤로 한 채 곧바로 교하현(交河縣, 오늘날 파주시 금촌동, 교하동, 운정동, 탄현면 일대)에 상륙. 쾌속 전진이 이어졌다.
한강까지 켈틱 2호가 들어갈 수 없다는 소식에 육상 보급을 걱정했는데, 각지의 수령들과 선비들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목숨을 애원하니 도리어 늘어난 물자를 보관하고 옮길 걱정을 하게 생겼다.
물론 모두가 저항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던지라 몇 번의 전투를 감행해야 했으나, ‘주상 전하께 지은 죽을 죄를 조금이나마 씻겠다’는 조선군들이 알아서 싸움에 나섰기 때문에 소련군의 피해 또한 없다시피 했다.
이홍위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웬만한 무력 충돌에는 소련군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저들에게 정치적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 정도의 산발적 저항쯤은 공중에 일제 사격 몇 번만 가하면 알아서들 와해되었으니 소련군의 부담도 덜했다.
그렇게 설렁설렁 교하현을 지나 고양현(高陽縣, 오늘날의 고양시)에 진입하고 나니, 슬슬 도성이 가시거리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제 한양까지 20km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조선의 신료들은 마침내 경도(京都)를 밟게 된다는 짜릿한 감각과, 이제는 리(里)보다 킬로미터(km)로 거리를 재는 것이 더 익숙해졌다는 데서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제 전보를 치도록 하겠소.”
“좋습니다.”
트로츠키의 말에 푸츠가 동의를 표하자, 회의는 마무리되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통신실로 향한다.
라디오파가 조선의 공기를 가르고, 곧 권람에게 짧은 메시지가 전달된다.
-“내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