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61
북방의 여러 나라가 중국에 하듯이, 사실상 교역이라기보다는 갈취에 가깝다.
트로츠키란 자와 양 옆의 문관이 요구 사항을 훑어본다. 그리고 세 사람의 표정이 굳고 빠르게 귓속말이 오가기 시작한다.
되었다. 이것으로 회담의 주도권을 쥔 것이다. 저들이 거절한다면 저 요구문 뒤에는 10만의 대군이, 수만의 군마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면 될 터이다.
어차피 두 번이나 전란을 거친 나라들이다. 조선군의 피해가 상상 이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초원 곳곳에서 전설처럼 들려오던 소련의 총통에 대한 소문도 과장된 것이리라.
저들의 요구가 무역의 축소나 개별 품목에 대한 자비를 구걸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으로 에센은 크게 양보하는 척···
“좋소. 따르겠소.”
“···뭐?”
“귀국의 교역 제안에 대하여 저는 조선국 섭정이자 소련의 지도자로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오.”
에센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든 말을 꺼내려 애쓴다면, “어···뭐라고?”나 “따, 따, 따른다고?” 같은 바보 같은 소리만 나올 것이 뻔했기에.
대체 어떻게 하면 그 요구가, 몽골인들이 보아도 부당하고 무리한 요구라 하여 비웃을 그 조건이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말인가?
갑자기 탁자가 흔들린다. 아마 저 태연한 태도를 본 몽골의 장수들 또한 하얗게 질린 듯했다.
애써 마음속의 당혹감을 억누르며 에센은 트로츠키의 얼굴을 보았다.
저 자신만만함의 근원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저리 당당할 수 있는가?
“다만.”
트로츠키는 에센이 내민 요구문을 돌려주며 말했다.
“수정해야 할 세부사항이 조금 있소.”
“무, 무엇이오?”
“일단 조선에서 나오는 금과 은의 산출량은 매우 형편없소. 그러니 우선 이 두 가지 자원은 같은 가치의 강철로 대체하려 하오. 괜찮겠소?”
“그건···”
“그리고 또 하나 더, 비단과 소금과 쌀은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도 부족한 자원이오. 이 또한 면포로 대체하기를 바라오. 그리고 세번째···”
트로츠키의 얼굴에 떠있는 미소는 이제 은근하지도, 비밀스럽지도 않았다.
믿기지 않았지만, 승리자의 얼굴이다.
“조선과 소련에 돌아오는 품목이 말과 모피? 말도 앞으로 그렇겠지만 특히 우리는 모피가 필요 없소. 우리가 제공하는 것에 상응하는 다른 물자를 바라오.”
“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오?”
“크흠, 여기에 미리 정리해둔 목록이 있으니 참고하시오.”
에센은 트로츠키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이···이들은 모두 우리 측에서 제공할 수 없는 품목들이오.”
“정말이오? 수량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오?”
“이 목록이 어떻게 작성됐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몽골에서 구하기는 어렵소.”
“그 목록은, 몽골제국의 영토와 교역로를 감안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 교역로들은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끊겼소. 특히 주치인 울루스(킵차크 칸국)는 혼란한 상태이며, 차가다이인 울루스(차가타이 칸국)도 멸망한 지 오래이고. 중동 또한 티무르의 후예들이 다른 세력들과 전쟁 중인 실정이오.”
“그렇소? 흠, 곤란하군.”
그렇게 말하며 트로츠키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우리 측에서 잘못 생각하였소. 폐하께서 카간을 지칭하시기에 우리는 폐하가 이전의 몽골제국만큼의 영광을 잇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결국 제국의 영광은 돌이킬 수 없는 바였군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몽골의 영광은 영원하고, 짐 또한 그를 계승하는 자로서 참을 수 없는 언사로군!”
“하지만 폐하, 현실을 보십시오.”
트로츠키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 측에서는 위대한 카간을 알현한다는 기대가 컸소. 그러나 폐하께선 서쪽으로는 루스 족과 튀르크 족을, 동쪽으로는 한족과 고려인들을 지배하던 그 시기의 영광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세력만을 품고 있지 않소?
이대로라면 우리가 기대했던 교역조건을 충족시킬 수는 없을 듯하니···.”
“작금의 상황은 그저 시작일 뿐이오! 짐이 카간위에 오른 지 이제야 한 해가 지났으니 푸른 늑대의 자손들이 다시 일어날 날도 이제 머지 않았소!”
“그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오?”
“당연한 이야기라 대답할 가치도 없군.”
“그렇다면···”
트로츠키는 종이를 한 장 더 꺼내 내밀었다.
요동을 그린 한 장의 지도. 곳곳에 알아보기 어려운 낯선 문자와 언어, 기호가 뒤섞여 있다.
“솔직히 말해 현재 몽골제국의 경제적 역량은 초라하오. 우리가 기대한 바에 훨씬 못 미치는 바요.
허나, 우리는 카간 폐하의 능력을 믿고, 위대한 제국을 이룩했던 몽골의 가능성 또한 믿어보기로 하였소.
그리하여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하오.”
“제안이라 하였소?”
“그렇소.”
트로츠키는 에센이 쥐고 있던 지도의 몇 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표시된 지점들은 현재 몽골의 기술력으로는 채굴할 수 없는 만추리아(Manchuria, 만주)의 자원들을 표시한 것이오.”
“만···추리아?”
“아, 죄송하오. 요동이라는 뜻이었소.”
트로츠키는 잠시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한다.
“앞서 말했듯 조선의 지하자원 매장량은 형편없소. 현재로서는 금광과 은광 또한 거의 고갈되어가는 상황이고.”
에센은 자기도 모르게 트로츠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또한 다양한 산업자원들이 부족하니 이를 만주, 아니 요동 지역에서 충당하려 하오. 카간께서 요동반도를 얻고 명국의 세력을 차단했으니, 곧 요동 일대를 차지하시리라 생각하오.
그러니 이 일대에서 지도에 표시된 자원들의 채굴권을 보장해주시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광산이 있는 곳의 영토를 넘겨달라는 말이오?”
“그런 것은 아니오. 그 땅에 사는 여진족들은 몽골의 신민이 될 것이며, 그들에게서 거두는 세금 또한 몽골의 차지가 될 것이오.
다만, 그 자원들을 우리가 채굴해서 가져갈 권리만 달라는 것이지···.”
“그러니까, 일대의 여진족을 평정하고 안전하게 광산을 열 수 있도록 보호만 해달라는 뜻이로군.”
“정확한 요약이오.”
지도에서 시선을 뗀 트로츠키가, 이번에는 에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지금 당장 무역수지가 맞지는 않지만, 이것으로 우리가 볼 ‘손해’를 벌충하려 하오. 그 동안은 우리가 귀국에 특혜를 베풀어 무역을 허가하겠소. 칭기즈 칸이 세운 교역망이 재건되고 폐하의 영광이 드높아질 때, 우리는 다시금 교역 조건을 수정할 수 있겠지.
우리는 투자자요. 그러니 이렇게 우리가 손해를 보는 데 대한 대가는 하나뿐이오.
제국을 건설하시오.
그리고 진정한 카간이 되시오.”
명국은 그동안 오이라트에 강철의 수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이 고스란히 날카로운 칼로 벼려져 자신들을 향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눈앞의 트로츠키라는 자는 무얼 하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양의 강철과 포목을 제공하겠다 약속하고서, 그 대가로 바라는 것이 몽골의 부흥이다. 마치 몽골이 아무리 강해져 봤자 감당할 수 있다는 듯.
세상에 둘도 없는 천치인가? 아니면 에센이 알지도 못하는 새, 머리 위에서 그를 가지고 노는 천재인가?
에센은 후자의 가능성을 믿었다.
“받아들이겠소.”
“아 잠시만, 한 가지 사항을 빼먹었소.”
“뭐요?”
서릿발처럼 차가운 긴장감 속에서 에센은 트로츠키의 입을 주시하였다.
“어··· 혹시 후추 필요하오? 향목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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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을 마치고 돌아오자 부족장들이 모여서 초조한 안색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에센은 단 두 가지 소식만을 전했다.
“조선국의 섭정이 직접 회담에 참석했다.”
순간 모두의 얼굴이 극적으로 밝아진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또 어떤 오해를 품고 있을지 눈에 선했으나 구태여 그를 교정하지 않았다.
‘한번의 전투도 없이 조선이 우리에게 굴복했다!’
에센은 사실만을 전했고, 그를 뒤틀어 받아들인 것은 저들이니까. 저들의 오해는 에센의 위용만을 드높일 뿐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 다음 소식이 이전의 오류쯤은 덮어버릴 것이니.
“세세한 내용들을 고친 것 외에는, 조선이 짐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번에 떠오른 표정은 기쁨이 아니다.
경악감이다.
에센이 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그런 성과를 이룩했는지에 대한 순수한 경악과 경탄.
“카···카간 페하 만세!!”
“만세!! 만만세!!!”
부족장들 사이에서 서서히, 스멀스멀 만세성이 울려퍼진다.
원정에 적극 찬동했던 이들부터, 줄곧 회의적이었던 이들까지. 누구 하나 카간의 영광을 부르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위대한 업적. 거대한 과실.
이것이야말로 새로 등극한 카간께서 몽골의 정당한 지배자임을 알려주는 징표가 아니겠는가!
보르지긴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제 ‘사소한’ 흠결 이상이 되지 못한다. 만일 그를 갖고 으름장 놓는 머저리가 있다면, 저 막대한 전리품을 분배받지 못할 테니.
에센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의혹이 가셨음을 깨닫는다.
가슴 속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넣어진다.
코앞을 흐르는 얄루(압록강)의 물결은 서쪽을 향해 간다. 중국과 삼한 땅의 거의 모든 강이 모이는 서쪽의 황해 바다로.
그리고 그 너머엔 중원이 있고, 또 차가다이인 울루스의 잔재와 무너져 내려가는 주치인 울루스가 있다. 모두 몽골제국의 잘려나간 팔다리들이다.
에센은 그 땅의 우두머리들이, 칸을 자칭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환상을 본다. 트로츠키가 던진 그 한 마디가 끊임없이 머리를 맴돈다.
“진정한 카간···.”
갑자기 바람이 서쪽으로 분다. 깃발들이 불꽃처럼 휘날리고 창칼이 공기의 저항을 이기려 자연스레 서향으로 기운다.
마치 무슨 계시처럼.
“서쪽으로 간다.”
에센은 읊조렸다. 카간의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러니 몽골의 전사들은 서쪽으로 갈 것이다.
다시 북쪽으로 강을 건너며, 에센은 생각지도 않았던 환송을 받았다.
“다시 얄루 강을 건널 때는 확실한 우방으로서 만나기를 바라오.“
“얄?루?”
“압록강이란 뜻입니다, 트로츠키 동지.”
“아, 그렇군.”
저들이 타고 온 거대한 강철의 배는 몇 번씩이나 부우우, 소리를 내며 몽골군의 말과 사람을 놀라게 했다. 분명 그 기적(汽笛) 소리는 환송의 의미뿐 아니라 과시와 견제의 뜻 또한 담고 있었으리라.
우리의 국력은 이러하다. 너희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으니 단념하라.
에센은 그 생각에 소름이 돋아오는 것을 느꼈다.
다른 부족장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도리어 저만한 국력을 가진 나라를 무릎 꿇린 카간의 위엄에 감탄할 뿐이었지만···
기실, 압도당한 것은 그였다.
저 철선(鐵船)이 올 시간을 벌러 왔던 그 사절의 묘하게 무감정한 표정부터, 트로츠키와 조선 문관들의 손짓 하나하나까지. 모든 것이 철저한 계획과 전략 속에서 계산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를 굴복시키고, 그리고 마침내는 회유하기 위하여 말이다.
에센은 새로이 조선 땅에 또아리 튼 저들, ‘소련’의 정체를 아직도 알지 못했다.
트로츠키라는 자가 내뱉는 그 낯설고 딱딱한 억양의 언어가 어느 지역의 것인지도, 하다못해 에드워즈라는 사절이 손목에 차고 있던 그 기묘한 기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을 꿰뚫어보았다.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가 자신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을 때만큼 두려운 순간이 있을까?
에센은 그렇게 얄루를 넘는 나룻배에 오르며, 복잡한 감정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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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밥? 괜찮나?”
“괘, 괘, 괘,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 다시는 이딴 일 시키지 마십시오···.”
“제가··· 객실까지 데려가겠습니다.”
“고맙소, 정남 동지. 부탁하오.”
회담이 끝난 직후 밥 에드워즈는 신경쇠약 직전의 상태로 바들바들 떠느라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다. 같이 와서 천막 공사에 참여한 정남이 그를 부축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갑판 복도에 엎어져 울고 있었으리라.
에드워즈의 횡설수설을 주워섬겨 보면 대강 이랬다.
“카간 폐하, 앞으로 잠시만 더 있으면 저희 일행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기다려 주시면 반드시 바라시던 회담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가? 이 자리에서 죽치고 앉은 지도 벌써 며칠인 줄 아는가!”
뭔가 에드워즈가 말만 꺼내면 에센은 탁자를 쾅, 하고 두들기고.
“애초에 너희 솔롱고스는 믿지 못할 족속들이 아니더냐? 옛적에도 대원의 흥성함이 가시자마자 배반하였는데, 지금 또한 우리를 앞으로는 안심시키고 뒤로는 군세를 모아 우리에 적대하려는 바가 아니냐!
너의 말에 따르면 조선국은 이미 내란이 끝났으니 더 볼 것도 없지 않으냐!”
“저, 저, 진정해주십시오.”
“허, 조선인이든 아니든 목을 베서 한양으로 싸보내면 저들도 느끼는 바가 있을 터.”
“폐하? 일단 절 보시면 아시겠다시피 저는 조선인도 아닙니다.”
걸핏하면 에드워즈의 모가지를 포장해 한양 직송으로 배달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이 이어졌다.
특히 에센이 몽골식의 ‘격식 있는’ 처형은 자루 속에 넣고 말발굽으로 죽을 때까지 짓밟는 것이라 언급하니(상대가 피 흘리지 않고 죽을 수 있도록 예우를 갖춘 것이기는 하다.), 에드워즈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그런데 에드워즈가 이곳으로 와서 에센을 달래고 어르는 데 들었던 시간이 벌써 이틀이다. 그 사이 목이 달아날 뻔한 건 수십 번이고.
함께 온 이징옥은 현지 지휘관이니 유사시를 대비해 주위의 군대를 끌어 모으고 관리하느라 고생 중이었다. 그러니, 에센의 접대는 오롯이 에드워즈의 몫이었다.
그 상태로 하루가 지나니 슬슬 에센의 기침소리만 들려도, 모가지의 ‘ㅁ’ 자만 나와도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트로츠키에게 온갖 욕과 협박을 들으면서 단련되지 않은 일반인들은 금세 미쳐버리고 말았으리라.
온갖 갈굼에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단련해준 트로츠키 새ㄲ··· 아니 동지를 위해 만세삼창.
그렇게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손목시계와 황해 바다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어···어··· 옵니다.”
“뭐가 말이냐?”
“회담의 장소와 전권대사 말입니다!”
RMS 켈틱 2호가 도착한 것이다.
‘휴, 시발 살았다.’
···그러나 그 뒤로 곧장 회담이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에드워즈가 회담을 위해 승선을 권했다가 뭘 믿고 올라가냐며 역정을 내는 에센에게 베일 뻔한 것이 한 번.
급하게 켈틱 2호에서 여분의 군막을 구해와 설치할 때도 왜 그렇게 밍기적대냐 핀잔을 받은 게 다시 두 번.
그리고 나서 트로츠키와 사절단이 하선하기 직전에 너는 여기까지 와서 한 게 시간 끌기 말고 뭐냐며 욕을 먹은 게 세 번.
그렇게 총 여섯 번을 비명횡사할까 싶어 벌벌 떨어야만 했다.
“아니, 대체 무슨 연유로 저 사람을 시간 끌기 역으로 보낸 겁니까?”
에드워즈의 처참한 꼴을 보니 박팽년의 입에서는 이런 질문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트로츠키는 쉽게 답했다.
“다른 사람이 죽으면 아깝잖소?”
그때, 박팽년은 트로츠키의 얼굴에서 악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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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간에 만사가 잘 풀려서 다행이오! 이제 조선도 안전하고, 무역로도 생겼으니 일본에서 떠넘긴 처치곤란 사치품들은 전부 북쪽으로 넘겨버릴 수 있지 않겠소?
의주가 10만이나 되는 외국군을 감당하느라 고생했겠지만 의주목사 유응부라는 인사도 내가 조선국왕 전하께 특별히 언급할 테니 결국 모두에게 다행 아니오?”
“뭐, 뭐가 다행입니까!”
“응? 왜 그러시오?”
이번에 문제를 제기해온 쪽은 신숙주.
“충분히 우리 측 부담을 깎아볼 만한 거래 조건이지 않았습니까? 그걸 그냥 곧이 곧대로 다 받아버리면···”
“하지만 그 면포랑 강철은 다 감당 가능하잖소?”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만.”
그때 에센은 모르겠지만, 신숙주와 박팽년이 도박으로 포커페이스를 연마하지 않았더라면 교역 성사의 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버렸으리라. 그러고도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탁자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다행히 그 또한 순간에 도취된 에센은 눈치채지 못 했지만.
“솔직히 말해 원산의 제철소는 애물단지였소. 선박을 수리하기는 해야겠고, 이런저런 곳에 들어가는 철물이 많으니 지어놨지만 애초에 굴리는 규모가 작으니 효율도 안 나오고 자원은 자원대로 들어갔다는 말이오.
그건 의류 공장이나 방적, 방직 공장도 마찬가지였소. 규모의 경제가 구축되지를 않으니 낭비란 낭비는 다 했지.”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단순히 조선의 물품을 수입해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냥 가져다 쓸 수 있게 되었다. 목화나 철광석, 석탄도 곳곳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이제 일본과 몽골을 잇는 중개무역로가 연결되었으니 시장도 충분하다.
“그러니, 더 주고 더 받아오면 될 것 아니오?”
“끄으응···.”
트로츠키의 말을 들은 신숙주와 박팽년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그들이 경험해온 공무역이란, 곧 착취나 다름없었다.
명국과의 조공무역에서 조선은 조공품에 대해 성대한 답례품을 뜯어냈다. 그리고 반대로 명국은 원 말기부터 이어진 경제적 혼란을 잠재우려 조선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금과 은을 갈취해갔다.
또 여진이나 일본의 경우에도, 그들의 무력 시위를 막기 위해서 손해를 봐 가면서 미곡 등의 생필품을 제공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번 에센의 경우에도 그들의 눈에는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먼 타국에서 공수해야 할 물자라 하면, 서적이나 약재, 사치품 또는 군수물자가 대부분이다.
서적과 약재는 둘째 치더라도 사치품은 국가에 쓸모가 없으며 군수물자를 타국으로 쉬이 넘기고 싶어하는 국가는 없으니 보통은 해당국 몰래 밀무역으로 충당했다.
활 만드는 데 쓸 궁각(弓角) 또한 명국 조정의 눈을 피해 사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트로츠키는 동등한 교환에 대해 말한다.
전략물자로 쓰일 게 뻔한 어마어마한 양의 강철, 그리고 그들의 생필품이자 화폐로 긴요할 면포, 그리고 신숙주가 무제한으로 풀어버린 대일 무역에서 들여올 사치품까지.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 트로츠키는 반대로 요동의 자원 채굴권과 다양한 물자들, 가장 중요하게는 미래의 교역망을 약속받았다.
지금의 생산력으로도 조선에게는 이익이며, 앞으로 그 이익은 더욱 커질 가능성밖에 없는 거래다.
게다가 통일된 북방은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견제할 주요한 수단이 될 테니··· 그를 위한 투자이기도 했다.
만일 에센이 죽고 몽골이 분열된다면, 앞으로 약 200년 간은 명국이 주도하는 세계 체제가 공고화될 것이다. 그래서는 소련의 생존을 보장받기 어렵다.
“그리고, 석유도 잊지 마시오?”
그렇다, 역청.
트로츠키가 석유라고 부르는 역청 또한 기자재들의 윤활재로 쓰겠다며 일본에서 온 사치품들과 교환하기로 되어 있었다. 몽골을 경유해 중국과 교류하는 서역의 상인들로부터 구해올 품목이었다. 그 역시 중요한 산업물자.
그러나 트로츠키의 설명에도 신숙주와 박팽년의 뇌리에서는 회의감이 가시지 않았다.
낭비다.
그 수만 리 길을 건너 물건을 옮길 방도는 무엇인가?
옮기는 동안의 손해를 벌충할 방법은?
그리고 그렇게 국외에서까지 들어온 물자를 조선 내에서 소비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소비하지 못한다면 다시 외국으로 팔아야 할텐데 그렇다면 다시 유통에서의 손실에 대한 질문이 떠오르고···
안다. 트로츠키의 세계와 두 사람의 세계는 다르다.
그러나 이곳은 트로츠키의 세계가 아니다.
그가 이야기해 준 것처럼 거미줄 같이 얽힌 통신망이 수만 리의 제국을 연결하는 일도 없고, 트로츠키가 타고 온 배와 같은 괴물들이 수백 수천 척씩 바다를 지배하지도 않는다.
동래에서 서울로 갈 때는 그 ‘철도’란 것이 아니라 두 다리에 의존하며, 도착에는 꼬박 열흘 넘게 걸리는 그런 느리고, 넓고, 트로츠키가 보기에는 답답해 보일 그런 세계란 말이다.
트로츠키의 구상이 과연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는가?
그렇게 의심으로 가득 찬 두 사람의 눈초리가 이어지자, 트로츠키는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 의견차의 이유는 저들이 어리석어서도, 자신이 현명해서도 아니다.
그저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달랐을 뿐.
트로츠키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동지들···
그런 세계는 죽을 것이오.
그것도 우리가 죽일 것이오.”
그 말에 박팽년과 신숙주는 먼 바다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