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8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백군 군대가 지척에 있다는 정보를 받았소. 이들이 적군에게 우호적이었던 해당 지역을 휩쓸기 위해 오고 있었지. 그들은 적법하고, 정당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서 이렇게 대응했소.
회의, 그리고 더 긴 회의.
진군속도가 문제였소. 너무 빠르게 진군하면 부상병들을 버리고 가야할 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왔지. 그래서 그 문제를 두고 삼일 밤낮을 토론했고. 결국 부상병들에 맞춰 천천히 가야 한다는 결론이 났소.
그리고 민주적 회의의 결론이 났을 때 이미 백군은 주위 마을을 모조리 약탈하고 적군 협력자들을 학살했소.
이번엔 다른 부대 이야기요.
이 부대는 지휘관이 엄하게 구니 병사들이 그를 ‘민주적으로’ 불신임했소. 물론 그들도 급하게 징집된 오합지졸들이었고. 백군 점령지로 갔을 때 ‘자유로운’ 병사들은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소.
‘전’ 지휘관은 자살했고, 이런 일은 한두 곳의 문제가 아니라 적군 전체의 문제였소. 난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었소.”
그 말을 끝으로 트로츠키는 입을 굳게 닫았다. 블레어는 트로츠키를 마주보았다.
트로츠키의 눈동자에서 어떤 감정이 읽히는가? 분노? 두려움? 후회? 전부 아니었다. 순간의 분노가 불타오른 뒤, 트로츠키는 어느 때보다도 차분해보였다. 마치 모든 감정이 소거된 것처럼.
느껴진 것은 오직 단호함···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깊이의 처연함.
“그래서 결국 고대 로마의 지혜를 빌렸고. 불복종하는 부대에게는··· 10분의 1형을 내렸소.
나는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믿소. 그러나, 그 뒤로 민주주의가 모든 상황에서 최선이라 믿지는 않게 되었소. 언제나 지켜야 할 원칙이란 게 있지만 그게 민주적 절차는 아니었던 것 같소.
그걸···나는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던 것 같소.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비민주적 절차라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을 예전의 나는 몰랐소.
무례에 사과드리오, 블레어 동지. 하지만 지금 저 밖의 어떤 뜨내기가 민간인과 다툼이 생겨 우발적으로 살해한다면 우린 어떻게 되겠소?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난 장담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이 방법을 택했소···. 이해해주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동지.”
블레어는 트로츠키가 자신을 다시 동지라 부르자 안심한 듯했지만, 어쩐지 침울해 보였다.
분위기를 환기하려 트로츠키가 화제를 돌리자 블레어도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지만 종종 고민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울한 침묵을 피하기 위해 두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사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시간은 갔다.
///
회의 이후 정확히 24시간.
각 단체의 지도자들이 하나둘씩 약속장소로 모여들었다.
약속장소는 원산의 호장이던 김밀의 저택. 수십 명이 모이는 회합 장소로 쓰기에는 이곳이 가장 적합했다.
이전의 회의들보다 훨씬 많은 인원들이 웅성대며 모이다 보니 마당은 사람으로 꽉 차서 열기로 달아올랐다. 자리가 없으니 지도자급 인사들만 일단 대청마루 쪽으로 올라와 있다.
그러나 웅성거리는 속에서도 질서는 있었다. 미리 정해진 분류에 따라 사열해 있던 것이다.
프랑스어권, 독일어권, 이탈리아어권··· 의사소통을 위해 트로츠키는 언어별로 편제를 짜 놓았고, 각각의 인구에 따라 대표자와 중간관리자들의 머릿수도 할당해 놓았다. 그렇게 사전에 합의된 대로 선발된 대표자들을 죽 둘러보며 트로츠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대표자 선거에서 프랑스어권은 급진당 인사들이 쪽도 못 썼나 봅니다. 의외로 프랑스 공산당이 많이 뽑혔는데 사회당 표가 계파대로 갈린 모양입니다.”
“프랑스 노조 지도자들은 중간 관리직을 맡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독일이랑 이탈리아는 역시 대부분 공산당 인사들이 됐습니다. 당 단위 참가자들이 압도적이라···.”
확대 개편된 회의를 위해 새로 뽑힌 서기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상황을 확인했고, 그 모든 사항이 정리되어 대표진에 착착 보고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영어권 쪽의 보고가 비었지?”
심지어 영국 쪽 지도자들 또한 회의시간이 10분 넘게 지났는데 도착하지 않았다. 영국놈들이 단체로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꼴은 보기 드물다.
“아···그게···.”
다들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하자 유일한 영국인이었던 블레어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원인이 짐작은 됩니다. 사실···”
“우린 인정할 수 없소. 일방적인 결과 통보에 불복하겠소!”
블레어의 말을 자르고 고성이 울려 퍼졌다. 다들 수근대면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는데, 저택의 문 바로 바깥이다.
그리고 곧 대답 또한 들려왔다.
“흥, 이미 24시간이 다 지났는데, 그렇다면 지휘권 박탈을 원한단 말이오?”
“차라리 그게 낫겠소! 이건 부당한 처사요. 우리는 이 사태를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소!”
“···아니 저건 무슨 일인가?”
트로츠키가 묻자 블레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제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 한심한 사태의 전말은 이러했다.
트로츠키와의 대담을 끝낸 블레어가 급하게 영어권 자원자들의 전체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이미 아수라장의 기미가 보였다.
“아니 인원을 언어별로 나누는 게 어딨습니까! 이러면···다른 국적자들과 마구 섞여 혼란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영국인 발언자는 약간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자연스럽게 시선이 아일랜드계들이 서있던 곳으로 향했다.
불편한 기류가 본격화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예 문화권별로 나누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계처럼.”
“그러면 미국은 편제 자체가 불가능해질 겁니다. 다른 안을 추진해보죠.”
“그 말이 맞습니다. 문화권으로 나눈다면 북아일랜드계는 어떻게 편성하겠습니까?”
“아, 그거야 당연히 우리 아일랜드 측에···.”
폭탄의 심지는 조금씩 타들어 가고.
“우리가 얻은 파이 내에서 국적별로 나눈다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전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지만 아일랜드 측에 참여하고 싶군요.”
“···일단 그럼 각국 편성에 참여할 신청자를 받아야 할까요?”
“그렇게 하면 기존의 조직 체계가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소!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주민은 영국 노동당 지휘로! 미국 국민은 미국 공산당 지휘로! 그렇게 해야 혼란이 없을 것 아니오!”
그러다 마침내.
“아일랜드 측은 이 정도 장교직 할당으로는 만족할 수 없소! 인구 비례상 몇 자리는 더 할당되어야 할 것이오!”
“그 인구 비례라는 게 북아일랜드 출신들을 아일랜드인으로 포함하는 거 아니오? 그 따위로 나오면 우리도 용납 못하오!”
“여러분, 제발 진정해주시오···.”
쾅, 하고 터져버렸다.
결국 자신들의 인구가 많으니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영국인들이 일방적으로 투표를 강행하고··· 거기에 아일랜드인들은 거수를 거부하면서 다시 회의가 길어지고··· 그렇게 합의가 지속적으로 미뤄진 결과.
24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렇게 심지어 회의장으로 향하기 직전까지도 의견이 정리되지 않은 채, 문 앞에서 싸우던 영국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은···.
“모두, 지휘권 박탈이오.”
응분의 대가를 치렀다.
트로츠키의 매몰찬 선언에 순간적으로 영어권 인사들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다만 영국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다른 영어권 국가들은 제외하겠소. 이미 그쪽은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진 것 같으니 그대로 속행하고, 나머지는 모두 지휘권 박탈이오.
내일까지 프랑스군 장교들과 편제를 짜 놓을 테니 이번 훈련에서 빠져 있으시오. 그럼 이만, 원한다면 훈련은 참관해도 좋소.”
그게 다였다. 그 뒤로 트로츠키는 그들을 투명인간처럼 무시했다.
그렇게 영국계와 아일랜드계 병사들은 멀뚱히 서서 다른 병사들이 훈련받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몇몇 영국인 지도자들이 항의했지만 누구도, 심지어 똑같이 지휘권을 잃은 아일랜드인들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뭐, 지난 회의에서 약속한대로 된 거 아니오? 문제라도 있소?”
“영국놈들 지휘를 받느니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수천 명이 진영을 꾸리고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고, 총을 쏘고 대열을 유지하는 훈련을 받는 동안 이 장관을 구경하러 원산의 마을 주민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그리고 편제를 제대로 꾸리지도 못한 병사들은 이들 사이에 섞여 불만스러운 혼잣말을 궁시렁대며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훈련이 끝나고 지친 병사들이 간이 막사로 들어가 잠든 다음날.
“일···일본군이다!”
결국 운명의 순간이 와버렸다.
///
조희선은 불안한 마음에 계속 오건석을 돌아보았다.
“제대로 안내하고 있는 것 맞느냐?”
별 의미 없는 확인부터 해서.
“그···때 왜병이 몇이나 된다 하였지?”
괜히 했던 말 또 하기까지.
‘괜히 임기 말에 봉변당해서 안절부절한가 보구만.”
물론 정해진 임기는 선왕의 교지에 따라 5년,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람이 없어 이직이 잦은 조선에서 그게 지켜지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즉 조희선의 지방 탈출, 서울 입성이 코앞이던 순간에 일이 터진 것.
오건석뿐 아니라 주위의 모두가 조희선의 속내를 알아챘지만 구태여 티 내지 않고 얌전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였다.
약 2800명, 기병이 반 이상에, 궁병이나 총통병이 4분지 1쯤, 나머지는 보병.
오건석의 이야기만 듣기로는 사실상 곤봉이나 들고 다니는 도적무리다. 그러나 금속 곤봉이라니, 칼도, 창도 아니고 귀한 쇳덩이로 곤봉 따위나 만들다니?
의구심이 들었지만 자신이 왜국 사정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이내 생각을 포기했다.
결국 보고받기로는 병력도 이쪽이 우세, 장비도 압도적. 왜병들에겐 기병도 궁병도 없다. 단순한 도적 때려잡기다.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나아가는 조희선의 가슴속에는 왠지 모를 걱정이 계속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앞서가던 오건석이 멈춰 서더니, 앞에 놓인 언덕을 가리켰다.
“이제, 저곳을 넘어 몇 리만 가면 언덕배기가 하나 더 나오는데, 그 뒤가 바로 원산입니다.”
“그런데 저기 위에 누군가 서 있지 않나?”
눈을 찌푸리던 조희선은 언덕 위에서 흔들리는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백···기를 든 건가?”
///
“일단, 사절을 보내 놓았습니다.”
프랑스어권 지휘관 조지프 푸츠가 말을 꺼내자 그것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지금이라도, 연락이 닿아 다행이오. 일단 소통만 되면 저들이 원하는대로 협조해야 할 것이오. 그들이 바라는 바가···무장해제일지라도.”
트로츠키의 말에 다들 신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어쩔 수 없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도 중무장한 수천의 외국인을 상주시키고 싶지는 않을 것이고.
군사훈련은 진행했지만 전투를 대비한 것이라기보다는 병사들이 엉뚱한 짓 못하게 힘을 빼놓은 것에 가까웠다. 스페인 행 자체가 불확실해진 이상, 이미 이들에게 전투력이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되도록이면 협조를 얻어 스페인까지 갈 지원을 얻었으면 좋겠군요. 배를 수리한 뒤에 아무리 늦더라도 공화국군에 합류할 수만 있다면···.”
올리버 로가 이야기하다 말끝을 흐렸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바라는 결말이었지만, 너무나 희망에 찬 낙관이다. 그들은 이유가 무엇이든 일본제국의 지방관을 죽였고, 어찌되었든 관공서를 약탈했다.
일본 당국이 보기엔 사실상 도적무리에 가까운 상황에서 이들의 처분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심지어 기병을 포함한 수백의 무장한 일본군이 그들 앞에 당도했다. 의용병들을 압송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혁명을 위해 떠난 군대가, 낯선 땅에서 누구는 목을 매달리고, 누구는 추방당해 뿔뿔이 흩어지고···.
모두가 저마다 끔찍한 파국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임시회의장으로 쓰인 김밀의 사랑방에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벌컥.
그러나 이 분위기에 눈치 없게도 갑자기 장지문 중 하나가 열렸다. 호통칠 기력도 없이 낙담한 지휘관들이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시퍼래진 병사가 서 있다.
“크···큰일입니다.”
“자네가 왜 여깄는가?”
푸츠의 반응을 보아하니 프랑스 측에서 막 보냈던 사절단 중 한 사람인 것 같다.
병사는 곧 졸도할 것마냥 바들바들 떨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백기를 들고···앞서갔던···피에르를···놈들이···.”
그 뒤에 나온 보고는 모두를 경악에 빠뜨렸다.
///
“백···기를 든 건가?”
“예, 백기를 들었군요.” 오건석이 조희선의 말에 대꾸했다.
조희선은 잠시 생각했다. 항복을 받아주면? 싸우지 않고 끝낼 수 있나? 하지만··· 만일 기만이라면?
이미 병력면에서 압도하는데 굳이 위험부담을 져야 하나?
“남의 나라 양민을 죽이고서 백기를 들어 목숨을 구걸하다니, 도적으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도리를 버렸구나. 화살을 쏘아 저 놈의 구차한 목숨을 끝내라.”
그렇게 프랑스인 피에르는 백기를 흔들다가 영문도 모른 채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
“차···참수?”
“이런 야만적인! 문명국의 처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소!”
“반드시 항의해야 하오!”
“잠깐.”
충격과 분노에 찬 회의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하기 직전, 손을 든 것은 얼굴이 새하얘진 노먼 베순 박사였다.
“사절마저 죽였다면···우리를 살려둘 의사가 없다는 것 아닌가요?”
너무나 자명한 사실.
“지···지금 당장···.”
트로츠키까지도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런 결말이라니. 동양의 어느 두메산골에서 어처구니없이 학살당하는 것이 그의 최후라니.
“당장, 기관총 포좌를 준비하고···진지를 구축해야 하오.”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다.
다들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잠시 후, 수천 명의 의용병이 생애 첫 전투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조선 땅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
집안 정리 (3)
조희선은 왼편에 펼쳐진 바다를 흘겨보았다.
지난 1년여의 세월.
서울에서 멀어지는 것은 선비가 할 짓이 못 된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만을 사무치게 뼈에 새겨왔던 그 세월.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오래, 얼마나 자주 저 변함없이 단조로운 푸른색을 바라보았는가?
한쪽 변에서 한강을 내다보면 그 너머에는 반대편 강변이, 끝이 있다. 그러나 저 넓고 깊은 바다에는 끝이 없다. 그것이 기약도 없이 이어지는 지루한 타향살이를 상징하는 것만 같아 그의 마음을 저리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 곧 모든 게 마무리되리라.
도적 떼를 잡고 가자(加資)를 받아 중앙에서 받을 관직의 급을 높인다. 안락한 한양으로 돌아간다.
그 생각만으로도 입가가 슬며시 올라가고 어깨가 가벼워진다.
“저 언덕이 마지막 고비라고 했나?”
몇몇 색목인들이 진지랍시고 급하게 쌓아올린 흙무더기 뒤에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다. 그 초라함에 병사들 사이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비져 나온다.
저 놈들을 죽이고 단숨에 언덕을 넘어 본진을 치면 끝이다.
“그럼···기병을 앞세워 저 진을 돌파한다!”
조희선의 선언에 효시가 날아올랐고, 일제히 기병들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가 움직였다.
///
피에르는 스스로를 중요한 인물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파리의 길거리 곳곳에 넘쳐흐르는 노동자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농사가 망하고 온가족이 파리로 이사한 뒤, 이브리의 좁고 냄새나는 어느 판잣집이 그의 터전이었다. 어릴 적부터 일하던 공장과 그 판잣집 사이의 좁다란 길이 그의 우주였다.
종일 일하다 돌아오면 옷소매와 얼굴이 시커매지고, 그걸 씻어내지도 못한 채 허접한 간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이 하루일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