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96
슬픔은 극에 달할 때 광기가 되나니.
“아파해서는 안 된다! 너는! 너는 나 같은 바보가 되지 말아라!”
그 말을 단말마처럼 남긴 채, 황제 주기진은 고개를 돌렸다. 금빛 용포를 둘렀으나 나무토막을 깎아 만든 인형처럼 생기 없는 아버지.
“…너는 이처럼 수치스럽게 도망치지 말거라.”
무수한 금의위 병사들이 피를 흘리고, 결국 천순제와 그 일행들은 도성을 빠져나갔다.
피 안개가 가라앉고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반쯤 불타고, 반쯤 피칠갑이 된 자금성의 주인은 결정되었으니.
“경태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복벽당했던 황제가 다시 복벽하였다.
그리고 만세 소리는 곧 말발굽 소리에 묻힌다.
* * *
“연회는 끝이니, 그대들도 모두 모스크바로 떠날 채비를 하시오.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지금까지의 환대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카간 폐하.”
저 동방의 조선과 ‘소소소련’이라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들도, 카간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저들이 모스크바를 관리하게 되리라. 아버지의 실질적인 주군으로서 루스의 주인이 될 이들이다.
그 생각을 하니 카간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떠나가는 총관 일행을 보며 기이하기도, 착잡하기도 한 기분이 드는 이반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친구를 죽인 뒤, 자신과 아버지를 무릎 꿇린 칸 또한 떠날 채비를 마친다.
이반은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카간께서 카라코룸을 떠나가시기를 기다린다.
“…무엇을 하는 건가?”
갑작스러운 질문이 닥쳐오기 전까진.
“예… 예? 카간 폐하께서 중국을 정벌하러 가시니 인사를….”
“아니, 그대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말하며 에센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대도 같이 간다.”
“…네?”
이반 3세, 북경에 가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3)
아바마마는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았다.
때때로 경태제가 보낸 추적이 이어졌으나, 천진(天津)에서 배편을 구해 나아가니 해적이 아니라면 감히 따라오기가 어려우리라.
게다가 여진족이 북경 인근에서 약탈을 벌이고 있으니 그를 수습하는 데만도 큰 공력이 들 터이다.
당장의 환란들을 쳐 내고 나서 황제의 뒤를 쫓으려 하여도, 이미 늦은 뒤다.
그렇기에 항구에서 겨우 황명으로 상선 하나를 수매해 승선하고 난 뒤에는 모두가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남경으로 향한 뒤에 어찌 될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당장 붙잡혀 죽을 일은 없어졌으니.
무슨 상서니, 대학사니, 하는 이들이 고작 상선 하나에 의지하여 울고 웃고 하는 꼴이 퍽 우습기도, 서글프기도 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아바마마만은 마치 돌처럼 굳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일에 미련을 버린 것처럼.
아니면 반대로, 세상이 그를 버린 것처럼.
“황태자 전하, 이리 오세요.”
그렇게 망가진 대명 황제의, 아버지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황태자 주견심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비좁은 선실로 가보니, 그곳에는 어릴 적부터 믿고 의지하던 한계란이 앉아 있었다.
나이가 쉰이 넘어가니 몸도 불편할 것이다. 조선에서도 권세가의 딸이었다 하니 이 추레한 상선 안에서 여인의 몸으로 고초와 불편이 크리라.
허나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는 바는 전혀 없이, 꼿꼿하게 자세를 바로 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그 모습이, 육신만 남아 있을 뿐 마음이 텅 비어 버린 아바마마와 비교되어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마음의 병이 크실 겁니다.”
그리고 한계란은 태자의 그런 생각마저 헤아린 듯 말했다. 그 말에 주견심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바마마께서 힘이 드실 텐데, 제가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으니 허물이 큽니다.”
“아닙니다. 태자 전하께서도 당연히 마음에 병이 생기셨을 겁니다.”
어릴 적부터 궁궐 속에 갇혀 산송장 취급을 받았다.
갑작스레 황태자라는 존귀한 자리에 오르자 그제야 모두가 낯빛을 바꾸고 아첨하였다.
그토록 자금성이라는 곳은 북적이면서도 쓸쓸하고, 충의를 말하면서도 비정한 곳이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태자 전하께서는 장차 천하를 이끄실 분입니다.”
여기 있는 여비(麗妃) 한계란을 빼고는.
항상 변함없이 주견심을 대하는 이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던 삶이었다. 열 살을 넘길 때부터 삶은 사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이었고, 그 버팀목이 한계란이었다.
갑작스레 북경에서 내쳐진 지금처럼 말이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정녕 천하를 다스릴 수야 있겠습니까? 천하는 이제 주기옥이나 주첨선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적이 얼굴에 분을 바르고 금으로 만든 관을 쓴다 하여도 도적일 뿐입니다.”
한계란은 강하게 고개를 도리질친다.
마치 고름을 째고 그 심을 빼내듯, 주견심에게서 삿된 생각을 절개해 내겠다는 듯한 단호한 의원 같은 얼굴이다.
“도적이 보위에 앉는다 하여도 도적이며, 스스로 칭제(稱帝)하고 건원(建元)하여도 도적입니다.
진정 천자의 자리에 오를 이는 천명에 따라 이미 정해진 바입니다. 그리고 하늘은 천자의 씨로 황태자 전하를 점지하셨습니다!”
저 말은 위로인가? 아니다.
확신이다.
그 굳은 얼굴 뒤로 한계란의 머릿속이 읽혀 보였다. 저 단호함, 결단력, 그리고 결심한 바를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
자신의 언니가 순장당하고, 숱한 후궁들이 권력의 움직임에 따라 피 흘리며 죽어 나간 자금성에서 살아남았다.
그 능력과 의지가 한계란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런 한계란이 확신에 차 말하기를, 황태자는 주견심이라 하였다.
“감사합니다.”
“신하가 참된 바를 이야기하는 데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태자 전하, 폐하께서 부르시옵니다.”
선실 문 바깥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과연, 환관이 이끄는 곳으로 향하자 오근, 이현, 마양 등 천순제의 편을 들다 도성을 탈출한 이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앉은 황제 폐하.
“…배가 남경에 곧 도착할 터이니, 도착하는 대로 남경을 황성으로 선포한 뒤 조선에 사신을 보내겠다.”
“조선 말씀이십니까, 폐하?”
“…그렇다. 천하의 번국 중에 기댈 만한 곳이 그곳밖에 없구나.”
“하오나 조선과 명국은 더 이상 육로로 닿아 있지 않습니다. 또한 전일에 야선의 정벌을 논의할 때도 미온한 태도를 보였으니 이번에도 그리 반응할 것이옵니다.”
“상관없다. 적어도 칙사를 보내 보고는 싶구나.”
신하들은 다들 천순제의 고집에 영문을 몰라 서로를 바라보았으나, 주견심은 아버지의 의도를 읽었다.
조선에서 돌려보내는 서신에서 “대명 천자께 삼가 아뢰옵니다.”라는 그 한 구절을 보고 싶으신 것이다.
물론 번국들의 지지 향방에 따라 어느 쪽에 대의명분이 실릴지가 분명해지니 무의미한 바는 아니다.
그러나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고 난 직후부터 고려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도 아니다.
남경에 도착할 때 그들은 조정을 새로이 건설하는 일이 더 바쁠 것이고, 조선이 어느 쪽을 분명히 편들고 지원할 확률은 희박하니.
그럼에도, 행여 아무 의미도 없더라도, 여전히 경태제가 아닌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는 나라가 한 곳쯤은 있어야 하겠다는 마음.
어딘가든 마음의 기댈 곳을 찾고자 하는 그 절실함.
그런 한 줄기 간절한 심정을 아바마마의 얼굴에서 읽어 낼 수 있었다.
곧 남경이었다.
* * *
한편, 명나라는 그 어떤 중화 왕조도 이뤄 낸 적 없는 거대한 위업을 달성하였으니,
“…거지 같군.”
“아, 알아듣지 못하였사옵니다, 폐하.”
“경들이 모두 좆 같고 거지 같다 하였네.”
“….”
바로 미친 염세주의자 황제를 ‘동시에’ 둘이나 배출해 내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이다.
“만세! 만세!”
“복벽 만세! 경태제 폐하 만세!”
“…지금 저기서 만세 부르는 새끼들 중 반수 이상이 7년 전에 주기진한테 ‘똑같이’ 해 줬을 걸세. 내 말이 틀린가?”
“….”
“게다가 시발, 나를 이 자리에 세웠다는 놈들은 그대처럼 주기진 앞에 바짝 엎드려 있던 인간이나, 석형과 조길상처럼 아예 나를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들을 세운 개자식들이 아닌가?”
이번 복벽의 일등 공신인 양왕 주첨선을 바로 곁에 두고, 경태제는 쉼 없이 속삭여 댔다.
세상의 모든 원한과 증오와 의심을 담은 눈빛으로 석형과 조길상을 노려보면서.
두 사람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만세를 부르지만, 자리에 있는 모두가 둘의 운명을 눈치챘다.
“…그래도 잘했네. 이제 저놈들의 정치적 인생은 끝장이 날 터이니.
저 빌어먹을 개새끼들의 세력도 이제 천치 같은 주기진이와 싸우면서 갈려 나갔고, 이제 모두가 새로 부상할 자네에게 빌붙으려 할 것 아닌가?”
바로 옆에서, 주첨선은 경태제 주기옥의 이가 갈리는 소리를 들었다. 뿌득거리는 소음이 그리 섬뜩할 수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본래 저 두 사람의 문앞을 바글바글 메우던 청탁의 물결이 이제 주첨선의 저택으로 향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 있엇다.
사실 그만큼은 아니고, 여전히 석형과 조길상의 세력은 어느 정도 잔존해 있었으나 소문은 소문만으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세간의 믿음에 따라 가장 먼저 뒤바뀌는 게 권세의 향방이기 때문이라.
청탁과 뇌물은 동서고금 어디를 막론하고 받는 자와 주는 자 간의 유대 관계를 쌓는 법.
복벽 이전 경태제의 치세에서 청렴함을 표방했던 우겸과 같은 자는 누구에게도 청탁을 받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좋게 들리지만, 누구와도 정치적 후원 관계를 갖지 않았고 권력과 이권을 나누지 않았다는 뜻이다. 석형과 조길상이 반역한 바도 그런 우겸의 권력 독식 때문이 크니….
양왕 주첨선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고, 이미 북경의 권력은 사실상 병권을 상실한 석형과 조길상으로부터 그에게 옮겨 가고 있었다.
“이제 자네가 실권자이고, 나는 곧 세상 하직할 몸 상태이니 한 가지만 부탁하겠네.”
그러니 경태제로서도 거리낌 없이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었으리라.
…경태제의 왼손이 몸에 넘쳐흐르는 증오심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인다.
“저 두 놈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죽여 주게나.”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아아, 이 영광스럽고 복된 날이여. 복벽한 줄 알았던 폐주가 복벽의 복벽을 당해 버렸으니, 다 같이 만세를 부르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폐하, 큰일이옵니다!”
“…뭔가? 황제가 바뀌고 천지가 뒤집히는 일보다 큰일이 있을 수 있더냐?”
다급한 부름에 경태제 폐하께서 그리 냉소적으로 대답하는 바 또한 그 때문이었으니….
“야선이 지금 북경으로 오고 있습니다.”
복벽의 복벽에 폐위가 이어질 참이 되니 경태제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건, 큰일이 맞군.”
만세 소리는 순식간에 멎었다.
* * *
조금 전까지 황궁을 불태우고 서로 죽여 대며 북경을 난장판 만드는 데 주력하던 명의 중앙군.
요동을 장악한 뒤로는, 아직 장성도 연결 안 된 산해관을 슬쩍 건너면 북경을 앞마당처럼 드나들 수 있는 에센의 원정군.
…둘 중 어느 쪽에 희망이 있을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팔바(пальба́, 발사)!”
―쾅, 콰곽!
게다가 명이나 조선의 것보다는 질이 낮더라도, 루스와 여러 칸국에서 몰수해 온 대포와 화약, 포수가 있으니 공성전에서 명군이 견뎌 낼 재간이 없었다.
황제의 복벽을 송축하던 만세 소리는 그렇게 대포 소리와 구령 소리에 묻혔고, 곧 북경의 도성들이 노인의 상한 이빨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포위하고 남는 기병대로는 인근 지역을 약탈하라. 사방에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다면 저들의 항복 또한 빨라질 터이다.”
창의문과 덕승문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고, 이미 자중지란으로 걸레짝이 된 성문들이 머지않아 열릴 것은 확실해 보였다.
더 이상 북경까지 밀고 오면서 겪을 손실도, 쓸 만한 공성 무기가 모자라는 일도 없으리라.
“…12년 전이다.”
12년 전인 1449년, 끝내 북경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되돌아갔던 그 허망한 패배는 이제 없다.
이반이 말로만 전해 들었던 그 순간을 되새기는지, 에센의 눈동자는 아릿한 감회에 잠겨 있었다.
이번 승리로서 오랜 마음의 짐을 덜어 내리라는 생각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이반, 그대도 보고 있는가?”
“예, 카간 폐하. 곧 중국의 수도가 함락될 듯합니다.”
“똑똑히 봐 두게, 세상에서 가장 강대하던 황제가 무릎을 꿇을 터이니.”
그리고 에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경의 성곽들 위로 깃발들이 치솟기 시작한다.
구름처럼 새하얀 색이다.
명국이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성문이 열리고 사절이 나오니, 에센은 잠시 병력을 물려 자신에게 사절이 다가올 길을 터 냈다.
단기로 부리나케 달려온 사절은 에센의 앞에 당도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대가한께 인사올립니다. …만백성의 어버이 되시는 대명의 천자께서 더 이상 백성들의 목숨을 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분명히 말하라. 백성의 목숨을 상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또 그를 피하는 법은 무엇이냐?”
에센이 근엄하게 쏘아붙이자, 사신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주먹을 움켜쥔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으리라.
이반 3세는 바로 작년에 그와 똑같은 일을 겪었던 만큼, 눈앞의 사절을 동정하고 안타까워하였다.
“…천자께서 항복을 결심하셨습니다.”
그제야 에센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완연해진다.
“좋다. 짐은 명국과 항상 형제의 맹을 맺고 싶었으나 너희 황제들이 항상 교만하여 그리하지 못함이 한이었다.
너희 황제가 짐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술잔을 따르도록 하면 그 아쉬움이 풀리겠다.”
“….”
사절은 분기 어린 얼굴을 감추려 더더욱 고개 숙일 뿐이었다.
곧, 소박하게 차려입은 황제가 성을 나섰고, 에센의 앞에 당도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즉위하자마자 온갖 굴욕을 겪는 경태제였다.
“’너’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가?”
‘너’. 대원의 카간이, 대명의 황제에게 ‘너’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