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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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돌아온 악몽
며칠 전, 더없이 화창했던 날이 거짓이었던 듯 카르디아 왕궁 위로 시커먼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대낮인데도 방 안에서는 불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두운 하늘 아래, 바람이라고는 한 점 불어오지 않았다. 만지면 물이 묻어 나올 것 같은 습기 찬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뒤늦게 찾아온 끈적한 더위에 예민해진 신경을 누른 채 손에 들린 종이로 연신 부채질을 했다.
이런 날씨면 누구 하나 짜증 섞인 소리를 낼 법도 하건만 왕궁은 기이할 정도의 침묵에 감싸여 있었다. 그리고 왕궁의 심장부인 본관의 회의실에는 입을 다문 각료들이 앉아 있었다.
바깥과 달리 보석의 힘으로 언제나 상쾌한 기온과 공기가 유지되는 곳이건만 앉아 있는 사람들의 이마와 목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바깥에 있는 자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것이 더위 때문이 아닌 자신들이 접한 소식이 가져다준 공포감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종이를 눈으로 훑었다. 가끔 구석에서 허,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그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선뜻 입을 열지 못한 채 국왕의 얼굴만 흘끔거릴 뿐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하운 아렐 팬드래건, 지금 도착했습니다.”
하운이 절도 있게 인사하자 레이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그의 인사를 받은 다음 명령했다.
“자리에 앉도록. 그럼 모두가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겠다.”
하운이 레이안의 근처에 앉자 레이안의 옆에 서 있던 보석술사 한 명이 테이블 가운데에 기록용 크리스털을 올렸다. 하운은 그 크리스털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알아차리고 테이블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영상에 시선을 돌렸다.
“지금부터 보는 영상은 약 여덟 시간 전, 북부 평… 아니, 북부 전선의 모습이다.”
레이안의 말에 곳곳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플레노트가 수면기에 든 다음 북부 전선은 북부 평야라는 명칭을 회복했다. 그 이름이 다시 북부 전선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전투가 아닌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리였다.
군사 기록용 크리스털은 제가 품고 있던 기억을 모두의 앞에 꺼내 보였다.
“꺄아아아아악!”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찢어질 것 같은 비명 소리였다. 그리고 그 비명을 묻을 정도로 거대한 폭음과 충격음이 들려왔다.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닌 그저 기록된 소리일 뿐임에도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목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꼈다.
분명 상질의 크리스털임이 분명한데도 떠오른 영상은 정신없이 흔들렸고 또한 흐릿했다. 이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보석술사가 제대로 힘을 운용해 기록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뜻이었다.
비명 소리가 연신 울리고 핏자국이 보였다. 불타는 마을과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중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자들도 많았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 대부분은 죽음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르디아는 아주 오랫동안 드래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였다. 하운이 플레노트를 상대하기 전에 호슨 공작이 있었고, 호슨 공작 이전에는 또 다른 보석술사들이 여기저기서 깨어나는 드래곤을 상대했다. 에르첼라 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카르디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 잔혹함에는 단련이 되어 있었으나 불길에 휩싸인 채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 앞에서는 굳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직 제대로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관료 한 명은 입을 틀어막은 채 필사적으로 구토감을 누르고 있기도 했다.
그들 중에서 가장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하운이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영상을 주시하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새삼 그가 젊은 나이임에도 가장 끔찍한 지옥을 걸어온 자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사이에도 영상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레이안이 보석술사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영상이 천천히 흘렀다. 사람들은 영상 속에서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형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레이안이 영상 속의 드래곤을 가리켰다.
“이놈이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탄식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애초에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게 가능한 존재는 드래곤뿐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혹시나 했던 모두의 희망이 박살 난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다른 웅성거림이 퍼졌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것은… 무엇입니까?”
드래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드래곤이 가진 ‘색’이다.
창세 신화에 따르면 드래곤은 하늘에서 빛이 떨어지기 전 어둠 속에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였다. 그들은 하늘에서 빛이 떨어진 이후 세상에 색이 생겨나면서 그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먹었다. 입에 넣어 삼키는 것이 그들의 본능이었으니까.
꽃을 먹어 대었지만 한 해를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은 드래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드래곤들은 땅을 파 헤집어 단단히 뭉쳐 있는 색의 덩어리인 보석을 삼켰다. 그리고 색을 얻었다. 새로이 태어나는 것들 역시 주변에 있는 색을 삼켜 제 것으로 만들었다.
드래곤들이 품은 색은 그들이 사용하는 힘과도 관련이 있었다. 모든 드래곤이 그런 것은 아니라지만 레드 드래곤의 경우 화염의 힘을 쓰는 경우가 많았으며, 블루 드래곤과 화이트 드래곤의 경우에는 물과 얼음의 힘을 쓰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드래곤과 조우했을 때, 그 색을 확인한 고대의 보석술사들은 그들과 반대되는 힘을 가진 보석들을 꺼내었다고 했다.
그렇게 색은 드래곤을 판단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상에 나오는 드래곤의 색을 보았다. 처음에는 검은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입을 벌린 순간 번쩍이는 붉은빛을 보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드래곤의 목에 뚫려 있는 숨구멍에서는 하얗고 푸른 연기가 피어났다.
영상의 드래곤은 그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러 가지 색을 가진 드래곤이었다.
레이안이 다시 손짓하자 영상 속의 드래곤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늘을 가리듯 날아오른 그것의 크기에 누군가 중얼거렸다.
“플레노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큽니다.”
저것이 나타났던 땅 아래 잠들어 있을 플레노트. 포악한 레드 드래곤은 지능이 조금 모자라긴 했지만, 그 덩치와 힘만큼은 다른 드래곤을 능가했다. 계속 성장한다면 드래곤 로드만큼 커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큰 드래곤이었는데 영상 속의 드래곤은 그 플레노트만큼이나 거대했다.
“하지만 플레노트가 아닙니다.”
그때 하운이 입을 열었다. 그는 영상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영상이 그대로 멈추었다. 크리스털의 영상을 끌어내고 있던 보석술사는 하운의 행위에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크리스털의 사용이 보석술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라고 해도 일단은 보석술사와 보석이 교감을 하는 행위이다. 그것에 개입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순식간에 전혀 다른 대상으로 향하도록 강제적으로 바꿔 버리는 일과 같았다. 그런데 하운은 그런 일을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하며 크리스털의 영상을 뒤적였다.
“여길 봐 주십시오.”
하운은 드래곤의 전신을 가장 잘 비춘 순간을 찾아낸 다음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드래곤의 긴 목이었다.
“수십 개의 숨구멍이 보이지만 플레노트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셀비아스!”
누군가 기억났다는 듯 소리쳤다. 하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그리고 목 위의 길고 날카로운 굵은 가시. 기억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이판타의 특징이지요. 그리고 지금 이 드래곤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크기는 플레노트가 생각나지만 가장 넓게 보이는 짙은 검은색과 신체의 특징으로 보았을 때 저는 이것이….”
하운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네이판타라 생각하는 바입니다.”
회의실에 끔찍한 침묵이 깔렸다.
네이판타. 가장 사악하고 교활한 블랙 드래곤. 호슨 공작의 손에 소멸되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부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예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그리고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외양적 특징을 보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갈기갈기 찢긴 셀비아스의 사체가 떠올랐다.
“네이판타는 셀비아스와 플레노트를 섭취하여 그들의 힘 일부를 흡수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침묵을 지켰던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설마 했던 자신들의 생각이 하운의 입을 통해 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래곤이 드래곤을 잡아먹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아 셀비아스 소멸의 관한 수사에 신중을 더했는데 단지 먹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힘과 외적인 특징까지 가져오다니?
레이안은 잠시 가만히 있다 손을 들었다. 그러자 시끄러운 회의장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지금부터 이 회의장에 있는 자들은 추가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본궁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며, 다른 자들과의 대화 역시 금지하는 바이다. 그리고 엘렌츠 경.”
“네, 전하.”
“그대는 잠시 나와 이야기 좀 하지. 하운 대공을 비롯한 나머지 대신들은 본궁 내에서 대기하라.”
엘렌츠 경이라 불린 기사가 일어나 레이안을 따랐다. 그는 드래곤 로드가 잠든 아르펠트해 일대를 지키는 책임자였다.
왕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
회의실에서 몇몇 대신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던 하운은 구석에 서 있는 아일리를 보았다.
며칠 전, 파르멜 저택의 연회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택의 모든 술을 끝장낼 기세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즐기던 그녀였다.
그러다 갑자기 리엘라를 끌어안고 “이렇게 귀여운 것을 저 늑대 같은 놈이 홀랑 잡아먹으려 하다니! 언니만 믿어!”라며 리엘라의 뺨에 뽀뽀를 해 대는 바람에 리엘라가 질색을 하며 취했으면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고 소리치던 것이 기억났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술잔을 마저 비우고 낄낄 웃었다. 그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아일리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운 역시 곁에 있던 대신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빠져나와 아일리를 향해 걸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대공님?”
“그러지.”
두 사람은 근처에 비어 있는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래, 할 말이 뭐지?”
“뭐긴 뭐겠어요.”
아일리는 팔짱을 낀 채 하운을 노려보았다.
“리엘라와 헤어져 주시죠.”
“…….”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말이기에 하운은 놀라지 않았다. 대신 준비하고 있던 대답을 했다.
“싫어.”
“…양심 없네요, 정말. 어디에 갖다 버리셨어요?”
“…….”
“제가 보석술사들과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뭔 줄 알아요? 대공님처럼 최전선에서 뛰는 사람들은 아끼는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심지어는 가족들과 연을 끊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 이유, 대공님도 잘 아시지요?”
물론 잘 알고 있다. 죽을 확률이 너무도 높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주변의 누군가가 자신 때문에 눈물 흘릴 일이 생긴다는 소리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물 흘려 줄 사람의 숫자를 줄이는 것뿐. 그래서 일부러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꺼려 하는 자들이 많았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하운도 마찬가지였다.
하운의 대답에 아일리는 답답하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일리는 그동안 제가 본 리엘라와 하운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어차피 헤어지란 소리를 제가 한다고 해서 하운이 넙죽 그러겠다고 대답할 리 없었다.
아니, 만약 그러겠다고 했으면 제 손으로 죽였다. 이게 우리 동생을 뭐라고 생각하길래, 콱 그냥.
“국왕 전하께서는 한 시간 후에 최소한의 치안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인원을 제외한 모든 병력은 북부 전선으로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리실 거예요.”
“…….”
“그 선봉에 누가 설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아실 테고.”
“…….”
아일리는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리엘라에게 어떻게 말하려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