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202
211
37. 네아
“자네 봤나?”
“그걸 안 본 왕궁 사람이 있으려고?”
리엘라가 복도를 지나가고 있을 때 서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대화를 흘려들으면서 리엘라는 걸음을 재촉했다. 본궁을 나가는 길에 여기저기 서 있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은 다 비슷비슷했다. 며칠 전, 왕궁의 정원에서 보았던 네이판타와의 전투에 대한 것들이었다.
에르첼라 컬렉션이 수백 년 만에 완벽에 가까운 힘을 사용했다. 그것만으로도 어제의 전투는 카르디아 역사책에 실릴 사건이었다. 네이판타가 지척에 도착하는 순간 발동된 결박의 힘이 네이판타의 날개와 목, 다리를 죄었고 빛의 칼날이 두꺼운 비늘을 뚫고 가죽을 찢으며 뼈를 긁었다. 끔찍한 비명이 북부 전선은 물론 연결된 영상 너머 왕궁과 수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왕궁의 정원에서 리엘라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며 하운이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처럼 제멋대로 둥둥 떠다니던 장신구들은 하운의 손에서 날카로운 빛의 검이 되었다가, 두꺼운 빛의 방패로 모습을 바꾸었다.
함께 보고 있던 실라는 옆에서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며 소리쳤다.
“책에서만 보았던 건데! 저 빛! 저 각도! 저 힘들! 과연 대드래곤용 무기! 세상에! 헤일로 세팅이다! 저런 대규모의 힘을 동시에 여러 개나…!”
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에르첼라 컬렉션은 에르첼라의 사후 그중에 일부가 사용된 적은 있어도 모든 보석들이 동시에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에르첼라 컬렉션이 완벽하게 갖춰졌을 때의 위력은 오래된 기록에나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과장된 전설로나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허공에서 각양각색의 빛을 내뿜으며 네이판타를 제압하는 위력은 그들이 기록에서 읽은 것 이상으로 거대하고 강력했다.
전설을 다시 마주한 희열에 보석술사들 대부분이 실라처럼 감격에 젖어 하운을 바라보았다. 왕궁에 있었을 때는 그리도 살가운 보석들이었는데, 드래곤의 앞에서 에르첼라 컬렉션은 그야말로 날카로움 그 자체였다. 그 어떤 힘도 자비가 없었다. 오직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맹렬한 힘이었다.
보석술사들이 감탄한 것은 보석들의 힘뿐만이 아니었다. 그 보석들 아래 서 있는 하운의 능력에 그들은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가까이로는 호슨 공작, 멀리로는 에르첼라까지 유명한 보석술사들과 항상 비교되는 하운이었다. 하운과 비교해 누가 더 세냐는 질문에 호슨 공작은 스승을 뛰어넘지 못하는 제자를 뭣 하러 가르치냐며 웃었다. 그 말에 다들 하운이 언젠가 호슨 공작을 넘어설 것임을 짐작했다.
호슨 공작은 넘는다 치더라도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에르첼라와 하운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 사람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답을 얻었다. 적어도 하운이 에르첼라 왕과 비슷할 것이라는 답을.
‘네이판타를 거의 잡았는데….’
하운과 네이판타의 전투는 세 시간이 넘게 지속되었다. 그사이에 다른 보석술사들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해야 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는 사이 세상을 찢는 힘과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북부 전선에 퍼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하운의 우위가 명확해졌다. 땀을 비 오듯 흘려 가면서도 하운은 흔들림이 없었다. 수백 년 만에 제 힘을 버텨 낼 수 있는 보석술사를 만난 덕분에 에르첼라 컬렉션들 역시 아낌없이 자신들의 힘을 발휘했다.
지금이야 에르첼라 컬렉션이라는 나름대로 무난하고 괜찮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과거 조금 낯간지럽고 강한 표현을 좋아하던 에르첼라가 그 보석들을 ‘도살자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보석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보석들은 오래된 자신들의 별명이 아쉽지 않을 만큼 거칠게 날뛰었다. 땅에 네이판타의 피가 연못을 만들었고 찢긴 신체가 사방에 뿌려졌다. 기어이 이곳에서 네이판타의 살을 죄다 발라내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
과거 그 거대한 드래곤 로드를 붙잡았던 보석들이다. 보석들의 힘을 문제없이 끌어낼 수 있다면 드래곤 로드보다 작고 약한 네이판타가 밀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거의 끝나 가던 전투에 문제가 생긴 것은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힘의 폭풍 속에서 겨우 버텨 내던 보석술사 몇이 결국 탈진한 것이다. 네이판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검은 브레스가 보호하는 힘이 없어진 인간들을 향했다. 수십의 생명이 네이판타의 브레스 한 번에 뼈도 남기지 못한 채 녹아 사라졌다. 하운의 시선이 그쪽을 향하는 순간, 네이판타는 다시 다른 인간들을 공격했다.
놀란 하운이 그쪽으로 힘을 돌리는 사이 네이판타는 재빨리 땅속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네이판타가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지하에서 네이판타가 기르던 몬스터들이 정신 지배를 당한 채 쏟아져 나와 인간들을 공격했다.
하운이 그것들은 전부 다 쓰러트렸을 때, 네이판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리엘라 씨!”
리엘라가 아래로 내려가자 기다리고 있던 실라가 손을 흔들었다. 리엘라는 반가운 마음으로 총총 실라에게 다가갔다. 실라의 눈은 여전히 퉁퉁 부어 있는 상태였다.
“좀 괜찮아요?”
리엘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실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은 못 잤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죽어서도 잘 수 있는 거, 전 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날의 영상 만 번 돌려 볼래요.”
“…잠은 자요.”
정말로 죽을 때까지 잠도 안 잘 것 같은 실라의 말에 리엘라는 한숨을 쉬었다. 며칠이나 지났는데 실라는 여전히 그날의 벅찬 감정이 다 식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보다 리엘라 씨는 괜찮으세요? 국왕 전하께서 따로 부르셨잖아요. 엄청 혼나셨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거요….”
정말로 리엘라는 오랜만에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성인이 되고 나서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 혼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뛰어들었나!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전투 후의 북부 전선을 관리하기도 바쁠 판에 친히 왕이 시간을 내어 혼낸다는 사실에 리엘라는 제가 크게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시간이 넘게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빌다시피 한 후에야 리엘라는 왕의 집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소식을 듣고 온 아일리가 밖에서 기다리다 울먹거리는 리엘라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언니랑 오랜만에 같이 잤네.’
국왕 전하가 내 몫까지 다 혼냈으니 자신은 더 말 안 하겠다고 한숨을 쉬면서 아일리는 어디서 얻어 왔는지 모를 단 음식들을 리엘라에게 잔뜩 먹였다. 그게 벌써 며칠 전의 일이었다.
“아, 맞다. 그리고 이거 리엘라 씨에게 온 편지들이예요. 오늘로 통신 제한이 풀려서 그동안 쌓였던 것들 다 가져왔어요.”
그 말에 리엘라는 그제야 실라가 한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리엘라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이게 전부 다 저에게 온 편지라구요?”
아주 두툼한 묶음이었다. 이곳에 와서 편지를 제대로 못 받은 지는 일주일이 흘렀다. 그런데 실라의 손에 들려 있는 편지는 족히 몇십 통은 되어 보였다. 혹시 제가 여기 있는 사이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나 싶어 편지를 넘겨받은 리엘라는 재빨리 누가 보냈는지를 확인했다.
“어?”
편지를 넘기던 리엘라의 손이 멈췄다. 편지는 전부 한곳에서 보낸 것이었다.
“왜 공작저에서….”
리엘라에게 온 편지는 전부 공작저에서 보낸 것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이렇게나 많은 편지를 보냈을까. 집사님이 이럴 분이 아닌데.
리엘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일 위에 있는 편지를 열었다. 그 안에는 달랑 한 문장만이 적힌 편지가 들어있었다.
아가씨. 언제 돌아오세요?
워낙에 악필인 글씨라 리엘라는 누가 보냈는지 적혀 있지 않았음에도 이것이 네아가 보낸 편지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아가씨라고 말하며 이렇게 직접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네아뿐이기도 했고.
리엘라는 미안함을 느끼며 다음 편지를 열었다.
아가씨, 언제 돌아와요?
“……?”
똑같은 편지에 리엘라는 봉투 안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다른 편지는 없었다. 그러다 세 번째 편지를 열기 전, 리엘라는 실라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편지를 열었다. 안에 있던 편지를 보던 리엘라의 표정이 굳었다.
세 번째 편지도, 네 번째도. 그 후로 수십 통이 넘는 편지는 전부 똑같은 내용이었다. 언제 돌아오느냐는 짧은 한 문장뿐.
“왜…?”
갑자기 알 수 없는 섬찟함에 등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네아가 왜 이렇게 편지를 보낸 거지? 그것도 하루에 몇 통씩이나 같은 내용으로?
모르는 자가 보냈다면 무척이나 기분 나쁜 짓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낸 사람은 네아였다. 하운이 없는 이곳에서 리엘라가 가장 믿는 사람인 그녀.
리엘라는 나머지 편지를 다 열지 못한 채 정리했다. 읽지 않아도 전부 다 같은 내용일 것 같았으니까.
‘네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러면 집사님이 편지를 보냈을 텐데.’
하지만 집사의 편지는 따로 보이지 않았다. 리엘라가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정리하고 있을 때, 실라가 그녀를 찾았다.
“리엘라 씨, 다 읽으셨어요?”
“네.”
“지금 연락이 왔는데 오늘 퇴궁하셔도 된대요. 그렇잖아도 공작저에서 매일 마차를 보냈던지 오늘도 밖에 대기하고 있는 것 같던데 준비하라고 전할까요?”
“네, 부탁드려요.”
에르첼라 컬렉션이 북부로 갔으니 이제 왕궁에서 리엘라가 더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는데 이제야 허가가 난 것이다. 실라가 전하러 간 사이 리엘라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네아가 보낸 편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연락할게요! 잘 지내요!”
“리엘라 씨두요! 나중에 공작저 꼭 놀러 갈 테니 모른 척하기 없기예요!”
짧은 시간 사이에 꽤 친해진 덕분에 리엘라는 실라에게 언제든지 공작저로 놀러 와 달라고 말했다. 실라는 진짜 갈 테니 문전 박대만은 하지 말아 달라며 웃었다. 실라가 손에 끼고 있는 반지가 햇빛에 붉게 반짝였다. 한참이나 창밖으로 손을 흔들던 리엘라는 더 이상 실라가 보이지 않자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돌아가네.”
왕궁의 방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집은 아니었기에 마음 편히 지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계속 에르첼라 컬렉션을 상대했던 데다가 피로 빛나는 꽃을 만들어 냈고 하운의 전투까지 지켜보지 않았던가. 어쩐지 몇 달을 보낸 것 같은 피곤함에 리엘라는 마차의 시트에 몸을 기댔다.
“…….”
거의 누워 있다시피 앉아 있던 리엘라는 자꾸만 네아의 편지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물론 네아가 그녀의 귀환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런 편지를 여러 통 보냈을까. 마치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것도 이렇게 이상하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리엘라는 일어나 마부를 불러 말했다.
“공작저 말고 파르멜 저택으로 가 주세요.”
이상하게 네아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음에도 바로 공작저로 돌아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한동안 가지 못했던 파르멜 저택이 걱정되었다. 정확히는 그곳에 있을 온실 안의 엘피안 꽃이.
그녀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게 힘이 걸려 있는 온실이니 그곳만큼은 저택의 정원사들이 관리할 수 없다.
‘그리고… 엘피안 꽃이 새로 피었으면 그것도 정리해야 하고.’
다시 말려서 따로 북부 전선으로 보낼까.
리엘라는 생각에 잠긴 채 파르멜 영지로 향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