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cover Professor at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632
◈ 632화 신의 말뚝 (2)
무언가 온다.
멜빈이 그렇게 느낀 순간 멀리서 풍겨 오던 사이한 기운이 막사를 휩쓸고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와, 정상에 선 그들의 몸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등골이 써늘해지고, 손끝이 바르르 떨리며 식은땀이 절로 나왔다.
멜빈은 한층 창백해진 시선으로 크레이터 쪽을 내려다보았다.
산꼭대기를 휩쓴 무형의 기운은 그 아래를 향해 산사태처럼 흘러내렸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던 토벌군들이 곧 자기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문 것은 동시였다.
환호성과 미소, 기쁨이 가득하던 현장 위로 침묵이 전염병처럼 창궐한다.
그것은 모두가 짜고 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기운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몸을 떨었다. 신실하고 육체를 단련한 성기사와 사제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흠?”
주홍색 머리카락을 지닌 30대 중후반의 마법사,
적색의 칭호를 지닌 알론 파블로는 흥미롭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더 왔군.”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사람들은 말하고는 한다. 알론 파블로는 불을 다루는 적색의 마법사라서 그 성미가 매우 뜨거울 거라고.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철하다.
그렇기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도, 빠르게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놈이야. 괴물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괴물은 따로 있었다는 건가?”
“하하하! 안 그래도 뭔가 심심하게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됐네!”
그 옆에서 반응한 것은 머리의 절반을 스킨헤드로 밀어 버리고, 귀에 피어싱을 꽂은 분홍색 머리의 남자였다.
펑키한 스타일과 경박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누구도 그를 지적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바로 자색의 칭호를 지닌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자색의 마법사 코일와트.
그는 긴 입술로 혀를 축였다. 8위계급 괴물과 싸울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그 결과가 신의 말뚝이라는 시시한 형태로 끝나서 불만이 쌓인 상태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이벤트가 새로 생겼으니, 즐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무언가 온다! 성기사단 준비해라!”
“다들 정신 차려라!”
“빛의 가호를.”
곳곳에서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신성력으로 주변을 따스한 빛으로 뒤덮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떨림이 잦아들고, 호흡을 제대로 되찾을 수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빛의 수호 성기사단의 단장, 벤텀은 눈을 날카롭게 좁히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어디냐.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힘에 몸을 떨고 있었지만, 벤텀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누군가가 이 토벌군의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는 것을 느꼈다.
‘상당히 위험한 놈이다. 조금 전 그 기운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어. 오히려 우리가 걱정했던 진혈의 흡혈귀보다, 이쪽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8위계 마법사의 힘을 지닌 괴물보다 더 위험하다니?
스스로가 생각해 놓고 이건 아니다 싶다가도, 벤텀은 자신의 본능을 괄시하지 않았다.
“보이나?”
그 옆에서 묻는 것은 벤텀의 오랜 친구이자, 루모스 가문의 직속 산하 기사인 발루트였다.
“아니. 아직 보이지 않는군. 하지만 알 수 있다. 놈은 분명 여기에 있어.”
“이만한 병력이 있는 곳에 숨길 생각도 없이 찾아들 줄이야.”
대부분 사람은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면 의아해할 것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토벌군 사이에 스며들었는데, 몰래 들어온 것이 아니라 숨길 생각이 없었다니?
하지만 벤텀과 발루트는 다르게 생각했다.
상대는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숨길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왜인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주 작은 것만이 아니다.
반대로 그 힘과 존재감이 너무 거대하면, 시야 자체가 가득 차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실력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이 현상의 위화감을 느끼고, 지금 이곳에 숨어든 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사냥꾼 놈들도 움직이는군.”
“추적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그때 멀리서 하늘 높이 치솟는 보라색 번개 줄기가 보였다.
번개는 하늘 높이 치솟는 것 같다가도 얇고 가늘게 쪼개져 실처럼 변했다.
수만 가닥의 번개 실들이 주변을 새장처럼 뒤덮으며 안쪽의 존재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저 망나니 놈이 결국 일을 내고 마는군.”
“그래도 저 정도라면, 분명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코일와트가 누군가를 찾았다는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이 정도의 마법을 펼쳤는데도 아직도 상대를 찾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대체 뭐지? 왜 아무것도 안 잡히는 거냐고!”
짜증을 내며 씩씩대는 코일와트를 본 알론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일와트의 이런 추적에도 먹히지 않는다고?
지금 펼친 가느다란 전류의 선은 인간이라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추적술이었다.
인간의 몸 안쪽에 흐르는 생체전기의 흐름을 잡아내고, 그것을 쫓는 것이 코일와트의 마법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숨을 쉬는 생명체라면 응당 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없다.
잡히지 않는다.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인간이 아닌 괴물은 지금 봉인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으로 신의 말뚝으로 봉인된 그란데르가 있는 방향을 돌아본 알론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무, 슨?”
있었다.
그곳에 한 사람이, 새하얀 고치의 앞에서 가만히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장발에 검은색과 백색의 기조가 들어간 멋들어진 프록코트, 훤칠한 키.
뒷모습만 보아도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는 고귀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현장에서는 도저히 어울리는 복색이 아니었다.
애초에 저곳에 저 남자가 이곳까지 도달할 때까지, 이 분화구 주위를 포위한 그 누구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화륵.
알론의 몸 주위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며 불씨가 흩날렸다.
놈이다.
지금 이 토벌군 전체를 기이한 감각에 빠뜨리게 만든 장본인.
‘파트리치오 추기경. 무언가 더 있다는 사실을 교묘히 숨기고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뭐가 어찌 됐든.
초대받지 않은 놈이라면, 죽여도 상관없을 터.
알론은 상대가 누구인지 굳이 캐물으려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당장 저걸 죽이지 않으면 위험하리란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주위로 피어오른 불꽃을 모아 거대한 창을 형성.
총 길이가 족히 30m는 돼 보이는 뜨거운 주홍색의 창이 침입자의 등 뒤를 향해 쏘아 냈다.
삽시간에 구현되어 쏘아진 알론의 마법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당혹해하는 그때.
다음에 펼쳐진 광경에 알론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파앗!
불꽃의 창이 사라졌다.
일반 2, 3위계 수준의 마법이 아니다.
화염 자체를 직접 다루는 알론의 마법은 그런 같잖은 마법과 비교할 수 없었다.
닿기만 해도 꺼지지 않고 영원히 타오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그의 화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졌다.
마치 소멸이라도 한 듯, 그 흔한 불씨마저 날리지 않았다.
알론의 마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저건, 누구지?”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웅성거리며 토벌군이 당황하는 그때.
새하얀 알 앞에서 가만히 있던 루드거가 입을 열었다.
“조용.”
그 한마디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놓고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러는 너야말로 왜 갑자기 조용해졌는데?
상대를 향해 눈빛으로 질책했지만, 정작 본인도 같은 처지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응.
그건 너무 기묘하고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웃을 수 없고,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 미묘한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제 할 일을 한 것은 루드거였다.
그는 손바닥을 신의 말뚝으로 봉인된 새하얀 알을 향해 내밀었다.
그 광경을 본 성기사단장 벤텀은 탄식을 내뱉었다.
미친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저건 정신 나간 행동이 아닌가.
신의 말뚝 봉인을 향해 다른 것도 아니고, 맨손을 들이밀다니?
저것은 그냥 무언가를 봉인하는 성물이 아니다.
닿는 것은 그 영혼을 분쇄해, 육신을 살아 있기만 한 껍데기로 바꿔 버리는 무서운 물건이었다.
인간이라면, 닿기가 무섭게 영혼이 소멸해 허물어지듯 사라질 터.
그런 생각은 오히려 루드거의 손바닥에 새하얀 알의 표면이 깨지기 시작하면서 바뀌었다.
빠직! 빠지직!
“신의 말뚝이 지닌 힘이…… 밀린다? 이게 가능한 건가?”
벤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새하얀 알 위로 검은 금이 쩍쩍 벌어지더니, 이내 루드거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유리가 부서지듯 산산조각이 났다.
알 한쪽에 뚫린 검은 균열.
루드거는 그 안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루드거를 막거나, 혹은 그를 뒤쫓아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저 검은 공간 자체가 주는 불길함 때문이었다.
봉인의 안쪽으로 들어간 루드거는, 어둠 속에서 곤히 누워 있는 그란데르의 모습을 보았다.
평소 관 속에 누워서 잘 때처럼 곤히 누워 있는 자세.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없고, 옷도 멀쩡하다.
색색거리며 숨도 쉬고 있고, 혈색 또한 좋다.
하지만 그란데르는 루드거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스승님.”
루드거는 그란데르의 곁에 서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당신께서 원하던 끝입니까? 영혼조차 구원받지 못하는, 죽음이라 부르기에도 아까운 이런 저열한 것이?”
루드거는 손으로 그란데르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천천히, 부드럽게, 소중한 가족을 대하듯.
“고작 이런 결말을 맞이하려고, 저와의 약속을 멋대로 끝낸 거냐는 말입니까.”
루드거의 목소리가 서서히 떨려 왔다.
평소 루드거가 보여 주지 않던 감정적인 모습.
분노, 자책, 후회, 슬픔.
그 모든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친 끝에 루드거가 내린 선택은 하나였다.
“저는, 도저히 그렇게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신의 말뚝으로 인해 그란데르는 그 영혼에 지대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그란데르는 인간보다 월등한, 격이 높은 존재.
신의 말뚝에 봉인당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영혼은 바로 소멸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녀의 영혼은 이 세상에서 구제할 길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리라.
루드거는 기운을 일으켰다.
그의 몸 주위로 일어난 새하얀 기운이, 신의 말뚝이 만들어 낸 검은 공간을 씻어 냈다.
그리고.
콰칭!
신의 말뚝으로 만들어 낸 커다란 알이 완전히 부서지며, 그 새하얀 파편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밤하늘의 모습이 펼쳐졌다.
루드거는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를 낸 뒤,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를 그란데르의 입술에 떨어뜨렸다.
한 방울. 한 방울.
정성스럽게 떨어뜨린 핏방울이 그란데르의 붉은 입술의 틈새로 스며들고.
줄곧 감겨 있던 그란데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막 잠에서 깬 듯한 흐리멍덩한 붉은 눈동자가 루드거를 향했다.
“아, 히스클리프.”
그란데르는 헤헤 웃으며 루드거를 향해 미소 지었다.
평소 그녀가 보여 주지 않았던, 모성애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루드거는 그 모습에 오히려 가슴이 더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정신이, 전과 달리 온전치 않다는 뜻이었으니까.
“오지 말라고 하였거늘. 결국, 와 버렸구나.”
그란데르는 루드거를 보는 순간 깨닫고 말았다.
자신은, 결국 또 죽지 못했다.
그리고 루드거가 기어코 자신을 구하러 와 버렸다.
“어째서냐. 이제는 마침내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약속했던 죽음은 이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핑계다. 나는 그저 쉬고 싶었을 뿐이야. 바로 지금처럼.”
그란데르의 눈동자 사이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쉬고, 싶었다고.”
“압니다.”
“알아? 네가 뭘 아는데. 너와 함께하면서 오히려 너에게 정을 느끼고 만 내가. 네 손에 피를 묻히게 할 수 없이 나약해져 버린 내가. 그래서 결국엔 약속마저 깨버리고 도망친 나를, 네가 어떻게 아는데!”
그란데르는 루드거를 향해 거의 떼를 쓰는 아이처럼 소리 질렀다.
신의 말뚝으로 인해 영혼에 타격을 입은 그녀는 지금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루드거는 그런 그란데르의 분노를 묵묵히 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란데르의 말이 끝나자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
스승님이 아닌 어머니.
평소 루드거가 그란데르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서 부르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루드거는 자신의 스승이면서, 동시에 이번 생에서 자신을 키워 준 어머니를 향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당신이 그저 살아 주기를 원합니다.”
“내게 사는 것은 고통이다.”
“압니다. 모두가 시간 속에서 사라질 때도, 당신은 그 모습 그대로 세상에 남겠죠.”
“그걸 알면서도……!”
“그래도, 그래도 말입니다.”
루드거는 그란데르를 향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자식은 부모가 살아 주길 바라는 겁니다.”
“…….”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그 앞에 기다리는 것이 분명 막막하기만 한 미래라 하더라도.”
루드거가 따스한 손길로 그란데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저는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