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qualed Scholar RAW novel - Chapter 153
7권 14화
그는 백이건의 말에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우린 선후인과 싸웠네. 애초에 승부가 정해진 싸움이라 생각했지. 굳이 노부가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네.”
결코 교만이나 자만이 아니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각기 일파의 지존들.
그들이 두세 명만 합공을 해도 왕처기 역시 전력을 다해야 했고, 대여섯 명이 합세를 하면 그땐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물며 열 명의 장문인들이 모두 모인 데다 왕처기까지 가세를 했으니 천하에 누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그들 열한 명의 고수들은 선후인의 손에 백 초도 넘기지 못하고 죽어 갔다.
“노부는 운이 좋은 편이었네. 선후인의 장력이 왼쪽 가슴을 정확하게 가격했고, 정신을 잃었지. 헌데, 노부의 심장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오른쪽에 있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네.”
왕처기는 당시 기억이 떠올리며 부르르 치를 떨었다. 그때의 충격과 공포는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선후인의 장력은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은 그의 고강한 공력으로 어떻게든 버텨 냈지만, 이젠 그것도 한계에 봉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맹렬한 속도로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쿨럭! 쿨럭! 구파일방은 한순간에 장문인을 잃은 셈이었지. 그리고 졸지에 독문절기를 잃어버리고 몰락의 길로 가게 된 것이네.”
“아!”
백이건이 무거운 표정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수백 년 동안 무림을 지탱해 온 구파일방의 몰락에 이런 비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안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문파도 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제자들에게 절기들이 제대로 전해지고 훌륭한 후학들이 양성되는 곳도 있다는 소리일세.”
“아!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소림사일세.”
“그럼 혹시 소림사가 배신한 곳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럴 수도……. 지금까지는 전혀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했었네. 하지만,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소림사의 행보가 이상하긴 했어.”
다른 문파들은 절기들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해서 급격하게 힘이 약화된 반면, 소림사는 그렇지가 않았다. 왕처기는 그게 소림사의 힘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어쩌면 소림사가 배신을 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때부터 노부는 죽은 척 숨어 지내야 했네. 멀쩡한 몸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거늘, 폐인이 된 지금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으음…… 그 심정은 소생도 잘 알 것 같습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할까?
절망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까지.
천하의 협객 왕처기 역시 자신이 느끼고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三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법.
왕처기는 거의 죽어 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무림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그는 백이건에게 영패를 건네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노부를 상징하는 것일세. 이것을 가지고 개방의 방주를 찾아가 주게. 그리고 구파일방과 육문칠가가 반목할 것이 아니라 은현장의 정체를 만천하에 폭로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진작부터 하고 싶던 일이었다.
언제까지 은현장이 막후에 숨어 무림을 좌지우지하게 놔둘 수 없었다. 세상은 그들의 손아귀에 놀아나 끊임없이 반목을 하고, 전쟁을 하며, 무기를 소진하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대협의 기상이구나!’
백이건은 문득 부끄러웠다.
자신은 아무 목적 없이 천하를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았던가? 백이건이 걱정하는 건 그의 주변 사람들 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처기는 죽어 가면서도 무림과 수많은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왕처기는 부탁을 하고서도 정작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백이건도 선후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선후인과 싸워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아무리 의지견강한 사람이라 해도 선후인 앞에 서면 절망과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부의 부탁을 거절해도 탓하지는 않겠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왕 대협, 잠시만 팔을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이 늙은이의 팔은 무에 쓰려고 그러는가?”
“소생이 재주는 미천하나 그래도 한번 선후인의 공력을 제거해 보겠습니다.”
왕처기가 죽어 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니었다. 몸속을 갉아먹고 있는 선후인의 공력을 제거하면 그의 몸도 괜찮아질 가능성이 높았다.
왕처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쿨럭! 쿨럭! 그건 불가능한 일일 걸세. 그자의 공력은 인간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네.”
“그래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백이건이 왕처기의 두 손목을 잡고 공력을 흘려보냈다.
그는 혼자서 막힌 혈맥을 뚫어 본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혈맥을 뚫는 것보다 자신의 혈맥을 뚫는 게 몇 배는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였다.
선후인의 공력이 강한 건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었지만, 충분히 해 볼 만한 일이었다.
왕처기는 소용없는 짓이라며 말렸지만, 어느새 백이건의 공력이 혈맥을 타고 선후인의 공력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으윽!”
왕처기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충격에 빠졌다. 그의 몸속에서는 백이건의 천마자전공과 선후인의 공력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왕처기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기혈이 역류해서 백이건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백이건과 왕처기는 순식간에 새하얀 기류에 휩싸였다.
처음에는 선후인의 공력에 막혀 천마자전공이 좀처럼 앞으로 밀고 들어가지 못했다. 허나, 백이건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자신의 혈맥을 뚫던 방법을 사용했다. 먼저 모든 힘을 전중혈 쪽으로 집중을 했다가 그 반동을 이용해 근처에 있는 혈맥으로 몰아갔다. 속도와 힘이 두 배 이상 강해지면서 막혀 있던 혈맥이 뚫렸다.
‘뚫렸다.’
왕처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겨우 혈맥 하나가 뚫렸을 뿐이었다. 그것도 일각이나 시간이 걸려서였다. 그사이 왕처기는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경험했지만, 아직 뚫어야 할 혈맥은 수없이 많았다.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었다. 어찌 보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셈이었다. 어지간한 사람도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상황.
허나, 왕처기는 자신감이 생겼다. 혈맥 하나만으로도 희망을 갖기에는 충분했다.
“계속해 주게.”
“조금 쉬었다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닐세. 내 걱정 하지 말고 혈맥을 뚫어 주게.”
“좋습니다. 그럼 고통스럽더라도 참으십시오.”
백이건은 본격적으로 혈맥을 뚫기 시작했다. 왕처기는 또다시 고통에 휩싸였지만, 그는 이제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졌다. 백이건과 왕처기의 사투는 여전히 끝날 줄 몰랐다. 백이건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불현듯 왕처기의 몸이 심하게 요동을 치며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왝!”
느닷없는 비명에 백이건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왕처기의 입에서 시커먼 핏덩이가 토해져 나왔다. 그건 혈맥 속에 응고되어 있던 어혈이었던 것이다.
백이건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휴! 막혀 있던 혈맥은 모두 뚫었다.”
백이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상당이 오랜 시간 이어진 사투였다. 그의 막강한 공력도 바닥까지 소진된 상태였다.
시간이 조금만 더 길어졌어도 그가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졌을지 몰랐다.
왕처기의 안색은 피를 토한 이후 급격히 정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병색이 짙던 그의 얼굴에서 더 이상 아픈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왕처기를 괴롭혔던 선후인의 공력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허나, 아직 예전의 공력을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왕처기는 지난 십 년 동안 공력을 잃고 오장육부가 파괴되어 갔기 때문에 완벽하게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건 어려울 수도 있었다.
“휴!”
왕처기가 돌연 번쩍 눈을 뜨고 백이건을 쳐다보았다.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은혜라니, 당치 않습니다.”
백이건은 땀을 닦다 말고 두 팔을 내저었다.
“그렇게 겸손해 할 것 없네. 내 구십 년 넘게 살았지만, 자네 나이에 그토록 엄청난 성취를 이룬 사람은 본 적이 없네.”
왕처기는 실로 탄복했다. 그의 단전에 한 줄기 희미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이는 갓 무공에 입문한 사람의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것도 기적이었다. 덕분에 그는 이제 몸을 움직여도 더 이상 온몸이 찢겨질 것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다. 예전의 공력을 모두 회복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노부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탄복해 본 사람이 자네가 처음이라면 믿겠는가?”
백이건이 얼굴을 붉혔다.
“왕 대협께서 계속 소생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는군요.”
“자꾸 왕 대협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는군. 우리 이 자리를 빌어 의형제를 맺는 것이 어떤가?”
“예에?”
백이건은 너무도 뜻밖의 말에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말도 안 됩니다. 소생이 어찌 왕 대협과 그럴 수 있겠습니까?”
왕처기 본인이 구십 살이 넘었다고 했다. 그에 비해 백이건은 삼십 년을 조금 넘게 살았으니 증손자뻘도 안 될 나이 차였다.
왕처기는 백이건이 난감해 하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노부가 자네의 형이 될 자격이 없어서 그런가? 하긴, 자네의 능력이 훨씬 뛰어나니 어찌 형으로 삼고 싶겠는가?”
“그, 그게 아닙니다.”
“후훗! 그럼 되었네. 사내대장부 사이에 무슨 격식이 필요하겠나? 저 하늘의 달을 보고 맹세하는 것으로 우리는 의형제가 되는 걸세.”
“아!”
백이건은 난감했지만,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노형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핫핫! 과연 성격이 화통한 것이 내 아우답네.”
두 사람은 곧이어 달을 증인 삼아 의형제의 의식을 치렀다.
낡은 사당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허나, 이 보잘것없는 일이 향후 무림의 정세를 완전히 뒤바꾸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