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qualed Scholar RAW novel - Chapter 45
2권 22화
三
이번 사건에 도찰원까지 개입한 이상 백이건의 신분이 발각되면 인생 종 치는 것이었다.
이걸 두고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 하던가?
무슨 화장실 살인 사건에 왕야의 아들이 개입되어 있고, 관아에 도찰원까지 뜰 수 있는지…….
기가 막힐 일이었다.
이젠 정말 잘못 걸리면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뒤틀리면 모조리 죽여 버리고 도망치는 수밖에.’
상황을 보자니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무공을 쓰면 이곳을 벗어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평생 황실과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여간 골치 아파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그를 식구처럼 대해 준 운혜와 소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채성룡과 채수연 부녀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었다.
‘우라질!’
이래서 가급적 북경에 오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운혜와 소혜, 그리고 채성룡과 채수연 부녀를 생각하면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인생 종 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져 버렸다.
가장 좋은 건 관병들이 그의 호패를 조사하기 전에 주세진이 모든 혐의를 자백하는 것이었다.
허나 방제문의 조사 방식은 바보 같다 못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해, 그의 호패를 조사하기 전에 사건이 끝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옷에 묻은 피는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다.
더구나 품속에서 칼이 나왔다면 더 이상 빼도 박도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었다.
주세진의 옷은 피로 가득한 데 반해 그의 손은 이상하리만큼 깨끗했다.
손이 더러워져 씻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옷에 묻은 피는 왜 그냥 두었는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진범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인데…….’
백이건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범인이 있다면 분명 가까운 데 있을지 몰랐다. 원래 범인은 범행 현장에 다시 나타나지 않던가?
취조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자들은 주세진을 한심하단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어떤 자들은 만사 귀찮은 듯 빨리 밖으로 내보내 달라며 관병들에게 따지고 있었다.
백이건은 그들의 손과 옷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진짜 범인이 있다면 흔적을 지우기 위해 손을 깨끗이 씻고 옷에 묻은 혈흔도 지웠을 것이었다.
‘응?’
문득 백이건이 눈빛을 반짝였다.
상의가 물에 살짝 젖어 있는 자가 딱 한 명 있었다. 물론 그의 손은 방금 씻은 듯 깨끗했다. 특히, 그의 눈동자는 교활하게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달.
유달은 떠돌이 낭인이었다.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도 파리 죽이듯 한 게 얼마인지 셀 수도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지금 주세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주세진이 궁지에 몰릴수록 그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 빠져나가는 일만 남았군.’
그는 자신의 범죄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피가 묻은 손과 옷은 모두 씻고 빨았다. 그리고 피가 묻은 칼은 주세진의 품속에 넣어 두었다.
주세진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관병은 물론이고 도찰원의 감찰어사까지 속여 넘겼으니 더 이상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때, 그의 눈동자와 백이건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움찔!
그는 잠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이건의 눈빛이 다 알고 있다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백이건을 향해 씩 웃어 주었다.
‘흐흐, 제법 똑똑한 놈이다만, 그래 봐야 소용없다. 네놈이 지금 알았다 해도 너무 늦었다. 내가 죽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백이건도 그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쫙 펴고는 자신의 목에 대고 쭉 그었다.
‘네놈은 죽었어!’
백이건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유달은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미친놈!”
수사는 심증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건 오랫동안 낭인으로 생활해 온 그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이상 백이건을 그냥 살려 둘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백이건이 했던 것처럼 자신의 손가락을 펴고는 목에 대고 쭉 그었다.
살벌한 눈빛에 표정까지 무서워서 어지간한 사람은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디 한번 해 보자 이거지?’
백이건이 코웃음 쳤다.
유달은 이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세상에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백이건이 길게 하품을 했다.
“아함! 이러다 날 새겠군. 진범은 멀쩡히 도망가고 억울한 사람 하나 목이 잘려 구천을 헤매겠어.”
그의 말에 채수연이 놀라 물었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리니? 진짜로 진범이 따로 있는 거야?”
“그거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죠. 용의자의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 손은 깨끗하지 않습니까?”
“어? 정말 그러네.”
채수연은 그제야 뭔가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손을 씻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옷은 그대로 놔뒀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건 왕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나도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진범을 잡지 못하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잖아?”
“진범도 당연히 이 안에 있죠. 아마 진범이 있다면 그자는 자신의 옷에 묻은 피를 닦으려고 물로 빨았을 겁니다.”
“에잇, 아무려면 그러려고…….”
채수연과 진소희는 호기심에 사람들을 쳐다보다 문득 유달에게서 멈추었다. 백이건이 말한 것처럼 그의 옷은 부분부분 물에 젖어 있었다.
“저, 저기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있는 자가 있어.”
“그런가요? 그럼 저자가 진범이로군요.”
백이건은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처럼 연극을 했다.
그래도 아직은 미심쩍은 점이 있어 채수연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옷이 물에 젖어 있는 것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어. 뭔가 확실한 물증이 필요하다고.”
“물증은 저자의 몸에 남아 있습니다.”
백이건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채수연이 냉큼 말했다.
“몸에 남아 있다면 지금 바로 몸수색을 하면 되겠네?”
“후훗!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조금만 머리를 쓰면 금방 밝혀낼 수 있습니다.”
백이건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채수연은 아무리 백이건이 천하에 둘도 없는 천재라 해도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밝혀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소희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백이건이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 말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
‘잠깐, 여기서 저자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다 결국 밝혀내지 못하면 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하게 되겠지?’
채수연의 얼굴을 슬쩍 쳐다본 진소희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방제문에게로 향했다.
四
방제문은 진소희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이런 황당한 말은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이 어지간해야 믿어 주기라도 하지.
백이건은 지금 물로 흔적을 깨끗하게 지운 것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다 말하고 있었다.
“이치는 간단합니다. 흔히 형광 반응이라 해서 피와 상반된 성질의 물질을 섞으면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원래 피는 아무리 물로 씻어도 그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두고 보면 알겠지요. 어찌하시겠습니까? 한 번 형광 반응을 사용해 보시고 후환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진범으로 왕자를 체포하고 후환을 남기시겠습니까?”
“흐음…….”
방제문은 눈살을 찌푸렸다.
백이건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삼왕야가 아무리 적이 많다 해도 황제의 인척이었다. 혹시 나중에 수사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그 역풍은 고스란히 그와 그의 집안이 뒤집어쓰는 것이다.
“좋소. 그대가 말한 것을 써 보리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 형광 반응인지 뭔지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을 시에는 그만한 책임을 질 각오를 해야 할 것이오.”
“무고한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백이건은 어쩌다 보니 좋은 사람 흉내를 내게 되었지만, 결국엔 다 자기 살자고 이러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호패를 검사하던 관병들의 손길은 멈춰진 상태였다.
그들은 물론이고 손님들 역시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백이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물로 씻어서 흔적을 깨끗이 지운 혈흔을 되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저토록 호언장담을 하니 호기심에라도 구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백이건은 형광 반응을 연출하기 전에 먼저 준비물이 필요했다.
“혹시 이곳에 대리석이 있습니까? 많이는 필요 없고, 조금만 있어도 괜찮습니다.”
대리석은 귀한 것으로, 일반 백성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허나 서점은 온갖 화려한 자재들로 지어져 있어 대리석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방제문이 관병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서점의 주인에게 부탁을 해서 대리석을 조금 구해 오거라.”
“예, 대인!”
관병들이 오래지 않아 대리석 조각을 구해서 돌아왔다.
백이건은 그다음에도 물과 주정, 그리고 굴과 각종 색을 띠는 과일이나 채소 등 몇 가지 재료들을 요구했다. 모두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최선의 방법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효과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 백이건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혈흔을 되살리겠다고 하더니, 이게 무슨 애들 소꿉놀이야?”
“어이쿠, 저 귀한 대리석은 왜 갈고 물에 섞는 건지, 원.”
사람들의 눈에는 지금 백이건이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방제문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고, 진소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소꿉놀이라니.
그녀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채수연을 쳐다보았다.
당황하기는 채수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백이건만 굳게 믿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건아,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그녀는 이렇게까지 당혹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허나 사람들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백이건은 관병들이 가져온 재료들을 갈고 빻고 섞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리석을 갈아서 물에 섞으면 염기성 물질이 되고, 색이 있는 과일이나 채소에서 얻은 물질은 보통 물에서 잘 녹지 않기 때문에 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굴 속에는 인체에 필요한 성분인 아연이 가장 많이 함유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백이건이 가져오게 한 재료들은 나름 이유가 있었고, 그것들이 한데 섞여야 그가 원하는 시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백이건은 그것들을 순서대로 섞고 불에 가열한 다음 주정으로 희석시켰다.
“자, 이제 다 되었습니다.”
백이건은 조그만 그릇에 시약을 담고 실험을 준비했다.
시약은 무색무취로, 얼핏 보면 맹물처럼 보였다.
실험이라고 해 봐야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시신의 피를 손가락에 묻혔다가 물로 씻어 주면 끝이었다.
이제 조건은 유달과 똑같았다.
유달은 뒤쪽에서 한심한 표정으로 백이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백이건이 손가락에 피를 묻히고 물로 씻는 것을 보고도 그저 코웃음만 쳤다.
‘미친놈, 겨우 저따위 것으로 뭘 어쩌겠다고.’
그의 눈에는 백이건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자신뿐만 아니라 서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백이건을 미친놈 취급하고 있었다.
허나 바로 그때였다.
백이건이 손가락 끝에 시약을 살짝 뿌리자 색이 변하면서 물에 지워졌던 혈흔의 흔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컥!”
유달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니겠지.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워졌던 혈흔이 다시 되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몇 번이고 자신의 눈을 비벼 보았다.
하지만 아까 백이건은 피를 정확히 손가락 한 마디만 묻혔었는데, 지금 나타난 혈흔의 흔적도 정확히 손가락 한 마디까지였다.
백이건이 곁눈질로 유달을 쳐다보았다. 그는 시약을 다른 곳에 뿌려 보았다.
피가 묻지 않은 곳이었다.
시약은 오직 혈흔에만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색이 변하거나 지웠던 흔적이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마술 같은 일에 유달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놀라기는 방제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혹시 사기가 아닐까 싶어서 자신이 직접 실험해 보았다.
이번에는 손가락이 아니라 옷에 피를 묻혔다.
뜨악!
이번에도 시약을 묻히자 사라졌던 혈흔의 흔적이 다시 되살아났다.
‘사, 사술이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단 말이냐?’
그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는 도찰원에서 근무하며 무수히 많은 사건 현장을 따라다녔지만, 이런 식으로 수사를 하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