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31
했다. 말로만 듣던 해남무공의 진수를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렇지 않았다. 옆에서 볼 때는 단지 빠르다는 느낌만 받았
다. 지금처럼 물러설 곳이 없어 보이지도 않았고, 검으로는 상
대가 안될 지 몰라도 창이라면 한 번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절박했다. 석불은 모든 희망을 깨끗하게 단절시켰다.
그 때였다.
한백은 문득 밝은 서광(瑞光)을 봤다. 그것은 죽음 속에서
피어난 희망이었다. 실낱같은 희망. 석불의 검세에서 살기가
사라졌다고 느낀 것이다.
‘죽일 의도가 없어.’
한백은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를 판단이었지만 반사적으로 몸이 따랐다.
“타앗!”
우렁찬 고함과 함께 창을 빙글 돌리며 전면을 봉쇄했다. 순
간,
차앙……!
날카로운 금속성이 터지며 한백은 목덜미에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그는 망연자실하게 서있었다.
기다란 창은 단창(短槍)과 단봉(短棒)으로 변해버렸다. 십
수년동안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신변을 보호도 해주던
애병(愛兵)이 반토막으로 잘라졌다.
은형묵창(隱形墨槍)은 결(缺)이 없다.
창 끝과 창대를 하나의 철로 주조했으며, 철은 단단하기로
유명한 곤륜(崑崙)의 묵강철(墨鋼鐵)을 사용했다.
병기의 효용은 이미 입증되었다. 수많은 접전에서 도(刀),
추(鎚) 극(戟) 등 위맹한 병기를 맞아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절반으로 부러졌다. 묵중한 병기도 아닌 검에 의해
서.
석불은 그가 공언한대로 향 한 자루가 타기 전에 한백을 제
압했다.
“내가 이야기했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된다고.”
석불의 검은 목 부근에서 춤을 추었다.
옷이 찢겨져 나가고, 수염이 잘렸다. 살은 베지 않았다. 석
불은 빠르면서도 정교한 검을 가지고 있어, 정확히 원하는 부
위만 잘라냈다.
한백은 기다렸다.
석불이 일 검에 참(斬)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을 터……
“나는 네가 뇌주반도에서 배를 타는 순간부터 예의 주시했
지. 부지런히 우화를 찾고 있더군.”
해남도에 들어서기 전부터 해남파는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
이었다. 해남파에는 고수들이 우글거리고, 치밀한 정보력을 가
지고 있다.
한백이 경계한 것은 정보력이었다.
정보력은 문파를 움직이는 눈.
처음부터 노출됐었다. 해남파의 눈은 날카롭고 예리해서 주
의한다고 주의했는데도 모든 행동이 샅샅이 노출되었다.
“우화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한백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라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석불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쉬익! 쉬익! 쉬익!
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며 무엇인가가 석불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쉬리릭! 퍼억……!
석불은 당황하지 않았다. 검은 빠르고 정확했다. 초식 또한
우아하고 섬세했다. 무조건 쳐내는 검공과는 격이 달랐다. 보
자기로 감싸서 던져버리듯이 날아오는 물체를 휘어 감아 속도
를 줄인 다음 다시 튕겨내는 검공.
칠 장 정도 떨어진 숲 속에서 날아온 물체는 돌멩이였다.
쉬익! 쉬이익……!
돌멩이는 쉬지 않고 날아왔다.
암습을 가했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은 조금도 이득을 얻지 못
했다. 반면에 석불은 여유가 있었다. 그는 돌멩이를 쳐내면서
돌멩이가 날아오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 때,
따가닥! 따각닥……!
느닷없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석불을 고개를 쳐들었다.
“섯!”
그가 고함을 내질렀을 때, 한백은 이미 황담색마에 몸을 싣
고 오 장 밖을 치달리는 중이었다.
쉬이익……!
한백이 떠난 자리에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한 인형
이 내려섰다.
석불과 비슷한 몸집에 비슷한 인상을 가진 초로의 노인이었
다. 다른 점이라면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라는 점.
석가주 석중이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더군요.”
“봤다.”
석중과 석불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들은 한백을 놓치고, 숲 속에 숨어 돌멩이를 날린 사람조
차 잡지 못했는데도 태연했다.
“대단한 놈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당에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다니. 전력을 다했다면 쉽게 승기를 잡지 못했을 겁
니다.”
“검을 읽었기 때문이다. 살심(殺心)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검은 똑같아야 한다.”
“망검존인(忘劍存人)은 아직 멀었나 봅니다.”
망검존인(忘劍存人)!
지검귀가보다 한 단계 위로 검리(劍理)를 깨우친 사람을 지
검귀가라 부른다면, 망검존인은 깨우쳤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
경지다.
“멀지 않았다. 생사(生死)를 갈라야 할 상황이었다면 망검존
인의 검을 펼쳤겠지. 너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니까 걱정하지 않
는다.”
석중은 멀어져 가는 한백에게 눈길을 주었다.
“놈의 창법은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으음! 중원은 넓은 곳이니까.”
석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역시 처음 보는 창법이었다.
일가의 가주라는 위치가 되고 보면 내륙에 드나들 일도 많
고, 중원인과 교분도 폭넓게 쌓을 수 있다. 소림, 무당, 청성,
아미…… 거리가 멀고 가까움에 불구하고 이름난 문파는 거의
방문해 보았다. 그런데도 중년인이 펼친 창법은 알아볼 수 없
었다.
“그럼 역시 적수노인의 하수인……?”
“……”
석중은 난감한 듯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들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검을 익히려면 살인귀라는 평판
을 먼저 얻어야 합니다. 아무리 적수노인의 하수인이라 할지라
도 일 년에 한두 명 죽여서는 전검을 익힐 수 없습니다. 선천
적으로 타고난 무골이라 할지라도……”
석불의 얼굴에도 그늘이 덮였다.
“어쨌든…… 편하게 됐어. 구파일방과 연관만 없다면 놈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
석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말을 십분 이해한다는 투였다.
석가는 남부럽지 않은 재력을 쌓았다. 무공도 강했다. 스스
로는 해남도 제일이라고 자부한다. 그런데도 왜 항상 장문인을
타 가문에 넘겨줘야 한단 말인가.
다행히 석불은 천부의 재질을 타고난 무인이다.
석가는 석불에게 기대를 모았다. 해남오지 중 다른 사 인이
특출 나게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
을 가지게끔 만들었다.
이번만은 반드시……
만약의 경우도 대비했다.
클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삼 년 경과를 지
켜본 후 역대이래 최강의 수굴일지라는 건곤검 한혁을 능가하
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들면 미련 없이 해남도를 뜨기로 의견을
모았다. 중원에 들어가 일파(一派)를 창립할 망정 더 이상 용
꼬리는 되지 말자고.
가업은 두고 갈 수밖에 없다.
바다를 통째로 들고 살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비가의 황담색마는 입에서 군침이 돌만큼 맛
좋은 유혹이었다.
내륙의 무림문파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중원으로 진출할 경우, 텃세쯤이야 신경도 쓰지 않지만 홀로
자존(自存) 할 수 없는 것이 무림이다 보면 도움을 받을 일도
많을 게다.
석중과 석불은 적엽명이 익힌 무공의 종류를 직접 눈으로 확
인하고 싶었다. 구파일방과 연관이 있다면 무슨 연관인지 알아
보고 적절히 대응할 방침으로. 하지만 무공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했으니.
“놈은 유소청이 맡았다만, 눈길을 떼지 마라. 해남파가 송두
리째 바뀔 수 있는 변수야.”
“우화를 만난다면……?”
“내버려 둬. 어쩔 수 없겠지. 우화를 왜 만나려는지 알 수
없지만, 막지 마라. 지켜보기만 하자. 무인의 검이란 단 한 번
만 뽑는 거야. 결정적일 때.”
“형님의 복수는 요원한 겁니까?”
“네 형은 미련했다.”
냉정한 대답이지만 의사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석중의 노안(老顔)은 하루 사이에 십
년을 지새운 듯 피곤해 보였다.
“복수는 해야겠지. 지하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그 전에…… 적엽명이 지난 팔 년 간 무엇을 했는지 파악해야
돼. 복수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
“아비에게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해남오지가 되었을 때가
첫 번째 기회였지. 그 때, 한 가주를 제치고 장문인이 되었어
야 해. 그러지 못했지. 두 번째 기회는 비가보가 몰락했을 때
다. 적선하는 셈치고 은자라도 몇 푼 던져줬으면 황담색마의
종부권을 이양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 두 번째 기회도
놓쳤어. 사람은 평생동안 기회가 세 번 찾아온다더구나. 이번
이 마지막 기회야. 네게는 첫 번째 기회가 될 테고.”
“……”
“지켜보자. 기다리는 자에게는 때가 오는 법이야. 상황이 급
하면 급할수록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지혜가 있어야 돼.
한가주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우리가 나서서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어. 무엇을 알아내더라도 일절 함구(緘口)하도
록 해라.”
석중은 장문인을 한가주라고 불렀다. 그것은 장문인이 되지
못한 미련 때문이었고, 상처 입은 자존심을 달래는 자위(自慰)
이기도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석가는 전면에 나서되,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은밀히 전하
고.”
“황담색마 종부에 전력을 집중하겠습니다.”
“그래야지. 휴우!”
석중은 긴 한숨을 불어 쉬었다.
그의 내심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어쩐지 이 싸움은 끼여들어
서는 안 되는 싸움 같았다. 낯선 무공을 보았다고 해서가 아니
라 적엽명이 명부객이고 그가 전검을 익혔다고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직감이었다.
전검에 목숨을 잃는 큰아들의 영상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
다.
한백이 사라진 곳에서 뿌연 먼지가 올라왔다.
그는 이미 여모봉을 벗어나 광야(廣野)를 치달리는 중이었
다.
3
적엽명은 마른 헝겊으로 검왕(劍王)이라고 불리는 난초를 닦
았다.
생전에 아버님이 무척이나 아끼던 난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도 난초만은 버리지
못하게 했고, 당신의 손길이 닿았던 난을 생전의 남편인 냥 애
지중지했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가슴에 맺힌 것이 많
겠지만 모두 풀어라.”
간단한 말 한 마디와 함께 건네주신 난.
연녹색의 이파리가 싱그러움을 품어낸다.
잎사귀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짙은 녹색도 다정함을 토해
낸다.
검왕이라고 불러도 하등 손색없을 위엄이 읽혀진다.
아버지는 무인이라기 보다는 목부에 가까웠다. 검을 익히기
는 했으되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오로지
목장에서 말과 더불어 사셨다.
그것은 평화였다.
적엽명은 아버지가 누렸던 평화가 부러웠다.
자신이 누리기에는…… 자신은 이미 평화와는 거리가 먼 아
비규환(阿鼻叫喚)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는가.
죽음, 죽음, 죽음…… 끝없는 죽음.
영원히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게다. 그러기에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아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적엽
명의 몸과 마음은 피가 넘실대는 현실에 익숙해져 있었고, 뼈
를 갈라내는 감촉이 손 끝에 느껴지지 않는 날은 오히려 마음
이 심란해지기조차 했다.
뜻밖의 곳에서 느낀 뜻밖의 평화.
적엽명은 비로소 자신이 어떤 형상인지 자각했다.
뇌주반도에서 유소청을 만나던 날, 그녀는 검을 들이댔다.
놀랐으리라. 살기가 폐부를 찌를 듯 뻗쳐오는데 검을 뽑지 않
을 무인이 어디 있으랴.
한광이 시비를 걸어왔다. 범위가 일수를 쳐왔다.
모두 본능적인 행동이었으리라.
죽고 죽이는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겉으로까
지 드러난 게다. 눈매는 오로지 죽음만을 보고, 코는 시체가
섞는 냄새만을 맡으며, 귀는 검의 움직임만 듣는 살인귀의 형
상.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사람이 경원시하는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
무인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이야.
피로 점철된 지난 팔 년.
저 놈을 어떻게 죽일까 하는 생각에만 골몰했던 지난 세월.
남이 어떻게 보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상관할 필요도 없었
고, 그런 쓸데없는 일에 정신을 분산할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
다.
아버지가 살아왔던 인생과는 분명히 정반대의 인생이었다.
적엽명은 아버지의 인생이 부러운데, 아버지는 또 다른 인생
이 부러웠을까? 아버지는 형을 무인으로 키웠다. 무인과 살인
귀는 명백히 다르지만 검에 피를 묻힌다는 것은 똑같거늘.
– 스님이 불도에 취하듯이 무인은 검도에 취해야 한다. 일신
의 영달을 위해서 검을 들 것이 아니라 마음의 수양을 위해서
검을 들어야 한다. 불도나 검도나 궁극에는 하나로 귀일(歸一)
할 것이며……
언젠가 언뜻 들은 말이다.
아버지는 검의 밝은 면만 본 것일까.
검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양(陽)이 있으면 음(陰)도 있
는 것을.
궁극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검의 진가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
요하고, 어쩔 수 없이 살인이란 과정을 거치게 되며, 한 번 맛
들인 살인으로 인해 심성마저 변하는 것을.
검결(劍訣)은 그래서 필요하다.
살심(殺心)에 젖은 마음을 평상심(平常心)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검결의 습득여부에 달려있다.
– 마음으로 베고 검을 잊는다. 검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검일 때 심검(心劍)을 이룰 수 있다.
뜬구름 같은 소리.
– 검법은 검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요, 검도는 검법을 통
하여 마음을 수양하는 것……
– 마음으로 벨 수 있을 때에서야 검의 진미(眞味)를 맛보았
다 할 수 있으니……
– 마음이 일면 기(氣)가 일고, 기가 일면 검이 간다.
적엽명은 백팔자(百八字) 밖에 되지 않는 검결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속에 아버지가 바라는 무인의 평화가 있을 텐데……
어쨌든 지금은 평화로웠다.
난을 닦아주면서 해남도를 뛰쳐나간 이래 가장 큰 고요함을
맛봤다.
이런 고요함은 전에도 느낀 적이 있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자이지만 하늘을 갈라버릴 것 같은 도법
(刀法)은 정말 매서웠다. 그런 자가 어떻게 이름이 나지 않았
는지…… 그의 얼굴이 터진 꽈리처럼 쫙 벌어지는 것을 본 순
간 마음이 지극히 낮게 가라앉았다.
편했다. 고요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두어 걸음 휘청거리다 푹 꼬꾸라지는 상대를 보면서도 아무
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 때와 지금은 분명히 상황이 다른데 마음에 찾아온 고요함
은 똑 같았다.
아무래도 장소가 제공한 편안함 같았다.
큰어머니일망정 평생 받지 못했던 정을 주고 있고, 배다른
형과 누이도 친동생이나 된 듯이 돌봐주고 있다.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다. 가족이 생기다니. 해남도에 들어올
적에는 천근만근 발걸음이 무거웠는데.
가족이 주는 편안함…… 고향.
이래서들 지치고 힘들면 고향을 떠올리는 것일까. 죽음이 임
박하면 고향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는 것일까.
적엽명에게는 고향이 없었다.
해남도가 주는 기억은 멸시와 모멸뿐이었다. 유소청의 갸름
한 얼굴이 간혹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녀 역시 시집갔으리라
생각하고 마음에서 지우려 노력했는데.
아픔만 주던 고향.
적엽명은 고향이 생겼다는 포근함에 아버지가 어루만지던 난
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아버지의 정이 함께 흘렀다.
우르릉……! 꽈앙!
저녁 무렵부터 마른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기어이
주먹만한 빗방울을 떨구기 시작했다. 앞으로 칠 주야 정도는
밤낮 없이 폭우가 쏟아지리라.
“우리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말해
봐.”
황유귀 술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비개조건(秘開條件)이라고 했을 텐데. 묻지 않겠다고.”
“빌어먹을!”
술이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래도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하잖아? 백지장도 받들면 낫
다는데 그렇게 혼자서 끙끙거릴 이유가 뭐야? 우릴 믿지 못하
는 거야? 섭섭해 죽겠어.”
류는 손가락을 활짝 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탄은 워낙 말이 없는 사내라 그렇고, 찬은 적엽명이 하는 일
이라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든다고 해도 같이 뛰어들 사
람이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자신들 모
르게 무슨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태연한 척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석불이란 자. 검이 대단히 날카롭더군요.”
한백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석불의 손에서, 그것도 해남파의 본문과 근접한 여모봉에서
죽음의 덫을 빠져나왔다고 하면 운이 좋다고들 말할 것이다.
하지만 한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석불은 일부로 잡지 않았다.
그가 잡으려고 했다면 자신 뿐 아니라 돌팔매질을 한 황유귀
또한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돌멩이를 쳐내는 석불의 검에는 여유가 있었다. 자신을 향해
검을 지쳐낼 때처럼 날카로운 섬광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혼
신을 다하는 듯 이를 악물었지만, 그리고 석불을 관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지만 한백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석불이 일부로 놓아주었다는 사실을 확신한 것은 황유귀를
만나면서였다.
여모봉을 벗어나 관도를 치달리기 십여 리.
이름도 모를 한적한 계곡에서 한숨을 돌리려 할 때 황유귀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한백이 어느 길로 달려올지 알고 있었던 게다.
황유귀가 그러하거늘 석불이야 말해 무엇하랴.
황유귀는 자신처럼 해남도를 샅샅이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
하면서 별 일 아닌 것처럼 흘려버렸지만 한백은 지금도 석불의
행동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왜 불쑥 나타나 검을 쳐왔으며, 또 왜 놓아주었을까.
적엽명은 침묵을 지켰다.
한백이 고민하는 바는 적엽명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
였다.
“말하지 않을 거야!”
술이 신경질적으로 다그쳤다.
적엽명은 다시 식은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열두 개의 눈을 의식했다.
황함사귀, 황유귀, 수귀, 호귀, 무자음사, 일도일사.
잠시 갈등이 일었다.
말해도 좋은가. 말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가.
그는 생각을 굳힌 듯 사귀를 쳐다보았다.
“그래 맞다. 짐작하겠지만 내가 해남도에 들어올 때는 비가
보와 관계없었어. 그저 스쳐 지나는 정도로…… 인사만 드리고
물러갈 심산이었다. 그렇다고 유람 삼아 온 것도 아니야. 목적
이 있다. 하지만 그 목적은…… 내가 입을 열면 우리들의 신뢰
는 회복되겠지. 하지만 난…… 너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없다. 지금도 충분히 위험해.”
“빌어먹을!”
“해남파가 죽이려 들 거야. 관원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르지.
그 때가 되면 불문곡직하고 죽일 거야. 왜 죽는지도 모르고.
모르지, 또 우화가 죽이려 들지도.”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해남도에 있는 모든 사
람이 적이란 말인가. 허나 사귀는 반박할 수 없었다. 적엽명은
진지했고, 무사음사와 일도일사에게서도 힘에 겨운 압박감이
흘러나왔다.
“비가보 재건보다 시급하게 처리할 일은…… 누가 나를 죽이
려 하는지 알아보는 거야.”
“이랑, 도무지 무슨 말인지……”
여족 제일의 꾀주머니라는 황함사귀도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
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알아줘.”
“소문대로…… 흑월이냐?”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네 놈을 잘 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냐. 뭐
가 뭔지 전혀 모르겠어. 네 놈 뱃속은 물론이고 번지르한 상판
때기까지 전혀 모르겠어. 내가 알던 적엽명이 아냐.”
적엽명은 피식 웃었다.
“나는 변하지 않았어.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야.
사귀는 더 이상 적엽명을 추궁할 수 없었다.
친우의 말투가 전에 없이 단호하기도 했지만 말속에서 알지
못할 경직을 읽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거칠 것이 없던 친우, 무공도 변변치 못한 주제에 해
남파를 향해 검을 들었던 만용덩어리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모봉 정상에는 사람이 살 수 없어.”
적엽명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지형이야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분명히 정상부근이었습니
다.”
“음……!”
적엽명과 한백, 화문은 여모봉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앞에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여모봉 정상은 암석으로 되어있어. 오랜 세월동안 삭을 대
로 삭아서 모래알처럼 푸석거리지. 웬만한 사람은 미끄러워서
바로 서지도 못해. 우화는 혼자가 아닐 텐데…… 많은 사람이
해남파의 눈길을 피해 숨을 장소라……”
적엽명은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쉽지 않았다. 하기는 그 정도로 찾을 것 같았으면 우화는 벌
써 백골이 되어 누워있으리라. 아니면 해남파에 장님과 귀머거
리들만 모여있거나.
“우화를 만나는 것은 포기한다. 무자음사, 일도일사. 이제부
터 이안(二案)에 집중한다.”
“존명(尊命)!”
두 사람의 입에서 똑같은 대답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일사불란했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생활해 온 규범이 몸
에 박힌 행동이었다.
“옛날의 적엽명 같지 않아. 뭔가 거리감이 느껴져. 그렇지
않아?”
호귀 류는 울적한 얼굴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놈의 곁에만 있으면 등짝이 서늘해져. 무인이 됐으니 방심
(放心)하지 않는 것이야 뭐라고 말할 게 못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처음에는 단순히 무공이 강해졌구나 하고 생
각했는데. 음……! 황유귀, 네가 알아보고 다닌 것이 뭐야? 넌
잠시도 비가에 머물지 않고 싸돌아 다녔잖아.”
수귀의 말에 황유귀는 입술을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