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우선에 현기 이상의 무인을 충원해 주십시오!”
천웅방 수뇌부가 위치한 본진의 중심.
깃발이 나부끼는 단상 위에서 적생이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전장을 살피고 쉼 없이 명령을 내렸다.
“이 조를 뒤로 물리고, 삼 조를 투입합니다.”
“예!”
“낭인들을 이용해 적의 선두를 막고, 별동대로 적의 후미를 공격해 주십시오.”
“예!”
그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전령들이 호흡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자신이 맡은 곳을 향해 달렸다.
선단부가 무너진 뒤 적생의 명령으로 시작된 진형의 변화.
적생은 천웅방주 원공후를 제외한 그의 다섯 아들과 장로들을 모조리 전장에 투입해 본대를 여섯으로 나누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갑작스레 진형을 바꾼 탓에 초반에 입은 다소간의 피해는 어쩔 수 없었다.
우왕좌왕, 처음에는 당황하고 의아하게 여겼던 천웅방의 수뇌는 원공후의 불같은 호통에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조금씩 전세가 안정되고 체계적으로 철검단의 공격에 맞설 수 있게 되자 이내 본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적생을 군사로서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생이 즉석에서 고안한 전략 덕택에 역습을 가할 틈은 놓쳤으되, 더 이상 철검단이 천웅방의 본진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하니 그 신뢰도는 더욱 높아져 갔다.
소방주 원천호를 중심으로 구축된 천웅방 본진의 방어를 진무와 당세령, 운암까지 가세해 도운 터라 철검단의 선두는 무수히 두들겨 대면서도 돌파하지 못했고, 그사이 넷으로 갈라진 장로들이 각각의 조를 이끌며 철검단의 좌우를 번갈아 공격했다.
적생의 명령을 따라 깊숙하게 파고들지 않은 채 피해를 입는 즉시 다음 조와 교대하며 빠져나와 인원을 충원하니, 철검단으로서는 계속해서 체력을 보충한 적과 싸우며 힘을 빼는 꼴이었다.
더욱이 원천호를 제외한 네 명의 아들이 천웅방의 정예를 이끌고 우회하여 적의 후미를 공격하는 탓에 주의가 분산된 천우명은 쉽사리 선두로 나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목숨을 걸었으되 모두가 철검단의 공격을 버틸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전투. 하지만 적생의 전술과 목숨을 걸고 나선 천웅방의 노력으로 쉽사리 결착이 나지 않고 있었다.
“철검단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본진의 전령이 전한 소식에 원공후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계속해서 진형을 유지하십시오! 완전히 물러나기 전까지 절대로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예!”
적생의 외침에 전령이 명을 전하기 위해 기쁜 얼굴로 달려갔다.
“됐네. 됐어!”
원공후는 이미 오늘의 전투가 끝났음을 알았다.
사파의 무인으로 살아온 그는 일개 군사의 역할이 전투에서 이 정도로 거대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숫자는 천웅방이 훨씬 많지만 결코 비등한 전력이라 할 수 없었다.
소속 무인 절반 이상이 현기급으로 구성된 철검단이 아니던가?
모두가 적생의 덕택이었다. 제갈량의 현신처럼 절대적인 열세를 뒤집은 그가 아니었다면 첫날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진무의 전음을 믿고 따르면서도 가시지 않았던 의혹은 간데없고, 이제는 오로지 적생의 능력에 더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네 덕분일세. 고생하였어.”
“…….”
원공후가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아 땀으로 흠뻑 젖어 버린 적생의 손을 잡고 웃었다.
하지만 적생의 얼굴은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군요. 당장은 막아 낸 모양입니다.”
“그래. 막아 내었어. 천웅방이, 아니 자네가 철검단의 공격을 막아 내었단 말이네.”
원공후가 크게 웃으며 적생을 힘껏 끌어안았다.
* * *
“망할!”
병력을 물린 천우명의 얼굴은 야차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뚫지 못했다.
저녁이면 원공후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져 버린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본진에 뛰어들어 사정없이 휘저어 버리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나다고 해도 천웅방 전체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가 뛰어드는 순간 원공후가 참전할 것은 자명한 일.
천우명은 누구보다 원공후의 무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강하다. 단순히 지닌 무공으로 따지자면 천우명이 이기기는 하겠으나 그것은 일대일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만약 그가 원공후와 싸우느라 천웅방의 본진 안에 갇혀 운신에 제약이 가해진다면 철검단의 패배로 곧장 이어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지쳐 가는 철검단의 모습에 모원려가 퇴각을 건의해 왔다.
먼 길을 달려왔으니 체력을 보충하고 난 뒤에 다시 싸우자는 말에 천우명은 이를 갈며 병력을 물렸다.
“단주님. 이것은 천웅방의 전술이 아닙니다. 마치 정무맹의 대군사 제갈협진이 와 있는 듯하지 않습니까?”
“…….”
“맞습니다. 부단주의 말대로 적의 전술은 마치 군문의 그것 같았습니다.”
삼 대주 석산까지 모원려의 말에 동조하자 천우명의 눈가가 쉴 새 없이 떨렸다.
모원려가 심어 준 의심의 씨앗.
어쩌면 천웅방이 정무맹과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점점 더 그의 생각을 괴롭혀 왔다.
“피해가 얼마인가?”
“최초의 전투에서 선두의 절반이 죽었습니다. 이어진 전투에서 스무 명이 죽고 부상을 입은 이가 서른입니다.”
“으음…….”
사상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피해가 크다.
천웅방 역시도 피해가 있었지만 감숙은 그들의 앞마당이다. 천웅방에서 등을 돌렸던 감숙의 사파 세력이 마음을 바꾸어 합류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단주님. 지금이라도 본성에 이를 알리고 지원군을 요청해야 합니다. 만약 저들이 정말로 정무맹과 손을 잡았다면…….”
“원려.”
천우명이 우려를 담은 모원려의 말을 멈추게 했다.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내일 하루 더 전투를 진행한다. 그리고 나서도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면 본성에 전서구를 보낸다.”
“단주님!”
“원려!”
“…….”
“공후를 믿고 있는 나의 마음에 변화는 없다.”
천우명의 우직한 말에 모원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성정을 잘 안다.
그와 함께 혁련무강의 옆에서 수십 년 동안 생사의 경계를 넘지 않았던가.
또한, 사파인임에도 주군에 대한 지고지순한 충정과 우직함을 가진 천우명에게 반해 그의 밑에 있는 철검단의 무인들이다.
비록 혁련무강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나 자신들의 수장은 천우명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원려, 호유, 석산, 지화, 일소.”
천우명이 부단주 모원려를 비롯해 철검단을 이끄는 네 명의 대주를 호명하며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무엇이 미안한지 안다.
사패천 본성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모원려의 우려를 받아들여야 함이 당연하다는 것 또한 안다.
“망할, 아무리 생각해도 단주를 잘못 만났어.”
모원려가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다들 뭣들 하느냐? 단주님의 명령이 내려졌다. 숙영지를 구축하고 경계조를 편성해 번을 세워라. 삼 대주는 부상자들을 따로 모아 치료하고, 전투에 나설 자와 나서지 못할 자를 구분하라.”
천우명을 대신해 모원려가 명을 내리자 네 명의 대주들이 밝은 얼굴로 일어나 자신이 맡은 책무를 다하기 위해 움직였다.
“원려…….”
“괜찮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계획대로 오늘 안에 끝내지는 못했으나 저들의 피해가 막심하니 정무맹 측에서 끼어들지 않는다면 내일 정도에는 천웅방의 본거지를 차지할 수 있겠지요.”
“음…….”
모원려의 말에 천우명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 * *
같은 시각, 천웅방의 진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야간의 기습에 대비해 경계조를 편성한 뒤에 수뇌부가 기쁜 얼굴로 모였다.
작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조촐한 술자리.
비록 전시에 취하는 것은 좋지 않았으나, 큰 공을 세운 적생과 진무에게는 반드시 감사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적생의 부탁으로 적생대의 낭인들도 본진에 거처를 마련한 참이었다.
“다행입니다. 철검단을 막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암요.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 전략을 구상하다니.”
장로들 모두가 적생을 칭찬했고, 그 모습을 원공후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 모두 조용히 하시오.”
원천호가 일어나 들뜬 장로들의 말을 막고 적생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받으시오. 내 적 선생의 공을 잊지 않겠소. 덕분에 천웅방이 큰 시름을 덜었소이다.”
쪼르륵.
잔이 채워졌지만 적생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한데 오늘 보인 전술은 무엇이었습니까?”
“손자의 구지(九地) 편에 나오는 계책입니다. 적을 분열시키는…….”
“오! 손자병법이란 말이오? 내 군문에서 그런 계책을 쓴다고 들은 바는 있소이다. 군문의 계책까지 알고 계시다니 실로 대단하시오.”
원천호의 칭찬에 장로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지만 적생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어색할 따름이었다.
“적 선생, 내일도 잘 부탁드리오.”
원천호가 어깨를 두들기며 부탁하자 적생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저는 오늘 하루만…….”
“응? 뭐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적생의 말에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본 원천호를 따라 모두가 적생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게…….”
갑자기 집중을 받게 되자 적생이 목을 거북처럼 움츠리며 진무의 눈치를 살폈다.
낮 동안 천웅방의 무인들을 지휘할 때는 마치 전장의 총사처럼 늠름하더니.
진무가 피식 웃으며 적생을 향해 말했다.
“괜찮아. 말해.”
진무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적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겁먹은 눈초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같은 전략은 계속 쓸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내일도, 모래도 막아 내긴 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는 점점 더 커질 겁니다. 최악의 경우 내일은 오늘의 피해의 두 배가 될 것이고 그다음에는 또 두 배…… 그렇게 되면 결국 패배하게 될 것은 자명하지요.”
“…….”
적생의 말이 너무 작았기 때문일까?
천웅방의 수뇌들이 침묵을 지킨 채 적생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되레 그것이 적생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쯧! 한가락 한다는 자들이…….”
잔뜩 위축된 적생의 모습에 진무가 혀를 차며 일어나 다가갔다.
가볍게 기운을 일으켜 주입하자 적생이 막혔던 숨을 토해 내었다.
“파아!”
진무의 기운은 청량함을 머금은 선기였기에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적생은 여전히 겁먹은 눈빛이지만 진무가 도와준 덕에.
“전쟁을 끝내려면…….”
적생이 다시 한번 눈치를 살핀다.
“어서 말해 보오. 적 선생.”
“그것이…… 항복하는 것입니다.”
“…….”
잠깐의 침묵.
“말도 안 되는 소리!”
원천호가 고함치듯이 나무라자 진무가 그를 째려보았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저들에게 고개를 숙일 순 없소! 다른 방책을 생각해 주시오.”
모두가 같은 마음인 듯 눈에 불을 토하며 적생을 쳐다보았다.
쯧쯧,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단하다며 칭찬을 하더니.
물에 빠진 놈 구해 줬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며 생짜를 부리는 모양새였다.
실소를 흘린 진무가 원천호를 나무랐다.
“넌 좀 닥치고 끝까지 들어.”
“뭐라? 이런 어린 자가 감히!”
황당할 만도 하지.
그는 아직 진무의 실력을 완전히 본 적이 없다.
진무가 본진으로 찾아와 적생을 소개할 때는 원체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제대로 무위를 파악할 틈이 없었고, 이후에는 본진의 중앙에서 철검단을 죽자고 막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천웅방의 수뇌부가 모인 자리에서 새파랗게 어린 진무가 소방주인 그를 반말로 타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천호가 당장이라도 진무를 잡아먹을 듯이 눈을 부릅뜨는데.
“그만!”
원공후가 얼굴을 찌푸리며 막았다.
“아버님!”
“그만하라지 않느냐! 우리를 도와준 이들에게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
원공후의 노성에 원천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무를 노려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적 선생. 항복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소?”
“그게…… 불확실한 방법인지라.”
“그게 뭐요.”
“방주께서 나서시는 겁니다.”
“내가?”
“예.”
적생의 말에 모두가 다시 의아함을 품는다.
모두가 그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누가 감히 이런 상황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있을까?
“괜찮아. 말해.”
진무가 옆에서 그의 용기를 북돋자 적생이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주께서 철검단주 천우명과 직접 승부를 보시는 것입니다.”
순간 싸늘한 정적이 흐른다.
적생의 말뜻은 둘이서 승패를 놓고 싸우라는 것이다.
이미 원공후가 처음에 마음먹었던 일이고, 원천호와 그의 형제들이 목숨까지 내놓으며 반대했던 일이었다.
“이노옴! 알량한 재주를 가졌기에 대우를 해 주려 했더니! 감히 누구에게 그따위 망발을 하는 것이냐!”
싸늘한 한기와 함께 살기마저 뿜어내며 원천호가 고성을 질렀다.
그뿐만이 아니라 장로들마저 적생을 찢어 놓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쯧!”
사방을 짓눌러 오는 위압감에 진무가 혀를 차며 적생의 앞을 막아서자, 청량한 기운이 그를 보호하듯 감쌌다.
“모자란 것들 같으니.”
나무라는 어조의 말과 함께 퍼트려진 선기가 천웅방의 수뇌들이 피운 기운을 밀어 낸 것은 물론, 되레 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크으…….”
짓눌린 신음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원천호는 버티다 못해 무릎까지 꿇어 버렸다.
“아무리 사파라 해도 도움을 받은 이에게 함부로 칼을 들이미는 것은 삼가야 하거늘!”
진무의 기운은 청량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들의 마음을 도려내었다.
“네놈들이 힘이 없어 제대로 된 방책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을 누굴 탓한단 말이냐!”
“으으…….”
진무의 기운이 점점 더 더해져 모두를 짜부라뜨릴 듯이 내리누르는데.
“그만!”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을 끊어 낸 것은 원공후였다.
그의 일갈과 함께 퍼져 나온 기운이 진무의 기운을 부드럽게 밀어 내었다.
“그만 기운을 거두어 주시오.”
“흥!”
원공후가 정중히 부탁하자 진무가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원공후는 한숨을 내쉬며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 나가 있거라. 적 선생도 그만 나가서 쉬시오. 내 이분과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예.”
적생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가고, 원천호와 장로들이 진무를 노려보다 원공후의 눈총을 받고 난 뒤에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침묵이 흐른 지 잠시.
“자, 이제 말해 보시오. 그대는 누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