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서안, 동림전장 본점.
운암 등과 떨어진 진무는 그 입구에서 건물을 바라보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위로 삼 층, 입간판에 쓰인 안내도로 미루어 지하로도 삼 층.
참 크게도 지었다.
오랜 세월 중원 오대전장으로 자리하며 그 재력을 과시해 온 만큼 규모가 실로 거대했다.
역시 돈 버는 데는 이자 놀음이 최고다.
말이 좋아 전장이지 실은 고리대를 뜯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합법적이라는 것 정도일까.
대부 이자가 국법에서 규정하는 범위를 넘지 않을 뿐, 남의 돈으로 장사를 한다는 사실은 똑같다.
지들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게 아니면서 모가지에 힘은 얼마나 주고 다니는지.
고객들에게는 무척 친절하지만, 빚 가림을 못 하는 이들에게는 사정없이 철퇴를 내린다.
단지 고리대를 뜯는 자들처럼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지는 않지만, 법이라는 허울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빼앗는다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는 데선 오히려 더 악랄할지도.
하지만 뭐, 상관없다.
살아가는 방식은 다들 다른 법이 아니던가?
진무는 고객이니까.
그것도 황금 열 관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맡겨 둔.
끼익.
문이 열리자 내부를 정리하던 전장의 점원들이 고개를 돌려 진무에게 시선을 던져 왔다.
응? 꼬라지가 왜 이래?
뭔 싸움이라도 났나?
보아하니 전장에 억하심정을 가진 이가 와서 술 먹고 행패라도 부린 그림인데 말야.
“뉘슈?”
바닥에 널브러진 탁자 조각들을 치우던 점원이 의아하게 진무의 위아래를 흝었다.
그 시건방진 눈빛을 내려다보던 진무의 관자놀이에 열 십(十) 자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긴, 갈아입고 온 옷이 좀 허름했지.
돈이 있어 보이면 눈에 띄니까 신경 써서 추레하게 차려입기는 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첫인상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고 양해한다 이거야.
원래 이런 놈들이 있어 보이는 놈에게는 공손하지만, 조금이라도 추레해 보이면 대접이 소홀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뉘슈? 뉘슈우?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을 봤나.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을 하다니. 넌 큰 사람 되려면 멀었다.
적진성산(積塵成山)이라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티끌 모아 태산이 되는 것처럼, 전장 직원들이라면 길가 거지의 동냥 그릇에 담긴 돈조차 허투루 대하지 말아야 하는 법인데.
진무는 여전히 자신을 대강 훑고 있는 점원을 무시하고 접객대를 향해 다가갔다.
딸랑.
점원들이 가득했지만, 부러 당당하게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종을 한 번 쳐 주고.
“뭐요?”
역시나 귀찮은 표정으로 귀를 후비며 다가오는 접객대의 직원을 향해 히죽 웃으며 소곤거렸다.
“흑.”
“……?”
“삼사이오.”
“……!”
진무의 말에 성가시다는 티를 팍팍 내며 잔뜩 구겨져 있던 점원의 얼굴이 달구어진 인두로 쭉 밀어 낸 천처럼 활짝 펴진다.
“흐, 흑이시라면?”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는 점원을 향해 진무가 거만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들어 웃으며.
“어디 앉으면 되나? 다리가 좀 아픈데?”
곧바로 하대했다. 느긋하게, 그리고 격조 있게.
점원은 너무 놀란 때문인지 눈만 끔벅거린다.
동림전장의 구좌는 둘로 나눈다. 백(白)구좌와 흑(黑)구좌.
백은 말 그대로 깨끗한 돈이다. 법의 통제하에 놓여 있는 돈.
하지만 흑은 다르다.
이른바 뒷돈이라고 하는 것으로 돈의 출처, 고객의 정보까지 모든 것이 철저히 비밀리에 관리된다.
그들의 신분을 판별하는 것은 네 자리의 구좌 번호뿐이다.
그리고 그 번호가 삼천대라면?
적어도 금 다섯 관 이상의 비자금을 가진 고객이라는 뜻이었다.
“귀, 귀인. 제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금세 표정을 바꾼 점원은 연신 몸을 배배 꼬며 송구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짜식,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암.
내 너른 마음으로 다 이해해 줄 테니 일단 의자부터 내와 봐.
진무가 자비롭게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윗분을 불러오겠습니다.”
점원이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를 하고 황급히 뛰어간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 정도 고객이면 응당 전장 주인 정도는 나와서 맞이해야 급이 맞지. 아암.
의자가 아직이긴 하지만 뭐, 봐줄게.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맛은 역시 돈맛이다.
진무는 새삼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 * *
“총관 어른! 총관 어른!”
접객대를 맡고 있어야 하는 계유초가 헐레벌떡 뛰어오자 외출 준비를 하고 있던 총관 황각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 문제다.
소란이 있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함부로 자리를 비운단 말인가?
안 그래도 지금 중요한 손님을 접대하러 진회루에 갈 시간이 다 되어 바쁜 와중이었다.
“뭔데 이리 소란이냐?”
짜증이 잔뜩 서린 황각수의 말투에도 계유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나와?”
“예.”
“이게 떨어진 철전을 잘못 처먹었나? 내 선약이 있음을 모르는 게냐? 지부 대인께서 진회루에 도착하시기까지 한 시진도 남지 않았거늘!”
황각수의 엄한 꾸짖음에도 무엇에 더 놀란 것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제 용건을 고하는 계유초였다.
“흑입니다. 흑!”
“내 분명 지금 나가서 미리 준비…… 어? 뭐? 흑이라고?”
“예. 흑구좌의 귀인께서 오셨다니까요?”
“…….”
“그것도 삼천 번대 구좌의.”
“…….”
삼천 번대라는 말에 황각수가 크게 떴던 눈을 끔벅거린다.
삼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동림전장의 흑구좌에도 등급이라는 것이 있다.
일천 번대는 최하급, 이천 번대 정도 되면 그나마 고개 좀 숙여야 하는 수준이었지만 삼천 번대부터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름난 상인이거나, 거대 문파의 주인, 혹은 관의 요직에 앉은 이들이 그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재신(財神)들에게만 부여되는 번호.
그런 만큼 본점에서도 특별히 취급되는 대상이 아니던가?
“몇 번이냐?”
황각수가 채비를 멈추고 뒤편의 금고를 열어 장부를 빼내 펼쳤다.
동림전장 흑구좌 고객 명부.
“삼사이오라고…….”
촤라락!
계유초가 말한 번호를 되뇌며 빠르게 명부를 넘기던 황각수가.
“삼사……이오…… 어?”
몇 번이고 눈을 비비며 확인해도 마찬가지다.
쭉 그어진 빨간 염료가 채 마르지도 않은 번호.
황각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동결 구좌의 주인이 방문했단 말인가?
황각수가 총관이 된 뒤 몽야의 명령에 의해 동결한 구좌는 대부분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일천 번대와 이천 번대였다.
그렇다고 삼천 번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극히 드물었다. 그쯤 되면 아무리 그가 총관이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기에 해당되는 구좌 중에서도 방문이 거의 없는 휴면 구좌만 엄선해 표 안 나게 동결시킨 것이다.
맡겨 두기만 하고 일 년 가까이, 혹은 그 이상 찾지 않은 돈.
흑구좌들의 주인은 대부분 그러하듯 뒤가 구리다. 일 년 이상 방문 없이 묵혀만 두었다면 필경 죽었거나 비리가 밝혀져 찾으러 올 수 없는 상황일 터.
그런데 갑자기 나타났다.
일 년 만에.
황금 열 관이나 되는 거액을 맡겨 둔 재신이.
“젠장! 하필이면…….”
황각수는 눈앞이 깜깜해져 옴을 느끼며 명부를 덮어 버렸다.
이 정도 액수라면 계유초같은 아랫것들에게 맡겨 둘 수가 없었다.
조금 바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가서 직접 만나 보는 수밖에.
“어디 계시냐?”
“접객대에 계십니다.”
“멍청한 놈! 귀인을 접객대에 세워 두면 어쩌잔 말이냐! 어서 이 층 별실로 모시거라. 차도 서호 용정이나 안계 철관음같은 것으로 준비하고!”
황각수의 빠른 명령에 계유초가 급히 뛰쳐나갔다.
“망할……. 하필이면 이렇게 바쁜 와중에.”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한때 동림전장의 호위를 맡고 있던 무인이기는 해도 그 역시 전장에서 뼈가 굵은 사람이다.
재신을 박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골수 깊이 세뇌되어 있었다.
* * *
계유초에 의해 이 층 별실로 안내된 진무는 더없이 흐뭇했다.
모락모락.
탁자에서 김을 피워 올리는 두 개의 찻잔.
냄새만 맡아도 알겠다. 서호 용정과 안계 철관음.
누누이 말하지만 돈은 많고 볼 일이다. 대접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준비된 의자에 깔린 방석은 일어나기 힘들 정도의 포근함으로 하체를 감싸고, 팔걸이는 어찌나 인체에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는지 팔을 얹자마자 잠이 올 듯이 노곤해진다.
다소곳이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시비는 혹여 진무가 무언가를 지시할까 숨소리마저 세세히 살피며.
“다과를 내올까요?”
“됐어.”
“허면 적옥춘은 어떠실까요?”
“허허, 참.”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원래도 웃을 줄밖에 모른다는 양 미소를 함빡 머금고 곱게 휘어진 눈으로 묻는다.
“됐다니까, 허허허.”
“하면 안마라도 해 드릴까요?”
안마까지?
나, 나쁘지 않은데?
그러고 보니 공동에서 서안까지 내도록 달려 몸이 좀 찌뿌둥한 것 같기도 하고…….
짝짝.
진무가 따로 대답을 하지 않자 눈치 빠른 시비가 손뼉을 두 번 쳐서 신호를 보낸다.
그러자 언제 준비한 것인지 천상 선녀 같은……이 아니고 우람하기 짝이 없는 건장한 사내놈 셋이 나타났다.
어?
아, 안마해 주는 거 아니었어?
원래 이런 건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이 더…….
주물, 주물.
“…….”
……가 아닌데?
뭐지? 뭐야? 이 손놀림은?
엄청나게 시원한데?
전문적으로 수련하기라도 한 건지 사내들의 손길은 근육이 뭉친 곳만 딱딱 골라 효과적으로 풀어내었다.
더욱이 이 편안함이란?
온몸이 흐물흐물해지는 게, 뭔가 믿기지 않는다.
사패천 부하 놈들 중에도 이렇게 할 줄 아는 놈이 없었는데…….
진무가 극도의 편안함에 몸을 맡기는 가운데.
“총관께서 급하게 먼저 처리할 일이 있으시다며 잠시 쉬고 계시라 전하셨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오신다고요.”
“뭐,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진무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란 게 참 그렇다. 여유도 만들고, 인성도 만들고, 사람도 만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크릅…… 쓰읍.”
문 열리는 소리에 깬 진무가 입가에 흐르는 액체를 닦았다.
안마사의 손길에 몸을 맡긴 터라 잠시 졸고 말았다.
나태해졌다.
위험천만한 강호에서 안마를 받으며 의자에서 넋을 놓고 졸다니.
그래도 뭐, 별일이야 있겠는가? 고객인데.
“아이구 귀인! 제가 늦었지 뭡니까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가 진무가 너무 어려 보였는지 조금 놀란 눈을 했다가, 금세 손바닥을 맞대고 비비면서 넉살 좋은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괜찮소.”
“감사합니다요. 본점이다 보니 원체 이것저것 일이 많은지라.”
“뭐, 그럴 수도 있지.”
전 무림을 통틀어 이해심이라면 천하제일(?)인 진무가 아니던가?
하해와 같은 너그러움을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저는 본점 총관을 맡고 있는 황각수라고 합니다.”
총관뿐인가.
뭐, 역시 그쯤은 되어야지.
동림전장주가 직접 나오지 않은 게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어쨌든 본점 총관이라면 전장의 모든 사업을 총괄하는 위치가 아니던가?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거라.”
황각수의 손짓에 안마사들과 시중을 들던 시비들이 물러가고 문이 닫힌다.
과연 총관이라더니 고객을 대하는 자세부터가 다르다. 신분 보장에 비밀 엄수를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걸 보면.
“한데 흑구좌의 귀인께서 본점에는 어쩐 일이십니까요?”
“전장에 뭐 다른 일이 있겠는가? 돈 찾으러 왔지.”
“저런, 이번엔 맡기시는 게 아니구요?”
“뭐, 그리되었네.”
사실 서안으로 오는 동안 잠깐의 고민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전장에 맡겨 둔 돈을 자금으로 쓰라며 내줬겠으나 이번에 공동에서 야명주를 받지 않았는가. 그것도 여러 알을.
귀찮은데 이걸로 알아서 해결하라고 줘 버릴까도 싶었지만,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고 원래의 목적대로 전장에 온 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일푼에 급전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면 모를까, 야명주 같은 귀한 물건은 함부로 내주는 게 아니다.
단순 금붙이와는 달리 주인만 잘 만나면 가격이 천차만별로 변하는 물건이니만큼 나중에 직접 팔아 치울 생각이었다.
돈을 찾으러 왔다는 진무의 말에 황각수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기분이 좋아 미처 그 기색을 알아채지 못한 진무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구좌에 있는 전액을 출금해 주게.”
순간 황각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전액이라고? 황금 열 관을?
엿 됐다.
하필이면 동결 구좌의 주인이 갑자기 찾아와서 전액 출금을 요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얼마간 찾는다면 융통해 주리라 생각한 것인데.
그리고 이미 동결 계좌의 돈은 몽야가 지정한 곳으로 출발시킨 뒤가 아니던가.
그야말로 대위기. 황각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
일신의 영달이 걸린 일이다. 동결 구좌든 정무맹과의 마찰이든 잘 마무리해야만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화려한 인생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
평생 오지 않을지도 모를 이 기회를 절대 허투루 날릴 수는 없다. 그러자면 일단은 눈 앞의 어린 재신부터 구워삶아야만 했다.
오랫동안 전장(錢場)을 구르며 살아온 그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귀인, 혹시 복리(復利)라고 들어 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