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매화검수들은 물러나거라!”
태허의 우렁찬 외침에 화산의 매화이십사수가 진무를 향해 검을 거꾸로 들어 내밀고 고개를 숙였다.
“무당지검께서 내린 가르침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스물넷의 목소리가 하나처럼 터져 나와 진무의 귓전을 때린다.
분명히 들리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라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무당지검. 이보게, 무당지검!”
“…….”
태허가 진무를 여러 차례 불렀음에도 진무는 그저 눈을 끔벅이며 자신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명진의 머릿속에 진무와 함께했던 모든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무당.
망도추행.
꺾인 검.
당대의 무당을 수식했던 수많은 말이 지금 눈앞에서 아스라이 사라진다.
그 모든 것을 이루어 낸 자신의 제자는 폭풍을 견디며 굳건히 뿌리를 박아 내린 천년 노송처럼 우뚝 서 있었다.
순수한 희열로 가득한, 너무나도 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아…….
어찌할꼬.
저 모습을 어찌할꼬.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어룽어룽 고였던 눈물이 줄기를 이루고 턱 아래 방울져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진무는 검의 울림으로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틀리지 않았다고.
계율에 억눌려서는 변화할 수 없다 주장했던, 전통을 고수하기만 해서는 발전을 취할 수 없다고 말했던 그 모든 것들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명진은 그 든든한 진무의 모습에 마치 이제까지의 삶을 보상받은 듯이 감격스러웠다.
그 모습은 진허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지어진 표정을 무어라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뿌듯함? 감격?
무당의 역사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선인.
북방의 선인이 요괴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바, 검은 옷에 항마검을 들고 내려오니 현악이 평정되고 인간에게 돌아와 대대로 평안하더라.
이는 북방 현무의 현신이나 피휘(避諱)하여 진무라 하며, 대제라 칭하라.
진무를 바라보며 전설 속의 진무대제를 떠올린 진허는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허, 무당지검께서 너무 심취한 모양이구먼. 자신도 모르게 또 다른 길을 깨달은 것이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진무의 모습에 태허가 헛웃음을 터트리자 보다 못한 명진이 석대를 내려와 진무를 향해 다가왔다.
턱.
따스함이 느껴지는 손이 진무의 어깨를 잡는다.
“진무야.”
부드러운 목소리.
그제야 진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스승, 명진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대신에 형용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과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잘하였다. 이 스승은 정말로 기쁘구나.”
명진이 웃는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토닥인다.
“……이겼네요?”
“…….”
순간 명진이 멍하니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이겼다니.
이기어검을 펼쳐 놓고.
하긴 그랬다.
태청신단을 취해 강기에 도달했을 때도 너무나 심드렁하기만 했던 제자였지 않던가?
“허헛! 오냐, 오냐. 네가 이겼구나. 무당의 검이 화산의 매화를 잘라 내었어.”
어쩌면 듣고 있는 화산의 도인들에게 무례가 될 수 있는 말이었으나 명진은 자신이 느낀 감정 그대로를 표현하였다.
“허허, 선대께서 보셨다면 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꼬, 장문인과 장로들이 보았다면 또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을꼬…….”
“…….”
스승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진무가 활짝 웃었다.
“그러게요.”
도동의 기억은 사라진 듯했으나 지난 이 년간의 정이 그러한 모양이었다.
스승이 좋다니…….
기분 참 좋네.
뭔가 인정받은 것 같기도 하고.
* * *
화산에서의 시험이 끝난 진무는 한동안 멍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접객당이 있는 금룡협에 앉아 쏟아지는 폭포를 말없이 바라보는 진무의 뒤에 명진과 진허, 운암이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숙, 안 주실 건가요?”
진허가 명진에게 소곤거렸다.
“허허, 기다리거라. 저 아이가 잠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정리할 시간을 주자꾸나. 본시 하나의 깨달음을 얻으면 되새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암, 무려 이기어검이 아니더냐. 불현듯 깨달은 것일수록 참오하여 머릿속에 각인하도록 하여야 하는 법이니라.”
“그렇군요.”
그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길이기에 모두가 추측을 하며 진무가 스스로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콰콰콰콰.
장쾌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던 진무가 문득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진 일휘를 바라보았다.
이기어검.
무인이 가진 내공의 경지를 나눌 때, 기감을 느껴 몸이 무공을 익힐 준비 상태가 되는 것을 입기(入氣)라 한다.
내공을 연단해 자신의 몸 일부에, 혹은 검에 기운을 담는 것을 충기(充氣)라 하니 주먹으로 돌을 부수고 경기공으로 칼날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충기의 경지가 심후해지면 외부로 기를 발출하게 되니 이를 나타난다는 의미를 담아 현기(顯氣)라 하는데, 통상 검기를 부리는 경지를 말한다.
그다음이 검기를 쏘아 내는 탄기(彈氣), 기운에 스스로의 뜻을 담아 가공하는 것을 의기(意氣)라 부른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해 각 단계의 벽을 깨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평생을 노력한 무인들 중에서도 의기에 오른 자는 결코 많지 않았다.
무의 마지막 경지라 불리는 강(罡)의 경지는 그야말로 절대.
중원 무림사에 존재하는 그 많은 무인들 중에서도 강을 이룬 무인은 극소수였다.
의기에 이른 자들 대부분이 마지막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러 죽음을 맞이하기에, 강의 경지는 특히나 절대라 불리며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도 여러 단계가 존재하며, 그중 초입에 도달한 자들 또한 더러 있었으니, 용봉관주 등여평이나 마도의 주구였던 이강백 등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들을 가리켜 절대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그들의 무공은 특정한 형과 식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무릇 정무칠성이나 사패오왕, 마도육제라 불리는 자들이라면 형이나 식, 병기 따위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강기를 뿜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그저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검을 들면 검강이 되고 주먹을 쓰면 권강이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가 진정한 강의 경지라 불린다.
지금의 진무는 강의 경지에서도 제법 높은 단계인 강사(罡絲)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기어검은 이러한 무공의 경지에 대한 깨달음과는 달랐다.
무구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무공의 발전 단계와는 또 다른 깨달음.
신검합일 어쩌고 하는 것도 그 과정 중 하나다.
이기어검은 어검술(馭劍術)이라 불리는 깨달음의 종착역으로, 검이라는 무구가 가진 본질을 완전히 깨달아 다스릴 수 있어야만 가능한 기예였다.
물론 내공이 받쳐 주지 못하면 깨달았다 해도 펼치지 못할 지고의 경지이거니와, 그 안에도 명확한 단계가 있었다.
그 처음이 수어(手馭).
손이 닿는 곳, 즉 자신의 기운이 미치는 곳까지 검을 조종하는 경지.
초입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이기어검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이기어검이 가진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음이 목어(目馭).
시선이 미치는 부분까지 검을 조종하는 경지.
여기서부터는 진정으로 놀랄 만한 세상이 펼쳐진다.
무릇 사람이 만들어 내는 기운 중 가장 강한 것을 강이라고 하지만, 거리의 한계가 명확하다.
하지만 목어에 이르면 그 한계가 사라진다.
강기를 머금은 검이 육체를 넘어 자유자재로 움직이니 무공이 가진 한계점마저 무색해진다.
철지량은 그것에 더해 기검을 만들어 사용하는 단계이니 실로 괴물이라 할 만했다.
물론 과거의 진무는 이기어검을 익히지 않았어도 철지량을 이길 수 있었다. 현재의 몸으로도 거의 이길 뻔(?)했고.
어쨌든 목어를 넘어서면 다음이 심어(心馭)인데.
마음 가는 곳에 검이 이른다.
이건 좀 사기성이 짙다.
목어를 넘어 본 자가 역사에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청무 조사라는 분은 가능했을까? 일검에 산봉우리를 잘라 내셨다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진무는 지금 처음으로 검공에 대해 욕심이 생겼다.
스윽.
진무가 손을 내밀자 어깨에 걸쳐져 있던 검이 저절로 검집을 빠져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검진과의 대결에서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진무의 손을 따라 일휘가 점점 더 높이 떠오른다.
허공섭물과 비슷한가 했으나 설명하기 힘든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무언가 교감을 하는 듯한.
비틀.
하지만 어느 순간 한계에 이르렀는지 둘 사이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끈이 끊어진 듯 일휘가 비틀거린다.
지금의 진무가 검을 조종할 수 있는 거리는 반 장에 조금 못 미친다.
그래도 막 깨달은 것을 되뇌는 것치고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수어…….
만약 목어에 이른다면?
검성 철지량.
다음에는 반드시! 검으로 짓밟아 주마.
진무가 뿌듯한 표정으로 일휘를 손안으로 당겨 잡았다.
그러곤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나 쓸 만하지?’ 하고 말해 오는…… 그만하자. 검하고 무슨 대화를.
진무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났느냐?”
“……예. 계속 기다리신 모양이네요.”
“지루하지 않았느니라.”
명진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고 진무가 마주 웃었다.
“어떠하냐? 제대로 담았더냐?”
명진의 말에 진무가 잠시 고민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입니다.”
“내 경지가 낮아 네게 도움을 줄 수 없으니 너무도 안타깝구나.”
진심이 담긴 한마디의 말.
안다.
느껴지니까.
“……그저 지켜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스승님.”
“허허, 오냐. 어쨌든 서둘러 따르거라. 화산 장문인께서 너를 찾으신다는구나.”
“저를요?”
“그래, 전언을 가져온 도동이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느니라.”
“……아!”
진무는 그제야 운암의 뒤편에 다소곳이 선 어린 도동을 바라보았다.
날이 어둑한 것이 제법 기다린 모양이었다.
“기다리게 했군요.”
“허허, 괜찮느니.”
명진이 웃으며 앞서 걷고 진무가 그 뒤를 따른다.
옆으로 다가온 진허가 진무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사제야.”
“…….”
“한 시진이나 기다렸다.”
그리 오래되었나?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꽤 시간이 흘렀구나.
근데, 그래서 뭐?
“나중에…… 그 깨달음을 좀…….”
진허가 멋쩍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거리자 옆에 있던 운암도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었다.
지랄들 하네.
운암이라면 몰라도 내가 왜 너한테 가르침을 준단 말이냐, 이 자식아.
부하도 아닌 자식이.
진무가 피식 웃으며 서둘러 명진의 뒤를 잰걸음으로 따랐다.
“지, 진무야! 사제! 야!”
진허가 급히 따라오며 불러 댔지만 그깟 거 무시하는 거야 일도 아니다.
* * *
밤을 맞이해서 그런 것일까?
다시 찾아온 화산의 천주궁은 또 달라 보였다.
이기어검을 깨달은 장소라 생각하니 뭔가 기념비를 세워 놔야 싶기도 하고.
어쨌든 도동의 안내를 받아 명진 등과 함께 찾아온 천주궁 앞 옥녀지의 한켠에 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태허와 을룡선상이 푸근한 미소를 지은 채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게나.”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하는 태허의 눈빛은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무당지검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학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자신보다 높은 경지를 이룩한 무인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눈빛이었다.
“어찌 찾으시었습니까?”
자리에 앉아 엽차를 받은 명진이 먼저 묻자 태허가 웃으며 대답했다.
“내 무당지검의 경지를 보며 경탄해 마지않았네. 또한 그 발전을 직접 보니 실로 감격스러웠지.”
“……?”
무슨 말을 할까 의아해하는데.
“내 무당지검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데 혹, 무당지검께서는 화산에 원하시는 바가 있는가?”
원하는 걸 준다고?
“주저 없이 말해 보게.”
“…….”
태허의 말에 진무가 크게 뜬 눈을 끔벅거렸다.
원하는 것.
있지. 있고말고!
의도치 않은 기회를 얻게 된 진무의 눈빛이 빠르게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