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콰직!
후려친 주먹에 청류실의 건물 한쪽 벽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갔다.
“큭!”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에서 생겨난 신음. 그리고 어느새 나타나 바닥을 뒹구는 복면인.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 새끼가 빨리빨리 나타나지 않고. 더럽게 오래 기다렸네.”
“…….”
진무의 말에 복면인의 눈이 찡그려졌다.
양춘의 의심에 따라 청류실에 잠입했다.
전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진회루주 이향란과 한 사내.
호위까지 있던 터라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향란이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절호의 기회가 생긴 셈이다.
복면인은 사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은밀하게 접근을 시도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신분을 알 수가 없었고, 입 모양은 움직이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복면인은 자신의 은신술을 믿었다.
그렇기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무당지검. 정보 조직의 일원으로 어찌 그 얼굴을 모를까?
확인은 끝났다.
무당지검임을 깨달은 이상 굳이 더 알아볼 필요가 없다 생각하는 순간 진무가 벼락같은 움직임으로 다가와 자신이 숨은 벽면을 터트려 버렸다.
“야, 하오문이 언제부터 이렇게 행동이 굼떠졌어? 세찬이 놈이 많이 후해졌네. 아랫것들을 안 갈구나 보지?”
그가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다. 더욱이 하오문주와 마치 호형호제라도 하는 듯이 말하다니.
그리고 기다렸다고?
설마, 자신을 꾀어낼 목적으로 일부러 진회루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뜻인가?
“뭘 꼬나봐? 눈깔을 확 파내 버릴라.”
“…….”
“근데 혼자 왔냐?”
“…….”
“실망스럽네. 한 대여섯 놈 정도는 와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애써서 이것저것 보여 줬는데. 애먼 놈에게 시비까지 걸어 가면서 말이야.”
“…….”
“그렇게 아가리 처닫고 째려보지 말고 저쪽으로 가서 앉아. 술이나 한잔하게.”
“…….”
이놈이 미친 건가? 이 마당에 대화는 무슨 대화란 말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복면인은 탈출할 궁리부터 했다.
무당지검과 정면 승부를 벌일 수 있는 자가 이 무림에 몇이나 되겠는가? 어서 은신, 은신을……!
“야,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려. 그리고 혹시나 토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다친다.”
양팔을 허리에 얹고 짝다리를 짚은 진무가 무심하게 복면인을 쳐다보는데.
파악! 스스스…….
갑자기 복면인이 청류실의 기둥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이향란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랜 움직임은 그렇다 치고, 분명히 눈앞에 있었는데…….
“하, 나 이 새끼.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지.”
진무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은신술. 비겁한 자들이나 쓰는 술수라곤 해도 분명 뛰어난 기예임이 틀림없다.
사라져 버린 그의 모습은 진무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사방에 퍼트려 놓은 기감 덕에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가 기어가는 움직임이 죄다 느껴져 왔다.
바닥에 사지를 딱 붙이고 은신에 집중하느라…… 느려도 너무 느린 그 움직임이.
벌레, 아니 달팽이도 너보단 빠르겠다. 차라리 그냥 경공을 최대한 발휘해서 튀는 게 나았을 텐데. 그래야 이쪽에서 잡는 맛도 좀 나고.
기감에 걸려든 지 한참이 지나도록 복면인의 기척은 고작 반 장 움직였을 뿐이었다.
“…….”
짜증이 절로 치민다.
오려면 좀 대단한 놈이 올 것이지, 뭐 이딴 허접한 게 와서는…….
저벅, 저벅, 저벅.
느긋하게 발걸음을 내딛자 은신한 놈의 기척이 움찔거리며 방향을 바꾸는 게 느껴진다.
어이구, 그랬어. 방향이 딱 그쪽이라 놀랐지, 니가.
척.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곳에 멈춘 진무가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야.”
“…….”
“나와.”
“…….”
“셋 센다. 자꾸 귀찮게 하면 정말 뒈져. 농담 아니야.”
“…….”
“하나둘셋.”
쑥! 턱! 쑤욱!
“……!”
센다는 말이 무색하게 숫자를 연달아 내뱉곤 그늘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가 뺀 그의 손에는 복면인의 멱살이 잡혀 있었다.
“뒈진다고 했지?”
“……!”
부릅뜬 복면인의 눈동자에 힘차게 움켜쥔 주먹이 선명하게 비치더니, 순식간에 크기가 커진다.
쩍!
“켁!”
처음으로 뱉은 소리가 그것이었다.
쩍! 쩍쩍쩍!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뭔 놈의 주먹이 이렇게 빠른…… 것도 빠른 건데, 아프다. 너무 아프다.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맞을수록 고통은 심해지고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순식간에 수십 대를 얻어맞아 버린 복면인의 몸이 노곤노곤하게 변해 축 늘어지자.
휙, 털썩.
복면인의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 이향란의 앞에 툭 떨어졌다.
되돌아온 진무가 복면인의 앞에 앉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향란이 급하게 잔을 채워 진무에게 내밀었다.
손을 발발 떠는 것이……. 뭐, 당연하다.
처맞는 모습을 보고 간접적으로 생긴 공포.
아마 지금쯤 좀 전에 진무에게 버릇없이 ‘어째서 그랬냐’는 식으로 따졌던 것이 지극히 후회될 것이다.
“야, 일어나. 앉아.”
휙, 타라락!
진무의 주먹맛을 알게 된 복면인이 재빨리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양손을 그 위에 얹었다.
몸이 아픈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반항하면 무조건 더 아프게 될 것 같았으니까.
“벗어.”
“…….”
주저하는 모습.
스윽, 휙!
슬쩍 주먹을 들자마자 순식간에 복면이 벗겨져 모습을 감춘다.
하오문의 비밀? 웃기는 소리.
궁의 세작이라는 놈도 맞고 나서는 빨리 죽여 달라며 애원했던 수준 높은 구타였다.
다시 말하지만, 진무의 주먹에 버텨 낸 놈…… 아니 분은 스승인 명진이 유일하다.
“이름.”
“…….”
“오, 훈련이 잘됐네. 아주 잘됐어.”
진무가 심드렁하게 감탄하며 일어난 동작은 자연스럽게 구타로 이어졌고.
“허삼수입니다!”
복면인, 아니 허삼수의 즉답으로 이어진다.
“그래, 직책은?”
“하오문 서안지부장입니다.”
“지부장? 니깟 놈이?”
“…….”
어이가 없었다. 고작 이 정도의 은신술을 가지고?
이미 놈이 십 장 내로 들어오면서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가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다. 허삼수는 정말 뛰어난 은신자였다. 단지 진무가 너무 뛰어날 뿐.
묵룡혼원공의 힘을 되찾고 나서 그의 기감이 몇 배로 증폭되었다. 특히나 사기를 느끼는 것은 그 이상이었다.
“내가 하오문주를 만나고 싶긴 한데 말이야.”
“예? 그건 저도 잘 모르는데…….”
안다 해도 정무맹에 속한 무당지검에게 가르쳐 줄 순 없었지만 정말로 몰랐다.
“알아. 하오문주의 위치를 아는 건 야묘(夜貓), 그 노친네들뿐인 거.”
“……!”
복면인, 허삼수는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진무를 쳐다보았다.
야묘까지 알아?
하오문에서도 극비에 속하는 원로 집단인 그들을?
서안지부를 맡은 허삼수조차도 이름만 들어 보았지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무당지검이 어찌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저 어린 자가?
“뭐,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대신 일 하나만 해라.”
일을 해? 의뢰를 하겠다는 뜻인가?
“……무슨?”
“종남파에서 도망친 놈들이 있다. 서안지부장이라는 게 썩 믿기지는 않지만…… 진짜 지부장이면 이미 알고 있지?”
“……그야.”
개방과 군문이 찾고 있는 자들이다.
“알아 몰라?”
“압니다.”
“찾아와. 그럼 뒤탈 없이 끝난다.”
“……?”
뒤탈이 없다.
더 이상 하오문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면 그저 하오문에 정보 의뢰를 하려는 것인가?
원래는 양춘이 말한 검은 기운이 묵룡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러 온 것이지만, 무당지검이라는 것을 안 이상 더 이상의 확인은 불필요했다.
선기를 익힌 무당지검이 묵룡기와 관계될 리는 없지.
아마도 늘 그랬듯이 첩보가 잘못된 것이리라.
그리고, 그가 더 이상의 소란을 원하지 않고 오직 정보를 원한 이상 서로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 상인과 고객.
첫 만남이 다소 요란하긴 했으나 종종 있는 일이다.
정무맹의 정보 단체인 개방.
사패천의 정보 단체인 하오문.
마교의 정보 단체인 삭월천(朔月天).
이 세 곳은 대적하는 관계면서도 서로 공생하는 관계로, 각자가 속한 세력의 기밀만 아니라면 종종 서로에게 적당한 값을 치르고 정보를 거래하곤 했다.
사실, 종남의 세작들이 서안부에 숨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나서 개방에서 은밀하게 요청이 있기도 했었다.
하지만 뭐 하러 그들을 돕는단 말인가?
어차피 그러거나 말거나 사패천에서 떨어져 나온 이상 대충 돈이나 챙기고 말 생각이었다.
“하면 비선(秘線)을 이용하실 일이지. 어찌 이리 소란을 피우셨습니까? 혹 무당지검께서는 저희 측의 비선을 모르시는 겁니까?”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기세가 오른 허삼수의 투덜거림에 진무가 피식 웃었다.
비선? 놀고 있네.
호현개를 통해 하오문에 정보 요청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들었다.
잘도 알려 줬겠다.
아마 알려 줬어도 두루뭉술하게 대충 자잘한 정보 몇 개 던지고 돈이나 챙겼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진무가 진회루를 찾아온 것은 세작들의 위치를 알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세작들을 찾는 것은 물론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명세찬의 귀에 자신에 대한 소식이 들어가게 해야 한다.
그래야 하오문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자, 그럼 일단 정보에 대한 가격부터 책정하시지요.”
참 대단한 놈이다.
얼굴이 시퍼렇게 물들고 이빨도 몇 개 나갔는데.
마치 언제 맞기라도 했었냐는 것처럼 정보를 팔 궁리를 하고 있다. 정보 상인으로서의 본능이 처맞는 공포를 이길 정도라니.
하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뭐 하러 돈을 주고 정보를 산단 말인가? 돈이 썩어 넘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이, 삼수.”
어, 어이? 삼수?
“지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
“나는 지금 돈 내고 정보를 사러 온 게 아니야.”
“그, 무슨?”
“지시를 내리러 온 거야.”
살기 어린 진무의 미소에 허삼수의 등줄기에 소름이 쭉 끼쳤다.
“말했잖아. 뒤탈은 없을 거라고. 그럼 그 반대가 뭐겠어? 탈이 생긴다는 거지. 너나 하오문 서안지부가 오늘부로 없어지는 거라고.”
담담하기 짝이 없는 위협.
더구나 이향란이 발발 떨며 채운 술잔을 여유롭게 비우면서.
“지금 정무맹에 소속된 그대가 하오문을 적대하겠단 뜻이오?”
허삼수가 살기를 피우자 또 웃음이 나온다.
정무맹에 소속된 무당지검이니 하오문을 상대로 마찰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웃기는 놈이다.
그렇게 처맞아 놓고도 머리가 덜 도네.
그래도 한 식구라고 봐줬더니.
어디 한 군데 분질러 놓고 시작했어야 했나, 뭔 말귀를 이렇게 못 알아들어.
“삼수야, 삼수야, 허삼수야.”
“…….”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내가 요새 사람이 좋아져서 그런지 인내심이 넘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항상 참는 건 아니거든. 아무리 과거의 인연이 있다고 해도…….”
진무가 미소를 가득 머금고 묵룡혼원공을 끌어 올렸다.
후아악!
순식간에 솟구친 검은 기운이 그의 손안에 어리고,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린다.
“……그, 그건!”
허삼수의 눈동자가 전에 없을 만큼 크게 뜨이고, 쩍 벌어진 턱 아래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제법 안목이 있는 모양이네. 고작 서안지부장 따위가.”
진무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쿠아악! 콰아앙!
검은 기운이 채찍처럼 날아가 처음 터트려 놓았던 담벼락의 옆을 또다시 폭발시켰다.
“…….”
허삼수는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하관을 달달 떨어 댔다.
“알아봤으면 어서 가서 알아 와. 혹시 오해가 있을지 몰라서 하는 말인데. 나는 지금 니가 생각하는 그 양반하고 성격도 크게 다르지 않거든.”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본인이긴 하지만.
“…….”
진무가 보여 준 한 수.
허삼수는 단번에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에서 목격한 믿기 힘든 무공. 묵룡혼원공, 흑수.
자신이 아는 한 그 기운을 운용하는 것은 한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혀, 혁련…….”
뒷말을 잇지 못한 허삼수를 향해 진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부인하지 않는다.
꿀꺽.
허삼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미친 듯이 눈을 끔벅거렸다.
맙소사. 혁련무강, 그의 전인이라니. 무당지검 진무가?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허삼수는 뒤통수를 망치로 거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머리가 복잡해져 판단이 제대로 서질 않는 허삼수를 향해 진무가 말했다.
“삼수야. 황당하지? 무당지검이 묵룡기를 쓰니까.”
“…….”
“가서 명세찬이한테 묵룡의 주인이 나타났다고 전해라. 안 그래도 요새 사패천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던데.”
허삼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본인의 입으로 들었고 직접 묵룡기를 보았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무당지검, 혁련무강의 전인.
한 사람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는 상극의 관계가 아니던가?
“아, 그 전에 세작부터 찾아와. 지금 내가 세작 놈들을 쫓은 지 하루가 좀 넘었거든? 그런데 못 찾았어. 딱 반나절 줄게.”
짙어지는 진무의 미소와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새하얀 송곳니.
“조, 존명!”
“존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가!”
“예!”
허삼수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청류실을 빠져나갔다.
어째서 그리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진무의 미소에 스며 있는 차가운 살기 때문인지, 그의 몸에 남은 구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과거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알게 된 온갖 비밀 중 가장 큰 비밀을 찾아낸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동쪽 나라 여이설화(驢耳說話)에 나오는 복두쟁이처럼 ‘진회루에 묵룡이 나타났다!’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단은 종남에서 도망친 세작 놈들부터 찾은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