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75
275화
여인의 이름은 범정.
진무의 말대로 그녀는 궁의 무인이다.
일궁주 송여방의 휘하에 있는 열 명의 전령이자 호위인 전궁대(傳宮隊)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는 코가 박살 났을 때는 알지 못했다. 외인에게 내의(內衣) 차림을 보인 당혹감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생각했고, 갈아입던 옷이 두 팔의 움직임을 방해했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평범한 존재감 따위가 아니다.
그의 검은 기운에 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몸의 움직임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욱이 긴장감에서 기인한 땀에 온몸이 축축이 젖어 올 정도다.
감히 자신이 추측할 수조차 없는 경지의 고수.
그런데 어째 사내의 얼굴이 몇 번이나 본 것처럼 익숙하다.
사파의 영역에 이런 고수가 있었던가? 더욱이 약관 언저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나이에 저만한 경지를 가진……!
“……무, 무당 도사 놈?”
“…….”
무심코 나온 말에 진무의 눈썹이 팔자로 일그러진다.
이것들이 다들 용모파기라도 그려서 매일 쳐다보고 다니나. 참 잘도 알아본다.
“……무당은 맞는데, 놈이 뭐냐? 싸가지 없게. 무당지검이라고 부르든가, 무당 도사 ‘님’이라고 하든가.”
“…….”
진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받는다.
그러나 범정은 그마저도 두렵기 짝이 없었다. 그의 미소가 짙어짐과 함께 몸에서 뻗어 나오는 압박감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젠 비틀린 대기가 기운을 이기지 못해 괴성까지 질러 대고 있었다.
“네놈이 어떻게 이곳에?”
“그건 니가 알 것 없고. 질문은 내가, 답은 니가.”
“…….”
“산서상회주에게 보낸 서신에 추가장을 들먹인 이유가 뭐냐? 더욱이 이렇게 서신을 뺏기자마자 습격한 이유는 뭐고?”
“…….”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여 놓고 저 둘만 살렸다는 것은…… 그러니까 니들이 뭔가 얻을 게 있어서 납치할 생각이라는 건데?”
진무가 슬쩍 떠보자 범정의 눈빛이 매서워진다.
거참, 알기 쉬운 년이네.
굳이 대답까지 들을 필요가 없게 된 진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산서상회씩이나 운영하는 것들이 새삼 돈이 필요할 리는 없고, 이런 허접한 곳에 복수를 할 리도 없는데……. 대낮에 살인을 한다라…….”
“…….”
고민하는 듯한 진무의 표정에 범정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목표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추형도의 딸, 추가령.
이제껏 자신들이 은밀하게 수소문해 온 칠음은맥의 체질을 가진 아이.
이미 소궁주에게 보고가 올라갔으니만큼 도망치더라도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범정은 단호히 결론을 내렸다. 부하들을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추가령을 데리고 도망친다.
아무리 무당지검이라고 해도 자신의 경공과 은신술이라면 도박을 걸어 볼 만했다.
산서상회의 본장이 있는 진중…… 아니, 인근 세력권에만 가면 될 것이다.
결심을 굳힌 범정은 재빨리 외쳤다.
“죽여!”
파앗!
그녀의 명령에 추가장 안에 있던 무인들이 진무를 향해 쏘아져 날아든다.
곧게 뻗어 온 검을 몸을 슬쩍 비틀어 피한 진무가 담담한 시선으로 공격자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어디 보자, 불나방이 한 마리.”
“……!”
콰직!
방비할 틈도 없이 찍어 누른 힘에 무인의 머리가 땅바닥 깊숙이 처박힌다.
슈슉!
동료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두 개의 검이 진무의 가슴팍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와드드득.
활짝 펼친 손에 닿은 검이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연이어 검을 쥔 손목을 잡아챈 진무가 두 다리를 가위처럼 벌려 차올린다.
퍼퍽! 퍽!
턱 언저리를 맞은 무인 둘이 고개를 쳐든 채 뒤로 넘어갔다.
“자, 이제 대장이 나서……?”
진무가 공격해 온 무인들을 상대하는 사이 범정이 추형도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허! 저런 망할 년이 수하들 목숨을 이용해서 인질을 잡으려고 해? 감히 나를 상대로?
뛰어 봐야 벼룩도 못 되는 게.
무수히 많은 검격이 날아……오거나 말거나 진무가 용천혈에 진기를 거칠게 때려 박으며 무릎을 굽힌다.
꾸우.
발에 짓밟힌 대지가 움푹 파이는 것과 동시에 수축했던 근육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었다가 엄청난 탄성으로 펼쳐진다.
슈아악!
날아온 검이 베어 낸 것은 진무의 잔상뿐이었다.
쐐애액!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잔상을 남기고 사라진 진무가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범정의 뒤에 나타났다.
“……!”
순식간에 뒷덜미를 잡히게 생긴 범정이 다급하게 검을 휘둘러 추형도를 노린다.
“이게 뒈질라고!”
파앗!
허공을 재차 차 내며 도약한 진무의 검, 일휘가 달리던 속도에 더해져 날아갔다.
슈우욱! 따아앙!
추형도를 노렸던 검이 이기어검에 막히고, 범정이 그 반탄력과 함께 튕겨져 땅바닥을 구른다.
“……!”
순간 추형도를 구한 진무의 눈이 일그러진다.
이런 개 같은 년이!
범정, 그녀가 노린 것은 추형도가 아니었다.
추형도를 공격하는 척 진무를 유인하고는 그의 딸 추가령을 빼낸 것이다.
“뒷골목 배수도 아닌 게 감히 내 앞에서 소매치기를 해?”
날 선 진무의 기세가 분노와 함께 폭발적으로 솟구쳤으나, 범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득의만면한 웃음을 띠었다.
“멈추는 게 좋을 거야.”
추가령의 목 반 치 앞에 멈춘 범정의 시퍼런 칼날.
“…….”
멈춰선 진무가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대단하군. 이기어검이라니. 하지만 이년이 내 손에 있는 이상 도사인 네놈이 움직일 수는 없겠지.”
“…….”
“조심해.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곧바로 이년의 목을 베어 버릴 테니까.”
“…….”
범정의 말에 진무의 담담했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진다.
“크크크, 너희 같은 도사 놈들이야 강해 봤자지. 결단력 따위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놈들.”
“…….”
“죽여 버려!”
짧게 명을 내린 범정이 추가령을 품에 안고 담벼락 쪽으로 몸을 날렸다.
모두 죽어도 상관없었다. 저 괴물 같은 놈에게서 도망칠 시간만 벌면 되니까.
“이런 개 같은!”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애만 아니면 벌써 죽었을 것이 지금 나를 상대로 협박을 해?
콰직! 퍽! 콰득!
진무는 범정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면서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무인들을 차례로 땅바닥에 처박아 으깨 버렸다.
오냐, 원한다면 찢어 죽여…… 어? 이건 또 뭐야?
모든 내력을 쏟아부어 쫓으려 했던 진무의 시선이 묘하게 변하더니,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범정은 그사이 안뜰을 쭉 가로질러 빠른 속도로 담벼락에 접근하고 있었다.
삼 장, 이 장, 일 장.
망설임 없이 단숨에 몸을 솟구쳐 뛰어넘으려는 순간 담벼락 너머에서 넘실거리는 섬뜩한 기운. 그리고…….
“아이야, 어디를 그리 열심히 가느냐?”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는 감정 한 올 실리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
“……!”
버, 벌써?
아니다. 노쇠한 여인의 목소리……. 무당지검이 아니야?
기겁한 범정이 몸을 급히 멈춰 세우고 방향을 틀었다.
스걱!
“크으윽!”
예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칼이 그녀의 팔을 잘라 내고 나서야 시퍼렇게 날 선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의 앞에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노파가 자신의 품에서 팔과 함께 빼앗아 간 추가령을 안고 있었다.
설마?
범정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빠각! 쩌어억!
손에 무언가를 들고 휘둘러 대는 학창의의 사내.
가벼운 손짓에 진무를 공격하던 수하들의 머리가 연신 수박처럼 터져 나간다.
“이런 개자식들이! 감히 귀체에 손을 대려고 해!”
곰처럼 우렁찬 욕설의 포효와 함께 진무의 앞을 막은 거한이 허리에 붙였던 주먹을 힘있게 뻗어 내었다.
투아아악!
거칠게 뻗어 나온 기운이 회오리처럼 추가장 내부를 휩쓴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오십이나 되는 자신의 수하들이 칼질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채 모조리 쓰러졌다.
그리고 무언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는 무당지검.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눈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팔을 자른 노파는 야화, 서책을 든 학창의의 사내는 가부자, 그리고 저 무식해 보이는 덩치는 필시 철혈붕권이다.
사, 사패오왕이 셋이나 몰려왔다고?
와중에 자신의 수하들을 깨끗하고 정리하고 추가장의 담벼락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선 이들 중 일부는 분명 사패천 최강이라 불리는 철검단이었다.
도주로가 막혔다.
팔이 잘려 나간 자리를 지혈하려던 범정은 순식간에 자신이 포위되었음을 깨달았다.
쿵!
“우명이 천주님을 뵙습니다.”
“……!”
뭐?
범정이 눈을 부릅떴다.
뭐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자신의 수하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린 저 천우명이 갑자기 진무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어째서 그가 무당지검에게? 그리고 천주?
복잡해진 머리가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한다.
“천주님을 뵙습니다.”
가부자 명세찬에 야화 소약벽까지?
“천주님을 뵙습니다!”
철검단을 비롯해 추가장을 포위한 모든 무인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이런 젠장. 뭐 하러 죄다 몰려와서는…….”
진무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짜증스러운 음성을 뱉는다.
범정은 거대한 혼란에 휩싸인 채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진무를 바라봤다.
무언가 상황이 단단히 잘못되었다. 무당지검……이 저들의 천주라고?
“어떻게 알고들 온 거야?”
“예? 천주님께서 명하신 게 아닙니까?”
인사를 마친 천우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찬의 말로는 황신이 반드시 지원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눈치를 보듯 꺼낸 천우명의 말에 얼굴을 확 구긴 진무가 한쪽을 째려봤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황신이 모르는 척 고개를 휙 돌렸다.
“이놈의 자식이…… 휴. 아무리 그렇다고 이렇게 죄다 몰려왔냐?”
진무의 말에 천우명이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당연합니다. 천주님께서 적과 싸우신다는데 이 천우명이 어떻게 가만히 앉아만 있겠습니까!”
“…….”
그래, 이 무식한 놈은 그렇다 치고. 진무가 명세찬을 째려보자 명세찬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황신의 요청도 요청이지만, 미현의 싸움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결과 천주님께선 아직 과거의 힘을 완전히 되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런 고수를 다시 만난다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크지요. 그리고 무명촌에서 본 것처럼 놈들은 간계가 상당히 뛰어납니다. 항상 홀로 적진에 뛰어들고 보는 천주님의 성격상…….”
“그만, 그만!”
하여간에 이 자식은 적당히가 없다. 구구절절 맞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건 좋은데, 그렇게 뭐든 분석해서 사실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냐? 그것도 이렇게 장황하게?
“천주님, 어차피 섬서의 세력 확보는 끝났습니다. 곧장 하남으로 갈 수도 있으나 산서상회가 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먼저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간결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적생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소약벽과 그 품에 안긴 추가령을 힐끗 쳐다본다.
“약벽.”
“예, 천주님.”
“……내가 구할 수 있었다. 알지?”
“…….”
“진짜야.”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말에 잠시 멈칫했던 소약벽이 주름진 눈을 곱게 휘어 웃는다.
“이를 말씀입니까? 그저 수하 된 도리로 천주님의 번거로움을 덜고자 앞서 움직인 게지요.”
“쯧, 말이나 못 하면.”
진무가 혀를 차고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범정을 바라본다.
“잡아 둬.”
눈이 마주친 순간 범정은 재빨리 입안에 있는 독단을……!
텁. 파팍!
“천주님의 명이다. 네 마음대로 죽을 수 있을 듯싶으냐?”
“……!”
언제 움직였단 말인가?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명세찬이 어느새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 호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명세찬의 두툼한 서책이 보인다.
거무튀튀한 쇳덩이로 된…… 이런 쌍……!
마음속으로 욕설을 끝맺지도 못한 범정의 얼굴이 세차게 돌아갔다.
쯧쯧, 저런 나쁜 놈.
그래도 여잔데 마혈이나 짚으면 될 것을, 때려도 얼굴을 때리냐.
이미 전날 범정의 코를 뭉개 버린 바 있던 진무였으나 명세찬의 잔인함에 새삼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