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93
393화
걷는다.
삼십여 장의 거리를 영겁의 시간을 지나는 사람처럼.
어찌 걸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 없는 길이나 한 걸음 한 걸음에 최선을 다하고.
어떤 자세를 취하여도 흠잡을 이 하나 없을 것임에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최대한 여유를 보인다.
어떠한 방해도, 압박도 없었으나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뛰고 긴장감에 발끝마저 저릿했다.
진무는 그 짧은 거리를 지나며 걸음마다 북리도천과 나누었던 수많은 기억을 담았다.
만난 횟수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수년, 혹은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와 보낸 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닿지 못했기에 닿으려 했고 잡지 못했기에 잡으려 했던, 인생 최대의 숙적이었던 자.
유일하게 자신보다 무(武)의 길을 앞서 걸었던 북리도천.
이윽고 진무의 걸음이 싸릿대 담벼락에 닿았다.
턱, 끼이익.
진무는 담 한쪽에 자리 잡은 부실한 문을 일부러 힘차게 열어젖혔다.
그러곤 너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듯 걸어가 북리도천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은 긴장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고, 약한 생물이 몸집을 일부러 부풀리는 것과 같은 허세였다.
붉은 수염을 가슴께까지 늘어뜨린 그는 진무가 유일하게 괴물이라 생각했던 인물이니까.
철컥.
어깨에 걸쳤던 일휘를 일부러 소리 나게 바닥에 내리자 침묵에 틈이 생겼다.
북리도천은 그 일련의 행위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로 담담히 물었다.
“마교는 어떠하던가?”
“…….”
진무는 이미 그를 알고 있으나 북리도천은 처음 마주한 상대였을 터인데, 첫 질문치고는 무척이나 가벼웠다.
하지만 근황이나 묻는 그 말이 이상하리만큼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진무는 일부러 피식 웃으며 막혔던 숨과 함께 한마디를 토했다.
“별 볼 일 없었어.”
“저런, 안타깝군. 제법 재미있으리라 여겼는데.”
“…….”
하대를 하대로 받아치는 것도 모자라, 대놓고 퉁명스럽게 말했는데도 조금의 언짢은 기색 없이 담담히 구니 왠지 처음부터 진 느낌이었다.
쪼르륵.
북리도천은 가벼운 유감을 표하는 것을 끝으로 입을 다문 채 진무의 앞에 사발을 내밀어 놓고는 술을 가득 채웠다.
마시란 말도 없었다.
내민 술잔을 마시든 말든 제 놈 입에 술만 부어 넣었다.
근데 왜 술병이 다르지?
설마 나는 싸구려 백주를 주고 너는 비싼 고급주를 처먹고 있는 거냐?
이 새끼, 많이 치사해졌네?
진무는 이리저리 생각하며 북리도천을 바라보다 피식 웃고는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넘겼다.
얼레?
어디선가 맛본 듯 익숙하다.
이런 술은 먹어 본 적이 없는데?
마음마저 편안해지는 것이 선기가 차분하게 안정되는 건 둘째 치고 제법 맛까지 좋은 게, 그래도 손님이라고 꽤 괜찮은 술을 준비한 모양이다.
그때부터 그들은 술잔이 비워질세라 따르기를 반복하며 말없이 술만 마셨다.
빈 술병이 하나둘 늘어 갈 때마다 입 밖으로 뱉지 않은 말들이 오갔다.
하긴 너와 나의 사이에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이미 많은 것을 담고 있음이니.
처음 만났을 때 네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나느냐?
‘중원은 재미있는가?’
‘내가 가져도 되겠는가?’
미친놈.
재미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세상을 물건 취급하는 배포는 또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리고 싸웠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치열하게 싸웠다.
산과 들이 상처를 입으며 괴성을 질러 대는 와중에도 그들은 쉼 없이 서로에게 죽음을 선사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해와 달이 몇 번이나 자리를 바꾸었는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고, 둘 모두가 더 내놓을 것 없이 쏟아부은 싸움의 결과는 정확히 반 초 차이.
북리도천과의 차이는 딱 그만큼이었다.
그는 무승부라 했고, 진무는 패배의 쓴맛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정확한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원수는 아니었으나 그 반 초를 메우기 위해서 섶에 누워 쓸개를 씹는 그 씁쓸함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무공을 미친 듯이 파헤치고 머릿속으로 늘 그의 인간 같지도 않은 움직임을 그리며 살았다.
비록 동년배였으되 어쩌면 그는 이전의 삶에서 무언(無言)의 가르침을 내려 준 스승과도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를 이기려 보이지도 않는 길에 들어선 뒤로 별의별 노력을 해야 했으니까.
뭐라도 가르쳐 줄 일이지……. 망할 자식 같으니.
그들은 따로 날을 잡지 않았으나 주기적으로 싸웠고, 날이 맑았던 어느 날 진무는 그 반 초를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섰다.
정확히 반 초의 차이였다.
이상하게 기쁘지 않았다.
그때 진무는 무승부라 말했던 북리도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반 초라는 것은 약간의 우위를 가진 자에게 찾아오는 결정적인 운이 작용한 결과일 뿐이었다.
물론, 실력을 갈고닦지 않으면 그 운도 찾아오지 않았겠지만.
그때 북리도천은 졌노라 말했고, 진무는 먼저 들었던 것처럼 무승부라 말했다.
그것은 승자의 자부심이나 아량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압도적인 차이가 아니면 이겼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번.
하지만 결국 그 어떤 싸움에서도 승부를 내지 못했고, 망할 하늘의 부름을 받아 죽음에 이르렀다.
긴 추억에 잠겼던 진무를 향해 북리도천이 문득 물었다.
“……그의 마지막을 보았던가?”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당연히 보았지.
직접 경험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만.
“어떠했나?”
“그…… 별 볼 일 없었어.”
진무는 대강 얼버무렸다.
사실 정말 볼 일도 없었다. 시체는 묻었어도 결과적으로 안 죽었으니까.
“고통스러워하지 않던가?”
“…….”
고통?
아, 혁련무강으로 죽을 때를 묻는 건가?
조금 아프긴 했지.
저승차사 놈이 악착같이 혼을 떼어 내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진무는 대꾸 없이 그냥 피식 웃었다.
“그에게 유월청 외의 제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꽤나 의외였다. 하긴 말년에 그가 제자를 들였다고 해도 내가 알 길은 없지. 우리는 벗이되 벗이 아닌 사이였으니.”
어느덧 빈 병은 여덟 개가 되었고, 시비는 더 이상 술병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는 참 강했지.”
“…….”
“그와의 승부는 항상 반 초 차이였다.”
과거에 대한 감상에 젖었기 때문일까? 북리도천의 말이 서서히 많아졌다.
“조금 앞섰다고 생각했었는데 금세 나를 따라잡더군.”
“…….”
“무던히도 노력해 겨우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세상에 없었다.”
따라잡아?
이 새끼가…… 수련은 너만 하고 나는 놀았냐?
내가 분명히 그때 무승부라고 말하긴 했어도 넌 절대 못 따라잡았어.
내심 발끈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북리도천의 눈빛에 가슴 먹먹한 아련함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탈하더군. 그의 죽음이 마치 나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 간 것만 같았다.”
“…….”
“이제는 영원히 닿을 수 없겠지. 다시 만나지 못할 테니까. 망할 자식, 한번 져 주기나 하고 갈 일이지.”
북리도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실소를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결국 패자로 죽겠지만…… 그놈이 극락에 갔을 리는 없고, 나 또한 지옥이라는 곳이 있다면 가게 될 테니 만나겠지. 그때 승부를 내 보는 수밖에.”
“…….”
진무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눈빛으로 중얼거리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저런…… 어쩌냐? 난 지금 여기 있는데.
마지막까지 져 줄 생각 따위는 절대 없는데.
마음 같아서는 혀를 쏙 내밀어 약이라도 올리고 싶었지만, 이제 와 불로초 덕분에 다시 살아서 왔다고 말해 무엇할까.
아니, 말해서도 안 된다.
말했다가는 승부는 뒤로 미루고 불로초부터 찾으러 갈 녀석이다.
절대 안 될 일이다. 불로초가 뭐 도라지도 아니고, 이놈 저놈 다 처먹게 둘 순 없지. 좋은 건 나만 가질 거야.
“그래, 얼마나 따라잡았는가?”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정도?”
“뭐?”
진무의 심드렁한 대답에 내내 고요하던 북리도천의 얼굴에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북리도천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진무를 한참 바라보다 갑자기 커다랗게 웃었다.
“큭, 크크크, 으핫핫핫! 높아? 높다고?”
“…….”
그래, 웃어라 이 자식아.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근데 그게 그렇게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을 일이냐?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쪼갤 일이야?
“기백만큼은 정말 높이 사 줄 만하군. 과연 그의 전인이야. 그놈이 제자를 아주 제대로 키웠어. 제 놈과 똑같이 말이야.”
북리도천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손을 휘휘 저으며 숨을 가라앉혔다.
“그래, 그래. 내 인정하지. 소신녀와 함께 왔다면 편하였을 길을 거절하고 몸소 육가와 천산의 방해를 뚫고 이곳까지 올라왔으니까.”
말과는 다르게 기특한 손자 보듯 하는 눈빛인 것을 보면 믿지 않는 게 분명한 것 같은데…….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
응? 당장? 바로?
“뭐 하나? 실은 아주 한참 전부터 흥분을 참을 수가 없다네.”
북리도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엉덩이를 들썩이자, 진무가 갑자기 손을 휙 내밀어 막았다.
이 자식아,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니지.
목 따는 망나니도 순서라는 것을 지키는 법인데. 대(大)마교의 교주씩이나 되는 놈이 뭐가 이렇게 급하단 말이냐?
“왜 그러지?”
“거, 사람이 왜 이리 빡빡해?”
“뭐?”
“생각 좀 해 보라고. 내가 지금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거든?”
“…….”
“이야기라고 치면 여기가 대미(大尾)라 이거야.”
미간을 찡그려 가며 당돌하게 나무라는 진무의 모습에 북리도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고 물었다.
“자네…… 그 말은 혹 쉬게 해 달라는?”
진무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는지를 묻는 북리도천을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당연하다.
당연히 쉬게 해 줘야지. 암.
“의외군. 소신녀에게 듣기로는 자네가 꽤나 화가 났었다고 들었는데.”
“그랬지.”
하지만 그땐 그때고, 지금은 아니지.
아직 팔도 치료 못 했다. 내력은 바닥이고.
지금 싸웠다가는 주먹질도 제대로 못 해 보고 뒈질 판인데 너 같으면 싸우겠냐?
“거참,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도 안 이상한데?”
“…….”
진무의 태도에 북리도천은 그만 황망해졌다.
아니, 뭔 놈이 이렇게 당당하단 말인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찾아와서는 대뜸 쉬게 해 달라니.
심지어 마땅히 받아야 할 배려라고 주장하는 태도 아닌가.
“생각 좀 해 봐.”
“…….”
“내가 여기까지 이놈 저놈 줘 패면서 한껏 지친 상태로 왔다, 이 말이야. 이 팔 보이지? 조금만 더 놔두면 썩어. 외팔이랑 싸우고 싶어?”
“아니, 그건 내 사정이…….”
“거참 답답하네.”
“……그게 아니라, 그동안 너에게 베푼 배려가.”
“하아…….”
진무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답답하게 살아?”
“…….”
“그래, 배려를 했다 쳐. 그럼 이왕 한 김에 좀 더 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이건 그냥 생짜다.
물에 빠진 놈 구했다가 덤터기를 써도 이것보단 나을 것이다.
쉬지 않고 나불대는 진무의 말에 북리도천이 허탈하게 웃으며 풀썩 주저앉았다.
“재미있게 하자고, 재미있게. 제법 그럴듯한 대미를 만들어야지. 저 봐, 다들 기대하고 있잖아.”
“…….”
북리도천은 고개를 돌려 진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초옥 주변을 빼곡히 메운 마교의 무인들.
둘의 싸움을 기다리는 그들의 눈동자에 어린 수많은 감정이 느껴져 왔다.
“저렇게 기대하고 있는데 개미 죽이듯이 날 죽여 버리면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스럽겠어?”
“이거 참…….”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한 열흘 정도는 괜찮잖아? 안 그래?”
진무의 말에 휘둘려 버린 북리도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실소를 흘렸다.
“좋다. 딱 열흘만 기다려 주지.”
“그래, 잘 생각했어.”
환하게 웃은 진무가 한술 더 떠서 북리도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그럼 나는 최대한 빨리 회복을 할 테니까, 그사이에 대결할 연무장도 만들어 놓고, 사람들도 불러 모으라고.”
“…….”
“뭐 해? 빨리 움직여야지.”
채근하며 등을 떠미는 말에 북리도천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이나 제자나 어지간히 별스러운 놈이다.
설마하니 자신을 말로 감아서 휘두를 줄이야.
북리도천은 다시금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막 생각난 한마디를 보탰다.
“참, 네 녀석이 마신 술.”
“……?”
북리도천의 시선을 따라 진무가 비어 버린 술병을 내려다보았다.
“천산설초의 즙을 짜내 만든 술이다. 그 안에 스민 영기가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니 지금부터 운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게야.”
처, 천산설초로 만든 술이라고?
어쩐지 뭔가 익숙한 맛이 나더라니.
그나저나 이 녀석, 못 본 새에 배려심만 늘어 가지고…….
진무는 북리도천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더 있냐?”
“…….”
없으면 말지, 째려보기는.
어쨌든 다행히도 열흘이라는 시간을 벌었다.
찬찬히 쉬고 몸을 회복해서 반드시 지옥으로 보내 주마.
가서 열심히 한번 찾아봐라.
내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