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24
424화
진무는 잔잔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높다랗게 지어진 전각의 가장 높은 곳, 정무맹주의 거처.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눈이 시렸지만, 한편으론 따스해서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 온기를 만끽하며 창밖에 빼곡히 서 있는 전각과 내부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정무맹에게는 필생의 난적이었던 자신이 그 심장부에서 이렇게 느긋하게 세상을 바라볼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하기야, 입장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지.
이제는 사패천과 마교의 수장이자 정파를 대표하는 무당의 제자니까.
쪼르륵.
진무가 상념에 젖어 있는 동안 곱게 차려입은 시비가 들어와 정성껏 우려낸 차를 찻잔에 따랐다.
“자, 이리 와 앉으시게.”
“…….”
가득 따라진 찻물이 찰랑거리며 온기를 피워 내자 철지량이 창밖을 바라보던 진무에게 자리를 권했다.
“철관음이군요.”
“허허, 자네가 얻은 위명에 비하면 차도 찻잔도 볼품없을 것이지만 이해하게. 내 원체 사치를 멀리하는 편이라서.”
옆집 사는 여느 평범한 노인처럼 친근하게 웃는 얼굴에 어쩐지 수심이 가득했다.
“…….”
근데 사치를 멀리해?
너 지금 진심이냐?
진무가 어이없는 눈길로 철지량과 그의 거처를 훑었다.
철지량의 방은 한눈에도 낡아 보이긴 했다.
벽체를 이루는 나무가 이래저래 갈라진 것이, 아마 수리를 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그러나 벽에 걸린 저 족자.
이백의 자견(自遣)이다. 그것도 친필.
그 곁에 놓인 난분(蘭盆)은 또 어떻고.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운남에서만 난다는 진귀한 난초가 분명하다.
그뿐이랴?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피부, 고생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듯한 고운 손.
한 마에 은 열 냥은 족히 될 것 같은 화려한 비단옷에…… 머리를 고정한 옥 상투관…….
대체 어딜 봐서 저 인간이 역사상 가장 소탈하고 검소한 맹주라는 거지?
“뭐 하는가? 이리 오시게.”
“…….”
비싸디비싼 것들로 온몸을 칭칭 휘감은 철지량이 있는 대로 소탈한 척을 하며 진무를 향해 손짓했다.
하긴, 처음에 왔을 때도 개인 연무장 어쩌고 하면서 무공 수련 중에 수없이 부서질 바닥을 금강석으로 깔아 두지 않았던가?
“맹이 꽤나 어려운 시기에 찾아왔구먼.”
“……?”
아주 염병을…… 이렇게나 호화찬란하게 살면서.
“여하간에 자세한 이야기는 대군사가 오면 나누기로 하고. 말해 보게. 내 개방의 소식통을 통하여 접하기는 했으나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네. 그 북리도천을 이기다니 말이야.”
“…….”
진무가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 철지량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와중에도 호기심을 잔뜩 드러내며 물었다.
그 모습에 진무는 피식 웃고 말았다.
궁금하겠지.
시대를 이끌어 온 무인으로서 역사상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았던 북리도천과의 승부가.
그 생생한 현장을 자신의 눈에 담지 못해 못내 아쉬웠으리라.
“뭐 별거 없었어요. 그저…….”
잡생각을 지워 버린 진무가 찬찬히 북리도천과 싸웠던 이야기를 풀자, 철지량은 중간중간 감탄사를 터트려 가며 경청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생생히 전해지는 긴장감에 찻잔이 수도 없이 비워지고, 끝내 차가 다 떨어졌을 때였다.
“진무 도장!”
“……?”
문이 세차게 열리고 제갈협진이 반가운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허, 이 사람아. 문 부서지겠네.”
“아, 죄송합니다. 맹주님. 진무 도장이 왔다는 소리에 제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철지량의 가벼운 핀잔에 제갈협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제 머리를 긁었다.
“괜찮네. 나라도 그러했을 것이야. 우리 정무맹의 자랑이 돌아왔으니.”
“암요, 암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호들갑을 떨어 대는 모습에 진무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내가 좀 대단했어야지.
“그래, 마교는 어떠하던가? 내 개방의 소식통을 통하여 접하기는 했으나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네. 그 북리도천을 이기다니 말이야.”
“…….”
옆에 가까이 다가와 앉으며 물어 오는 제갈협진의 말에 진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짜고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첫 소절만 다르고 똑같이 물을 거면 돈 내고 들어라.
피곤하게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그나저나 어째 지쳐 보이십니다?”
“응? 아…… 근자에 어떤 미친놈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
“미친놈이요?”
“그래. 오면서 듣지 못하였던가?”
“뭘요?”
“무풍개께서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으신 모양이구만.”
“……그 대궁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그렇네만 다른 문제가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제갈협진이 연거푸 한숨을 내쉬자 철지량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거들었다.
“자네에겐 말해 줘도 괜찮겠지.”
“…….”
신뢰가 물씬 느껴지는 말에 진무는 양소방을 떠올렸다.
자네에겐 말해 줘도 괜찮겠지.
이게 요새 유행하는 표현일 리는 없고…….
어쨌거나 태자에 관한 내용이라는 건 듣지 않아도 알겠는데 말이야.
극비라고 한 것치고 너무 쉽게 나불거리는 거 아니냐?
이젠 다음 말이야 예상하고도 남았다.
실은 얼마 전…….
“실은 얼마 전 영왕 전하께서 찾아온 일이 있었다네.”
“…….”
역시.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양소방에게 이미 들어 다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은밀하게 찾고 있던 태자의 행적이 갑자기 감숙에서 나타났지 뭔가.”
“……정말입니까?”
그 태자를 만든 게 자신이었지만 놀라는 척은 해 주자.
원래 청취자의 올바른 자세는 적절한 추임새니까.
“그로 인해 맹에서는 가용한 모든 전력을 투입하였네. 이를 알게 된 동창은 물론, 서창까지 그곳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
그럴 테지.
“한데 도무지 태자의 종적이 잡히지를 않아. 마치 누군가 돕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양소방 어른께서 그곳에…….”
여전히 모른 척으로 일관하고는 있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마강이 시선을 이리도 잘 끌어 주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진짜 태자를 찾는 하오문과 삭월천이 한결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음, 그래도 다행 아닙니까? 동창이나 서창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무풍개 어른과 그 휘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인데요?”
그 정도 전력이면 마강도 절대 못 잡을 거고 말이지.
“그리 여겼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또 터져 버렸어.”
“문제요?”
“음…….”
진무의 되물음에 철지량이 진한 침음을 흘렸다.
이어 그간의 고뇌로 귀밑머리가 허옇게 변해 버린 제갈협진이 이를 갈며 말했다.
“어떤 미친 자식이 태자와 관련된 소문을 내 버렸다네.”
“…….”
“망할, 어떤 놈인지 찾아내면 주둥이를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일세.”
그 어떤 미친 자식은 겉으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볼만하다, 볼만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줄 아는 네놈을 위해서 준비해 봤다.
어때? 미치고 팔짝 뛰겠지?
“어쨌든 그 소문 때문에 무림 자체가 풍전등화에 놓여 버렸어.”
“…….”
풍전등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인마.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뭘 그런 걸로 풍전등화야?
아, 신나게 비웃어 주고 싶다.
하지만 괜한 오해를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혀를 깨물어서라도 참아야지.
“그로 인해 영왕도 귀비도 금군을 움직이려 하고 있다네. 다행히 아직 두 세력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있는 터라 결정이 나진 않았으나 머지않아 황제의 명령이 떨어질 게야.”
“…….”
응? 뭐?
자, 잠깐만, 금군이 뭐 어쩐다고?
걔들이 갑자기 왜 나와? 그건 내 계획에 없었던 일인데?
분노로 이를 가는 제갈협진의 모습을 즐기던 진무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황제의 명을 받는 쪽이 어느 쪽이든 무림에 큰 피바람이 불 것은 자명한 일 아니겠는가.”
“…….”
철지량까지 거들고 나서자 제갈협진의 얼굴이 더욱 침울해졌다.
그건 그 나름대로 좋긴 하지만…… 이거 어째 일이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것만 같은데?
“사실 그 때문에 영왕이 찾아와 손을 내밀었을 때 선뜻 잡지 못했었다네.”
“……자, 잠깐만요.”
“……?”
“아니, 너무 과한 생각 아닙니까? 태자를 누가 확보하든 그게 무림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요?”
“하긴, 무당의 도사이자 무인으로 살아온 자네는 정국이 어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지.”
“…….”
“사실 태자의 존재는 무척이나 민감한 사안이었네.”
“…….”
“현 황실을 장악한 두 개의 세력, 귀비파와 영왕파가 서로의 목줄을 움켜쥘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지.”
제갈협진의 설명에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비파와 영왕파?
그건 또 뭐야? 양소방은 그런 깊은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이야기가 갑자기 왜 그렇게 정국의 소용돌이 느낌으로 확장되는 거냐?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것은 그사이에 끼인 새우라네.”
고래는 귀비와 영왕일 것이고…… 그렇다면 새우는 무림이라는 뜻인데.
“귀비가 군권을 얻게 되면 태자를 확보해 죽이고 실권을 장악할 것이야.”
“태자를 죽여요?”
“그래. 태자를 죽이고 모든 죄를 영왕에게 뒤집어씌울 것이야. 그러곤 영왕과 결탁한 무림을 어떻게든 쓸어 버리려 하겠지.”
“그럼, 영왕이 태자를 확보하게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그 또한 문제일세.”
“……?”
“영왕이 우리의 도움 없이 태자를 직접 확보하게 되면 귀비파를 처단하고 나서 우리를 가만둘 것 같은가?”
“설마 팽이라도 당한다는 겁니까? 대궁을 막아 달라 했다면서요?”
“맞아. 대궁을 막아 달라 했지. 문제는 그다음일세. 무림과 대궁의 싸움. 어떤 결과가 나도 영왕은 어부지리를 취하려는 것이네. 누가 승리하든 금군을 사용해 뿌리째 뽑아 놓으려 하겠지.”
“뭐라구요? 어째서요?”
“본시 황가는 무림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자신이 만든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자들이 제멋대로 세상의 주인인 양 행동하는데 좋아할 리가 없지.”
“…….”
“이제까진 관무불침 어쩌고 하며 그냥 내버려 두었지. 괜히 분란을 만들어 봐야 금군도 무림도 손해만 입을 것이 뻔하니까. 하지만 이젠 달라. 무림인들의 수를 줄여 줄 대궁이 오고 있지 않은가.”
태자를 이용한 귀비의 숙청.
국조를 뒤흔들려는 대궁과 그동안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무림을 무너뜨리려 한다, 라.
“영왕이 무림을 이용해 두 마리, 아니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다는 말입니까?”
“내 추측은 그렇다네.”
“…….”
“해서 나는 그의 손을 잡을 때, 황제의 직인이 찍힌 면책권을 요구하였네. 정무맹을 무림 최고의 자리에 올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최악의 순간에 무림을 보존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였지.”
세 가지 목적을 이루려는 영왕도 대단하지만 제갈협진도 대단하다.
관무불침이라는 태조의 칙령은 구두에 불과했으나 문서로 남기게 되면 그것은 법제가 된다.
황제의 영이니 대를 지나도 함부로 어길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역시 얌생이 놈.
풍전등화 어쩌고를 다 예상했으면서도 제 놈 살길은 전부 열어 두었구나.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소용없게 되었어.”
묵묵히 듣고 있던 철지량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왜요?”
“영왕이 그 소문으로 인해 우리를 불신하게 되었다네.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몇 번 접견을 청하였으나 도무지 만나 주질 않으니.”
“…….”
면책권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단 소리인가?
망할, 이런 것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뛰는 놈과 나는 놈을 모조리 제칠 생각만 했지, 그로 인해 벌어질 문제들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역시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굽는다고 전략과 전술을 아무나 세우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빌어먹을. 이래서 옛 어른들이 공부해서 남 주는 거 아니라고 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