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49
449화
진무는 당황한 기색을 얼른 지우고 공손히 인사했다.
“대태감께서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담담한 어조의 질문에 위정필은 사람 좋게 웃으며 답했다.
“허허, 뭐 다른 이유야 있겠소이까? 귀비께서 육부 상서들에 대한 처결 내용을 궁금해하시어 잠시 살펴보러 왔소이다.”
“아, 그러십니까?”
육부의 상서? 왕직이겠지.
위정필이 온 이유는 뻔했다.
모든 환관을 총괄하는 사례태감은 황제를 바로 곁에서 보필하는 직책이고, 귀비는 곤녕궁, 즉 내궁의 주인이다.
둘이 업무적으로 엮일 일이 없으니 귀비가 알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응당 곤녕궁의 전령이나 시비를 보내야 마땅했다.
아무리 한패라지만 위정필을 직접 보낸다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
그런데도 그가 직접 왔다는 것은 왕직의 신변이 법도를 무시할 만큼 궁금하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귀비가 그만큼 위기에 몰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육부의 상서들이 꽤 많은 비리를 저지른 모양이지요?”
“예. 그들의 비리를 조사한 내용이 한 수레에 달합니다.”
“저런, 저런……. 고위직일수록 청렴결백하게 자신을 돌보고 나라에 충성하여야 하거늘…….”
“…….”
진무는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차는 위정필을 보며 내심 코웃음을 쳤다.
똥 묻은 개 주제에 겨 묻은 개를 나무라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것 봐라.
이놈아, 내가 너를 모를 것 같으냐?
사례태감 위정필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 황성의 밤을 지배하는 자.
허허거리며 웃고 있으나 그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사갈처럼 철퇴를 내리는 독한 인물이라 했던가.
휘하의 환관과 시비들에게 공포의 상징으로 군림하는 자가 바로 눈앞의 이 노인네였다.
그런데 희한하게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안 나왔다.
잡아넣을 명분이 없다는 뜻이었다.
원래 뒤 구린 놈들끼리 잘 뭉치는 법인데, 이놈은 조금 독특한 경우라고 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귀비나 왕직이 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사례태감이었고, 따로 받아 처먹은 것도 없는데 어찌 둘과 한편이 되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나저나 어찌 서창 제독은 보이질 않는 게요? 내 듣기로 그 역시 비리 죄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묵묵히 걷던 위정필이 흘러가는 말처럼 물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이제야 본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아서라, 이놈아.
내가 혁련무강이다.
니놈이 기저귀 차고 빽빽 울며 기어 다니던 시절에 사파의 중심에서 사기를 외치던 나다.
속으로 위정필을 한차례 비웃은 진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안 그래도 그 때문에 귀비마마께 참으로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죄를 지었더군요. 그자가 추국장에서 잘못 입을 놀리면 마마께 누가 될까 싶어 별도의 공간에서 취조 중입니다.”
“흐음, 그랬군. 알았소. 내 그저 의아하여 물은 것이니 크게 신경은 쓰지 마시오.”
위정필이 손을 휘휘 내젓자 진무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며 정중히 그를 안내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추국 중이라 바쁘긴 하지만, 대태감께 차 한잔 대접할 시간은 됩니다.”
“핫핫, 좋지요. 들어가십시다.”
재차 사람 좋게 웃으며 진무의 제안을 선뜻 수락한 위정필이 함께 온 호위 태감들에게 명했다.
“예서 기다리며 누구도 접근시키지 말거라.”
“예, 대태감.”
그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호위 태감들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물러났다.
방으로 들어가 마주 앉은 둘 앞에 차가 놓였다.
진무는 시비를 물리고 나서도 한참을 차만 홀짝이다, 은근히 걱정 어린 어조로 물었다.
“이번 제 행동으로 마마께서 역정이 많이 나셨습니까?”
지금부터는 서로의 속마음을 파악하기 위한 설전(舌戰).
혓바닥이라는 칼날 위를 걸어야 한다.
저쪽의 동태를 살피고자 던진 질문이었으나, 이쪽의 배신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자세히 말해 줄 리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도 상관없다.
믿지는 않았을 것이나 이용하려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으니 오죽이나 아플까?
아마 위정필의 반응이 곧 귀비의 반응일 터였다.
“암요, 암요. 당연한 일이지요. 그동안 공들여 심어 둔 수족으로도 모자라 믿었던 서창 제독까지 잡혔으니, 마마의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마마를 뵐 낯이 없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우도사께서 허투루 조사를 하셨을 리는 없고……. 영왕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닌가, 뭐 그런 걱정이 문득문득 들기는 하더군요. 이 늙은이의 기우겠지만 말이오, 허허.”
이미 다 알면서 너스레는.
코웃음을 친 진무가 위정필을 약 올리려 고개를 내젓는데.
[그대의 저의가 무엇이오?]“……?”
응? 뭐라고?
진무는 웃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는 위정필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이 전음은?
진무는 싸늘히 굳은 표정으로 재빨리 기감을 퍼트렸다.
방 전체를 장악했음에도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내 기감을 속일 정도로 뛰어난 은신자가 있다고?
“우도사, 어찌 그러시오?”
[밖에서 듣고 있으니 이리 물을 수밖에 없음을 용서하시오.]“…….”
은신자를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진무의 귀에 두 가지 말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들렸다.
입을 통해 전해진 말과 기를 통해 전해진 전음.
그리고 그 대상은 분명…….
[나는 무공을 익히지 못하였기에 전음을 오래 사용할 수 없소. 그러니 어서 답해 주오. 나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요.]“…….”
진무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뭔데 이거?
이건 또 무슨 신박한 상황인데?
이 노인네,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것이 분명한데 전음을 할 줄 알아?
진무는 황당함이 도를 넘은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위정필을 쳐다보기만 했다.
땀이 흐르고 있다.
더워서 흐르는 땀이 아니었다. 사력을 다하고 있기에 흐르는 진땀이 위정필의 피부에서 솟아나 턱 아래에 방울방울 맺혔다.
불뚝 돋아난 힘줄과 핏발 가득한 눈동자가 무언으로 그의 의지를 대변한다.
급기야 진무를 바라보는 위정필의 입가로 한 줄기 핏물이 새어 나와 땀과 섞여 바닥에 떨어졌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혼절 직전임에도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당신…….”
진무가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고개를 내저은 위정필이 이내 탁자 위로 쓰러졌다.
털썩, 쿠당당탕.
“…….”
진무는 망연히 그를 응시했다.
너무 놀란 탓에 막지도 못한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소란을 들은 호위들이 당장에 뛰어 들어왔다.
“대태감!”
“…….”
호위가 위정필을 안고 맥을 짚는 동안에도 진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 그냥…… 갑자기.”
“갑자기요?”
“…….”
호위의 다그침에 진무가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차마 내력이 없는 상황에서 전음을 사용하였기에 기혈이 뒤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진무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전음을 쓰면서까지 진무가 감춘 뜻을 알고자 한 위정필.
귀비의 사람인 그가 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를 불안하게 했던 변수들이 갑자기 가시화되는 기분이었다.
“젠장, 근래 쇠약하시다더니 병증이 도지신 게로군. 기혈이 상했다. 서둘러 내의원으로 모셔야겠다.”
“예.”
맥을 짚던 상급자의 말에 다른 호위가 대답하고 급히 위정필을 업으려 했다.
통상적이라면 당연한 절차였지만 왠지 꺼림칙했다.
위정필은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어느 정도 경지를 깨달은 무인들에게야 전음이라는 것이 남몰래 의사를 주고받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막연한 기예였다.
물론 내공이 없다 하여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용하는 생기(生氣)를 가지고 있으니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위정필이 전음을 사용하였다면 생기를 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사용하면 기혈이 뒤틀려 평생 반신불수로 살아야 할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 뭐지?
진무는 그를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호위들을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리게.”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태감의 상태가 이리도 위중한데!”
호위가 발끈했지만 진무는 답하지 않고 위정필의 손목을 잡고 상태를 살폈다.
“…….”
좋지 않다.
기맥이 불안정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혈도가 아예 터져 버렸다.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군.”
“예?”
“상태가 너무 위중하여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할 충격을 견디지 못할 거야.”
“…….”
진무의 말에 호위가 난감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했다.
“이곳은 내가 살필 터이니 자네는 속히 태의(太醫)를 불러오게.”
“예!”
명을 받은 호위가 날 듯이 달려가고 난 뒤 진무는 위정필을 살폈다.
뭐가 됐든 일단 목숨부터 살리고 봐야지.
우우웅.
진무가 기운을 끌어 올리자 푸른빛이 일어나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히 채웠다.
“이, 이건!”
안온함이 느껴지는 푸른 선기에 남아 있던 다른 호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러나 있게. 그의 상태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맥을 돌볼 것이야. 지금부터는 미세한 충격도 받아서는 안 되네.”
“예? 예!”
진무의 말에 호위가 화들짝 놀라 방 밖으로 물러났다.
무릇 영험한 장소에 오색찬란한 빛이 스민다 하였다.
호위가 보기에는 지금 방 안이 그러해 보였다.
푸른 선기가 은은히 깔려 흐르는 방 안은 마치 신선계처럼 느껴졌고, 옅은 빛을 머금은 채 위정필을 돌보는 진무는 꼭 신선 같았다.
“으음…….”
진무의 손을 통해 푸른빛이 몸에 스며들자 얼마 뒤 위정필이 작은 신음과 함께 눈을 끔벅이며 정신을 차렸다.
기혈이 뒤틀리며 생긴 사기가 진무의 선기에 잦아든 덕분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방편일 뿐, 치료가 된 것이 아니니 무리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으으으…….”
“말은 나중에. 일단은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오.”
“…….”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겠지?”
진무의 나지막한 질문에 위정필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눈동자를 굴려 호위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감추고 있는 게 뭐기에 이렇게까지?
“누가 들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이미 나의 기운으로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으니까.”
“으으…….”
그랬다.
진무가 위정필을 치료하기 위해 뿜어낸 선기는 방에 기막을 친 듯한 효과를 내었다.
아마 밖에 있는 호위는 치료 중이라 생각할 테니 의심을 품진 않을 것이다.
문이 열려 있기는 하지만 진무가 몸으로 위정필을 가리고 있으니 보이지도 않을 것이고.
“으으…….”
위정필이 진무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그 힘없는 눈빛에 담긴 간절함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정신을 차리거든 병증을 핑계로 사가에 돌아가 있으시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내가 그대의 거처로 찾아갈 테니까.”
“……으.”
비로소 차분해지는 위정필의 눈빛에 진무가 잔잔히 웃었다.
“지금은 일단 쉬시오.”
툭, 스르륵.
진무가 수혈을 짚자 위정필의 눈이 감겼다.
얼마 가지 않아 호위가 데려온 태의가 침으로 막혀 버린 혈도를 뚫고 난 뒤에야 호흡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안정을 위해 사가로 옮긴 위정필의 침소에 진무가 은위단과 함께 은밀하게 숨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