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15
15화
“……슬르 두시시오.”
최선을 다해 말했다.
입술이 터지고 부풀어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죽을힘을 다해 말했다.
그러곤 자신의 뜻이 제발 전해지기를 빌면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으로 하염없이 눈빛을 보냈다.
“살려 달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
황신이 냉큼 답했다.
개천주에게 맞은 사람 본 게 어디 한두 번이며, 하루 이틀이던가?
근자에 좀 뜸하긴 했지만, 처맞고 난 놈들은 죄 저 모양 저딴 식으로 말했다.
하물며 남보다 뛰어난 청각을 지닌 황신 아닌가. 개미 기어가는 양 작은 소리며 발음으로도 알아듣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황신의 통역에 진무가 피식 웃고는 바닥에 넓게 펼쳐진 멍석처럼 변해 버린 운연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누가 죽인대?”
“…….”
운연이 힘겹게 눈을 끔벅였다.
“아프냐?”
“…….”
“그래도 처누워서 이럼 안 되지. 내가 이래 봬도 너한텐 사조이신데……. 안 그냐?”
“……녜?”
일어나란 이야긴가?
하지만 지금 그의 몸 상태로는 눈꺼풀을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거 참 말귀를 못 알아먹네. 눈치는 있어 보이는데…….”
스윽.
슬며시 들린 진무의 손이 기적을 일으켰다.
파파박!
맞아 죽고 싶지 않다는 간곡한 염원이 만들어 낸 미증유의 힘이 운연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팍! 파팍!
어깨너비로 벌린 발에 각 잡힌 부동자세까지.
몸이 알아서 움직이게 두며, 운연은 멍하니 생각했다.
역시…… 인간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한 게 틀림없다.
조금 전까진 아파서 죽을 것만 같은 몸이었다.
자근자근 짓밟힌 덕에 솜털 하나까지도 고통스러웠는데, 진무의 그윽한 눈빛이 마치 천고의 영약이라도 되는 듯 자신을 고쳤다.
그리고 온 신경이 고래고래 외쳤다.
절대로 그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
그의 신경을 거스르면 안 된다.
여기서 더 맞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즈스하니다!”
여전히 발음은 되지 않았고, 해석은 황신의 몫이었다.
“자, 그럼 대화를 나눌 준비는 된 것 같은데…….”
“…….”
“일단 좀 앉을까?”
진무가 손에 든 뼈다귀를 옆에 툭 던지더니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게 되겠냐, 미친놈아?
서 있는 것도 가까스로였다.
앉았다가는 그대로 흘러내려 버릴지도 몰랐다.
“……거 앉으라니까?”
“느에!”
스산함이 깃든 목소리에 또다시 인간의 위대한 잠재력이 발휘되었다.
운연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냉큼 진무의 옆에 착석했다.
직각을 이룬 무릎, 꼿꼿한 허리, 팽팽히 당긴 턱, 곧게 뻗은 양팔, 가볍게 말아 쥐고 무릎에 얹은 양손.
공자께서 별안간 살아 돌아오셔서 박수 쳐 줄 만큼 예의 바른 자세였다.
“원 녀석, 뭘 이리 긴장하나? 술도 한잔하고 고기도 좀 먹고 해. 멧돼지가 아주 잘 익었어.”
“…….”
진무가 잔을 내밀자 황신이 냉큼 채웠다.
“내가 원래 격식 같은 걸 잘 안 따지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
처누워서 대답 대신 눈 깜박거렸다고 때리려 든 건 어디의 누구인지 모를 지경이다.
“편하게 해, 편하게. 그런 살벌한 자세는 이런 고즈넉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안 그래?”
“눼? 아, 하하하. 눼.”
진무의 웃음에 운연이 최대한 살갑게 답하며 엉망진창인 얼굴로 열심히 따라 웃었다.
편하게…… 되겠냐? 그렇게 줘 패 놓고?
와중에 뒤는 안 보냐? 눈 없어?
슥슥. 삭삭.
망할 황신 놈을 비롯해 소동보와 각출 놈이 뒤에서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져서 뒤통수가 따가울 지경이다.
비수로 고기를 자르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몸에 와닿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뭐? 고즈너억?
하도 고요해서 누구 하나 뒈져도 모르겠고, 하도 아늑해서 뒈진 놈이 눈감자마자 저승 문턱까지 가겠다.
“그래. 기억이 안 나신다고?”
“…….”
힐끗 쳐다보며 묻는 진무의 말에 운연의 전신 솜털이 바늘처럼 곤두섰다.
“흠, 이거 참 충격이 부족했나? 살펴본 바로는 뇌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데 말이야.”
“……?”
진무가 슬쩍 손을 뻗어 까딱거렸다.
“거, 울혈이 쌓인 것 같지도 않고. 아까 그 어설픈 연기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니가 거짓말하는 건데 말이지……. 이거 참…….”
“……!”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한계점까지 돌린 운연의 눈알에 각출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뼈다귀를 집어 드는 모습이 스쳤다.
“방금! 방금 기적적으로 되찾았습니다. 암요, 되찾고말고요. 태어난 순간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네요. 이런 놀라울 데가 있나!”
“…….”
어쨌든 기억난다는 아무 말에 진무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운연이 속으로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미친! 얼마나 놀랐는지 처맞고 나서 어눌해졌던 발음까지 정확해졌다.
“그거 잘됐네. 참으로 다행이야.”
“모두가 사숙조님의 충격 요법이 가져온 크나큰 은덕입니다.”
“허허, 감사할 줄도 알고. 아주 바른 자세야.”
“과찬이십니다.”
“그래, 운남에서 왔다고?”
“예?”
“아냐?”
진무가 눈을 샐쭉하게 뜨자 운연의 눈이 당황으로 댕그래졌다.
이런 씨발…….
이야기도 기승전결이 있고, 위기가 왔으면 해소도 있어야지.
뭔 놈의 질문이 죄 위기위기위기위기야!
하지만 여기서 사실대로 토하면?
실은 역문현 촌놈이 아니라 궁의 후예이고, 너를 죽이기 위해 무당으로 왔다고 하면?
……살려 둘 리가 없지.
하니 이것만은 절대로 사실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
이제 겨우 양의심공을 얻은 참이다.
여기서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다.
다가올 찬란한 미래의 머리끄덩이조차 보지 못했는데 여기서 고즈넉하게 뒈질 수는 없다.
잡아떼기나 해 보자.
혹시 아는가? 버티다 보면 기사회생할 방도를 찾게 될지도…….
뭘 아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버틴다.
“그렇습니다. 저는 운남, 역문현에서 태어났습니다.”
“호오? 그으래?”
“예!”
“흐흠, 이름은 야율성이시고?”
“……예!”
“허허, 참.”
“…….”
“좋아, 믿어 주지. 그런데 말이야, 묵룡기는 어찌 익혔지?”
“예?”
“묵룡기를 익혔던데? 아니야?”
“그, 그렇습니다.”
그것만은 발뺌할 수 없었다. 이미 다 보여 버렸으니까.
들킨 건 순순히 까발리는 것이 좋다.
아니라고 해 봐야 괜한 의심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흐흠, 거참 신기하단 말이야. 운남에 사는 야율성이가 어찌 화산 금룡협에 남아 있던 묵룡기를 익혔을까?”
“그, 그건…….”
운연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살면서 이렇게 머릴 써 본 것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그…… 얻었습니다.”
“어디서? 금룡협에서? 보자, 거기서 묵룡동이 없어졌다는 소리를 들은 지가 한 오 년 되었거든? 그래, 뭐. 대충 오 년 전에 니가 발견했다고 치고…….”
“…….”
“그곳에서 묵룡기를 얻어서 오 년 만에 나타나 무당에 입도했다는 거네, 그러니까?”
“…….”
“그것참 말 된다, 그치?”
순간 운연은 숨이 턱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열심히 머리를 짜내고 있었는데 꺼내 놓기도 전에 차단당해 버린 느낌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금룡협에서 얻은 묵룡기를 수련하기 위해서 오 년간 짱박혀 있다가 세상으로 나왔다든가 하는 소설은 쓰지 않기 바란다. 식상하잖아. 그리고 이미 개방이며 삭월천, 하오문까지 운남을 뒤지고 있거든? 니 과거 찾겠다고.”
“……!”
진무가 그 재수 없는 이빨들을 하얗게 드러내며 웃을수록 운연의 속은 점점 더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이 간악한 도사 놈, 벌써 뒷조사를 시켰을 줄이야.
생각조차 못 했다. 이 치밀하고 비열한 놈…….
다행히 자신의 행적은 무려 이십 년 내내 운남에 살아온 것으로 꾸며 놓았다.
개방, 삭월천, 하오문.
세 정보 조직이 자신의 뒤를 캔다고 해도 절대로 궁과의 연관성을 밝혀내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그 이십 년이다.
이십 년간 운남에 살다가 뜬금없이 금룡협에 나타나 묵룡혼원공을 얻어 갔다는 것을 어떻게든 말이 되게 만들어야 하는데…….
운남서 금룡협이 집 앞 우물가는 아니지 않은가?
산책 나왔다가 얻었다고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다.
시간 관계가 너무도 명확하니, 사실에 입각해서 약간만 꾸민다.
“……주웠습니다.”
“…….”
“…….”
일순 정적이 흘렀다.
“주워?”
“예!”
“운남에서?”
“아무렴요!”
“…….”
“…….”
탁자에 턱을 기댄 진무가 운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주웠다라……. 믿으라고 하는 개소리인 거지, 그러니까?
“흐흠…….”
“…….”
진무가 고개를 삐뚜름하게 꺾자 운연이 다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새끼, 기억 상실증에 걸린 척하길래 좀 어루만져 준 거 가지고 쫄기는.
무당의 새로운 제자 운연.
처음 보았을 때는 묵룡기를 익힌 놈에 대한 신기함이었고, 호기심이었다.
비록 재미를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이제까지 벌인 일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는 확인했다.
실력과 인성.
묵룡혼원공은 꽤나 까다로운 녀석이다.
인연을 맺기도 어렵지만, 그 기원이 타인에게 있기 때문에 욕심이 과하면 마성에 빠져들기 쉽다.
하나 다행히 운연은 그리 엇나갈 놈은 아니었다.
비록 연기였을지언정 어려운 이를 보고 도울 줄도 아는 녀석이었고, 무엇보다 그가 상대했던 산적들 중 죽은 놈이 하나도 없었다.
필요하면 제대로 가르쳐 줄 생각도 있었다.
스스로 인연을 맺은 녀석이니까.
다만 아직 과거가 미심쩍다는 것이 문젠데…….
“좋아. 그럼 어디, 어떻게 줍게 되었는지 말해 봐라.”
“에…… 그것이…….”
“왜?”
“아니 그것이…….”
“…….”
운연이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자꾸 흐리자 진무가 가만히 웃다가 손을 휙 뻗었다.
탁!
손안에 날아와 잡히는 뼈다귀.
허공섭물이 참, 이럴 때 쓰기 좋다니까. 각출이 놈 시킬 필요도 없고.
“시, 실은! 제가 운남에 살 때…….”
“…….”
운연이 재빨리 묵룡혼원공을 얻게 된 경위를 어떻게든 짜내며 설명했고, 진무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말인즉슨…….
운남 역문현에서 살아가던 야율성이 어느 날 상처를 입은 한 노인을 만났다.
그는 죽었고, 장례를 치르려 소지품을 확인하는데 품에서 작은 서책 한 권이 나왔다.
죽은 이의 가족이라도 찾아 주려는 생각에 읽은 것인데…….
그게 묵룡혼원공의 채기법이었다.
희한하게도 자신에게 꼭 맞는 듯이 익혀졌고, 처음에 사람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짐승의 기운으로 대체한 끝에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단다.
그 과정에서 몇 마리 죽인 적도 있다고 했다.
개연성에 도덕성까지 갖춘,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에 대한 의심은 여전했다.
운연이 쓴 무공부터가 운남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대대로 내려오는 가전 무공 같은 소리.
경험을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어찌 모르겠는가?
운남의 무공은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운연의 그것처럼 깔끔하지 않았다.
뭐…… 그 정돈 이해한다 치자.
아예 교류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조상 중 하나가 중원에서 흘러든 무공을 익히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어차피 운연의 지난 행적은 삼패의 정보 조직이 알아서 조사해다 바칠 것이다.
그때 가서 녀석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면 된다.
자,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채기법을 서책에 베껴 적었다는 그 노인네인데…….
누굴까?
서책까지 만들었다면 필시 금룡협을 찾았음이 틀림없는데.
“쯧쯧,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그 위험한 것을 아무나 훔쳐 가게 하고 말이야.”
진무가 얼굴을 찡그리며 턱을 쓸고는, 각출을 불렀다.
“야! 각출아!”
“예?”
“그, 화산…… 아니다.”
“예?”
그래, 뭐 하러 귀찮게 바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시킨단 말인가?
이제까지 바쁘다가 때마침, 아주 시기적절하게 할 일도 없지 않던가?
직접 가 보면 될 일이다.
자신이 조사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기도 할 것이고…….
묵룡동을 함부로 관리한 화산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야단까진 아니어도 타박은 좀 해야지.
진무가 천천히 일어나 황신과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예?”
“간만에 세상 나들이다.”
“예?”
“……화산 간다고, 이 새끼들아.”
“…….”
화산엘? 갑자기?
황신과 아이들이 멍한 표정으로 진무와 자신들이 각고의 노력을 바쳐 만든 집을 바라보았다.
그래, 니가 이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어야지.
그래도 집구경이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
방이 몇 갠지, 부엌은 어떤지, 침상의 안락함은 괜찮은지…… 궁금할 수도 있는 거잖아?
문 열 때 왠지 어울릴 것 같아서 ‘빠라바빠빠~! 빠라바라~!’ 하는 효과음을 내 주려고 화음도 열심히 연습했는데!
방 안이 삭막해 보일까 봐 화사한 꽃도 몇 송이 꺾어 장식했는데…….
하지만 늘 그랬듯 진무의 말에 토를 다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속으론 인세에 존재하지 않을 수많은 욕을 남발하면서도, 셋은 이미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리고 진무가 운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 말, 지금은 믿어 주마. 대신에 거짓이면……. 그땐 진짜 뒈진다, 알겠니?”
“…….”
다정한 말투와 그린 듯한 미소 속 진득하게 묻어나는 스산함에, 운연이 몸을 움찔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