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80
50화
진무와 규사의 싸움은 이란격석(以卵擊石)이라는 말처럼 한쪽의 우세가 극명했다.
그래, 이란격석.
무모한 도전을 일컬어 그리 말한다.
그러나 제 몸이 부서질 것 알면서도 던지고, 또 던지다 보면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은 어느 순간 측은지심을 건드리고 동정을 유발하며, 응원을 산다.
응원은 사기가 되고, 사기는 전의로 변해 때론 천지를 흐르는 물길마저 되돌리는 힘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염병할 놈의 것.
두들길 수나 있어야 말이지!
흔적? 그딴 게 남아야 동정이라도 받을 게 아니냐고!
빌어먹을 바위가 날쌔도 너무 날쌔잖아! 공격하는 족족 피해 버리는데 흔적은 무슨 놈의 흔적이냐고!
쩌어억!
휘두른 여의에 때려 맞은 규사가 땅바닥을 요란스럽게 뒹굴다 철퍼덕 쓰러졌다.
바들, 바들.
하도 처맞아서인지 이젠 다리에 힘도 없다. 법구에 몸을 지탱해서 일으키는 것이 고작이다.
아니, 실은 일으키고 싶지도 않았다.
또 맞을 텐데…….
처절하디처절한 싸움을 이어 가던 규사가 문득 주위를 바라봤다.
자신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 박피옥의 귀와 요, 괴들…….
“저런, 또 맞았어.”
“휴, 내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지.”
“…….”
애초에 배신자들이 판치는 박피옥에서 동정 따윌 기대한 자신이 멍청했다.
기특하게 망할 새끼들. 그게 맞고 있는 이를 대하는 태도냐!?
하지만 나만 아니면 되는 놈들을 두고 기대는 뭔 얼어 죽을 놈의 기대란 말인가?
바위 같은 진무와의 싸움에서 얻은 것은 압도적인 강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전신이 녹신녹신해지는 고통뿐이었다.
빠아아악!
처박히고.
털썩!
쓰러진다.
끝내는 더 이상 후들거리던 다리조차 말을 듣지 않았다.
상황이 그 지경이 되자 진무가 공격을 멈춘 채 다가왔다.
어깨에 여의를 걸치고 빤히 내려다보는 진무의 모습에 규사는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더 싸워 봐야 맞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겠는가?
이젠 지쳤다. 죽인다면 부활해서 좀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졌습니다.”
규사의 패배.
청상과 황신, 백표의 선전에 이생의 처절하고 미약한 노력이 더해져 승리가 확실시되어 가던 상황에서, 그 패배 선언은 조금이나마 남았던 박피옥의 전의마저 앗아 가 버렸다.
툭, 투툭.
손에 들렸던 법구는 사라지고 싸움을 멈춘 박피옥의 생명체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싸움은 끝났다.
박피옥이 고작 다섯에게 무너진 것이다.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던 그때, 물끄러미 규사를 내려다보던 진무가 싱긋 웃었다.
“재미있었다, 제법.”
“…….”
“또 다른 놈은 없어? 너보다 센 놈이면 좋겠는데?”
규사는 가볍게 웃으며 묻는 진무의 얼굴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재미있었다니…… 그게 단가?
“죽이지…… 않는 거요?”
“어차피 살아날 놈을 뭐 하러 죽여? 귀찮게.”
“……?”
“진 놈에겐 관심 없다. 뭐, 체력을 회복해서 덤비려면 더 해 보든가.”
진무의 말에 규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통상 싸움에서 승리하고 나면 목을 따든 충성 서약을 강요하든 둘 중 하난 해야 정상 아닌가?
교마만 해도 자신에게 도전해 온 상대의 껍데기를 수집하기에 여념이 없는데…….
그저 시큰둥하니 서서 입맛을 다시는 진무를 멍하니 보다가, 규사는 픽 웃어 버렸다.
희한한 놈이다.
지계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형의…….
“후우…….”
잠시 심호흡하며 몸을 회복한 규사가 겨우 추슬러 일어나 진무에게 물었다.
“해형장과 분절형장을 공격하신 분이죠?”
“맞아.”
패배를 시인한 순간 공대로 바뀐 말투에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박피옥주의 자리에 도전할 생각이신 모양이군요.”
“아니.”
“예?”
“자리 따위가 왜 필요해? 난 교마면 충분해.”
“그게 무슨?”
“원래 지계라는 곳이 자신을 이긴 강자에게 충성을 바친다며?”
“그야……. 대체적으로는…….”
“나한테 지고 나면 나한테 충성할 텐데, 박피옥주의 자리를 빼앗을 이유가 뭐 있겠어? 안 그래?”
“…….”
확신에 찬 진무의 말에 규사가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싸운다, 이긴다. 넌 내 거.
참…… 간단명료하다.
대체 어떤 뇌 구조를 가지면 생각이 이리 단순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누가 그런 말을?”
“응? 아냐? 쟤가 그러던데?”
“…….”
진무가 손가락을 쭉 뻗어 가리키자 규사가 이생을 쳐다봤다.
“저자는?”
“도산옥의 귀 이생이다. 제법 아는 게 많은 녀석이지.”
“아…… 도산옥. 그렇군요. 하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응? 완전히 틀리지 않다는 것은 무슨 말이야?”
“아마 도산옥의 귀라서 정확히 알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다만 박피옥에서의 충성은 개념이 조금 다릅니다.”
“달라?”
“예, 이곳은 배신자들이 모인 곳이니까요.”
“……?”
“모르십니까? 배신자의 특성?”
규사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알긴 알지. 내가 왜 몰라?
소싯적에 배신 하면 혁련무강이었을 정도로 유명했는데.
잘난 놈 배신하고, 못난 놈 짓밟고, 도와준 놈 등에 칼 꽂고……. 배신과 배반을 일삼으며 승승장구하여 사파의 지존까지 오른 몸이 이 몸이신데.
“당장에는 힘에 굴복해 충성해도 항시 기회를 엿보는 것이 배신자들의 속성입니다. 충성이라는 것은 그저 척! 일 뿐이죠.”
“흠……. 그럼 교마가 나한테 패배해도 충성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건 곤란한데?”
“척은 하겠죠? 앞에서는.”
“흠.”
진무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긴 뭐, 협비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패배로 인해 자신 아래가 되긴 했지만, 결국 그도 귀모의 명은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협비와 달리 교마는 자신의 신력을 확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세류가 남긴 상흔을 통해서.
아직 일러바치지 않았는지 귀모가 개입하지 않았으나 만약 놈이 나중에라도 꼰지르면?
지금껏 방관하던 귀모가 직접 나설 수도 있다.
그건 곤란하다.
골똘히 생각하던 진무의 눈이 불현듯 살벌하게 빛났다.
결국, 살마멸구.
소문이 새기 전에 입을 막는다.
속으로 잔인한 결심을 하던 진무가 문득 의아한 표정으로 규사를 쳐다봤다.
“그런데 넌 왜 이런 말을 해 주는 건데?”
“당장은 패배했으니 충성을 해야지요.”
“……나중에 배신할 수도 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희한하게도 어느 순간 배신의 욕구가 충동적으로 샘솟거든요.”
히죽 웃는 그 모습에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정체성 확고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런 놈이 지금까지 교마에게 잘도 충성했구나?”
“그야, 제 능력으로는 어쩌지 못할 힘을 가졌으니까요.”
“그놈이 그렇게 강해? 등짝에 몰래 칼도 못 꽂을 정도로?”
“강하기도 강하지만, 교마 님의 손에 세류가 들려 있는 이상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류? 교마의 법구?”
“예.”
“그게 왜?”
“세류가 가진 기이한 능력 때문입니다.”
“능력이라…….”
세류가 가졌다는 세 가지 능력.
조음에게 두 가지를 들었으나 규사가 말한 능력과는 다르다.
즉, 조음에게 듣지 못한 세 번째 능력일 것이다.
규사의 말대로 암습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능력이라면 사령과 비슷한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세뇌와 같은 금제를 거는 걸 수도 있고…….
“자세히 말해 주겠어? 그 세류라는 법구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서. 환형이랑 위안은 아는데, 나머지 하난 모르거든.”
“세류의 세 번째 능력은…….”
진무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며 머뭇거리던 규사가 입을 떼려던 찰나.
“천주님!”
싸움이 끝난 이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반경 오십여 장의 원을 그려 두고 주위의 접근을 막던 황신이 귀를 쫑긋거리며 다가와 급히 보고했다.
“다수의 무리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발걸음이 매우 급박합니다.”
“다수?”
“예.”
“흠.”
교마의 세 번째 능력이 몹시 궁금하긴 했지만, 누가 오고 있다니 살피는 게 먼저라 판단한 진무가 박피옥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격과 함께 전부 때려 부숴 놓은 터였고, 그 피해 규모가 심해 재생이 더뎠기에 멀리까지 휑하니 잘 보였다.
황신의 말대로 누군가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저놈은…… 그러니까…… 어? 육장인데요?”
멀어서 점처럼 보여 눈으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황신의 청각이 미세한 발걸음의 차이를 구분해 냈다.
“육장?”
“예. 흐음, 그런데 왜 혼자일까요?”
“혼자? 조음이 없단 말이냐?”
“예, 와중에 땅을 누르는 힘이 제각각인 것을 보니…… 부상을 당한 모양입니다.”
“…….”
아무리 미끼로 쓴 녀석이지만, 자신의 명을 수행하다가 상처를 입은 놈을 방치할 순 없었다.
자신의 울타리 안쪽으로 들어온 이상, 싫든 좋든 최소한의 도리는 다해야지.
빠르게 결정을 내린 진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명했다.
“청상! 백표!”
“예!”
“혹시나 따르는 자들이 있는지 살피고, 육장을 데려와!”
“예!”
진무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청상과 백표가 몸을 날렸다.
다행히 쫓는 이는 없었고, 육장은 청상에게 부축을 받은 채 무사히 진무에게 다가왔다.
“진무 님을 뵙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그것이…….”
진무의 물음에 육장이 얼굴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조음과 분골형장을 습격하고 얼마 뒤, 교마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조음이 죽고, 저만 이렇게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조음이 죽었어?”
“예, 교마의 손에…….”
“제길, 완전히 소멸한 거냐?”
“그렇습니다.”
“젠장, 하지만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다.”
“예.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세류에게 흡수당했으니 교마가 조음을 흉내 낼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것을 알려 드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리 달려왔습니다.”
“고생했다. 일단은 몸을 회복해야 하니 쉬어라.”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진무 님의 곁에 있겠습니다.”
“뭘 굳이…….”
“함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럼 그래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언제 교마가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예.”
짧게 답한 육장이 곧장 주저앉았다. 진무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조음에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저 죽어 버린 것이라면 부활할 테지만, 마왕의 힘으로 소멸당했으니.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지계의 생명체들에게 소멸은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이라 했으…… 어? 잠깐.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진무는 지금의 상황을 세심히 되짚기 시작했다.
조음이 당했다.
그리고 육장은 살아 돌아왔다.
말이 되나? 애초에 육장 정도 되는 놈이 교마의 손을 빠져나온다는 것이?
규사의 말에 따르면, 놈의 세 번째 능력은 사령의 그것과 비슷할 가능성이 크다.
멈춰! 하면 멈춰야 했을 텐데?
“…….”
거기까지 생각한 진무의 고개가 천천히 육장 쪽으로 돌아갔다.
외양은 그가 확실하다. 느껴지는 기척 또한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하지만 교마가 조음만 흡수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유심히 살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심의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
어쩌면…….
진무는 속을 감춘 채 뻔뻔한 표정으로 친근하게 물었다.
“이봐, 육장.”
“예?”
“전에 말했던 그거 기억하고 있겠지?”
“……전에, 제가 무슨 말을?”
“이런, 교마에게 당한 충격이 컸던 모양이네.”
“…….”
“그 왜, 있지 않은가? 자네가 말한 교마의 약점.”
“야, 약점이요?”
“그래, 자네가 내게 충성하겠다면서 심어로 전하지 않았나? 교마에게 아주 치명적인! 자네만 아는 뭐 그런 약점이 있다고. 그것만 알면 교마는 애새끼나 다름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야. 나는 그 대가로 자네에게 한자리 챙겨 주기로 했고.”
“…….”
진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육장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청상, 황신, 백표, 이생…… 규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를 멀뚱히 쳐다보며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젠장, 육장 놈이 대체 뭘 말한 거지?
육장의 모든 것을 흡수하며 가리온이 백표로 불린다는 사실까지도 알게 된 교마였지만, 지금 이 순간 진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야? 생각이 안 나?”
진무가 재촉해 오는 통에 육장은 어쩔 수 없이 생각난 척 답했다.
“아! 아아! 그거 말이군요? 그 치명적인 그거?”
“이제 기억나는가?”
“예, 암요.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너무 치명적인 것이어서 혹시 지금 누군가 듣고 교마에게 이를 수도 있는지라.”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내 혹시나 자네가 잊었을까 봐 물은 것이네.”
“그러시군요. 전 또…… 헛헛.”
육장의 변명에 진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근데 뭔 약점?”
“예?”
“무슨 말을 한 적이 있었나, 우리가?”
“…….”
순간 육장의 눈동자에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황, 놀람, 분노, 당했다, 망했다, 기타 등등.
다채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그를 보며, 진무는 싱긋 웃었다.
잡았다! 요놈!
근데 너 너무 허술한 거 아니냐? 아니면 그동안 나만 한 상대가 없었나? 던진 미끼를 이리 겁 없이 물어 주다니, 멍청하게도.
이놈아.
니가 교마(狡魔)면, 나는 혁련무강이다.
너 따위완 비열함의 순도부터가 달라, 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