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02
72화
양측이 대치한 해검지에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규사라니…….
“사, 살아 있었던 건가?”
“죽은 적이 없는데?”
“…….”
규사는 한없이 가벼운 표정이었다.
“설마, 내가 교마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을까? 나는 박피옥의 총귀장이라네. 귀속이 끊어지고 교마의 패배를 직감한 순간, 몸을 피했지.”
“그렇군.”
청상은 쉬이 납득했다.
박피옥은 배신자들의 세계. 그가 제 살길을 위해 교마를 배신한다 한들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올 줄은 몰랐다.”
“온 것이 나뿐일까? 이미 육계의 귀들이 모두 인계로 나왔다네.”
“하긴…….”
규사의 말에 청상이 잔뜩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어째서 이곳인가?”
“소문을 들었지.”
“…….”
“북방칠수의 하나인 벽장군께서 무당산에 신령으로 내려왔다더군. 그 이름이 청상이라는데 아니 와 볼 수가 있을까? 내 옛 인연을 생각해 말이나 몇 마디 건네고자 왔네.”
규사가 빙그레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황신이 이를 부드득 갈며 끼어들었다.
“지랄 쌈 싸 먹는 소리 하고 있네. 줄줄이 사탕처럼 달고 온 귀 새끼들은 허수아비냐?”
“허허, 이보게, 황신. 한때 한편이 될 수도 있었던 사이에 뭘 그리 날을 세우는가?”
“……한펴언?”
황신이 코웃음을 치며 그를 쏘아봤다.
“그렇지 않은가? 진무선인이 교마를 쓰러뜨렸을 때, 하마터면 충성을 맹세할 뻔했지. 내 당시엔 그분께 참으로 감명을 받았거든.”
“흥! 개소리 말고…….”
황신이 당장에 뛰쳐나갈 듯 자세를 취하자, 청상이 손을 들어 막았다.
“신!”
“왜! 뭐!? 어쩌자고! 저 새끼가 말대로 진짜 대화라도 할 참이야?”
“……기다려 주게.”
“이……! 어휴!”
낮게 만류하는 청상의 진지한 눈빛에 발끈하던 황신이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뭐가 됐든 지금 그들을 이끄는 것은 청상이다. 고지식한 놈이긴 하지만, 자신보다 생각이 깊으니 바른 판단을 할 것이다.
“휘둘리지 마라. 뱀의 혀를 가진 놈이다.”
“알았다.”
물러나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는 황신과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청상의 모습에 규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것 참, 미운털이 단단히도 박힌 모양일세.”
“그대들이 세상을 이리 만들어 놓았으니까. 거두절미하고, 심중에 있는 말을 하게.”
“저런, 성미도 급하지. 진무 님이었다면 그래도 일단 술부터 권했을 것 같은데. 그분께서 그리 가서 안타깝네.”
짐짓 애석해하며 고개를 내젓는 규사의 말에 청상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분이다. 쓸데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라면…… 검이 더 빠를지도 모르지.”
스윽.
청상이 자충을 들어 겨누자 규사가 손을 휘휘 저었다.
“어이쿠, 그 검이 아직도 자네 손에 있었던가? 귀모님의 권능은 진작에 사라졌을 텐데.”
“귀모의 권능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사숙께서 나에게 맡겨 둔 것이라 보관하는 것이지.”
“거, 충성심하고는……. 역시나 박피옥에서 살아 온 나는 자네들의 생각이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야.”
“…….”
“뭐, 좋아. 용건을 말하지.”
뒷짐을 진 채로 턱을 살짝 든 규사의 시선이 해검지를 훑었다.
“이곳을 내주게.”
“뭐?”
“퇴로를 보장해 주지. 이미 무당산을 향한 모든 공격을 멈춰 두었네. 만약 내준다면, 적어도 내 영역 안에서는 공격받지 않도록 선의를 베풀지.”
“…….”
“자네가 지키고자 하는 이들과 구해낸 자들, 모두 놓아주도록 하겠다.”
“그게 무슨 말이지?”
“실은 이곳을 내 터로 삼으려고 하거든.”
“터?”
“그래.”
고개를 끄덕인 규사가 가볍게 손을 젓자, 마력이 회오리처럼 그 손에 몰려들어 하나의 형상으로 변했다.
날이 시퍼렇게 선 작은 조각도…….
“세, 세류?”
“용케 알아보는군.”
“설마?”
“설마는 무슨? 교마가 죽었고, 진무님이 걷어찬 자리가 아니던가? 박피옥 총귀장이었던 내가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
청상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의 손에 세류가 들려 있다는 것은 귀모의 권능을 이어받았다는 뜻이다.
즉, 눈앞에 있는 그는 이제 박피옥의 총귀장 따위가 아니라 지계 여섯 세계를 다스리는 마왕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마왕이 어찌?”
“귀모님께 청하여 다른 이들보다 먼저 나왔네.”
“뭐?”
“다른 분들이야 이미 오랫동안 마력을 쌓아 온 분들이 아닌가? 신참이 먼저 와서 선점을 해 둬야 나중에 꿀리지 않지.”
“…….”
희망이 사라졌다.
언제고 벌어졌을 일이나 막연하기만 했던 일이 순식간에 눈앞에 들이닥쳤다.
절로 손이 떨려 왔다.
예전의 규사였다면 몰라도 마왕의 힘을 부여받은 그라면…….
이미 보지 않았던가?
사숙조차도 고전을 면치 못한 마왕의 힘이다. 천 년의 세월을 죽어라 수련해 벽장군에까지 올랐지만, 한참 못 미칠 것이 자명했다.
이미 두장군이었던 사숙이 음양의 힘을 모두 방출하고 나서야 교마를 상대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신마합일을 이루지 않았다면 봉신을 해한 교마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고…….
어찌해야 하는가?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그의 말대로 터를 버리고 물러나야 하는가?
“저런, 고심하는가?”
“…….”
“결정이 오래 걸리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 도움이 될 말을 하나 더 해 줌세.”
규사가 손 위로 띄운 세류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귀모께선 이미 우리 마왕들에게 봉신의 해제를 허락한 상태라네.”
“뭐라고?”
“그러니 거부할 생각은 말아. 혹여 대항하려 하지도 말고.”
부드러우면서도 싸늘한 미소에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내려야 할 답이 강제로 정해져 버렸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싸우기로 해도 상관없네. 그대들의 거죽에 꽤 흥미가 있거든.”
“…….”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듯한 기분이었다. 청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사숙, 사숙이라면 어찌하셨을까요.
지켜야 할 자들, 지켜 내야만 하는 장소를 두고, 사숙이라면 어떤 결단을 내리셨겠습니까?
“이런 씨발! 뭘 고민을 처하고 있어!”
“……?!”
머뭇거리던 그때, 별안간 황신이 고함치며 튀어나왔다.
“이 개새끼가 어디서 썰을 풀어? 그래서 우리더러 물러나라고? 이곳을 내달라고!?”
“…….”
“안전하게 보내 준다는 저 말을 믿는 거냐, 청상?”
“신! 멈춰라.”
“개소리하지 마. 천계조차 문을 걸어 잠갔다. 이곳을 떠난 우리가 안전해질 장소는 그 어디에도 없어!”
황신이 비수를 힘껏 꼬나쥐며 규사를 노려본다. 선기를 모조리 뽑아낸 뒤라 허기에 지쳐 널브러져 있던 청우마저 일어나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장에라도 뛰어들 기세로 투기를 피워올리는 둘의 모습에 청상이 한숨을 내쉬며 고민을 떨쳤다.
황신의 말이 옳다.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무당을 떠났었고, 무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지막을 함께할 것이다.
……사숙을 처음 만났던 그 자리에서.
스윽.
청상이 자충을 들어 겨누자 규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 원하지 않았던 결정이 내려졌군. 모두가 죽는 쪽으로 말이야.”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 그가 손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래도 급이라는 것이 있지, 고작 천계 북방칠수의 장수 하나와 마왕이 싸울 순 없지 않겠는가? 이젠 신령 나부랭이이기도 하고…….”
“…….”
마지막을 예고하는 규사의 인사와 함께 그 뒤의 귀들이 시퍼런 안광을 내뿜었다.
“그럼 잘 가게. 청상, 황신.”
손이 내려졌다.
그와 함께 마기가 청상과 황신, 해검지를 지키던 마지막 수호자들을 향해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크어어엉!
“……!”
청상이 이를 악물고 막으려던 그 순간, 하늘에서 누런 빛줄기 하나가 벼락처럼 쏟아졌다.
콰지직! 콰드드득!
양측의 중심에 쏟아진 빛줄기가 가공할 선기를 뿜어내며 귀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휘두른 발에 귀들의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가고, 날카로운 이빨에 목이 뜯겨 나갔다.
-크허엉!
대지를 두 발로 버티며 우뚝 선 누런 빛 덩어리가 하늘을 향해 거칠게 포효했다.
……범이다.
이전에 본 적 없던 신령스러운 기운을 가진 대호가 청상의 앞을 지키듯 가로막고 눈알을 번들거리며 귀들을 위협했다.
-크르르르…….
낮게 우는 소리에 귀들이 얼어붙은 듯이 멈췄다.
기대했던 참사가 일어나지 않자 규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작 괭이 새끼 한 마리가…….”
화가 잔뜩 난 규사가 뿜어낸 마력에 대지가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하나 범접하지 못했다.
대지를 달구는 마기의 아지랑이가 범이 두 발로 선 대지를 넘지 못하고, 되레 밀려 나기 시작했다.
청상도, 황신도, 청우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늠름하기 짝이 없는 범을 쳐다봤다.
이상하다. 모양은 신령들과 함께 다니는 산군이 분명할진대…… 어찌 저런 힘을?
무엇보다 그 포효에서 묘한 힘이 느껴진다.
지쳤던 팔다리의 근육을 다시금 불끈거리게 만들고, 마음을 보듬어 전의를 일깨우는…… 대체 저 범이 무엇이기에?
그런데 한순간 깨달았다.
범이 아니다.
자신들을 보듬는 힘은 범이 아니라 그 뒤편에서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래, 규사의 마력을 막아 낸 것도 범이 아니라…….
청상이 침을 울컥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휘익.
산들바람이 불었다.
절로 상쾌해지는 바람과 함께 무언가가 휙 스쳐 지나갔다.
왠지 익숙한…….
따아악!
“캥!”
산들바람이 범에게 다가가고, 범이 아프다는 듯 울음을 토한다. 그런데…… 캥? 좀 전까진 위세 좋게 크릉거리며 귀들을 위협하던 범이?
“자꾸 으르렁거리니까 애들이 겁먹잖아!”
-크르르.
“……이게, 확!”
-멍멍!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범의 머리를 툭툭 두들기던 것을 멈추는 백의의 사내.
너무 잘 아는 목소리였다.
잊을 수도 없는, 잊어서도 안 되는 사람의.
“청상아, 잘 있었지?”
“…….”
“황신도…… 청우는 참 오랜만이다, 그치? 그래도 살은 좀 빼지 그랬냐. 비만으로 죽은 놈이 여태 정신을 못 차렸네. 수련을 시키든가 해야지, 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짓궂게 웃는 익숙한 얼굴.
멍하니 눈을 끔벅이던 청상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
채 완성하지 못한 말이 입 안을 맴돈다. 북받쳐 오른 감정이 그의 목구멍을 꽉 메운 것만 같았다.
“사수우욱!”
대신하여 청우의 울음 섞인 외침이 울려 퍼지고…….
“천주님!”
맥이 탁 풀린 듯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버린 황신의 눈이 촉촉이 젖었다.
“자식들, 울긴. 그래, 많이 힘들었지?”
“어허헝.”
환하게 웃는 그 모습에 청상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진무…….
어딘가에 살아 있으리라 믿고 또 믿었던 그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사실에 모두가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천 년, 아니 백 년? 대충 꽤 오랜만이기는 하다만, 인사는 나중에 하자꾸나. 일단은 이쪽이 더 시급하니까.”
싱긋 웃은 진무가 고개를 돌려 규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도 오랜만이다, 규사.”
“지, 진무…… 님?”
“기운을 보니까 니가 박피옥주가 된 모양이지?”
“그, 그렇소.”
적잖이 당황한 듯 규사가 말을 더듬었다.
당연한 일이다.
봉신을 해하고도 그 상대가 되지 못했던 교마를 기억하는 그였다. 고작 신출내기 마왕이 어찌해 보기에는 너무 강한…….
“흠,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여긴 해검진데…….”
“…….”
언짢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 그가 해검지와 규사, 그리고 수많은 귀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나무 몽둥이를 어깨에 걸치며 짝다리를 짚은 채 활짝 웃었다.
“칼, 계속 들고 있네?”
오랜만에 그의 송곳니가 환하게 빛나며 자욱한 어둠을 밀어 냈다.
어둠이라는 세찬 바람 속에 곧 꺼질 듯 위태롭기만 하던 촛불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진무라는 기름으로 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