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03
73화
스윽.
한 걸음을 옮긴 만큼 거리가 가까워진다.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물러난 규사의 얼굴이 이내 부끄러움에 홧홧해졌다.
“쫄기는.”
“…….”
실소와 함께 흘러나온 그 한마디에 규사가 물러나던 걸음을 멈춘 채 진무를 매섭게 노려봤다.
규사의 위협적인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무는 다시 걸음을 옮겨 걸으며 해검지의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널따란 평원과 작은 못.
그뿐이다.
버들가지 길게 늘어뜨려 그늘을 만들던 거목은 불타 버린 지 오래였고, 한때 자신이 벌어다 준 돈으로 위세 좋게 지었던 산문과 객들의 쉼터였던 누각도 사라졌다.
“흠, 마목(馬木)까지 다 뽑혀 버렸네. 청우랑 청상이랑 열심히 박아 뒀었는데…… 다시 박아야겠어.”
마치 유랑객처럼, 진무는 팽팽한 대치 속을 거닐었다.
오래전의 일을 추억하고, 채 사라지지 않은 폐허 속 잔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걷고 또 걸어, 이윽고 규사와 조금의 거리를 둔 채 멈췄다.
“규사.”
“……말하시오.”
규사는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마력을 끌어 올린 채 대답했다.
“이곳 무당은 참으로 좋은 곳이야. 물도 맑고 산세도 수려하고.”
“…….”
“그래서 그런지, 머물렀던 이들도 그렇고 머무는 이들도 그렇고 참으로 선해.”
“…….”
“원체 착해서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는 법이 없지. 그들이 과거에 선의 길을 걸었건, 악의 길을 걸었건 일절 신경 쓰질 않는단 말이야. 언제든 계도할 수 있다고 믿거든.”
진무가 막대기를 짚은 손에 살포시 다른 쪽 손을 올려 겹치며 규사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래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하는 선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야.”
“…….”
“이곳 해검지는 바로 그런 곳이야, 지켜야 할 선. 해서 찾은 이들은 이곳 해검지에 검을 풀어 위협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무당은 그런 이들에게는 예를 갖추어 객으로 맞이하지.”
진무의 시선을 따라 규사가 제 손에 잡힌 세류를 힐끗거렸다.
“사실, 지금까지 범한 일만으로도 참기가 좀 그래.”
“…….”
“자네들은 너무 심했어. 싸우려면 천계랑 싸우지, 굳이 인계를 이리 쑥대밭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잖아.”
“…….”
“만약에 예전의 나였으면, 무당을 공격한 자네와 자네 뒤에 있는 이들의 모가지를 진작에 뽑아 버렸을 거야.”
담담한 위협이 해검지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내 입장이 안 그래.”
“…….”
“뜬금없이 중재자가 돼 버렸지 뭐냐?”
“중재자?”
“그래. 말해도 이해는 못 할 거야, 나 역시 이해는 해도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그런 입장이 됐어.”
“…….”
“그러니까 하나만 정해. 칼을 내려놓고 객으로서 잠시 머물다 지계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적으로서 싸우고 난 뒤에 갈 것인지. 아, 싸우면 딴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겠네.”
별안간 눈앞에 놓인 선택지. 말이야 짐짓 점잖게 하고 있지만, 속뜻은 뻔하다.
맞고 갈래, 그냥 갈래?
규사는 제게 대놓고 이곳에서 꺼지라고 하는 진무를 말없이 바라봤다.
과거 그의 몸에서 느껴진 것은 신과 마의 중간 어디쯤이었다. 신력과 마력을 동시에 품은.
해서 신이 될 수도, 마가 될 수도 있었던 자였으나…… 지금의 그는 모호했다. 어느 것으로도 정의할 수가 없었다.
“혼돈……인가?”
“아니, 조화지.”
“조화?”
“그래.”
“…….”
진무는 시종일관 담담했고, 규사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도무지 정의 내릴 수 없는 진무의 정체가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모든 의문을 관통하는 핵심은 딱 하나였다.
스스로를 중재자라 칭하고 있는 그는 정말로…… 강한가?
과거의 그는 강했다. 그때의 자신, 그때의 교마를 능히 제압할 만큼.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없다. 모습과 기운, 존재감이 그때와 확연히 다르니, 서로 대봐야 알 일이다.
하물며 자신 또한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마왕이 되었고, 새로운 힘을 부여받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규사는 답을 내렸다.
“진무.”
“…….”
“나는, 귀모님의 명을 받드는 박피옥주다.”
결심을 굳히고 당당하게 허리를 펴는 규사를 응시하던 진무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세류에 닿았다.
움켜쥐던 힘이 이전보다 강해졌다.
또한, 결의를 다진 규사의 몸에서 넘실넘실 피어오른 마기가 하늘을 향해 번져 가고 있었다.
싸울 작정인 것이다. 객이 아닌 적으로서.
“큭, 큭큭큭. 그래, 박피옥주지, 그렇게 되었지.”
“……?”
규사의 뜻이 정해진 순간, 진무가 갑자기 사악한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왜 웃는 거지?”
“실은 정말 내빼 버리면 어쩌나, 칼을 놓으면 어쩌나 걱정했지 뭐야?”
“뭐?”
“내가 새로 얻은 힘이 말이지, 이게 참 묘해.”
“……?”
“엄청나게 강한 것 같지만, 거지 같은 족쇄 같은 게 채워져 있단 말이야.”
순간 서늘한 눈빛과 함께 진무의 존재감이 사방에 번졌다.
사아아…….
산들바람 같았던 부드러움이 칼날로 변해 피부를 얇게 저미는 것 같다.
이어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니 나무가 휘청이고, 대지마저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니가 끝까지 싸울 결심을 굳히는 순간, 그 빌어먹을 족쇄가 풀렸다. 마치 네놈들이 말하는 봉신의 해(解)처럼.”
“뭐라고?”
스윽.
진무가 천천히 몸을 세우며 두 손으로 누르고 있던 나뭇가지를 들어 어깨에 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번거롭지만, 뭐 어쩌겠어.”
신목을 통해 운명을 깨달았을 때 알게 되었다.
마고의 아들로서 부여받게 된 조화의 힘은 무언가를 파괴하기 위한 힘이 아니었다. 싸움을 말리고, 어울려 살아가게끔 만드는 중재자로서의 힘이었다.
천지인의 삼계로 구분되었으나 그 시작은 이 땅에 정착한 마고의 자손들. 잠시 엇나간다고 하여 내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름지기 부모란 그런 거거든.”
“…….”
“나쁜 짓을 하든 착한 짓을 하든, 모두가 자식인지라 한쪽 편만 들 수가 없단 말이야. 사랑으로 끌어안아야지.”
짐짓 자애롭게 말하던 그가 일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런데! 부모가 아무리 사랑스러운 말로 타이르고 보듬어도 말이 안 통하는 자식새끼들이 있단 말이야.”
“…….”
“그러니 어쩌겠어? 매를 들고 종아리를 때려서라도 말을 듣게 해야지, 안 그래?”
“그, 그게 무슨?”
“뭐긴 뭐야?”
진무가 어깨에 올리고 있던 막대기로 규사를 겨누며 씩 웃었다.
신목(神木)이 건넨 막대기. 혹여 말이 안 통하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 줘 패라며 건넨 그 막대기였다.
“이른바, 사랑의 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달게 처맞아라.”
뭐, 그러다 뒈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파학!
진무가 일보를 내디뎠다.
규사의 눈에 무당산이 순간적으로 뒤로 떠밀린 듯 멀어져 사라졌다.
그를 막아서던 청상도, 청우도 황신도…… 그리고 오직 눈앞의 세상에 진무만이 존재하듯 다가와 있었다.
“허헉!”
목젖이 튀어나오도록 놀란 규사가 온 힘을 다해 물러났다.
한데 희한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물러났는데, 진무가 멀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바로 앞.
게다가 제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가 폭풍처럼 대기를 할퀴어 대고 있음에도, 진무의 몸에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리고 들렸던 막대기가 아래로 내려왔다.
“이런 쌍!”
봉신을 해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일단 떨어져야 했다.
그래, 일단 저 빌어먹을 막대기부터 쳐 내고…….
슈아아악!
세류가 규사의 손을 따라 대기를 갈랐다.
고작 막대기가 아닌가? 잘라 버릴 것이다.
빠아아악!
“크악!”
그 순간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고통이 발끝까지 관통하며 저릿하게 몸을 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분명히 잘랐는데…….
또한 이 고통은 어찌 된 영문인가? 사람의 탈을 쓰고 있을 뿐 사람이 아닌데, 어찌 이리도 오감에 충실한 고통을 느낀단 말인가?
“요 쉐끼!”
빡! 빠바박!
“크억!”
규사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명 막대기의 궤적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뭘 하느냐! 놈을 공격해라!”
규사가 세류에 마력을 밀어 넣으며 있는 힘껏 외쳤다.
검은색 빛을 확 내뿜은 세류가 권능을 발현하자, 규사와 함께 온 귀들이 안광을 뿜으며 뛰쳐나왔다.
“어쭈?”
몰아치는 공격을 피해 훌쩍 거리를 벌린 진무가 입꼬리를 비틀며 막대기를 높이 세웠다.
“여의!”
쿠르릉!
부름과 동시에 우렛소리가 울리고, 빛이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극점에 닿곤 이내 벼락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아아!
이어 둔중하게 휘둘러진 꼬리가 귀 떼를 으깨고 부순다.
-크아아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포효와 함께, 현신한 여의가 날카로운 이빨로 귀들을 먹어 치웠다.
“금혼!”
-크허헝!
이어진 진무의 두 번째 부름에, 이번에는 하늘을 무너뜨릴 듯 소리 지르며 나타난 누런 빛줄기가 여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채웠다.
낫 같은 발톱이 스칠 때마다 귀들의 몸이 갈가리 찢기고, 소름 끼치는 귀성이 선천을 짜르르 울려 놓았다.
여의가 세찬 바람처럼 휘몰아치고, 금혼이 귀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 사이.
“이 빌어먹을 자식!”
“…….”
귀들을 용과 범의 먹잇감으로 바치고 시간을 번 규사가 봉신을 해하고 진무의 앞에 본모습을 드러냈다.
소처럼 돋은 뿔, 검붉은 광택으로 번들거리는 육체와 피처럼 붉은빛을 발하는 눈동자. 마왕의 진신(眞身).
진무는 붉은 눈을 번들거리며 살기와 마기가 혼재된 기운을 뿜어내는 규사를 언짢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강함이었다. 몸에 와 닿는 규사의 존재감은 교마의 그것을 압도했다.
찌직, 찌지직.
“……?”
막대한 마력에 진무 뒤편의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찢어진 틈새 안에서 사라진 것 같았던 무당산 해검지가 다시 드러났다.
“놈……. 결계를 펼쳤던 것이냐?”
“걸렸네, 아쉽게도.”
뒤를 힐끗 쳐다본 진무가 씁쓸하게 웃었다.
돌아본 곳엔 청상을 비롯한 모두가 놀란 얼굴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규사가 그랬듯, 그들의 눈에도 갑자기 눈앞의 세상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혹여 그들이 싸움이 휩쓸리게 될까 봐, 규사를 공격하던 순간 공간의 결계를 펼쳤었다. 귀들의 공격이 결계를 넘을 것을 우려해 여의와 금혼을 불러 지키게 한 것이다.
하나 이제 의미 없게 되었다. 봉신을 해한 규사의 마력이 너무 강해서 결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여전히 여의와 금혼이 막고 있었지만, 귀들의 수가 원체 많았다.
이내 청상과 청우, 황신을 비롯한 무당 도사들이 공격해 오는 귀들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좀 신경은 쓰이지만, 도울 필요는 없다. 제 몫을 충분히 할 정도로 성장한 녀석들이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규사였다.
“……제법이네.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네놈 마력에 몸이 저릿저릿할 지경이야. 그사이 귀모가 새로운 힘이라도 준 모양이지?”
“놈, 이제야 알았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귀모님이 제약을 풀어 주셨다. 스스로 봉신을 해했던 교마 따위와는 확연히 다른 힘이지.”
“…….”
양팔을 쭉 뻗어 올린 규사가 자신의 힘을 음미하듯 웃었다.
“나의 이 강대한 힘으로 네놈은 물론이고, 무당산 자체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사방으로 퍼져 있던 검은 마력이 양팔을 쭉 뻗어 올린 규사의 몸 주위에 구체 형상으로 몰려들었다.
응축된 마력.
놈은 정말로 그 말처럼 한순간에 마력을 토해 무당산을 허허벌판으로 만들 작정인 듯했다.
제 부하들도 있는데…….
하지만 과거 교마에게서 느꼈던 막막함은 없었다. 그저, 조금 더 강한 마력일 뿐이다.
“쯧, 다 이긴 것처럼 말하기는.”
“뭐라고?”
“매가 꼭 싸릿대일 필요가 있겠니? 자식이 대가리가 커지면, 사랑의 매도 그만큼 커져야지.”
“……?”
그러고 보니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진무의 손에 막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어, 언제?”
“아까부터.”
진무의 손이 들린다.
그 뒤를 따라 규사의 고개도 천천히 쳐들렸다.
“……!”
하늘이 갈라졌다.
아니, 갈라진 듯 보인 것은 거대한 나무 기둥이 내려쳐지고 있는 것을 본 규사의 착각이었다.
“꽤 아플 거다. 내가 가진 힘을 제법 담아 넣었거든.”
“이런…… 빌어먹을.”
콰아아아앙!
내려오는 진무의 손과 함께, 나무 기둥이 무당산 해검지에 내려앉았다.
콰아아앙!
규사의 모든 힘이 스민 마력의 구체는 방어막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신과 마는 상극이나, 조화는 둘 모두를 아우르는 법.
조화의 힘을 담은 막대기가 마치 투명한 막을 스치듯 마력의 구체를 지나 규사의 머리통에 때려 박혔다.
“이놈의 새끼! 뭐가 어째? 무당산을 날려 버려? 넌 오늘 뒈졌다!”
악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무의 손을 따라 계속해서…….
“크하하! 뒈져라!”
……死랑도 사랑이지!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