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04
74화
슈아아아…….
사방에서 공격해 오던 지계의 마귀들이 일순간 연기처럼 흩어졌다.
남은 것은 마귀들에게 홀렸다가 정신을 차리며 멀뚱거리고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이게 대체?”
당대 무당의 제자들과 함께 산정을 지키던 선인, 명진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휙휙 돌려 주위를 살폈다.
무너진 궁의 전각들, 싸움에 지친 선인들과 무당의 도사들, 마귀에게 홀렸다가 막 정신을 차리고 어리둥절해하는 이들…….
그들 사이로 계속해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가 바람에 쓸리듯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공격이 멈췄다.
지친 얼굴로 멀뚱하게 서로를 쳐다보던 이들의 얼굴이 환희가 감돌고.
“우아아아아! 이겼다!”
환희는 곧 함성이 되어 전염됐다.
하나 명진으로서는 마냥 기뻐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수십, 수백 차례 이상 무당산을 지켜 내는 동안 처음 있는 일인 탓이었다.
혹, 좀 전에 있었던 연이은 충격 때문인가?
무당산 전체를 여러 차례 뒤흔든 충격파의 근원을 쫓아가 보면 분명 청상이 있는 해검지 방향이다.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명진선인!”
“…….”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곰처럼 커다란 체구를 가진 인물이 헐레벌떡 뛰어와 물었다. 우진궁 쪽을 방어하던 천우명이었다.
“아니, 저도…… 잘…….”
명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어떠한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명진선인!”
천우명뿐이 아니었다.
명세찬, 그 뒤로 원공후와 소약벽까지 나타났다.
명진과 눈이 마주치자 소약벽이 손에 들렸던 머리통을 잽싸게 허리춤에 감췄다.
불필요한 살생은 금하라 했는데……. 천계에서도 지계의 괴수들 머리를 그리 뽑아 대더니, 아직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하나 나무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선은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이보시오, 적생.”
“예, 명진선인.”
나지막한 부름에 명진을 도와 산정의 전투를 총괄하던 적생이 즉시 대답했다.
“어찌 된 영문인 것 같소?”
“상황으로 봐선, 청상선인이 큰일을 해낸 것 같습니다.”
“큰일?”
“예. 이전에도 보셨다시피, 홀린 자들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그들 틈에 숨은 마귀를 반드시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음…….”
“한데 보십시오. 사패오왕을 비롯해 다들 이곳으로 모이는 것을 보면, 무당산 전역에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면? 청상이 해검지에서 적들의 수괴를 쓰러뜨렸단 말이오?”
“예.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아마도 귀 이상급이 아닐지…….”
명진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벌어진 무당산 전투는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명진을 수좌로 하여 사패오왕과 선인, 무당산 도사들이 지키는 산정과 청상 등이 지키는 해검지.
가장 치열한 격전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해검지였다.
해검지의 못이 대대로 신령의 거처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한때 청우가 커다란 돌을 던진 바람에 해검지에 머물던 신령이 꽤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는 후문을 듣고는 어찌나 웃었던지.
어쨌든 청상이 해검지를 선택한 것은 그저 신령의 거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검지가 뚫리게 되면 무당산을 감도는 선기의 방벽이 무너지기 때문이었고, 혹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나머지가 보다 수월히 무당을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 정도로 강한 놈이 왔었다면 벽장군이 괜찮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서둘러 해검지로 가서 안위를 살피는 것이…….”
청상이라는 이름보다 벽장군이라는 호칭이 편했던 원공후의 걱정에 명진이 고심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 길지 않았다.
원공후의 말처럼 청상이 어찌 되었을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아니오. 일단은 승리가 추측되는 상황이오. 청상이 다쳤다면, 누군가 뛰어올라 상황을 전할 것이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청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장을 수습하여 다시금 방어막을 치는 것이오.”
“예?”
“세상이 이미 저들의 것이오. 꽤 높은 지위를 가진 마귀가 소멸하여 잠시 전쟁이 멈추었다고는 하나,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일.”
“…….”
“적생.”
“예, 명진선인.”
“지금 즉시 산정을 지키는 이들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전력 손실을 세부적으로 판단해 각 궁의 전력을 재편성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이만 돌아가 주시오. 긴 싸움에 지치고 피로하신 것은 알고 있으나…… 돌아가 휴식을 취하되, 자리를 지켜 주시오.”
“예, 명진선인.”
명진의 마음을 알기에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청상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중 명진이 가장 클 것이다. 하나 그는 산정을 지키는 이들의 수좌였다.
모두를 이끌어야 하는 자리. 잠시의 기쁨에 도취될 수도, 잠시의 슬픔에 풀 죽어 있을 수도 없는 자리였다.
이미 수십, 수백 차례 이어져 왔던 싸움이 아니던가?
명진의 말대로 저들이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 모르니 다시 대비해야 한다.
막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그때.
“사숙조니이임!”
“……?”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청우가 공처럼 굴러왔다.
그를 본 모두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청우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원체 살집이 많아 표정을 보고 눈치챌 수는 없는 일이었으나, 온 힘을 쏟아 낸 때처럼 무척이나 허기져 보이는…… 설마 우려하던 일이?
“사수욱조니이임! 오셨습니다! 드디어 오셨습니다!”
“…….”
모두의 걱정과 달리, 청우의 목소리는 지친 와중에도 밝았다. 다시 보니 표정에도 기쁨이 가득했다.
대체 무엇이 왔길래?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또 있었다.
청우가 허기진 채로 달려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배가 꺼지면 목……인 듯한 곳에 칼이 들어와도 꼼짝 안 할 녀석인데?
“청우야,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오다니, 누가 왔단…… 말…….”
달려온 그대로 터진 만두처럼 풀썩 주저앉은 청우를 다그치던 명진이 멀리 산정 끝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청상, 황신, 백표…… 수많은 무당 도사들, 그 옆으로 기세등등하게 사뿐거리며 걸어오는 누런 대호.
그리고 맨 앞.
나무 막대기를 어깨에 걸치고 정돈치 않고 풀어 헤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휘적휘적 걸어오는 백의의 사내.
“……아, 아아.”
그립고 그리웠던 얼굴을 알아봤음에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웃는 얼굴로 자신을 향해 한 걸음씩 가까워져 오는 그 모습에 아래턱이 잘게 떨려 온다. 순식간에 가슴을 꽉 메우는 감정의 정체를 느낄 새도 없이 차오른 눈물이 주룩 흘렀다.
“지, 지…….”
겨우 나온 목소리였건만, 완성하지 못한 이름의 주인.
“스승님.”
“아으…….”
자상하게 부르는 그 말에 내내 묻어 뒀던 명진의 감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제자 진무가, 길고 긴 길을 돌아 스승님을 다시 뵙습니다.”
“…….”
옷자락을 가벼이 뒤로 젖히며 무릎을 꿇은 진무가 그저 멍하니 감격만을 토해 내는 명진을 향해 절을 올렸다.
“진무야…….”
스승은 다른 말 없이 그 이름 하나를 부르며 엎드린 제자의 등 위에 몸을 포갰다.
끌어안은 채 한참을 우는 통에 눈물이 등을 축축하게 적셨지만, 진무는 그저 엎드린 채 빙그레 웃었다.
못내 따스한 눈물이었다. 누구라도 그 온기에 몸을 녹이고 싶을 만큼.
그리고 스승을 부축해 일어난 진무가 맑게 웃던 그때.
“우, 우명이 천주님을 뵙습니다.”
“천주님을 뵙습니다.”
천우명을 시작으로 적생과 사패오왕이 진무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가벼이 고개를 끄덕인 진무는 환히 웃으며 그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웠다.
“그간 잘들 있었지?”
“예, 천주님.”
“미안하다, 만 년이나 잊은 채 살아서……. 내 진작에 너희를 구했어야 했는데.”
진무가 그들의 어깨를 보듬으며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의 손길에, 목소리에 담긴 감정에 사패오왕의 눈에도 어느새 물기가 맺혔다.
하지만 먹먹함이 어색해서였을까? 눈에 힘을 잔뜩 주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은 천우명이 코를 훅 들이마시곤, 잔뜩 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럼 거하게 술이나 한잔 사십시오.”
“으응?”
“…….”
그러다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이며 딴청을 피우는 그의 모습에 진무가 환히 웃으며 답했다.
“그래, 마시자.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도 함께 술 한잔 마실 여유가 없을까?”
“……예.”
“그런데 우명아.”
“예?”
“때론 삼키는 것보다 흘리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
“…….”
진무가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자 끝내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펑펑 흘렀다.
“어흐흑, 네.”
그리고 둘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시자.
대낮이면 어떠할까?
만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으니, 낮부터 밤까지, 다시 해가 뜰 때까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자꾸나.
* * *
무당산에 찾아온 평화로운 시간.
무너져 버린 오룡궁 아래 충허암 앞뜰에서는 술자리가 한창이었다.
그곳에는 선인과 사람의 구분이 없었다. 그저 더불어 앉아 부었고, 마셨다.
진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무당산 전역에 퍼져 나가고, 술자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래서? 태고의 땅에 갔었다고?”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허!”
청상과 떨어져 있는 동안 겪었던 이야기에 모두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중 명진은 뛸 듯이 기뻐했다.
“내 너를 처음 제자로 들였을 때부터 이리될 줄 알았지. 암! 그렇고말고. 내 너에게 말하지 않았다만, 무당산 전역에 오색 서기가 어찌도 영롱하던지, 어헛헛헛!”
“……하하, 그, 그랬나요?”
“암! 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아느냐? 내 제자가 태초의 자손이라니? 삼계의 중재자라니! 어헛헛헛!”
“…….”
명진이…… 취해 버렸다.
또박또박 말하는 것을 보면 멀쩡해 보이는데 취한 게 분명하다.
방구석에 몸져누워 계시던 분이 오색 서기가 웬 말인지.
하지만 뻥이 좀 세면 또 어떠하랴? 기분 좋아 보이는 명진을 보니 그저 흐뭇할 따름이었다.
“스승님, 좀 쉬시지요?”
“으응?”
“그간에 고생이 많으셨다 들었습니다. 이제 함께할 시간이 많으니, 대화는 천천히 나누어도 될 듯합니다.”
“그럴까?”
“예. 혹여 병약하신 스승님께서 불편하실까, 제자 걱정입니다.”
“음, 그러하냐?”
“…….”
“알았다. 내 어찌 잘난 내 제자가 걱정하게 만들겠느냐? 네 덕에 잠시 쉴 터이니, 모처럼 만난 이들과 회포를 풀도록 하여라.”
“예, 스승님.”
명진이 한껏 웃으며 진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곤.
“거기 호 선생! 용 선생! 내 진무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던가?”
“…….”
벌떡 일어나 다른 자리로 갔다.
한쪽 구석에 사람의 모습으로 화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금혼과 여의에게…….
“우리 진무가 말이오, 이거 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
기나긴, 끝도 없는 자랑질이 시작되었다.
벌써부터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 여의와 금혼의 모습에 진무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리를 피해 주신 게다, 오랜 인연들을 만난 자리에 자신이 진무를 독차지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여겨서.
문득, 진무는 충허암을 둘러봤다.
양손 가득 안주를 움켜쥐며 열심히 배를 채우고 있는 청우,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
살아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있더라도, 살아 있으니 재회의 기쁨도 나눌 수 있지 아니한가?
과거를 추억하며, 또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다짐하며.
“흠, 그나저나 몇몇이 보이지 않는구나.”
충허암을 둘러보던 진무의 말에 청상이 술잔을 채워 주며 답했다.
“소식을 전하라 했으니, 곧 모일…….”
청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음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진무야!”
“…….”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휙 하니 날아든…….
와락!
예상은 했지만, 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크핫핫핫! 내가 너를 이리 다시 보는구나!”
“…….”
누런 이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웃는…….
“그래, 어찌 지냈더냐? 어디 말 좀 해 보거라!”
“…….”
……양소방.
오자마자 그 명성에 걸맞게 호구 조사부터 시작하는 노인네 뒤엔 각출이가 울먹거리면서 서 있었다.
따악!
“큭!”
“넌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 나타나? 천주님께서 도착하신 지가 언젠데?”
“아, 그게…….”
황신이 각출의 뒤통수를 때리며 왈칵 성질을 부린다.
“쯧쯧, 하여간 막내라는 놈이…….”
소동보도 옆에서 황신을 거들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황신과 아이들, 이놈들도 이제 완전체가 되었구나.
“그렇게 입 다물고 있지만 말고 썰 좀 풀어 보거라. 허헛, 내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야!”
아니, 근데 내가 이 귀찮은 거지새끼도 살렸다고? 진짜로?
젠장, 시간이 촉박해서 업경을 마구 찢어 내다 보니…….
속으로 투덜거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양소방이 다시금 채근했다.
“이놈아, 어여 말해 보라니까? 응? 으응?”
“…….”
진무는 애처럼 졸라 대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음…… 근데 이게 아까부터 왜 반말이지?
이젠 내가 혁련무강임을 알고 있을 텐데, 와중에 내가 만 년 더 산 선밴데…… 대놓고 반말을 해?
미소를 머금은 그의 손이 슬며시 막대기를 움켜쥐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너한텐 좀 가르쳐야겠지? 천계 기강이 어떤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