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05
75화
인계를 놓고 벌어진 백 년간의 신마전쟁은 지계의 승리로 돌아갔다.
경계가 무너진 뒤 왕래가 자유로워졌다고는 하나, 인계와 지계는 명백히 다른 공간.
아무리 귀모라 할지라도 공간 너머로 모든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권능이 이어진 마왕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패배한 천계는 수성을 택했고, 인계는 마기로 가득 채워졌으니까.
귀모는 느긋하게 때를 기다렸다.
곧이다.
이미 육계가 인계로 옮겨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의 터가 완성되고 마왕들이 강림하면, 지계와 인계가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
육계가 완벽하게 자리 잡는 날, 자신 또한 인계로 나가 옥황이 닫아건 통로를 강제로 열어 천계로 진격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은 사라지고, 자신이 마로 충만한 세상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 장담했다. 그런데.
“……!”
저도 모르게 반쯤 일어선 귀모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꽈드득.
움켜쥐었던 팔걸이가 단숨에 바스러지고, 부릅뜬 눈에 돋은 핏발이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번졌다.
이게,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별안간 자신의 권능을 이어받은 규사와의 감응이 끊어져 버렸다.
오시기 전 제가 먼저 인계에 터를 닦아 놓겠노라, 호언장담하고 떠나간 그다. 한데 봉신을 해하는 느낌을 받은 직후, 그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인계에 있었기에 보고 듣는 것이 제한적이었지만, 귀모는 확신했다.
규사가 소멸, 아니 소멸당했다. 무언가에 의해서.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봉신까지 해한 마왕을 소멸시킬 만한 존재가 인계에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천계 족속이라고는 몇몇 신령 놈들이 고작이다. 훅 불면 꺼질 듯 위태로운 촛불 같은 놈들이 봉신을 해한 마왕을? 어불성설이다.
마왕씩이나 되는 자를 소멸시키자면 그만한 신력을 가진 존재여야 하고, 그런 자가 규사와 격돌했다면 공간을 뒤흔들 만한 파동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흐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규사의 존재감은 갑자기 사라졌다. 마치 지워진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까드득.
당황과 분노에 사로잡힌 그녀가 어금니를 세차게 갈자 포궁이 요동치고 공간이 뒤틀렸다.
곁에 있던 순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귀모님, 어찌 그러십니까?”
“……인계에 변고가 생겼다. 나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예?”
눈이 휘둥그레진 순조를 무시하고, 귀모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확인해야 한다. 규사의 소멸에 무엇이 개입되어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협비.」
그녀는 곧장 도산옥주 협비를 소환했다.
남은 마왕 중 강림할 준비를 마친 이는 그가 유일했다.
「예, 귀모님.」
「지금 즉시 인계로 가거라.」
「하나 아직 도산옥이 자리 잡을 터가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습니…….」
「규사가 소멸당했다.」
「……예?!」
협비의 놀람이 귀모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 역시 충격일 터였다.
「길을 열어 줄 것이다. 가서 감히 어떤 놈이 나의 계획에 재를 뿌린 것인지 확인하고, 그 목을 베어 오라.」
「알겠습니다.」
답을 들음과 동시에 귀모가 힘을 발휘해 도산옥에 통로를 열었다.
이내 협비의 존재감이 인계로 이동하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꽉 다문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아 댔다.
“어떤 놈인지…… 나의 계획에 재를 뿌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귀모의 눈동자가 시퍼런 빛을 발했다.
* * *
“뭘 째려봐?”
“…….”
“이게 확, 그냥!”
입술을 댓 발이나 내밀면서도, 양소방은 꿇은 무릎을 매만질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진무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안에 든 것은 혁련무강이 아닌가? 자신과 같은 대를 살았던…… 와중에 자신보다 몇 살 더 많은.
뿐인가?
‘내가 선계 선배야! 무려 만 년이나!’
……라고 말하는 통에 대꾸 한번 못 해 봤다, 젠장.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무였을 때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도와줬는데. 내공까지 쪽쪽 빨려 가면서 그를 성장시켜 줬는데…….
“어쭈? 눈 안 깔어?”
“…….”
진무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부라리자 양소방이 슬며시 시선을 깔았다.
어쩌겠는가. 상대가 돼야 반항이라도 해 볼 것 아닌가.
“진작에 그럴 것이지. 자 한 잔 받아.”
“…….”
진무가 술병을 내밀자 양소방이 못 이기는 척 손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싸가지 없이! 두 손.”
“…….”
“하아, 상하(上下)가 어떤 모양인지 다시 알려 줘야 하나?”
진무가 한숨을 폭 쉬며 막대기를 슬며시 움켜쥐자 양소방이 기겁하며 황급히 잔에 손 하나를 더했다.
“돌려 마셔라, 으이?”
“…….”
참을 수 없이 짜증이 치밀었지만, 더는 맞고 싶지 않았다. 양소방은 고분고분 몸을 돌려 잔을 감추곤 빠르게 들이켰다.
“옳지, 잘한다.”
그제야 진무가 흐뭇하게 웃으며 막대기를 내려놨다.
“지, 진무……선인?”
보다 못한 명진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양소방이 무자비하게 처맞는 모습을 본 뒤라 차마 그냥 진무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예! 스승님.”
“…….”
진무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활짝 웃으며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게 답했다.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아, 아니…… 진무선인께서 너무 과하신 게 아닌가…… 해서…….”
명진이 더듬거리자 진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스승님.”
“으응?”
“어찌 제자에게 갑자기 공대하십니까? 제자, 말씀 받잡기 어렵습니다. 그저 전처럼 진무야, 하시면 예, 하겠습니다.”
“…….”
진무가 세상 착한 제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헤실거렸지만, 지금만큼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양소방을 대할 때와는 온도 차가 너무 극명하지 않은가? 더구나 자신보다 어른인 양소방이 진무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데…….
“그…… 진무야. 아무리 그래도 무풍개이신데…….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닐지.”
“에이, 신경 쓰지 마세요, 스승님. 쟤랑은 예전부터 친구 비슷한 관계였습니다.”
“무, 물론 그렇긴 한데……. 내게도 입장이라는 것이…….”
“명백히 다른 입장이죠.”
“응?”
“스승님은 스승님이시고, 저놈은 그냥 저놈이죠. 스승님도 참, 어찌 저딴 놈과 비교하신답니까?”
“…….”
“신경 쓰지 마시고, 제자의 술이나 한 잔 받으십시오.”
진무가 양손으로 명진과 자신의 잔을 채우곤, 보란 듯이 술잔을 감추고 돌려 마셨다. 그 후에도 명진이 거듭 조심스럽게 잔소리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째서 사람이 입은 하나인데 귀가 두 개겠는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고 두 개인 것이다.
존경하고 아껴 마지않는 스승님이시지만, 진무는 절대로 양소방에게 공대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스승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자, 한 잔 더 해.”
“…….”
“돌려 마시고.”
거듭 양소방을 괴롭히는 가운데, 술자리는 밤새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분위기는 흥겹기만 했다.
술자리에 모인 이들이 함께 지나온 시간이 그러했다.
길거리를 떠돌던 부랑아로 시작해 사패천의 패자가 되었던 파란만장한 혁련무강의 생애가, 도동의 몸에 빙의해 무너진 무당을 되살렸던 진무의 생애가……. 또한 선인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그러했다.
같은 시간을 겪어 온 자들에게는 추억이요, 그리움이었고, 후대를 사는 무당의 도사들에게는 경외였다.
그날 밤의 술자리에는 선인과 사람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선후배의 상하 구분이 있었을 뿐.
길고 긴 추억담과 함께 밤이 깊어 간다. 수많은 이야기 속에 진무가 있었고, 그와 함께해 온 이들의 삶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잔을 채우고, 또 비워 내며 웃었다.
그리고 어둠만 가득할 것 같았던 세상에 다시 빛이 돋아났다.
산 어림을 붉게 물들이며 솟구치는 태양이 어둠을 밀어 내고, 세상을 비췄다.
풀, 나무, 산, 무당의 역사를 간직한 전각들과 암묘, 사당…….
하나씩 드러나는 모습에 왁자지껄했던 술자리에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내내 보았던 모습이나, 늘 이 시간이 되면 심장을 짓누르는 먹먹함을 느끼곤 했다.
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무당산에 과거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녹음이 우거져야 할 숲은 불탔고, 그 신묘한 형상에 넋 놓고 감상하도록 만들던 기암괴석은 부서지고 무너져 흉하게 널브러졌다.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역사를 이어 왔던 무당의 전각들 또한 성한 곳 하나 없었다. 지붕은 무너지고, 벽은 허물어져 찬 서리조차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자연히 보는 이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아 갔다.
하나 잠시일 뿐이다.
다시 시작될 싸움에 몸을 던지고 나면 살았음에, 또 한 번 지켜 냈음에 감사하고 말 것이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
침묵만 가득하던 그때, 청상이 진무에게 물었다.
“뭘?”
“다시…… 공격해 오겠지요.”
“흠, 그렇겠지. 끈질긴 놈들이니까.”
“규사, 아니 육계마왕의 하나인 박피옥주가 나타났으니 마왕들의 강림이 머지않았을 겁니다.”
“맞아, 곧 오겠지.”
“귀모도 올 것입니다.”
“당연한 소릴. 이미 세상에 마(魔)가 가득하게 되었으니……. 마왕들이 자리를 잡고 나면 인계로 나올 거야. 그러곤 천계로 진격하려 할 테지.”
“어찌합니까?”
막막함이 느껴지는 청상의 질문에 진무가 툭 내뱉었다.
“뭘 자꾸 어찌해?”
“……?”
“하나씩 돌려보내야지. 더는 인계에 관여치 않도록 해야지. 그러려고 다시 돌아온 걸음이니까.”
시큰둥하게 말하는 진무를 바라보던 청상이 결심을 굳힌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사숙을 도울 겁니다. 안 된다, 위험하다 하셔도 반드시 도울 것입니다.”
“…….”
엄숙하기 그지없는 청상을 힐끗 쳐다본 진무가 픽 웃었다.
어째 쓸데없이 서두를 장황하게 깔더라니,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어? 내가 물러나 있으라 할까 봐?
“저도 돕겠습니다, 사숙!”
청우가 투실한 볼을 떨어 대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요!”
“제가 천주님의 옆을 지킬 것입니다.”
어느새 한데 뭉친 황신과 아이들이 거들고, 사패오왕도 옆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에 모인 모든 선인과 도사 또한 덩달아 눈에 힘을 잔뜩 주고선 진무를 바라봤다.
“진무야, 나도 힘닿는 데까지 도울 것이니라.”
“…….”
명진까지 나서서 결사 항전을 다짐한다.
다들 말려도 듣지 않을 기세였다.
뭐, 그 마음을 어찌 모를까마는! 떽! 어딜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다른 놈들은 다 돼도, 스승님만큼은 안 된다.
몸도 약한 양반이 나서길 어딜 나선단 말인가? 선인이 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제자로서 마땅히 스승을 지켜 드려야 할 책임이 있지. 눈에 흙이 들어가도 스승이 지계 놈과 싸우다 죽는 꼴은 못 본다. 암! 그렇고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