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09
79화
“이건 또 무슨?”
규사의 죽음 이후, 좀 더 세심하게 인계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귀모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내내 늘어 가던 마의 영향력이 일부 구간에서 급격히 줄었다.
전세가 뒤집힐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껏 내내 늘어 가고 있던 추세가 아닌가? 문제라고는 잠시 정체되는 것이 전부였는데…… 줄다니?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극히 일부, 대해(大海)에 돌멩이를 던져 만든 파문에 불과했다.
하지만 몹시 신경 쓰인다.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게, 마치 손톱 주위에 보풀처럼 일어난 거스러미 같다 해야 할까?
와중에 인계의 마력이 줄어든 만큼 늘어난 게 신력이 아니다.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생소한 기운이다.
“대체 어떤 놈들이…….”
짜증이 극에 달한 귀모의 볼 어림이 잘게 떨린다.
까드득.
이어 악문 이가 세차게 갈렸다.
규사의 죽음, 그리고 인계에서 시작된 알 수 없는 작은 변화의 흐름.
……어그러짐.
모든 계획이 완벽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는데…….
이제 곧 육계의 터가 완성된다. 완성된 그곳에 마왕들이 강림하고 나면 끝날 일이었다.
당장, 당장 알아봐야겠다.
비록 그 조짐이 아주 작은 변화에 불과할지라도, 절대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잘못 끼워진 조각 하나가 미세한 균열을 만드는 법이고, 나아가 탄탄하게 세워진 방벽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는 법이다.
나중에 가서야 ‘그때 그것만 아니었더라도…….’라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 없다.
삼계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오래전부터 세워 온 계획이다. 이제 막바지, 정상을 목전에 놓고 있는 만큼,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될성부른 나무가 될 떡잎이 움트고 있다면, 겨우 새싹에 불과할지라도 돋은 땅 전부를 뒤집어엎을 것이다.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다. 이미 대신 일을 처리해 줄 이가 인계에 나가 있지 않은가?
협비.
귀모는 정신을 집중해 인계로 내보낸 협비의 존재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협비에게 내린 권능, 검령(劍靈).
천천히 풀어 인계로 흘려보낸 권능의 실타래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머릿속에 협비의 형체가 선명히 떠올랐다.
공간의 한계로 인해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뜻을 전할 수 있을 만큼의 감응을 이룬 것이다.
「협비.」
귀모가 마음속으로 그를 불렀다. 이제 곧 ‘예’하고 답해 올 것이다.
얼마 전, 봉신을 해한 그가 뿜어낸 힘의 파동이 느껴졌으니 규사를 죽인 흉수 놈과 부딪쳤을 것이다.
힘이 다시 봉해지고도 그 존재감이 선명한 것을 보면 임무를 무사히 마쳤을 터.
장한 일이지만, 칭찬은 나중이다. 사소한 임무 하나를 더 처리하게 하고, 나중에 후한 상을 내리면 될…….
“…….”
부르고 한참을 기다렸건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귀모는 당황을 억누르며 정신을 집중했다.
「협비!」
두 번째 부름.
하나 기다렸음에도 역시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뭐지?
「협비! 협비!!」
수차례의 부름에도 협비는 묵묵부답이었다.
어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검령의 권능이 머무는 이상 협비가 자신과의 종속을 거부할 리도 없거니와, 존재감이 이리 선명한 것을 보면 그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 듯한데…….
“서, 설마? 공간이 내 권능의 부름마저 제약하는가?”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줄 합당한 이유는 그뿐이었다.
달리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지금까지 인계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가 아니었던가?
“제기랄…… 생각지도 못한 문제로군.”
그녀라고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삼계의 경계가 무너진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한다?
협비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다면 다른 마왕에게 임무를 주어 내보내야 하는데…… 마땅한 적임자가 없다.
강림의 때가 임박한 마왕들을 보낼 수는 없다. 이미 인계 곳곳에 자리 잡은 그들의 터가 완성되어 가는 참이다. 완벽한 강림을 위해서는 기다려야만 한다.
가능한 것은 규사의 죽음 이후 새로 박피옥주가 된 녀석 하나뿐이다. 하나 아직 마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각성을 이루지 못한 놈을 보낼 수는 없다.
“제기랄,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꼭 필요할 때 찾는 물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인간뿐 아니라 신에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나 이대로 발만 동동 구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비록 그 방법이란 게…….
“내가 전령을 써야 할 날이 올 줄이야.”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던 귀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마 역대 귀모 중 최초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무에 대수겠는가.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최초로 삼계를 손에 넣은 지배자로 남을 것인데…….
「순조.」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흐뭇한 미소를 떠올린 귀모가 수호령 순조를 불렀다.
“귀모님!”
“……?”
공간을 찢으며 모습을 드러낸 순조가 냅다 답하며 엎드린다.
그런데 몹시도 경망스럽다.
당황한 기색마저 역력한 것이, 절로 눈이 찌푸려질 만큼…….
“순조.”
“……사, 사타의 터가 공격받았습니다.”
“…….”
귀모의 눈빛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인계에 준비되고 있는 사타의 터가 뭘 어쨌다고?
“……공격을 받아?”
“그렇습니다. 지석(誌石)이 파괴되고, 괴와 요들이 지계로 강제 소환 당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소멸해…….”
콰아앙!
의자가 산산이 조각났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리고, 부릅뜬 눈동자에 혈광이 치솟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누가 사타의 터를 공격했단 말이냐!”
“그, 그것이…….”
“말하라!”
거친 고함에 포궁이 우르릉 뒤흔들렸다.
“각 계의 부활지로 돌아온 자들의 말로는…… 공격해 온 흉수의 정체가 협비였다고 합니다.”
“뭐, 뭣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흉수가 협비라니, 개소리라 표현해도 아까운 말이 아닌가?
“수차례 확인했으나 모두 한결같이 그리 말했다고 합니다. 협비가 도산옥 귀들과 함께 사타의 터를…….”
“닥쳐라!”
“…….”
귀모의 세찬 노기가 순조의 육신을 옥좼다.
온몸이 짜부라질 것 같은 압박감에 순조는 숨을 헐떡이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 대체 무슨 일이…….”
이제 그녀의 몸에서는 서늘한 귀기마저 뻗치고 있었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협비라니? 그와 이어진 권능의 실타래가 이리도 견고하거늘!
설마 배신을?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권능에 종속된 자가 어찌 자신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순조가 자신에게 거짓을 고할 리는 없다.
그럼 정말로 협비가……?
대체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
순간 귀모는 부릅뜬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늘 지계의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묘한 흐름을 보인다.
불안하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의 발생이 마음을 조급하게 한다. 살아온 모든 시간 안에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규사의 죽음을 시작으로…….
아무것도 아니던 손가락 거스러미가 아무것으로 변했고, 어느 틈에 잘못 끼워 버린 작은 조각이 만든 균열이 점점 더 는다.
막아야 한다. 자신의 모든 계획이 붕괴되기 전에.
“빌어먹을…….”
귀모가 눈가를 파들파들 떨며 순조를 불렀다.
“순조.”
“끄으…… 귀모님.”
“공격을 준비하라.”
“……!?”
“마왕들을 내보낼 것이다.”
“귀, 귀모님! 하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안다.”
“자칫 계획이……!”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귀모의 단호한 명에 순조가 힘겹게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더 머뭇거릴 수 없다. 변화가 소용돌이로 변해 인계를 집어삼키기 전에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설사, 인계를 조금 더 늦게 손에 넣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 * *
쾅! 콰쾅!
“끄아아악!”
비명이 하늘 아래를 가득 채운다.
-크아아아!
용의 모습으로 현신해 하늘 높이 솟구친 여의가 뇌성벽력이 되어 내리꽂힌다.
콰드득! 쾅!
폭격당한 지면이 터져 오르고, 휩쓸린 마귀들이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소멸했다.
-크앙!
금혼이 크게 휘두른 발이 뇌격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를 다섯 조각으로 찢어 버렸다.
그리고 난입한 둘의 포악한 기세에 뿔뿔이 흩어지는 적들 사이로, 표표히 날아와 내려앉은 여섯 줄기의 선기.
슈아악! 따다닥!
휘둘러진 목검이 스친 자리마다 마귀들의 육신이 부서져 재처럼 흩날린다.
“적들을 섬멸하라!”
청상의 명과 함께 일곱 줄기의 선기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하합!”
선기를 품은 청우의 권격이 뭉친 적들을 때려서 흩어 놓으면.
푹!
황신의 비수가 적들의 목을 스치고, 소동보의 걸음이 쓰러진 그들을 유린하며 각출의 손에 들린 묵직한 곤봉이 머리를 바스러뜨렸다.
진무를 제외한 돌파조.
여의와 금혼, 신목의 가지로 만든 무기가 더해진 그들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건 뭐, 할 일이 없네.”
백표가 짜증스럽게 입을 삐죽거렸다.
정말로 할 일이 없다.
앞선 자들이 전부 박살 내 놓은 곳에 가서 뒤처리나 하는 게 고작 아닌가?
“편해서 좋기만 하구만.”
“…….”
양소방이 거부한 자리를 대신하게 된 이생이 죽어 가는 자들의 머리에 쇠도리깨를 선사하며 중얼거렸다.
“좋긴 뭐가 좋아! 저놈들은 저리도 신났는데 난 왜 니놈이랑 한 조냐고! 저 봐, 저거! 어!? 아주 다들 신났잖아!”
“…….”
백표가 날고뛰는 동료들을 삿대질하며 이생에게 짜증을 부렸다. 하여간 껍데기를 못 벗겨서 환장한 모양이었다.
참 지랄 맞다 싶지만, 괜히 저 더러운 성질 건드려 좋을 게 없다. 그러다 미운털 박혀서 승전 연회에서 그의 기예가 스민 고기 한 점 못 얻어먹으면 큰일 아닌가?
이생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진무 님께선 정말 대단하시네. 설마하니 협비와 그 휘하의 귀들을 귀속시켜 버리실 줄이야.”
그 말에 잠시 짜증을 멈춘 백표가 멀리 산자락을 바라봤다.
전투의 현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백표가 만든 안주를 놓고 적생과 술을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진무.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무당을 찾았던 협비는 진무와 한동안 대화를 나누다 별안간 봉신을 해제했다.
갑자기 싸움이 시작되었고, 진신을 드러낸 협비는 엄청난 위용을 보여 줬다.
보이는 모든 하늘이 검으로 뒤덮이는 장관이라니…….
그가 만든 검이 온 땅을 적시는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데도, 진무는 그 속에서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둘의 싸움에 공간이 뒤틀려 솟구치고, 하늘이 쩍쩍 갈라졌다.
한데 희한한 싸움이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주제에 협비는 내내 도망쳐 다니고, 진무는 작은 칼 하나를 들고 착한 동네 개를 괴롭히는 못돼 먹은 아이처럼 그를 쫓았다.
그리고 갑자기 멈춘 싸움.
푹.
진무가 찔렀다.
협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차례 더 찔러 넣기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별안간 한편이 되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 작은 칼이 세류였다는 것을.
협비가 홀린 듯 멍하니 술자리 옆에 서 있는 이유다. 돌파조의 공격에 혼란해진 마귀들을 협비 휘하의 마귀들이 공격하고 있는 것도 또한 그렇고.
설마하니, 박피옥주의 법구인 세류로 협비와 그 휘하의 마귀들을 종속시켜 부릴 줄이야. 대체 진무의 한계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백표가 픽, 한숨처럼 웃던 그때.
“끄으으…….”
협비가 막 정신을 차린 듯 고통스럽게 머리를 움켜쥐고 비틀거리자 진무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번거롭구만, 번거로워.”
기껏 세류에 스민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긴 했는데, 종속시킬 수 있는 마귀들의 숫자가 한정적이다. 와중에 뭔 놈의 지속 시간이 이리도 짧은지…… 마왕이라 그런가?
그 때문에 전투에도 투입하지 못했다. 혹시나 싸우다 정신을 차려서 귀찮게 할까 봐.
“이놈, 진무!”
협비가 버럭 외친 그 순간.
푹!
“끄으…….”
푹, 푹!
연거푸 찌르고 나서야 협비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변하며 겨우 잠잠해졌다.
“염병, 꼭 세 번을 찔러야 말을 듣지.”
툴툴거린 진무가 손에 들린 세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거 혹시, 싸구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