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08
78화
해맑기만 한 미소였다.
그뿐인가? 온통 마귀로 가득한 곳에 서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여유롭다.
그의 머리 위로 여의가 넘실넘실 휘돌며 우레성을 내고, 금혼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땅을 파헤치며 흉포하게 으르렁거려서가 아니었다.
조금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짝다리로 서서 양손으로 누른 나뭇가지를 지팡이처럼 짚은 채, 진무는 마치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쳐다봐 왔다.
“주, 죽은 게 아니었나?”
“내가 원체 끈질긴 목숨이라서 말이야. 인생을 세 번, 아니 네 번째 살고 있다니까?”
“…….”
장난스럽게 눈을 찡그리며 웃는 진무를 보며, 협비는 그제야 깨달았다.
봉신을 해한 규사를 소멸시킨 것은…… 놈이다.
이를 사리물고 잠시 생각하던 그가 주위를 향해 손을 저었다.
「물러나라.」
손짓과 더불어 전해진 심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면서도, 마귀들은 순순히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이미 봉신을 해한 마왕까지 죽인 마당에 그들이 무슨 도움이 될까? 이대로는 쓸데없이 전력만 줄일 뿐이다.
이전에도 도산옥이 자랑하는 검수림을 폐허로 만들 만큼 강했던 그다. 요와 괴는 물론, 귀가 떼로 덤벼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한데 조금 의아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났을까? 귀모님께서는 놈이 분명 축융과 함께 산화했다고 했는데.
그리고 놈에게서 느껴지는 생소한 기운은 대체 뭐지? 포근한 가운데서도 몸이 떨려 올 정도로 짙은 압박감을 지닌 저 힘은…….
“규사를 소멸시킨 것이 그대였나?”
“맞아.”
“……역시, 그랬군.”
재차 확인을 거친 협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악감정은 없었어.”
“……?”
“내가 분명히 경고했는데, 칼을 안 놓더라고. 해검지에서 말이야.”
“고작 그런 이유로?”
“야, 인마!”
“…….”
“고작이라니! 그게 우리 무당을 얼마나 열 받게 만드는지 알아? 목숨보다 중한 문파의 자존심이었다고!”
별안간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정색하는 진무의 모습에 협비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내 시, 실언했다. 그리 중한 것인지도 모르고…….”
“짜식이 진작에 그럴 것이지.”
“…….”
진무의 표정이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다시 평온해졌다.
협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무를 샅샅이 살폈다.
뭔 놈의 성격이 이리도 제멋대로란 말인가? 인생을 네 번이나 살았다더니…… 몸 안에 서로 다른 인격이 공존하고 있는 건가?
어디로 튈지 몰라 약간 불안했지만, 지금은 진무가 가진 힘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어떻게든 구슬려서…….
“한데 자네가 과거의 연에 연연할 줄은 몰랐군. 무당의 전통까지 생각하다니.”
“안타깝게도 쉽게 뿌리칠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근데 생각해 보니까 규사에게 악감정도 좀 있었던 것 같네.”
“뭐?”
“그놈 그거, 애들을 괴롭히고 있지 뭐야? 기껏 지계까지 찾아가서 생고생해 가며 살려 놓은 놈들인데…… 아오! 지금 생각해도 열 받네, 쌍놈의 새끼.”
“저, 저런! 그가 큰 실수를 범했군.”
협비가 급히 맞장구를 치며 진무를 다독거렸다.
빌어먹을 다중인격.
지계에서 보았을 때와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황당할 정도로 당당한 성격이긴 했어도, 이리 변화막측하진 않았던 것 같았는데.
“한데 그대는 무언가 또 달라진 모양이군? 새로운 힘이라도 얻은 건가?”
“……아, 그게.”
협비가 눈을 반짝거리며 묻자 진무가 대답하려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요 새끼 보게.
자꾸 묻는 게, 어째 뭐라도 캐 보려는 속셈이구만?
“글쎄다, 뭘 얻었다기보단…… 원래부터 있던 걸 제대로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있던 것?”
“깊이 알려고 하지 마라. 묻는다고 설명해 줄 정돈 아니거든.”
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적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딱 요 정도다, 이놈아.
장난스레 히죽거리던 진무가 웃음을 그치고 물었다.
“그런데, 혼자야?”
“…….”
무안을 주려는 듯 일부러 과장되게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핀 진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건 뭐, 미리 모가지라도 바치러 온 것도 아니고 말이지. 혼자서 괜찮겠어?”
“……그, 그건.”
협비의 눈동자에 순간 당황이 스쳤다. 다소 예상을 빗나간 반응에 진무는 가볍게 혀를 찼다.
새끼, 농담 좀 한 걸 가지…….
일순 진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살아 있었냐고?
자신을 처음 보았을 때 협비가 보인 반응은 분명 ‘놀람’이었다. 어째서?
마왕들과 정신적 감응을 통해 모든 것을 보고 듣던 귀모가 아니던가? 그럼 규사를 통해 자신을 봤을…… 텐데…….
어떤 생각이 불현듯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귀모가…… 모른다?
“…….”
진무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촉이 온다. 그것도 아주 그냥 짜릿한 촉이. 뭔가 있는 게 확실하다.
진무의 머리가 모처럼 급류 만난 수차(水車)처럼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귀모가 규사를 통해 날 봤다면 지금 협비가 혼자만 찾아온 것이 말이 안 된다.
봉신을 해하고도 처맞아 뒈진 상황을 봤다면, 내가 가진 힘이나 손에 들린 막대기에 대해 귀모가 의문을 가졌어야 한단 말이지. 그럼 교마 때처럼 적어도 마왕 둘은 보냈어야 하고.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 즉, 어떤 이유에선지 마왕들을 통해 보고 듣는 그녀의 권능이 통하지 않고 있다는 건데.
“흐음.”
하나 속단은 금물.
추측에는 언제나 확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때마침 확인해 줄 놈도 있었다.
“규사를 누가 죽인 건지 너보고 확인하고 오래?”
“…….”
슬쩍 미끼를 던지고, 진무는 낚시꾼 찌 살피듯 협비의 반응에 집중했다.
아주 미세하지만…… 요런, 정직한 새끼.
맞구나?
내가 아주 핵심을 정확히 찌른 게야. 십 할로 명중이란 소리지.
“큭큭,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
진무가 갑자기 기괴하게 웃기 시작하자 협비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요한 건, 이유가 뭐든 간에 귀모가 지금의 상황을 모른다는 것이다.
괜히 지피지기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때로 전쟁의 향방을 결정 짓는 법이다.
가만 보자, 이걸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무의 인격 중 하나가 전면에 부상했다. 아주 비이이이열한 혁련무강이.
“…….”
일순 협비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진무의 기질이 갑자기 판이할 정도로 달라졌다.
좀 전까지만 해도 신마 어느 쪽에도 서 있지 않은 듯했는데, 지금 그에게서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마왕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확연한 존재감이었다.
혹, 이자…… 어쩌면?
“나도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
묻긴 뭘 물어?
머리 복잡해 죽겠구만.
흉계(?)를 꾸미느라 고민에 빠진 진무가 귀찮다는 듯 대충 손을 내저어 승낙하자, 협비가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 물었다.
“그대는 여전히 천계 편에 서 있는 것인가?”
“……응?”
난데없는 질문에 진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협비를 쳐다봤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왠지…… 그대의 성향이 천계와는 너무 동떨어진 듯하여.”
약간 망설이는 투로 말을 마친 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 진무가 피식 웃었다.
그리 느낄 만도 하다.
조화의 힘을 깨달은 이후부터 찾아온 변화.
자신의 힘은 딱히 무어라 구분 지어져 있지 않았다. 때론 사악하고 잔인하며, 또 때론 선하고 정의로웠다.
그냥, 그런 것이다.
그저 어떤 마음을 품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의 말과 행동이 그러한 것처럼.
“새끼. 아니라고 하면, 꼬셔라도 보게?”
“…….”
“뭐, 천계 편이 아니긴 한데, 니들이랑 같은 편도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일종의 중재자랄까?”
“중, 중재자?”
“그래, 난데없이 그런 입장이 되어 버렸지만…….”
“무엇을 중재한다는 거지?”
“천계와 지계의 싸움.”
“……말리기라도 하겠다고?”
“말리긴 내가 왜 말려?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싸움인데.”
“……?”
“그런데 옛날부터 말이야,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게 하나 있거든?”
협비를 향한 진무의 눈빛이 서늘히 가라앉았다.
“이곳 인계의 무림은 정, 사, 마로 나누어져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계는 삼계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지.”
“…….”
협비는 묵묵히 진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서로 가는 바가 다르단 말이야. 더러 계도를 통해 악인을 선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지만, 내 생각은 달라. 실제로도 그러했고.”
“…….”
“잠시는 화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애초에 생각이 평행선을 달리는 놈들이 뭐가 달라지겠어? 또 싸우고 말걸?”
“…….”
“뭐, 그건 상관없어. 싸움을 구경하는 건 내 취미 중 하나니까. 때로 일부러 싸움을 붙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 때문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단 말이야.”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단 말이야. 왜 천계와 지계가 싸우는데 인계가 피해를 봐야 하지?”
“…….”
담담히 제 뜻을 밝힌 진무를 협비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대가 인계를 보호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잘 알아들었네.”
선선한 수긍에, 협비는 그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오만함도 정도가 있지.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니까.
하나 진무가 이끄는 이들이라고 해 봐야 무당산에 머무는 신령들이 전부. 고작 그 정도 전력으로 지계와 맞설 생각인 건가?
“우습군.”
“……?”
“자신감만으로 가능한 것도 정도가 있다. 가능하리라 보는가? 천계의 도움 없이?”
협비의 노골적인 조소에도 진무는 언짢아하기는커녕 자신만만했다.
“가능? 그딴 거 고민해 본 적 없는데?”
“뭐?”
“뜻을 정했으니, 행한다.”
“…….”
“그게 내 방식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꾸어 본 적 없는.”
“미쳤군. 아무짝에 쓸모없는 몇몇 신령들을 데리고, 홀로 지계와 맞설 생각을 하다니…….”
“그게 뭐?”
“지금이야 가능하겠지. 하나 곧 인계에 육계의 터가 다져지면 마왕들이 강림한다. 홀로 모두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
기실 진무도 알고 있다.
당장에야 신목의 가지로 만든 검으로 전력을 보강했지만, 지계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다. 적생이 아무리 뛰어난 전략을 세운다고 해도, 모두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천계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젠장할, 미련 없이 인계를 버린 놈들에겐 고개 숙이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그것 말고는 수적 열세를 뒤집을 방법이…… 없…….
순간 진무의 머릿속에 절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귀모의 권능이 제대로 힘을 쓰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은 조화, 신력과 마력을 아우르는 힘이다.
고로 어쩌면, 귀모의 권능을 무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눈앞에 있는 마왕 한 놈이랑 주위에 널린 수많은 마귀.
이거 잘하면…… 대가리 수가 채워질지도 모르겠는데?
스윽.
결정을 내린 진무가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품을 뒤져 꺼낸 물건에 협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건?”
“이거 참, 이게 이렇게 쓰일 수 있을지는 몰랐네.”
“……!”
진무의 손에 들린 것은 규사의 법구였던 세류였다. 타인을 조종하는 권능을 지닌.
과거 지계에서 조음이라는 놈의 법구 사령을 사용해 본 적이 있었기에 혹시나 해서 챙겨 둔 물건이었다.
“네, 네놈, 지금 그걸 왜?”
“……혹시나 해서.”
스산한 눈빛으로 세류를 꼬나쥔 진무가 협비를 향해 손짓했다.
야, 이리 와 봐.
시험 삼아 한번 해 보자고.
와 보라니까? 일단 생각대로 되는지, 푹 찔러나 보게.
응? 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