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20
90화
콰아앙!
불비가 내렸다.
쏟아지는 운석이 땅을 파헤쳤고, 뒤집힌 대지가 거신의 주먹이 되어 휘둘러졌다.
진무는 어느새 수기와 화기뿐 아니라 토기마저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전투 중의 각성.
악구와 싸우며 모든 힘을 개방한 진무는 오행에 대해 깨닫고, 공격을 통해 숙달하며 조화가 가진 근원의 힘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합!”
솟구친 땅이 산처럼 높이 쌓이고, 그 안에 머물던 금(金)의 기운이 날카롭게 곧추서 예기를 머금고 악구를 향해 날아들었다.
깡! 까가강!
“크윽!”
악구가 가진 법구, 영경은 비추는 거울이다.
모든 힘을 되돌리는 권능을 가졌으나,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진무가 뿜어내는 힘의 크기도 문제였지만, 받아칠 수 있는 것은 한 번에 하나였다. 지금처럼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힘이 다양하게 쏟아지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까드득.
받아 되돌릴 수 있는 힘의 한계를 초과하자 버티지 못한 영경에 실금이 조금씩, 거미줄처럼 뻗었다.
하지만 진무의 힘의 위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의 힘은 무극(無極)하단 말인가?
피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영경이 버티지 못할 것이고, 영경이 부서지면 자신의 운명도 끝이다. 악구는 이를 악물고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혼천을 살폈다.
아직인가? 아직도 회복하지 못했는가?
이젠 혼자서 버티기는커녕, 피해 다니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어쭈? 피해?”
“……?”
도망치기 급급한 악구를 쳐다보던 진무가 한껏 이죽거리며 또 다른 기운을 개방시켰다.
목(木)이 가진 기운.
오행 중 마지막으로 깨달은 힘이다.
상생상극하며 순환하던 힘들이 피워 내는 생명의 힘.
탄생과 죽음을 모두 갖춘 목의 기운은 오행의 정수이자 조화의 그것과 가장 닮아 있었다.
[뻗어라.]진무가 목의 기운을 담아 손을 활짝 펼쳐 뻗었다.
쿠르릉!
“……!”
묘한 흔들림.
대지가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은 악구가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하지만 이전처럼 땅이 뒤집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응집된 쇠의 기운이 땅속에서 솟구쳐 오를 때의 예기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대체……?
촤아악!
의아함을 머금고 고개를 휘휘 돌리던 그 순간, 뾰족한 송곳처럼 생긴 것들이 사방에서 돋아났다.
……나, 나무뿌리?
눈이 휘둥그레진 악구가 다급히 몸을 솟구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몸이 덜컥 내려앉았다.
꽈아악.
어느새 나무뿌리가 넝쿨처럼 그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이, 이런 젠장할!”
다급히 영경으로 그 힘을 흡수하려 했으나, 하늘에서 이미 공격이 쏟아져 내렸다.
물의 창…… 공격부터 막아야 했다.
“하압!”
악구가 영경을 들어 수기를 흡수하는 사이, 어느새 넝쿨이 그의 허리까지 휘감아 올랐다.
꽈드드득!
그리고 땅속 깊은 곳으로 그를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다급히 목의 기운을 흡수하려 했지만, 이번엔 땅이 밀려와 깊이 빠진 그의 몸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진퇴양난이다.
영경은 한 번에 한 종류의 힘만을 흡수해 되돌리기에 어느 것을 먼저 무력화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고민하는 사이 쇠의 기운까지 더해져 땅을 더욱 단단하게 굳혔다.
“흠, 여러 개는 안 되는 모양이지?”
“이익……!”
“……그리 자존심 상해할 것 없다. 규사도, 협비도, 사타도…… 다들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기특해서 봐주긴 했다만, 이렇게나 오래 버틴 건 니가 처음이다.”
“…….”
“하나, 이제 그만 보내 주마.”
진무가 악구를 향해 활짝 편 손을 들어 겨눴다.
“……!”
산들바람이 분다.
시원스레 불어온 바람을 타고, 오행의 기운이 회오리 지어 진무의 손바닥 안으로 모여들었다.
이내 다섯 기운이 뒤섞여 태극을 이뤘다.
낮과 밤, 음과 양, 신과 마.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다 하나로 뭉친 기운은 어쩐지 괴이했다.
밝아 보였고, 어두워 보이기도 했다. 따뜻한가 하면 차가웠고, 생동감 넘치는가 하면 죽어 있는 듯 음산했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담고 있는 힘, 조화.
진무는 작은 구슬처럼 뭉쳐진 무한한 힘을 느끼며 손을 가볍게 당겼다가 밀었다.
쿠우우우…….
무엇이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작은 동작이었으나, 악구는 천지가 밀려오는 듯한 환각을 봤다.
소멸, 영원한 죽음.
영경을 사용한다 해도 되돌릴 수 있을 만한 힘이 아니란 것쯤은 알 것 같았다.
쫓기에는 너무도 아득한 힘.
인정하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마음 또한 차분해졌다.
여기까지였다. 자신이 버틸 수 있는 것은.
“……고맙군. 나의 죽음이 그리 헛된 것만은 아니게 해 주어서.”
“…….”
막대한 힘에 제 몸을 내맡겨 버린 악구가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뱉은 말에 진무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비록 악업을 쌓아 지계의 망자가 되었으나, 깨닫고 깨달아 마왕까지 오른 자다. 비록 지은 죄업을 씻지는 못했을 테지만, 부단히 노력해 온 것만은 사실이다.
진무는 그런 그에게 최고의 죽음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쓰지 않았던 태초의 힘으로.
부디 좋은 곳으로 가거…… 어?!
조화의 힘이 응축된 구슬이 악구에게 닿으려던 그 순간, 진무의 눈매가 와락 찡그려졌다.
쩌저저적!
악구를 움켜쥐고 있던 세 가지 기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조화의 구슬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
악구가 맞았다면 조화의 힘이 그 몸에 스며 육신만을 소멸시켰을 것이나, 목표를 잃은 탓에 그가 서 있던 대지가 뜯겨 나가듯 폭발했다.
하지만 진무는 자신이 만든 폐허가 아니라, 한참이나 떨어진 곳을 응시했다.
“혼천…….”
폭발이 일어나기 전 끼어든 혼천이 조화의 구슬을 만들어 내느라 구속력이 약해진 오행의 힘으로부터 악구를 구출해 간 것이다.
악구를 부축한 채 멀어진 혼천을 언짢게 꼬나보던 진무가 피식 웃었다.
“전생엔 제 놈 목숨 말고는 관심이 없더니.”
꼴에 마왕이 되더니 개과천선이라도 한 모양이지? 동료를 구할 줄도 알고.
뭐, 상관없다. 즐길 만큼 충분히 즐겼고, 적이 둘이 된다 해서 문제 될 건 없으니까.
이제 진짜로 끝낼 때다.
북리도천이 진작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니들! 회복할 시간이라도 줘야…… 어? 어어?”
둘을 향해 외치다 말을 뚝 멈춘 진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악구의 가슴을 파고든 혼천의 손.
“큭, 큭큭…….”
“…….”
스산하게 웃는 혼천을 바라보는 악구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꽈드득, 꽈드드득!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쪼그라들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끄아아악!”
소스라치는 비명과 함께 악구의 형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힘을 모조리 빼앗은 혼천의 모습이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크으……. 기대했던 이상이군.”
새로이 얻은 힘을 만끽하는 듯 이를 악물고 숨을 몰아쉬는 혼천의 모습에 진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흡수하기 위해 지켜 낸 거였어?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설마하니 귀모가 저런 힘을 허락했을 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큭큭, 이제야 좀 볼만하군, 네놈의 놀란 꼴 말이야.”
“…….”
진무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혼천을 노려보았다.
“꽤 궁금한 모양이지?”
“…….”
“모두가 네놈 덕분이지.”
“뭐?”
“나만 죽인 것이 아니지 않았더냐?”
“…….”
무슨 소릴까? 저놈만 죽이지 않았다니.
그 순간 한 인물이 진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흡성대법을 익혔던…….
“기억난 모양이군.”
“설마?”
“그래. 내가 한빙옥의 귀가 되었을 때, 녀석을 발견했지.”
“……한승.”
“그에게 배웠다. 그리고 먹어 치웠지. 이 무공은 나만 알아야 하니까.”
“뭐, 뭐라고?”
진무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먹었다고? 자신의…… 아들을?
아무리 지계의 악귀가 되었다고 하지만, 어찌 아비였던 자가 자식을…….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그 녀석의 희생으로 나는 한빙옥의 마귀들을 잡아먹으며 힘을 쌓아서 마왕이 될 수 있었으니까.”
“……귀모도, 귀모도 알고 있는 일이냐?”
“모를 리 없지.”
“그런데도 방치했단 것이냐?”
“방치? 큭, 크핫핫핫!”
“…….”
“네놈은 뭔가 크게 착각하는구나.”
“뭐?”
“귀모가 성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냐?”
“…….”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데 뭐 하러 제재를 할까. 오히려 더욱 강해져 보라며 칭찬까지 하더구나.”
뿌드득.
이가 갈렸다.
이런 놈을…… 힘에 대한 자부심조차 없는 이런 놈을…….
“하지만 마왕이 된 이후로는 더 강해지지 못했지. 마귀 놈들을 아무리 많이 흡수해도 힘이 조금도 늘지 않더란 말이야. 하긴, 이미 권능까지 부여받았는데…… 그딴 약해 빠진 놈들이 도움이 될 리 없지.”
“…….”
“결국 마왕을 흡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마왕을 흡수하는 건 귀모도 원하지 않는 일일뿐더러, 원체 강한 놈들이라서 말이야.”
“그래서…… 악구가 약해진 틈을 노린 거냐?”
“운이 좋았지, 설마하니 네놈이 악구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여 놓을 줄은 몰랐거든. 더욱이 이곳 인계에는 귀모의 권능이 닿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랬군.”
“큭큭…… 덕에 이런 힘을 가지게 되었구나.”
꽉 움켜쥔 손아귀에서 소용돌이치는 힘을 만끽하며, 혼천이 진무를 향해 다가갔다.
“너를 죽일 이 힘을 말이야.”
“…….”
진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분노조차 표출하지 않은 채, 그저 혼천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놈, 너도 이 힘이 느껴지는 모양이구나. 왜? 몸이 움직이지도 않는 게냐?”
“…….”
“큭, 그럼 그렇게 죽어라!”
후아악! 콰아앙!
후려친 거대한 주먹을 보면서도 진무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곧바로 그의 몸이 세차게 날아가 바위를 부수며 쑤셔박혔다.
“크흐흐, 크핫핫핫!”
가져 본 적 없는 강대한 힘에 도취한 나머지 이길 수 있다 여긴 것일까? 한껏 고양된 표정으로 웃은 혼천이 북리도천을 쳐다봤다.
“그간 거들먹거리던 네놈의 꼬락서니가 얼마나 보기 싫었는지. 우융, 너도 기다리고 있거라. 진무 놈을 흡수하고 나면 다음은 네놈 차례다.”
“…….”
완전히 괴물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 혼천의 이죽거림에 북리도천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시선이 향한 곳은 혼천이 아니었다.
우르르.
“…….”
부서진 바위를 밀치고 일어난 진무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고 있었다.
“다 한 거냐?”
“뭐?”
“고작 이 정도냐고.”
“……!”
싸늘한 시선과 차분하지만 적나라한 멸시가 묻어나는 목소리 어디에서도 두려움은 느낄 수 없었다. 혼천은 치미는 분노에 눈을 부릅떴다.
“이 개자식이…….”
“그래, 뭐…… 개라 치자. 그런데 넌 뭐냐? 모기가 물어도 이거보단 아플 것 같은데.”
“닥쳐라!”
콰앙!
박찬 땅이 폭발하듯 튀어 오르고, 곧장 혼천의 육중한 덩치가 진무를 덮쳤다.
빠악! 빠가각!
연거푸 후려친 주먹이 진무의 몸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나 진무는 대응하지 않았다.
땅바닥을 구르고 입은 옷이 흙투성이로 변했지만, 고작 그 정도…….
아들을 잡아먹고, 수많은 마귀에 이어 제 놈을 구하려던 동료까지 약해진 틈을 타 잡아먹은 놈이, 겨우 이 정도의 힘이다.
뼈 하나 부러뜨려 놓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그런 쓸모없는 힘.
“허억, 허억…….”
쉴 새 없이 주먹질해 대던 혼천이 힘에 부쳤는지 몸까지 들썩이며 헐떡였다. 그리고 태연히 일어나 그를 바라보는 진무의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측은지심 따위와는 다른 동정이었고, 실망이었다.
“불쌍한 놈.”
“…….”
“그때도 그랬지. 힘에 취해서…… 있지도 않은 환각 속에 사로잡혀 있었지.”
충격 따윈 하나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 많은 공격을 퍼부었는데, 주먹이 욱신거릴 만큼 강하게 두들겼는데…….
“혼천, 아니 한무화. 만약 지금까지가 네 전부라면…… 너는 죽는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
담담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혼천은 뇌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바르르.
소, 손……. 아니 몸 전체가 떨렸다.
자박, 자박.
“……!”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진무의 덤덤한 발소리가 천둥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악구의 힘을 전부 흡수했는데…….
어찌 거미줄에 걸린 나방인 양 꼼짝달싹할 수가 없단 말인가?
“한무화,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패 죽여 줄게.”
“……!”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물러난 혼천이 커다래진 눈으로 고개를 휙휙 돌렸다.
이럴 리가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 그래, 약간 부족했던 것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아직 북리도천을 잡아먹을 순 없다. 그럼? 마귀! 마귀들을 먹어 치워 힘을 채워야 한다.
“으아아아!”
“…….”
혼천이 괴성과 함께 마귀들을 향해 뛰어갔다.
“후우…… 정말이지 귀찮게 하네, 힘도 없는 새끼가.”
깊은 한숨을 내쉰 진무가 가볍게 발을 들었다 놓자, 그의 신형이 살랑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가벼운 산들바람이 아니었다. 세찼고, 소용돌이쳤으며 이내 폭풍처럼 세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의 형체가 혼천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