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허윤이 말을 이었다.
“효사는 혹약재연(或躍在淵)하면 무구(无咎)라. 중천건은 그 풀이가 용과 관련되어 있소. 용이 연못에서 뛰어오른다고 하여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오.”
진승은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허윤의 실력은 확실하다.
그가 안 좋다고 하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허 선생님, 무슨 의미입니까? 용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니요.”
“뛰어오를 약(躍) 자를 썼소. 오를 승(昇) 자나 오를 등(登) 자와 달리 뛰어오를 약 자에는 올랐다가 다시 떨어진다는 의미가 있소. 용이 완전히 승천하지 못하고 제자리로, 연못으로 다시 떨어지는 것이오.”
남궁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제자리 뛰기를 한 건가요? 어쨌든 연못으로 떨어졌으니 다치지는 않겠네요.”
“바로 그거요. 애초에 움직이지 않으면 다치지도 않겠지만, 혹약이라! 혹시(或是)나 움직인다 해도 중간에 포기하면 최소한 현상을 유지할 수 있소.”
고우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섬서 연합이 대승을 거두고 상황이 아주 좋은데, 여기서 뭘 더 하지 말라는 뜻이냐?”
“그렇소.”
“아니, 근데 어떻게 그래. 지금 섬서 연합이 턴 장원만 수십 곳이야. 쟤들은 이제 보급에 큰 차질이 생기겠지? 게다가 보주를 셋이나 죽였잖아. 네 광두포(狂頭砲)로 죽고 다친 놈들도 수백이라며. 하다못해 이럴 때 남은 장원이라도 마저 쳐야지, 놀면 뭐 해.”
“사람 말을 이해 못 하시오?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거요. 아니, 그런데 광두포는 또 뭐요?”
“그럼 독두(禿頭)라고 하든지.”
광두나 독두나 전부 대머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자꾸 이상한 말 지어내지 마시오.”
허윤은 고우사를 째려본 뒤 답했다.
“아무튼. 욕심을 부려서 함부로 행동하면 사달이 날 것이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좋소.”
일행들이 웅성거렸다.
진승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씀은 알겠으나, 경우가 너무 방대하여 쉽게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 방법이 없습니까?”
“동쪽에서 귀인이 찾아올 것이오. 그러나 승천하는 줄 알았는데 승천을 못 한 것처럼, 그 역시 귀인으로 보이나 귀인이 아니오. 만일 그가 오거든, 화산파는 무조건 엮이지 말고 달아나야 하오. 그래야 화를 피할 수 있소.”
진승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황보홍이 물었다.
“달아나라는 건, 본산을 정리하고 흩어지란 소리 아녜요? 수백 년 이어 온 화산파의 도량을 두고 떠나라고요?”
“그것 말고 섬서를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소.”
“연못을 벗어나지 않아야 문제가 없다고 했잖아요. 근데 화산파가 화산을 떠나는 건, 연못을 떠나는 게 아닐까요?”
“이 점괘는 단순히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승천할 때가 아닌데 승천하려 욕심부리는 걸 조심하라는 거요. 뛰면 반드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세임에도 욕심을 부리다가 연못이 아닌 곳에 떨어지면, 맨땅에 부딪혀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지게 되오. 새 연못을 찾아가는 건 오히려 때를 기다리며 자중하는 셈이니 차라리 그걸 권하는 것이올시다.”
말을 하던 허윤이 진승을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종남파처럼 화산파도 결국은 피하지 못할 것이오.”
“허 선생님. 도와주십시오! 내가 뭘 하면 됩니까?”
진승의 부탁에도 허윤은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점괘를 뽑아 보았는데, 옥상옥(屋上屋)이라 나왔소. 지붕 위에 또 지붕이 있는 꼴이오. 내가 암만 노력하여 지붕을 오른대도 그 위에 또 지붕이 있고, 그 지붕을 오르면 또 지붕이 있으니 만사가 허사요. 부질없는 짓이올시다. 그저 귀인이 오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그 귀인이 오지 못하게 하면요?”
“그 뒤로는 지붕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어차피 그대도, 나도 손이 닿지 않소.”
허윤은 이번 일로 한계를 크게 느꼈다.
아무리 점술 실력이 좋아도, 자신은 한낱 백도맹의 서기일 뿐이었다.
미래를 보았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대군을 부리거나 이끌 수 없었다.
지휘권을 가진 결정권자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허윤의 점괘도 소용이 없어지는 것이다.
지붕 아래에서는 아무리 외쳐도 위에까지 닿지 않는다…….
하여 깨달은 바가 많았다.
“난 여기 회주님을 만나러 가야겠소. 부디 화산파에 잘 전해 주시기를 바라고…….”
허윤이 남궁민을 돌아보았다.
“처자는 가문으로 돌아가시오. 섬서에 더 있지 말고.”
남궁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전에도 허윤이 자신에게 돌아가라고 한 게 떠올라서였다.
“허 형…….”
백도맹 섬서 지회 회주 계춘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에 서 있는 허윤을 올려다보았다.
“철수하라고? 남아 있자고 박박 우긴 사람이 누군데 인제 와서 그러나?”
사실 계춘은 백도맹 본회에 계속 철수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고, 이번에야말로 철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섬서의 정파 연합이 마도에 크게 피해를 주었다는 정보를 접하고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하여 막 사업을 늘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마도에 피해를 주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한 허윤이 갑자기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니, 이보게. 우리 맹에 가입한 섬서 상인들은 이번에 상당한 이득을 봤네. 자네 말대로 배송을 늦췄더니, 물건을 받을 마도가 다 죽는 바람에 배송할 필요가 없게 됐지. 받은 계약금도 고스란히 남았어. 게다가 그들이 계약을 차명으로 해서 다른 마도에 넘기지 않아도 된단 말일세.”
“그래서요?”
“마도가 대패했으니 이제 정파가 득세하지 않겠는가? 그럼 남은 물건도 그들에게 처리하고, 그 차익으로 사업을 더 확장할 수도 있네. 섬서에서 우리 백도맹의 입지가 확고해질 게야.”
허윤이 딱 잘라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지금 상황에서의 최선은, 우리 맹에 가입한 상인들에게 최대한 신속하게 사업을 정리하고 이곳을 떠나라 촉구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면 내가 꼴이 어떻게 되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그래?”
“섬서에서 백도맹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뭐라고?”
허윤이 계춘을 바라보며 말했다.
“머잖아 섬서에서 백도맹을 볼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들은 계춘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 * *
섬서 정파는 큰 승리에 도취하였다.
섬서의 크고 작은 정파의 문파들 모두가 들떴다.
이십 년 싸움 중에 가장 좋은 성과를 냈다.
마도에서 한창 떠오르던 신흥 세력인 마가십세의 보주 셋을 죽인 것도 대단한 전과였지만, 무엇보다 마도의 물자 보급을 끊어 버린 것이 가장 큰 성공이었다.
사실 그것만 해도 대승인데, 섬서 정파의 피해는 마도에 비하면 아주 적었다.
전력을 거의 고스란히 유지한 것이다.
게다가 종남파의 천하검 도세홍이 허윤과 함께 육대 마도를 작살 냈다는 것도 비공식적으로 암암리에 알려졌다.
단 두 명이 섬서 정파 전원이 나선 것과 거의 비슷한 수의 마도를 죽였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섬서 정파의 성과를 퇴색하게 만들고 사기를 꺾는 얘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세홍이 앙연의 경지에 올랐다는 게 밝혀지면서, ‘그럴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
이쪽에 앙연의 고수가 버티고 있다는 건 오히려 든든한 얘기였다.
섬서의 마도는 이제 거의 힘을 잃었고, 보급 때문에 시간을 끌수록 더 불리해질 터였다.
마도 대종사가 후방에서 단단히 자리를 굳힌 채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게 의심스러운 일이나, 이제 남은 건 섬서의 마도 잔당들을 언제 쳐서 몰아내느냐 뿐이었다.
* * *
자정의 수련을 거의 쉬지 않았던 허윤이었으나, 며칠 간은 영 마음이 복잡하여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제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옆에서 봐줄 필요가 없어서인지 낙락도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다과를 가져와 함께 먹었다.
“천하검이 벽을 넘었구먼.”
“뭐, 그런가 봅니다.”
“잘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네.”
“잘된 거 아닙니까?”
“꼭 그렇진 않네. 대개 벽을 넘을 때 큰 깨달음을 동반하네. 정신적으로, 혹은 신체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지.”
낙락이 뺨이 볼록하게 다과를 넣고 녹여 먹으면서 말했다.
“벽은 그 사람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껍질 같은 걸세. 그 껍질이 깨지니 선악의 기준이 모호해지기도 하고, 규율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게 되기도 하네. 반대로 한 가지에 집착하게 되는 일도 생기지.”
허윤은 낙락이 손에 들고 있는 월병을 쳐다봤다.
“이건 집착이 아니라 취미일세.”
“그렇다 치죠. 그래서, 종남파 문주님이 앙연에 올라서 잘된 일이 아닌 건 뭡니까?”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종남파를 지키는 데 관심이 없어질 수 있지.”
“제가 물어봤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반대로 지키는 데 집착하게 될 수 있네.”
“음. 오히려 그쪽이 가깝겠군요. 그럼 잘된 거 아닙니까?”
“글쎄. 그러면 종남파에서 아예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될 수도 있네. 강호에서 절정고수만큼 앙연의 고수들을 쉽게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 경지에 다다르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그 전처럼 무공에 열정을 쏟으며 강호에서 살아가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일세. 그 시간에 어딘가에서 자신에게 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지.”
허윤이 다시 낙락이 당과를 집어 드는 모습을 쳐다봤다.
“그래, 지금 내겐 이 당과가 강호의 무사 안녕보다 중요하다네! 이제 됐는가?”
낙락은 삐친 투로 고개를 돌렸다.
흥.
허윤은 문득 생각난 게 있어 물었다.
“혹시 마도는요? 마공을 익히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흥.
허윤이 슬며시 당과를 내밀었다.
낙락이 냉큼 집으면서 대답했다.
“마도 애들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하나 그쪽은 본래부터 정파보다 자유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규율이나 선악보다는 본성에 충실해지는 경우가 많지. 그런데 왜?”
“이쪽에 앙연의 고수가 있으면 저쪽에도 있지 않겠나 해서요.”
“있어도 보기 쉽지 않지.”
“왜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귀찮은 건 싫어하는 게 본성이니까.”
“그렇군요.”
허윤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는 걸 느꼈다.
하여 자연스레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손님이 오는 것 같습니다. 잠시 가 봐야겠군요.”
* * *
자정도 넘긴 늦은 시간에 찾아온 이는 손현이었다.
허윤은 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어서 오시오.”
손현이 한숨을 쉬었다.
“제가 올 줄 안 걸 보니, 허 선생께서 섬서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던 말도 거짓이 아니겠군요.”
“거짓말은 그쪽이 하였지.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보았소?”
손현은 쓴 미소를 지었다.
“허 선생의 말대로 했다면 분명 더 크고 좋은 성과를 얻었겠지요. 하나 그때의 저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노라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최선이 아니라 최악이었소. 안 했으니만 못한 일이었지. 그게 이제 더 큰 화를 부를 거요.”
“그래서 왔습니다.”
손현이 죽간을 내밀었다.
“이것, 허 선생이 일전에 제게 준 점괘죠. 산수몽. 이게 앞으로 생길 일과 관계가 있나요?”
“그렇소.”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전히 설명해 주실 수 없고요?”
“분명 그때도 말했을 거요. 산과 물이 관련되어 있으며, 외부에 도적이 있으니 잘 지켜야 한다고.”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기로는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어요.”
허윤이 손현을 빤히 보았다.
“유일한 대응은 섬서를 비우고 떠나는 것뿐이오. 그 외엔 어떤 대응을 해도 마찬가지요.”
“이 정도로 큰 성과를 냈고, 마도는 궤멸 직전인데도요?”
“정말 궤멸 직전인 게 맞소?”
“허 선생께서 짚어 준 장소의 절반이긴 하지만, 주요 거점을 대부분 파괴했어요. 마도의 본산은 먼 서역이라 다시 인원을 충원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래도 우리가 불리하다고요?”
되묻던 허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나는 모르겠소.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방금 그게 다요.”
손현은 허윤의 눈을 똑바로 보다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아, 온 김에 소식을 말씀드릴게요. 화산파의 아운 장로님은 운남으로 무사히 들어간 것 같아요. 남궁가와 모용가도 우리 쪽의 승전보를 듣고 사천에서 활동을 시작했고요.”
“잘됐구려.”
손현은 홀짝 차를 마시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 잘 마셨어요.”
허윤도 일어나 정중하게 읍을 했다.
“잘 가시오.”
“아 참.”
생각난 듯 손현이 물었다.
“귀인이요. 동쪽에서 온다는 귀인은 누구지요?”
“곧 알게 될 거요. 나도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을 뭐라고 설명하겠소? 다만, 심상으로는 동글동글하고 뭐 그런 느낌이었소이다.”
“동글동글?”
손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동쪽에서 온다는 귀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