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22
22화
진령상회 오주 지회의 장원은 여타의 장원과는 달랐다.
수백 명이 동시에 모일 수 있는 큰 마당이 있었고, 그 옆으로 무인들의 숙소로 쓰이는 장원들이 줄지어 연결되어 있었다.
사람이 사는 거주지라기보다는 병영에 더 가까운 구조였다.
들어 보니 진령상회 자체가 백도맹의 주축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회가 다 이런 모양으로 개축된 듯했다.
진령상회는 상단이면서 무림 단체이기도 한 묘한 곳이었다. 회주나 높은 자리의 임원들은 대부분 무공을 배웠다고도 했다.
아까의 오주 지회 회주 안종도 상인이지만 강호에서 벽력선이라는 별호로 제법 이름을 알렸을 정도이니, 진령상회의 기조가 어떤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허윤은 안내해 주는 하인의 말을 들으며 장용, 쾌도와 함께 숙소로 이동했다.
팔 조의 숙소는 장원과 장원이 연결된 공간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배정되어 있었다.
자체가 사합원처럼 되어 있는데, 본채처럼 정원과 연못 대신 마당이 있고 문이 있는 쪽만 제외하고는 모두 거주할 수 있는 방이었다.
마침 셋이 도착할 무렵엔 팔 조의 조원으로 보이는 무인들이 방 밖에 나와 있었다. 한데 다들 제 할 일이 바쁜지 들어오는 세 사람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한쪽에서 조용히 칼을 갈고 있던 이십 대의 검수만 힐끗 세 사람에게 눈길을 주었을 뿐이다.
허윤은 언제 병장기가 튀어나올지 모를 듯한 분위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자기만 빼고 모두가 무림인인 상황은 아무래도 적응이 어려웠다.
그때, 장용이 소리를 높여서 반갑게 인사했다.
“어이, 안녕들 하쇼!”
그제야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장용과 쾌도를 본 조원 한 명이 화들짝 놀라서 욕을 했다.
“아이, 씨발!”
뒤늦게 세 사람을 본 다른 조원들도 움찔하며 저마다 칼을 쥐고 무기를 들었다.
“뭐야. 뭐? 뭐가 쳐들어온 거야?”
놀라서 일어난 조원들이 장용과 쾌도를 보고 욕을 했다.
“어이 씨, 깜짝이야!”
“너넨 뭔데 남의 숙소에 와서 눈을 부라려, 개새끼야.”
“잘못 왔으면 꺼져. 빨리 안 꺼져?”
장용이 눈을 부릅떴다.
“거, 말이 심하시네. 우리도 오늘부터 팔 조에 배정받은 동료들이올시다.”
조원 중에 오십 대 후반 정도로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초로의 노인이 곰방대를 물고 입을 이죽거렸다.
“니미, 마도가 쳐들어온 줄 알았네. 늬들은 뭔데 면상을 절굿공이로 다섯 번 빻고 다니냐.”
장용이 궁금했는지 물었다.
“빻은 거면 빻은 거지, 콕 집어서 다섯 번 빻은 건 뭐요?”
쾌도가 면박을 주었다.
“뭐긴 뭐겠어. 여섯 번 빻으면 죽잖아.”
“허어. 그러네. 여섯 번은 버티기 힘들지.”
초로의 노인이 잠시 장용과 쾌도를 빤히 쳐다보면서 뭐 하는 놈들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곰방대를 털면서 말했다.
“헛소리하지들 말고, 어떻게 패류방(敗類房)까지 왔는지 신세 내력이나 읊어 봐.”
이번엔 쾌도가 물었다.
“패류방이 뭐요?”
“뭐긴 뭐야. 파렴치한과 인간쓰레기가 패류고, 오주 장원에서도 유독 그런 놈들을 모아 놓은 데가 이 방이란 얘기지.”
“아닌데.”
“뭐가 아냐. 생긴 거만 봐도 딱 패류인데.”
쾌도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사람을 생긴 걸로 판단하면 쓰나. 패류 영감.”
노인도 쾌도의 인상에 움찔했다.
“이놈 이거, 인상만 보면 내가 한마디 했다고 밤에 몰래 들어와서 칼침 두 방 놓고 갈 새끼네, 이거.”
쾌도가 뭐라고 하려다가 갑자기 궁금했는지 물었다.
“한 방도 아니고 왜 두 방이야.”
장용이 끼어들었다.
“한 방에는 안 죽나 보지.”
“허! 제법 고수구만, 패류 영감.”
노인이 어처구니가 없어 ‘허’ 하고 웃었다.
“어째 이놈들은 선입견과 실제가 하나도 틀리질 않는 것 같냐.”
노인의 시선이 허윤을 향했다.
“거기, 제일 멀쩡해 보이는 네놈이 먼저 읊어 봐라. 그냥 서기도 이쪽으로는 잘 안 보내는데, 어떻게 딱 보기에도 희멀건 놈을 여기에 보냈는지 궁금하네.”
허윤은 험악한 무인들의 모습이 예상했던 그대로인지라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의 의미를 잘못 알아챈 장용이 인상을 쓰고 말을 가로막았다.
“영감이 뭔데 우리 형님에게 소개해라 마라야! 할 거면 영감 놈이 먼저 해야지. 왜 우리 형님 심기를 건드려?”
“영감 놈?”
노인이 곰방대로 머리를 긁었다.
“가만있자. 내가 육십 년 가까이 살면서 그런 말을 듣고도 참은 적이 있었던가?”
장용과 쾌도가 피식 웃었다.
“영감 놈이 참든가 말든가.”
“감히 우리 형님이 어떤 분인 줄 알고. 패류 영감.”
노인이 곰방대를 들고 일어섰다.
“그래? 너희 형님이 어떤 분인지 자못 궁금하구나. 한번 알아볼까?”
근처에 있던 조원들은 좋은 구경이 났다는 듯 자리를 잡았다. 칼을 갈고 있던 청년도 칼 갈기를 그만두고 와서 둘러섰다.
노인이 곰방대로 발바닥을 툭툭 쳐서 흙을 떨어냈다.
“내가 누구냐면…….”
“영감 놈이 누군지는 관심 없고.”
그때, 칼 갈던 청년이 말했다.
“단연자(短煙子) 소지광.”
단연자 소지광이라고 하면 광서에서만 평생 활동해 강호 전체에 크게 이름이 알려진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광서에서는 아는 사람은 알 만한 노강호다. 정사지간에 속했는데, 듣기 싫은 말만 하는 바람에 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단독으로 다녔다.
하나 남들에게 듣기 싫은 말만 하고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도리어 그의 실력을 방증하는 바였다.
장용 역시 단연자 소지광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자기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나름 거물급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하나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물러설 필요도 없었다.
장용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담벼락에 쌓인 장작을 보았다. 그러더니 그중에서 가장 단단해 보이는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가느다란 여자의 허리 정도 굵기나 되어 거의 기둥에 가까웠다.
“그걸 무기로 쓰게? 지같이 무식한 걸 좋아하는구나.”
노인 소지광이 빈정거렸지만 장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웃었다.
“우리 형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 주마! 형님!”
그제야 허윤은 장용이 뭘 하려고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허윤은 장용을 빤히 바라보았다.
“…….”
말은 안 했지만, 눈빛에 한심함 반, 죽이고 싶은 마음 반이 담겼다.
“…….”
장용이 땀을 삐질 흘렸다.
소지광이 추궁했다.
“뭐 하냐고. 뭘 보여 주게. 할 거면 빨리해 봐.”
“으랏챠아!”
장용이 나무 기둥으로 자기 머리를 쳤다.
뻐억! 뻑! 뻐어억!
소지광이 움찔했다.
“뭐지! 철두공인가!”
팔 조의 다른 조원들도 시시덕거리던 걸 멈추고 긴장했다.
철두공까지 익혔으면 내공이 최소 일 갑자는 된다. 그러면 어지간한 삼류 무인들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
주루룩.
굵은 피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철두공은 아니었다.
소지광과 조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들…… 자해 공갈 전문인가.”
“패류 중의 패류가 맞네.”
장용은 씩씩거리더니 나무 기둥을 치켜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쾌도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도 해!”
“난 왜!”
허윤은 머리가 아파 왔다. 보자마자 기 싸움을 하고 서열을 정하는 게 무림인들의 당연한 모습이라는 건 알지만, 허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냥 시비와 다를 바가 없다.
결국 본인이 나설 수밖에.
허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오늘 일진이 사납더라니. 이쯤에서 그만하게.”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장용은 바로 쾌도의 멱살을 놓고 공손히 물러섰다.
“네, 형님.”
태도는 바보 같았지만, 효과는 그게 더 확실했다.
“호오.”
소지광이 허윤을 다시 보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뭐 남들 모르게 숨겨 놓은 한 수가 있어서 대형 노릇을 한다는 게냐?”
무림인들 사이에서 너무 신경을 쓴 데다 긴장한 탓인지 허윤은 머리가 슬슬 간지러워졌다. 감각도 예민해지고 있었다. 빨리 줄 것 주고 해결한 뒤에 머리부터 어떻게 해야 할 듯싶었다.
허윤이 대답 없이 노인에게 다가갔다. 소지광이 눈을 가늘게 뜨고 슬쩍 곰방대를 손에서 옮겨 쥐었다.
“이보시오.”
허윤이 말을 걸며 계약서를 꺼내려고 소매 품에 손을 넣자, 소지광이 곰방대를 확 치켜들었다. 소매에서 무기를 꺼내려는 줄 알고 어깨를 찍으려 한 것이다.
그 순간 허윤은 보았다.
곰방대가 어깨를 찍고, 자신은 팔이 마비가 되어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동시에 소지광이 허윤의 늑골을 발끝으로 찍어서 허윤의 갈빗대가 부러지며 피를 뿜는다!
무림인들에게야 갈빗대 하나둘 정도 부러지는 건 일상이지만, 허윤 같은 일반인은 아니다. 허윤은 크게 놀라서 즉시 어깨를 뒤로 뺐다. 그 시기가 너무 적절해서 소지광이 곰방대를 치켜들긴 했으나 미처 휘두르기도 전이었다.
‘응?’
소지광은 공격하려다가 허윤이 딱 몸을 빼자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 되어 당황했다.
하지만 노강호답게 바로 다리를 걸고 가슴을 밀어 허윤을 넘어뜨리려 했다.
그때, 몸을 뺐던 허윤이 오히려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었다. 약간 허리가 굽은 소지광보다 허윤의 키가 커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모습이 되었다.
그에 소지광은 당연히 옆으로 피했는데, 허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다.
‘억! 어떻게!’
덕분에 오히려 소지광이 허윤의 머리를 들이받은 셈이 되었다.
빠아악!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다행히 허윤은 혹시나 소지광이 죽을까 봐 최대한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커윽.”
그런데도 소지광은 충격을 심하게 받았는지 완전히 안면을 찌푸리고 잠깐이나마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다 겨우 눈을 떴는데, 그나마도 아직 초점이 돌아오지 않고 계속 흔들렸다.
소지광은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너, 너…….”
그러다가 철퍼덕 엎어졌다.
지켜보던 조원들은 말을 잃었다.
뭐지?
단연자 소지광이 한 방에?
여기에서 단연자 소지광을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그것도 정당한 대결을 한 것이 아니었다. 말을 걸면서 비겁하게 기습을 한 것이다.
이후에 내뱉은 허윤의 말은 조원들을 경악게 하기에 충분했다.
“후. 또 저질러 버렸구나.”
저런 발언은 보통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감정이 북받치면 눈이 돌아가는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사람이나 할 법한 말이다.
허윤은 허리를 구부려 소지광의 안색을 살폈다.
“안 죽었네.”
그 말에 조원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모를 두려움이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허윤이 조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흠칫.
“왜, 왜요?”
“이거나 가져가시오.”
허윤이 내민 것은 계약서였다. 어리벙벙한 조원들과 달리 기세가 오른 것은 장용이었다.
장용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우리 형님 실력을 봤냐! 우리 형님이 바로…… 바로…….”
쾌도가 말했다.
“점술가. 형님은 점술가야.”
“그래! 점술가시다! 점술가 맛이 어떠냐!”
“…….”
조원들의 얼굴은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칼을 갈던 청년도 뭐라고 말 못 할 표정을 짓더니 칼을 쥐곤 방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러면서 조용하게 말을 내던졌다.
“또라이 새끼들.”
“뭐, 인마?”
“저 핏덩이가 지금 뭐라는 거야. 어이, 패류 영감. 일어나 봐. 지금 저 핏덩이가 패류 영감 욕하고 있잖아. 안 들려? 지금 패류 영감이 또라이라고 욕먹는다고. 어이, 패류 영감.”
쾌도가 히히 웃으며 기절한 소지광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걸 보고 조원들이 움찔움찔했다.
허윤은 기분이 요상했다.
꼬였다고는 할 수 없고, 어쨌든 원했던 대로 가고는 있는데 뭔가 엉망진창인 그런 느낌이었다.
일단은 패류방의 기선을 제압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