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왜 허윤의 혈도에 독소가 쌓여 있지 않고 떠다니는가.
공세연이 자기가 유추한 바를 허윤에게 말해 주었다.
“어떤 종류의 내공들이 큰 내공을 머릿속에 가두어 막고 있어요. 그런데 독소가 쌓여서 몸의 혈도를 막으면 머릿속의 내공이 터져 나오면서 한 번씩 막힌 혈도를 뚫어 주는 것 같아요.”
허윤은 자신의 상태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한 공세연의 말에 꽤 놀랐다.
머릿속 내공은 만년소정이고 그걸 막고 있는 건 증위와 방녹의 내공이었다. 그리고 독소는 만년소정을 받아들인 대가로 얻은 부산물이었다.
‘돌을 깨면 충격으로 만년소정의 내공이 새어 나와 혈도를 뚫어 주나? 그래서 머리를 쓰면 시원해지는 느낌이 있었군.’
공세연이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 정도의 독소가 상시 혈도에 남아 있다는 건, 외부로 통하는 혈도가 닫혀 독소가 배출되고 있지 않거나 혹은 어디선가 독소가 계속 생성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으음.”
증위와 방녹이 말했었다. 독기를 완전히 정화하지 못하면 만년소정의 독성을 평생 억누르고 살아야 한다고.
“이 상태로는 노폐물이 많아 내공이 제대로 통하기 어려워요. 독소를 배출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혈도가 꽉 차서 막히게 될 거예요.”
“그럼 내공심법을 익힐 수 없는 것이오?”
“불가능하진 않지만…… 심법을 아예 배우신 적이 없으면 기초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독소 때문에 수련하기가 매우 어려울 거예요. 환정보뇌의 법은 무인이 사용하는 내공심법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대개의 내공심법은 하단전(下丹田)에서 시작하거든요. 허 소협처럼 머리에 내공을 모으는 건 너무 특이한 경우라…….”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 어쨌든 지금은 안 된다는 얘기구려.”
독소는 평생 나올 것이니 어차피 허윤이 내공심법을 익히는 건 요원하다는 얘기다.
“환정보뇌의 법은 원래 도문(道門)에서 나온 것이니 더 자세히 알고자 하시면 유서 깊은 도문을 찾아가셔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아니오. 처자께서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소.”
“하지만 내공심법은 몰라도 독소를 해소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응?
“방법이 있소?”
“아주 명망이 높은 의원을 만나시거나 혹은 추궁과혈(推宮過穴)을 통해 외부로 통하는 혈도를 열어 강제로 독소를 배출시킬 수 있죠.”
허윤은 크게 기뻐했다.
독소를 없애고 내공을 익힐 방법이 있다니!
“명망이 높은 의원은 인맥이 없으니 무리지만, 추궁과혈이라면 가능할 것 같소!”
“아는 분이 있으신가요?”
허윤이 이리 쉬운 법을 몰랐었다는 투로 흐뭇하게 웃었다.
“아는 사람은 없지만, 그거 안마법이잖소. 이렇게 뭉친 데를 손으로 두드리고 문질러서 풀어 주고 하는 거. 침술방에 가면 다 해 주오. 나도 나이가 들면서 몇 번 받았는데, 등과 팔다리가 아주 시원했소.”
“저…… 그거 아닌데요.”
나이가 들면서라는 건 또 무슨 얘기인지.
“……그게 아니오?”
“그건 민간에서 하는 추궁과혈이고, 강호에서는 좀 달라요.”
“아! 무인들의 추궁과혈은 또 다른 거였구료.”
“네. 배출되는 독소를 버티려면 시전자의 내공이 최소 이 갑자 정도는 되어야 하고 또, 음.”
얘기하다 보니 공세연은 자기가 허윤을 추궁과혈 해 주는 장면이 잠시 떠올랐다. 공세연의 뺨이 새빨개졌다.
“어쩌면 서로 좀 친하기도 해야 하고…….”
“굳이 친해야…… 하오?”
“아니면 서로 좀 허물이 없거나…….”
공세연이 약간 허둥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 사실 남자들끼리라면 상관없긴 하겠지만요.”
“……?”
허물은 딱히 무인의 언어 같지 않은데?
“남자들끼리라는 건 또 무슨 얘기요?”
허윤이 공세연을 쳐다보는데,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공세연의 뺨이 또 새빨개졌다.
“허물이요? 어쨌든 허물이 없어야 하오?”
끄덕.
“좀 많이 없어야 하오?”
끄덕.
“그…… 혹시 얼마나 없어야…….”
공세연은 당황했다.
일부러 알면서 그러는 건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
‘아냐. 내가 이 정도에 괜히 수줍어하면 허 소협이 더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나이를 한둘 먹은 것도 아니고, 벌써 스물여덟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양 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상대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여인과 동침하며 저 어마어마한 내공을 얻은 사람인데.
하여 공세연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독소가 가장 많이 뭉치는 곳이 회음혈(會陰穴)이에요. 그래서 단순히 무공 증진을 위해 경혈타통(經穴打通)을 할 때는 건너뛰어도 괜찮지만, 독소를 빼내려면 반드시 그곳을 짚어야 해요.”
회음혈은 음부와 항문 사이에 있는 혈도였다.
허윤은 공세연에게 추궁과혈을 부탁하려 했다가 화들짝 놀라서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어…… 음…….”
솔직히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든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간절하긴 하다.
엄청난 내공을 얻었으니 그걸 쓸 수만 있으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될 터였다. 마도고 뭐고 막 쓸어 버릴 수 있는 발판이 될지도 모른다. 도진의 복수에 크게 가까워질 수 있다!
하지만…… 시집도 안 간 젊은 처자에게 그런 부탁을 하기에는 좀 염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과거에 허윤이 공세연을 돕고자 그녀의 알몸을 본 적이 있다고 해도, 지금 그 말을 할 수는 없고…….
“이것 참.”
활활 타오르는 젊은 나이였다면 아마 호기롭게 부탁을 해 봤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허윤도 앞뒤 가리지 않고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땐 허윤도 이십 대였다. 차라리 젊은 청춘 남녀 사이에 말해 봐서 잘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외모만 이십 대다. 그런 부탁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 머리로 먼저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도진이를 위해서라면 염치 불고하고 부탁을 해 봐야 하는데…….’
하지만 공세연의 다음 말에 허윤은 그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독소의 양이 많아서 제법 상당한 기간 추궁과혈을 여러 번, 지속적으로 해야 할 거예요.”
허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렇소? 차라리 잘됐구려.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겠소. 알려 주어 고맙소이다.”
공세연도 방금까지는 왠지 허윤이 추궁과혈을 부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온갖 상상을 다 하고 괜히 얼굴이 빨개지고 했었다.
한데 허윤이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물러나니 뭔가 엄청 서운해졌다.
공세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원하신다면 제가 한 번은 도…….”
“아이고, 괜찮소.”
“네?”
공세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가 곧 새초롬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죠?”
“한 번에 해결될 일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괜찮소이다.”
“한 번이라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복수하고 싶다면서요. 저는 오히려 허 소협이 제게 부탁할 줄 알았는데요.”
포기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 허윤이었다. 허윤이 아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음 써 줘서 고맙소. 됐으니까, 괜찮아요.”
반대로 공세연은 허윤이 아빠 미소를 짓고 대답하자 괜히 화가 났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 나왔다.
“싫으세요?”
“허허, 싫다기보다는 남녀가 유별한데 어쩌겠소.”
“말투만 그런 게 아니라, 생각도 어르신 같군요. 하지만 무림인들은 무공을 펼칠 때 남녀유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 상관없어요.”
아까까지는 조금 상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도 더듬거리고 얼굴에도 홍조가…….
허윤은 그 말은 하지 않고 완곡히 거절했다.
“어허, 나는 무림인이 아니지 않소. 무리하게 부탁드리고 싶지 않아요.”
“제가 괜찮다면요?”
“아니! 됐다는데 왜 그러시는 거요?”
“왜 화를 내세요? 저도 괜찮다니까요? 제가 괜찮다는데 왜요? 어차피 허 소협에게는 그게 별다른 일도 아니지 않아요?”
“아니, 별다른 일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씀…….”
순간 허윤은 공세연의 눈을 보았다.
눈동자 속에서 왠지 작은 불길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
아이고…….
허윤은 깨달았다.
본인은 이십 대가 아니지만.
공세연은 불타는 이십 대였다.
“복채. 받으셔야죠.”
꿀꺽.
허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 * *
“너무 오래 안 나오는 거 아냐?”
“그러게. 들어간 지 한참 됐는데.”
“원래 점 볼 때 오래 걸리긴 하드만. 저번에도 반나절 동안 봤잖아.”
“하긴. 그래도 벌써 한 시진은 족히 넘었네.”
팔 조 조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던 막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혹시?”
막성이 호흡을 고르고 기감을 퍼뜨렸다. 그러더니 눈을 부릅 치켜떴다.
‘기막(氣幕)! 어설프지만 기의 장막이 쳐져 있다!’
기막을 치면 소리와 인기척이 차단된다.
물론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누기 위해 기막을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안 좋은 예감이 든 막성은 내공을 귀로 끌어모아 최대한 청력을 올렸다.
순간 막성의 얼굴이 굳었다.
차마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기막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막성은 아까 허윤이 공세연에게 추파를 던졌던 게 떠올랐다.
혹시나 공세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허윤이 사승을 잡은 게 사실이라면 아무리 공세연이라고 해도 당해 내기가 어렵다!
막성이 방 안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공 조사관! 내 목소리가 들리면 답하시게!”
하지만 공세연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막성이 더 언성을 높였다.
“안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당장 그만두고 밖으로 나오시게!”
팔 조 조원들이 깜짝 놀라서 짜증을 부렸다.
“아, 뭐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난리셔.”
막성이 급히 하후온을 돌아보고 말했다.
“하후 대협! 공 조사관에게 일이 생긴 거 같소! 기막이 쳐 있소이다!”
장용과 쾌도가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듯 말했다.
“거, 남녀 둘만 한 방에 있는데 그럴 수도 있지.”
“쯧, 눈치도 없이 중간에 훼방을 놓으려고.”
막성이 격노했다.
“이놈들!”
가뜩이나 허윤이 마음에 안 들어 짜증 나는데 이놈들은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러자 오히려 장용과 쾌도가 더 화를 냈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걸 왜 우리에게 물어? 이상한 양반이네?”
“누구면! 노인장이 우리 형님보다 더 세?”
막성이 눈을 치켜떴다. 주특기인 장법(掌法)을 구사하려고 내공을 끌어모으자 눈빛이 사나워지고 손바닥이 벌게졌다.
팔 조 조원들이 막성을 자꾸 긁은 장용과 쾌도를 욕하면서 무기를 꼬나 쥐었다.
“모두 그만들 두시오.”
하후온이 급히 중간에서 말리려 했으나, 막성은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때, 허윤의 방문이 열리고 공세연이 나왔다.
모두의 눈길이 그곳으로 쏠렸다.
“어?”
그리곤 다들 당혹스러워했다.
공세연의 얼굴이 다홍빛으로 상기된 데다 땀을 흘린 듯 머리칼도 살짝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장용과 쾌도가 바로 눈치챘다는 듯 입을 열려는 순간, 공세연이 둘을 째려보았다. 한마디라도 하면 가만두지 않을 듯 서슬이 시퍼렜다. 장용과 쾌도는 바로 입을 다물고 시선을 외면했다. 막성을 대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막성은 자신에게는 무례한 둘이 공세연에겐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이놈들!”
장용과 쾌도는 어쩌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저들끼리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주제를 알아야지. 어디 우리 형수님이 될 분하고 비비려 들어.’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