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96
96화
스르륵.
마치 긴 잠을 잔 것 같았다. 의식이 소용돌이로 잠시 빨려 들어갔다가 튀어나온 듯했다.
허윤이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 낙락은 곁에 없었다.
어렴풋하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자정에 시작했는데 지금은 새벽 동이 트니 거의 두 시진이 지난 것이다.
여전히 하늘을 향해 팔을 든 채로 어리둥절해 있는 허윤의 귓가에 한 줄기의 전음이 들려왔다.
— 잘했네. 오늘의 수련은 끝났으니 내일 보세.
뭘 잘했다는 거지?
허윤이 문득 땅을 내려다보니.
자기를 중심으로 동심원이 퍼지듯 흙바닥이 밀려나 있었다.
“엥?”
허윤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해하면서도 방으로 돌아온 허윤은 일단 옷부터 갈아입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다시금 하늘로 팔을 올려 보았다. 무거운 걸 오래 들고 있었던 것처럼 뻑적지근했다.
어떻게 이러고 두 시진을 있었지?
파문인가 뭔가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왜 바닥에 동심원이 그려져 있는지도 의문이고.
옛날 생각을 좀 하다 보니 갑자기 날이 새 버린 게 다라서 뭐가 어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흐음.”
정신을 잃은 건 기분 나쁜 일이었지만, 몸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밤을 새웠는지 모를 정도로 멀쩡했다.
게다가 숨겨 뒀던 감정을 실컷 쏟아 낸 후라 그런지 속이 아주 개운했다.
“나 정말 울었나? 진짜 운 건지 울었다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네.”
낙락이 봤으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그게 정말 일어난 일이었는지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거참 희한하네.”
허윤은 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야. 너냐? 네가 뭐 했니?”
톡톡.
당연히 머리는 답이 없었다.
“아니, 근데. 이게 정말로 일단금의 수련이면, 이단금도 설마 비급에 쓰인 그대로 해야 하는 건가?”
허윤은 북두건곤칠성대법의 비급을 펼쳐 봤다.
이단금은 일단금에서 이어지는데, 하늘로 팔을 올린 자세에서 옆으로 벌린 자세로 반나절의 시간을 들여서 바꾸라고 적혀 있었다.
팔을 들었다 옆으로 내리는 데 반나절을…….
이건 가만히 서서 옛날 일을 회상할 수 없고, 정말로 집중을 해서 천천히 해야 한다는 의미로 보였다.
“그리고 이걸 좌우로 번갈아서 삼 회를 하라 이거지. 좌우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그림이 없는데. 허리를 돌리라는 건가, 팔을 돌리라는 건가?”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니, 그림 속의 노인 다리가 좀 이상했다. 잘 보니 다리 한쪽을 살짝 들고 있는 듯 보였다.
“억! 이걸 외다리로 서서 하는 거였어? 이래서 좌우야?”
심지어 일단금의 자세로 돌아가서 세 번을 더 하라고 되어 있으니, 좌우 세 번씩 여섯 번을 하면 총 열여덟 번을 해야 했다. 한 번에 반나절이 넘고 일단금도 한 시진이 걸리는데 열여덟 번이면 대체 며칠 동안 이걸 하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허윤은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비급을 내려놓았다.
“뭐, 알아서 가르치겠지.”
혼자라면 막막했을 텐데 그래도 누가 옆에서 알려 준다 생각하니 확실히 마음이 편했다.
* * *
허윤의 일정이 갑자기 붕 떠 버렸다.
일단 악가장에 잠시 머물러도 좋다고 제갈료의 허락이 있긴 했는데, 정작 장사로 온 목적 중 하나였던 장가상회의 문제가 꼬였다.
주인이 야반도주를 해 버린 것이다.
악가장에서도 크게 당황했다. 달아난 자체로 장가상회의 주인이 마도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갖게 만들었다.
백도맹 쪽 얘기를 들어 보니 운귀고원의 상황장 사람들 역시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정말로 뇌마가에서 벌인 일이었나?
도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백도맹에 표행을 의뢰해서 중간에 가로챌 이유가 뭐가 있는가. 거기에서 뇌마가 같은 큰 마도의 가문이 이득을 볼 일이 뭐가 있는가?
하나 이유를 모르는 채로 이제는 악가까지 개입하게 되었으니…… 악가장도 골치가 아프게 되었다.
하여 허윤을 크게 신뢰하고 있는 악가장은 점술로 장가상회의 주인을 찾을 수 없는지 물었다.
안타깝게도 허윤이라고 다 찾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보가 없으면 점괘가 나와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해서다.
하나 그렇다고 무작정 모른 척할 수도 없어 점을 쳐 보긴 하였다.
북서향의 큰 바위 아래.
그것이 점괘 내용의 전부였다.
악가장에서는 그것만도 다행이라는 듯 사람을 풀어 본격적으로 장가상회의 주인을 찾기 시작했다.
덕분에 허윤은 한동안 공식적으로는 할 일이 없어졌다. 어차피 무공을 배우려면 좀 더 있어야 해서 오히려 다행인 셈이 되었다.
허윤은 낮에는 책을 읽거나 찾아오는 악씨 사람들의 점을 쳐 주었다. 때로는 악가장 무인들의 무공 수련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악영도 가끔 와서 놀다 갔다.
밤에는 낙락에게 계속 팔단정금을 배웠다. 일단금은 이상하게도 수월해져서 이단금으로 넘어가려는데, 이단금이 잘 안 되었다. 다리만 들면 여지없이 기우뚱거려서 자세가 무너졌다.
“이상하네.”
“뭐가 말인가?”
“제가 일단금을 할 때 그날 바로 해냈지 않습니까.”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지. 아주 집중이 좋았어.”
“그래서 제가 의외로 무공에 굉장히 소질이 있다거나 천재라거나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낙락이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네.”
허윤은 입맛을 다셨다.
“쩝.”
“섭섭해할 것 없네. 자네에게 무골의 느낌은 전혀 없어. 아마 기존에 쌓은 능력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 걸세. 애초에 일반인은 한 시진도 팔을 들고 있기 힘들지.”
역시 만년소정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 듯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가진 게 없으니 노력이라도 해야겠군요.”
가만히 허윤을 보던 낙락이 문득 탄성을 냈다.
“오호라, 자네가 왜 이단금으로 넘어가지 못하는지 알겠군.”
“네?”
“너무 급해. 첫날의 성공에 너무 심취해서 자만해진 게야.”
“아니, 첫날부터 했으면 잘한 거 아닙니까. 노인장께선 이거 배우는 데 얼마나 걸렸는데요?”
“삼단금까지 하루 걸렸네.”
허윤은 낙락을 빤히 쳐다봤다. 낙락은 악가장 최초의 앙연 고수라더니, 천재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안소방조차 보법을 금세 배웠다 하지 않았는가.
“비급에 쓰여 있다시피, 팔단정금은 아주 느린 절대의 동공일세. 요즘 사람들처럼 바삐 사는 이들에게는 맞지 않지. 특히나 후다닥 배워서 빨리 사람 죽일 무공을 배우고 싶은 자들에겐 더더욱.”
“저도 그렇게 배워서 원수를 죽이고 싶습니다만.”
“쯧쯧쯧. 내가 그 말을 하고 싶었네. 바쁘다고 성취를 허겁지겁 얻으려는 건, 가장 느린 길이 때로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모르는 우매한 자들의 망동(妄動)일 뿐일세.”
“하지만 일단금을 어떻게 했는지 몰라서 이단금도 못하겠습니다.”
“흠.”
낙락이 허윤을 두고 고민을 했다.
“자꾸 해답부터 가르쳐 주면 안 되는데.”
솔깃.
“해답이 있어요? 그런 방법이 있으면 당연히 알려 주셔야죠. 요즘 사람들이 괜히 바쁜 게 아닙니다. 배울 게 많아서 그래요. 저만 해도 무공 전문이 아니라 점술이 전문이잖아요. 두 개 다 겸업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흥. 하나만 진득하게 해도 성공하기 어려웁네. 가주에게 전해 준 팔단정금은 아마 그의 대에서 성취를 보지는 못할 게야.”
“허어, 그럼 너무 느리잖아요. 이거 보십쇼. 이단금만 해도 밥도 안 먹고 쉬지도 않고 무슨 열흘은 팔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키나 한 일입니까?”
“무슨 소린가?”
“왜요.”
“이단금을 왜 열흘이나 하고 있어.”
“…….”
허윤이 비급의 설명을 가리켰다.
“아니, 본인이 천재라고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쓰여진 대로 하면 최소한으로 해도 사흘, 최대 엿새는 꼬박인데요.”
그렇게 말해 놓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아까 낙락은 하루 만에 삼단금까지 끝냈다지 않았는가.
“어?”
허윤이 눈을 또르르 굴렸다.
“제가 모르는 날짜 계산법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여기에 나온 날짜가 엉터립니까.”
낙락은 한숨을 쉬었다.
“자네에게 무공에 대한 이해나 재능이 없다는 건 확실하군. 첫날 자네에게 내가 어떻게 하라고 했지?”
“몸에서 파문을 생각하면서…….”
“맞네. 그게 심상이야. 기는 우리가 의식하기 전에는 실체가 없네. 따라서 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확고한 의지로 마음속에 본인이 원하는 상(象)을 또렷하게 그려야 한다네.”
하긴, 첫날을 생각해 보면 옛날 일을 회상하면서도 자기가 양손을 들고 있다는 자각, 혹은 착각이 있었다. 허윤 본인이 정말로 팔을 들고 있었는지 아닌지 몰랐지만 그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노인이 떠올랐다.
“어? 그때 비급의 그림이 떠올랐었는데요. 그게 심상입니까!”
“그렇지.”
허윤이 비급을 펼치며 그림을 가리켰다.
“그럼 여기 있는 그림은 실제로 하는 게 아니라, 전부 심상인 거고요?”
“맞네.”
“…….”
허윤은 문득 북두건곤칠성대법의 저자에 대해 살인 충동을 느꼈다. 장용과 쾌도를 불러다가 몇 날 며칠을 한방에 가둬 두고 싶었다.
낙락이 말했다.
“심상에서 시간은 중요하지 않지. 내 안에서 반나절 동안 수련을 했다면 반나절만큼의 수련이 되는 것이오, 열흘 동안 수련을 했다 생각하면 열흘만큼의 수련이 되는 걸세. 그러나 열흘을 하지도 않고 열흘이라 생각하면 공(空)이 되고, 수련의 효과는 그 찰나만 남아 있게 되네.”
어쨌든 심상 속에 판을 깔고 알아서 수련을 하란 의미였다.
허윤은 충격을 받았다.
인생이 참 재미없는 분들이신가…… 그럼 그렇게 쓸 것이지, 이걸 왜 이따위로 쓰고 그래…….
새삼 악가장의 가주가 불쌍해졌다.
“그럼 말이지요. 제가 공상은 좀 잘하는데, 그럼 저도 그냥 앉아서 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안 돼. 자네는 재능이 없어서 몸을 움직여야 심상이 따라온다네. 소주천을 한 번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초보 때는 한 식경이 걸려도 못하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이면 열 번을 할 수 있다네.”
말도 안 된다고 할 얘기는 아니었다. 허윤도 아직 정확한 소주천은 못하지만, 기를 빠르게 움직인 적은 몇 번이나 있었다.
“그 차이는 숙련도와 심상의 선명도(鮮明度)에 있네. 그리고 그건 그냥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쉼 없는 수련으로 구체화되는 것일세.”
해답을 가르쳐 주지 않겠다더니, 한번 말문이 열리니까 학사 때처럼 줄줄 말이 나오는 낙락이다.
“솔직히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낙락이 물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서술에 이걸 심상으로 하라고 쓰면 안 됩니까?”
“안 되네. 이것을 심상으로 생각하면 ‘심상이 아닌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네.”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잘 보게.”
낙락이 손가락을 들었다.
어두운 밤에 별이 빛나듯 낙락의 손가락 끝에 빛이 맺혔다.
지끈!
갑자기 허윤의 머리가 찡했다. 낙락이 내공을 끌어 올린 것에 반응한 듯했다.
낙락이 허공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콕.
“뭐 하시는…….”
그 순간, 공기에 파문이 일었다.
우우우웅…….
“어?”
낙락의 빛나는 손가락에서부터 퍼져 나온 동심원을 허윤도 느낄 수 있었다.
콕콕.
낙락이 허공을 찌를 때마다 공기의 수면에 계속해서 동심원이 생겨났다.
파문이 밤공기가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와 허윤에게 부딪쳤다. 그때마다 만년소정이 반응해서 울컥거렸다.
허윤은 놀라서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자신은 머리에서 권풍이 나가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는데, 낙락은…….
낙락이 손을 거두고 뒷짐을 지며 말했다.
“이게 심상일세. 하지만 벽을 넘기 위해서는 무심상사고(無心象思考)를 알아야 하네. 심상이란 것은 마치 그림과도 같아서 자꾸만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려고만 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심상에 없는 것은 하지 못하게 된다네.”
그러곤 뒷짐을 진 채로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렸다.
그 순간, 허공에서 동심원이 생겨났다.
“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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