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95
95화
허윤이 헛기침을 했다.
“어흠흠. 왔습니다.”
“어서 오게. 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시작하세.”
“독기부터 빼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내공 운기도 못 하고 아무것도 안 됩니다.”
“알겠네. 돌아서 보게.”
허윤이 등을 보이고 돌아서자, 낙락이 허윤의 등에 손을 얹고 툭 쳤다. 그냥 건드린 정도였는데 허윤의 몸 안에서는 대형 파문(波紋)이 일었다.
투 웅.
파문이 번지면서 근육이며 뼈며 죄다 진동하고 출렁거렸다.
‘우아악!’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으려 했는데, 소리도 나오지 않고 팔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했다.
부르르르.
몸이 크게 떨렸다.
파문은 허윤의 몸 전체로 쭉 퍼지더니 금세 잦아들었는데, 일부는 오른손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곧 낙락이 허윤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잡고선 손톱으로 그었다.
스윽. 툭.
손가락 끝이 칼로 짼 것처럼 잘리면서 시커먼 액체와 피가 섞여서 똑똑똑 떨어졌다.
“어이구, 독기가 심하긴 하구먼. 한 번 뺐는데 독혈(毒血)이 아주 시커메.”
“허어…… 고거 조금 빼냈는데 시원하네요.”
아닌 게 아니라 공세연이 그렇게 고생해 줬을 때보다 훨씬 더 몸이 가볍고 개운했다.
허윤은 이런 방법으로도 독소를 빼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런 방법이 있으면 추궁과혈을 할 필요가 없겠군요.”
“남들은 못 하지.”
“그럼 노인장께선 어떻게 하는 겁니까?”
“팔단정금으로.”
허윤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낙락을 쳐다봤다.
“진짭니까? 저 배우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 아니지요?”
“팔단정금은 파문일세. 내 몸 안의 기를 울려서 밖으로 퍼뜨리지.”
낙락의 이 말을 팔단정금을 배우는 이들이 들었다면 경악할 만한 얘기였다. 이것이 곧 팔단정금의 궁극적인 요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밖으로 내보내면, 내 몸 안에 있는 건 다 없어지는 거 아닙니까?”
“호수에 큰 돌을 던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영원히 파문이 남아 있나?”
“동심원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잠잠해지지요.”
“그렇다네. 돌이 떨어지는 바로 그곳의 수면은 잠깐 낮아지지만, 파문 바깥에서 다시 물이 밀려와 수면을 원래대로 채운다네.”
“내보냈다가 다시 들어오는군요.”
“다시 들어올 때 더 많은 기가 내 안에 채워지지.”
허윤은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멀쩡한 물에 돌을 던지면 흙탕물이 되지 않습니까. 내 몸에 다시 들어올 때 많이 들어오면 좋지만, 흙탕물이 되면 어떡합니까?”
낙락은 허윤의 질문에 귀찮기는커녕 더 좋아하며 대답했다.
“팔단정금은 본래 도가에서 나온 것이라 내 것과 남의 것을 따지지 않았네. 내 안의 모든 것을 비워 대자연의 기가 마음대로 내 안을 오가게 하고, 내가 대자연과 똑같은 상태가 되면 그것을 곧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하였네.”
“예전에는 따지지 않았다면, 지금은 따지나 봅니다.”
“도가 안에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네. 어떤 도사는 팔단정금조차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고, 화기를 금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하니 그냥 내키는 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것이 곧 무위자연이라 말하였지. 하나 그리하면 사람이나 하루살이 같은 미물이 전혀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되네. 광활한 대우주에서 보자면 사람이나 하루살이가 똑같이 하찮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걸세.”
허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낙락이 말만 많은 이상한 노인네인 줄 알았는데, 지금 순간에는 어떤 도사보다도 더 대단해 보였다.
“하여 반대로, 하루살이 같은 미물과 사람이 다르다는 걸 아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야말로 종국에는 무위자연으로 향하는 길이라 믿는 이들이 있었네.”
허윤이 말을 정리했다.
“전자는 이미 사람이 자연 속의 한 존재라 보고 있으나, 후자는 사람이 자연 속의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는 것입니까?”
“정확하네! ‘내[我]’가 무위자연을 결심하는 순간, 이미 나는 자연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므로, ‘내’가 자연에 속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세.”
허윤은 이제껏 무공이 단순히 때려 부수고 하는 건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다. 이 정도의 도가적 수양이면 무림인들이 신선이 되네 마네 하는 것도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낙락이 말을 계속했다.
“하여 팔단정금은 이후에 후자의 방향으로 발전하였네. 즉, 내 안의 흙탕물은 밖으로 내보내고, 들어오는 흙탕물은 거르고 정련(精鍊)하여 채우네. 이것이 자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며, 앞으로 배울 팔단정금의 핵심이라 보면 되겠네.”
끔벅끔벅.
“그걸 어떻게 하느냐고?”
“예.”
“자네에게 준 그 책으로.”
“북두건곤칠성대법이요? 솔직히 제목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낙락이 빙긋 웃었다.
“팔단정금은 무림으로 넘어오면서 더욱 강력한 동공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북두건곤칠성대법은 무림으로 넘어오기 이전의 별칭일세. 해 보면 왜 그런 제목이 붙었는지 알게 될 걸세.”
허윤은 이제야 조금 낙락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원래의 팔단정금은 도가의 색이 강해서 사람을 살리는 효능이 강하고, 무림으로 넘어간 뒤에는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파괴력이 증강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그 강력한 팔단정금을 가르쳐 주면 안 되나.’
허윤의 속마음을 눈치챈 듯 낙락이 말했다.
“나는 본래 그 북두건곤칠성대법을 꾸준히 익히고 싶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할 수 없었네. 그러니 자네에게 가르치는 건 내가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꿈을 이루는 거라 볼 수 있지.”
쩝. 그게 속마음이었군.
마치 어릴 적 집안이 어려워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부모가 아이에게는 공부를 강요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허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터면 살짝 을의 입장이 될 뻔했는데, 약간 갑의 입장이 되어도 아쉬운 건 낙락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낙락이 재촉했다.
“자, 그럼 처음부터 시작해 보세. 일단금, 양수탁천리삼초 환원기일세.”
동작은 기억이 난다. 양팔을 하늘로 올리고 있는 자세다.
“그냥 하면 됩니까? 자세를 따로 안 가르쳐 주시나요.”
“무위자연에서 너와 나는 같은 존재이지만 다른 존재일세.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므로 모든 자세는 특정한 이치에 따른 동작을 제외하곤 본인의 독립적인 개별성을 가져야 하네.”
“…….”
쉽게 말하면 대충 동작을 하란 뜻이다.
어쩐지 그림도 대충 그려져 있더라니!
허윤은 엉거주춤 다리를 벌리고 양팔을 하늘로 향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이론이 무공에까지 적용이 되나?
그런데 낙락은 허윤이 대충 취한 자세를 보고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하늘로, 발바닥은 땅을 향한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취하게.”
허윤은 주춤거리면서 시키는 대로 했다.
“자, 그대로 두 시진일세.”
“……!”
“어허, 호흡이 갑자기 거칠어졌군. 호흡을 편안히 하라고 쓰여 있을 걸세.”
“그…… 말입니다? 들숨 몇 번, 날숨 몇 번…… 뭐 그런 거 없습니까?”
“없네. 그거 하다 보면 힘들어 죽을 건데 어떻게 호흡까지 챙기나. 지금은 그냥 하게.”
그렇게 힘든 걸 두 시진을 하라고?
허윤은 눈을 부릅뜨고 낙락을 쳐다보았다.
혹시 가학적인 성향이 있어서 자기를 괴롭히려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낙락은 중년 무사의 얼굴을 한 채 흐뭇한 표정으로 허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딱히 괴롭히는 걸 즐기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
할 수 없지.
허윤은 그냥 시키는 대로 팔을 든 채 두 시진을 버텨 보기로 했다.
“자아, 집중하고. 몸에서 작은 파문이 일어나 밖으로 퍼져 나간다고 생각하게.”
“…….”
팔은 후들후들 떨리고 다리는 부들거렸다. 목도 뻣뻣하고 허리는 뻐근했다.
젊어지고 체력이 좋아졌는데도 이 다경을 채 마치기가 어려웠다. 허윤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낙락을 바라보았다.
“이, 이제 잠시 쉬면 안 됩니까?”
“아니, 겨우 그거 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가? 여기 애들만 해도 마보로 한 시진은 버틴다네. 자네는 너무 허약하군.”
“제가 원래 점을 치는 사람이고 무공에 뜻이 없는 데다 독소가 기혈 곳곳에 잔뜩 쌓여 있어서 말입니다.”
낙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몸이 허약한 게 아니고 의지가 허약해. 기는 오로지 의지를 통한 심상(心象)으로 제어할 수 있기에, 의지가 부족하면 그거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
“아니, 몸이 힘든데 머리로 안 힘들다고 하면 그게 안 힘들어집니까? 끙…… 끙. 그래서 안 힘들어질 수 있으면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없을 겁니다.”
“맞네. 그걸 못해서 세상에 고수가 많지 않은 거야. 천 번을 실패하고 만 번을 좌절해도, 포기하지 않아야 바늘귀를 뚫고 고수가 될 수 있는 걸세.”
“……끙끙.”
“고수들도 힘든 걸 모르지 않네. 고비를 넘어서면 또 높아진 눈높이에 맞는 고비가 생기지. 어떤 고수들은 이른바 그 ‘벽’을 깨려고 평생 토굴에서 수련을 하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안에서 죽는 경우도 많다네.”
허윤도 말로는 지지 않는 편인데, 대꾸하고 싶어도 몸이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냥 빨리 팔을 내리고 주저앉아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낙락이 말했다.
“쉬고 싶을 걸세. 중단하고 싶을 걸세.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게. 자네는 원래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었나? 어려서부터 어려운 건 회피하는 사람이었나?”
문득 그 말이 허윤의 뇌리에 맴돌았다.
그랬나?
그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살면 그만인 삶을 살아왔기에 과거를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그냥 회피였나?
곰곰이 지난 오십 년의 세월을 생각해 보니…….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좌절 중의 하나가 떠오른다.
젊은 날, 허윤은 그럭저럭 점술가로서의 재능이 있었다. 한자리에 터를 잡고 유명한 점술가가 되어 살고 싶었다.
그런데 이류육종을 정통으로 치는 점술계는 계보도 없는 허윤의 진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떠돌이가 되었다. 수련도 포기하고 발전도 포기했다. 결국 허윤은 점술이 아니라 말재주로 먹고 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라고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닌데…….
한번 과거를 회상하니 다른 장면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도진의 엄마였던 여인…….
가진 것도 없는 허윤이 뭐가 좋은지 같이 살자고까지 했는데, 왜 그녀를 떠났을까?
허윤은 그동안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그냥 하룻밤의 불장난이라고 여기고 말았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두려움에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 와 어딘가에 정착한다는 게 두려웠고, 할 줄 아는 게 점 보는 것뿐이라 다른 일을 하기도 두려웠다.
하여 연을 맺은 바로 다음 날 달아나고 말았다.
참으로 비겁했다.
그렇게…… 도망치고 회피하고 되는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도진이를 잃었다.
자기가 친부라는 걸 알면 떠날까 두려워 도진이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지 못했고, 결국 도진이는 한을 남긴 채 떠나고 말았다.
주륵.
이마에 잔뜩 맺혀 있던 땀이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볼을 타고 줄줄 흘러서 턱으로 뚝뚝 떨어졌다.
비겁한 겁쟁이. 도망자.
그게 허윤이었다.
지금 남은 게 뭐가 있는가.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다 잃고 난 후에야 복수를 하겠다며 이렇게 팔이나 들고 있는 신세였다.
갑자기 서글퍼진 허윤은 양팔을 든 채로 엉엉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면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으며 살아갈 텐데…….
왜인지 비급 속의 노인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