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are you obsessed with fake wives? RAW novel - Chapter 87
제87화
어떻게든 변명해 보려 애썼지만 그럴듯한 핑계가 떠오를 리가 없다. 카레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녀를 향한 눈초리가 점점 싸늘해져 갔다.
“뭐가 아쉬운 게 있어서 공작 영애가 도둑질을 했단 말입니까?”
“윈터펠과 발라지트는 사이가 안 좋긴 하니까요. 그런 이유일 수도요.”
“윈터펠 후작 부인이기 이전에 친자매잖아요! 어쩜 저렇게 악랄한 수가…….”
분위기는 나디아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상황을 마무리 짓기 위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우리가 자매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솔직히 말해 줘. 내가 너를 서운하게 한 일이 있니? 혹시 저번 약혼파티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앙심을 품은 거야?”
“그, 그건 이미 지난 일이잖아! 무슨 의도로 그 얘기를 꺼내는 거야?!”
“네가 나한테 악감정을 품을 만한 일이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그러지. 카레인…… 미안하지만 그 일은 네 잘못이었어.”
나디아의 말 덕분에 사람들은 작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약혼 기념 파티가 열렸던 날, 카레인이 언니가 자신을 연못에 떠밀었다고 누명을 씌우려 했었던 일을.
“뭐예요? 무슨 일을 말하는 거예요?”
“아, 모르시구나. 그건 말이죠…….”
“원래 사이가 많이 안 좋았나 보네요.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선 돈독한 자매인 척해서 미처 몰랐는데.”
웅성거림이 더욱 요란해져간다. 나디아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녀는 소리 내어 웃는 대신 눈물을 한 방울 또르르 흘렸다. 결혼생활 내내 갈고닦은 연기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흐윽.”
“?!”
카레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진짜 울고 싶은 게 누구인데 왜 제가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
하지만 기막힌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형부, 그러니까 윈터펠 후작이 흐느끼는 나디아의 어깨를 감싸 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쓰러운 것을 대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이런 일에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어.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흑, 하지만.”
그러더니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준다. 카레인의 얼굴에 서린 기막힘이 점점 더해져 갔다.
하지만 그녀가 황당해하는 것과 별개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카레인은 이미 ‘이복 언니를 괴롭히다 못해 몇 번이나 누명을 씌우려 한 희대의 악녀’가 된 지 오래였다.
그녀가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발라지트 공작이 서 있는 방향이었다.
“아, 아버지…….”
“못난 것.”
“저, 전 정말 아니…… 하, 저는, 전…….”
버러지를 보는 듯한 시선에 혀가 돌처럼 굳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결코 자신을 감싸 주지 않으리라.
절망감이 온몸을 감싼다. 마치 교수대 앞에 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카레인이 힘없이 바닥 위로 쓰러졌다.
털썩.
그러나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아비조차도.
무릎 꿇은 딸을 뒤로 한 채, 발라지트 공작이 국왕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제가 여식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탓입니다. 딸아이를 감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 여식을 엄히 벌하여 주십시오.”
“으음…….”
국왕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신음했다.
충신의 하나뿐인 적녀인 만큼, 카레인을 꽤 귀여워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를 엄하게 처벌하는 수밖에.
왕이 한숨과 함께 명령했다.
“사사로운 복수를 하고자 왕실의 보물에 손을 댄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재판이 열릴 때가지 카레인 발라지트를 왕궁 감옥에 구금한다. 끌고 가라.”
“예!”
경비병들이 달려들어 카레인을 짐짝처럼 일으켜 세운다. 망연자실한 그녀는 저항 없이 순순히 끌려가기만 했다.
카레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연회장 안에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한 침묵이 찾아왔다.
싸늘한 침묵을 깬 것은 왕의 헛기침 소리였다.
“크흠, 흠.”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라지만 이 상황에서 연회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이 무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왕이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연다.
“큼, 흥이 식었다. 오늘 연회는 이만 파하는 것으로 하지.”
그러더니 먼저 몸을 돌려 연회장을 떠나 버린다. 기분 상한 기색이 역력한 왕의 뒤를 왕족들과 시종들이 따라갔다.
왕이 완전히 연회장을 벗어나자, 곳곳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카레인 양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설마 큰 벌을 받겠어요. 공작님의 따님이신데 고작 해야 유배형 정도겠죠.”
“저런, 결혼 적령기의 영애가 유배형에 처해지면 치명적일 터인데.”
“손을 잃는 것보단 낫겠지요.”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며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연회장이 반쯤 비워졌을 때쯤, 글렌의 품에 안겨 우는 척하던 나디아가 입을 열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입가가 비뚜름한 미소를 짓고 있다.
“우리도 이만 가요.”
“그러지.”
글렌이 걸음을 옮기며 속삭이듯 물었다.
“이복 여동생에게 원한이 있다고 했지. 이걸로 원수는 갚은 셈인가?”
“그럴 리가요.”
과거에 그녀는 더러운 누명을 뒤집어쓴 채 차가운 지하실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숨이 끊어져 가는 순간 깔깔거리며 웃던 카레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그러니 고작 유배형 정도로 복수를 끝내 버리기엔 너무 아쉽지 않은가?
‘당장 카레인을 죽이는 건 무리야. 고작해야 수도에서 몇 년간 추방되거나 유폐되는 정도겠지.’
이복동생의 목숨을 앗아 가는 건 발라지트를 완전히 무너트린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도록 만들 수는 있다.
‘그 애도 슬슬 알 때가 됐네.’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았을 진실을.
* * *
왕궁의 지하 감옥은 사방에서 한기가 새어나오는 장소였다. 아직 날씨가 추워지기 전인 시기인데도 턱이 딱딱 부딪힐 지경이다.
카레인이 덜덜 떨리는 팔을 움켜쥐며 물었다. 창살 바깥에는 공작 저에서 찾아온 하녀가 서 있었다.
“아, 아버지는 뭐라고 하셔?”
“당분간은 세간의 이목 때문에라도 꺼내 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꺼내 줄 테니 소란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럼 재판은? 응? 나, 난 이 나라의 하나뿐인 공작 영애잖아. 설마 나한테 중형을 내리진 않겠지?”
“물론 그렇겠지요. 공작님께선 노력해 보겠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잘 해결될 겁니다. 발라지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아가씨께서도 아시잖아요.”
“그래……. 그렇지. 아버지가 날 버릴 리가 없어…….”
하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카레인을 향해 담요를 내밀었다. 간수들에게 금화 열 개를 주고 반입한 물건이었다.
“감옥 안은 추우니까 몸조심하시고요. 저는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녀는 그리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뚜벅뚜벅 하는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더니 지하실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쾅!
맨 아래층에 갇힌 것은 카레인 한 명뿐이었기에, 하녀가 자리를 뜨자 감옥은 완연한 침묵으로 감싸였다.
“흐으…….”
지독한 추위와 공포가 신경을 태우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건네받은 담요로 상체를 둘둘 말곤 벽에 몸을 기댔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조금만. 아버지가 날 구해 주실 거야. 나, 난 그분의 딸이잖아.’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해도 자신은 아버지의 하나뿐인 적녀였다.
지금 당장은 제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할지 몰라도 언젠가는 용서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 괜히 겁먹을 필요 없어. 곧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이곳에서 나가기만 한다면 증오스러운 자매에게 복수할 방법도 생길 것이다. 카레인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하 입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끼익―
“……!”
고막을 긁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에 카레인이 어깨를 떨었다. 뒤이어 뚜벅뚜벅 하는 발소리가 따라온다.
간수가 다가오는 것일까? 무슨 용건일까?
하지만 두려워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창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간수가 아닌 이복 언니였다.
카레인이 멍하게 눈을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나…… 디아? 여, 여긴 무슨 일이야?”
“하나뿐인 동생이 투옥되었다는데, 면회를 안 올 수가 있어야지.”
“피, 필요 없어! 누가 네 얼굴 보고 싶대?!”
“원래 면회란 건, 죄수가 청하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 마음이란다.”
나디아가 돌바닥 위에 주저앉은 이복동생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화려한 파티용 드레스는 이곳에 들어올 때 빼앗긴 모양인지, 얇은 속치마 위로 담요 한 장을 덮고 있다.
그에 비해 나디아가 입고 있는 것은 두꺼운 비단옷이었다. 이런 지하 감옥에 입고 들어오는 것이 아까울 만큼 고급스러운 옷.
어딘가 데자뷔가 느껴진다고 생각한 나디아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일이 생각나네.”
“……옛날 일? 뭐라는 거야?”
“알 필요 없어. 넌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시간이 되돌아가는 순간 네 머릿속에선 사라진 기억일 테니.
“그보다 바깥에서 네 처분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날 겁주려는 생각이라면 당장 꺼져. 어차피 아버지가 해결해 주실 테니까.”
“아니, 아버지는 널 이미 포기했어. 넌 요하네스 수도원으로 가게 될 거야.”
“……뭐?”
하지만 확신에 찬 태도가 무색하게도, 카레인은 나디아의 말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요하네스 수도원이 살인적인 규율로 유명한 곳이라는 건 둘째치더라도, 그녀는 이미 혼기에 찬 귀족 영애였다.
그런 곳에 몇 년만 유배된다면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혼처는 거의 없어질 것이다.
경악에 찬 카레인을 향해 나디아가 말을 이었다.
“유배 기간이 얼마나 길지는 몰라도, 결혼 적령기가 한참 지난 후에서야 수도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건 확실하지.”
“나, 나와 아버지 사이를 이간질하려 하지 마! 넌 예전부터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못해서 안달이었잖아. 반쪽짜리 주제에, 평민의 피가 반이나 섞인 주제에! 너하고 내가 같은 줄 알아? 아버지는 반드시 날 비호해 줄…….”
“하지만 넌 친딸이 아닌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