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100)
백소고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운이 좋았다. 위지호연의 도플갱어와 마주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임 당한 극천도나 무쌍괴협과 비교한다면 확실하게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소고가 마주친 것은, 그녀와 함께 이곳에 들어 온 무림맹의 소속원 중 하나인 극천도의 도플갱어였다.
무림맹의 다섯 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극천도였고, 백소고의 실력은 다섯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덕분에 백소고가 극천도의 도플갱어를 쓰러트리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더욱이 운이 좋았던 것은, 백소고가 다짜고짜 극천도의 도플갱어와 마주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백소고는 극천도의 도플갱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목격했고, 이 던전이 어떤 식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가 있었다.
‘도플갱어…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대부분의 무림인들. 특히나 에리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 무림에서 살다가 갑작스레 에리아에 소환 된 이계인들은 무공 외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무림이라는 세상에 넘치는 자부심과, 무공이라는 기술이 제일이라는 자부심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면에서 백소고는 굉장히 합리적인 무림인이었다. 그녀는 무공 외에 다른 기술에 대해서도 박식할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도플갱어는 모습만을 흉내낼 뿐인데. 하지만 이 던전의 도플갱어는 무공까지 사용하고 있어. 전투 자체는 미숙했지만… 극천도의 도플갱어는 극천도 본인과 비교해서 크게 부족함이 없는 무공을 사용했지.’
백소고는 극천도의 무공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이 무림맹에 소속되고, 위지호연의 감시라는 임무를 받게 되면서 극천도와 여러 번 비무를 해왔기 때문이다. 극천도는 일행들과 비교해서 그리 뛰어난 고수는 아니었으나, 무공에 대한 그의 열정만은 진짜였기 때문에 백소고는 극천도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던전은 위험해.’
쓰러진 도플갱어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본래 던전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는 쓰러지면서 확실한 전리품을 남긴다. 백소고는 손을 뻗어 도플갱어의 살점을 뒤적거렸다. 방금 전까지 극천도의 모습을 하고 있던 살덩이를 뒤지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살덩이를 헤집는 백소고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포션?”
끈적거리는 살점의 아래에 손바닥만한 크기의 유리병이 파묻혀 있었다. 백소고는 유리병을 들어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색깔은 영롱한 자주색. 나름대로 지식을 쌓은 백소고였지만, 안에 든 내용물이 어떤 것인지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 가장 확실한 것은 자신이 마시거나 타인에게 마시게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많은 방법 중에서도 가장 무식한 방법일 것이다.
백소고는 허리춤에 매어 두었던 아공간 포켓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무림맹의 쥐꼬리만 한 봉급을 모아 구입한 아티펙트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잡한 돋보기처럼 보이지만, 이 아티펙트를 구입하기 위해 백소고는 반 년이 넘도록 생활비를 줄여야만 했다.
‘엘릭서로군. 불순물도 적어… 이 정도의 엘릭서라면 고위 신관의 축복 급이야.’
물론 엘릭서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팔이 잘렸을 때, 잘려나간 팔이 있다면 붙이는 것이 가능하지만 팔 자체를 재생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엘릭서는 다양한 포션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꼽힌다. 백소고는 엘릭서를 아공간 포켓 안에 집어 넣었다.
“…자아… 그러면…”
백소고는 구불구불한 살덩이의 길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가. 공간이 변화한 것인지 이런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우선, 백소고는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보자고 생각했다.
던전을 악취 가득한 살덩이의 길로 바꾼 장본인인 장득수는 말이 많았다. 그는 이성민의 어깨 옆에서 걸으면서, 이성민이 백소고의 도플갱어를 살해할 때에 보였던 수법에 대해 감탄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무론을 늘어놓았다.
이성민은 루비아의 말에 공감했다. 차라리 죽이고 가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성민은 살인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성민이 2100년의 정신세계에서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정신이 붕괴하고 재구축되는 과정에서 필사적으로 붙잡은 인간성 중 하나였다.
죽이는 것에 망설임은 갖지 않는다. 하지만 즐기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다면 죽인다. 그래야 한다면 죽인다. 그 외에는 죽이지 않는다. 장득수는 수다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장득수는 초절정고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던전이니 함께 행동해서 나쁠 것은 없다.
마갑이 웅웅거린다.
‘또 뭡니까?’
[단순한 궁금증이다.]이제까지 잘 닥치고 있던 허주이지만,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웅웅거리는 것에 이성민이 그리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조금 안심한 모양이었다.
[네놈. 왜 먹지 않는 것이냐?]뭔가 싶었더니. 이성민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도플갱어의 사체를 뒤져 얻은 전리품. 이성민이 획득한 것은 인공적으로는 정제가 불가능한, 던전에서만 발견되는 마정석이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영약이다. 본래 영약은 아무리 잘 만들고, 복용자가 뛰어난 심법을 익힌 고수이거나 경지에 오른 마법사라고 하여도 취할 수 있는 내공과 마력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마정석은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보석이지만, 입에 넣는다면 사르르 녹아 그대로 몸에 흡수된다. 내공심법도 마법도 필요없다. 복용한 순간 아무런 부작용없이 힘이 더해진다. 무공을 익혔다면 내공이 증진되고, 마법을 익혔다면 마력이 증진된다.
‘내 몸뚱이는 불안정합니다. 괜히 처먹었다가는 몸이 망가질 수도 있어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걸.]이성민의 대답에 허주가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무슨 뜻입니까?’
‘튼튼하다고?’
[네놈의 몸 안에 이상한 것이 있어. 의식하고 있나? 으하하! 인간의 몸에 인간의 것이 아닌 심장이라니. 이 대요괴 허주가 장담하건데, 대요괴라고 불리는 놈들 중에서 네놈만큼 튼튼하고 뛰어난 심장을 가졌던 놈은 없었다. 물론 이 몸을 제외하고서 말이야.] [몸뚱이도 없는 주제에 으스대기는.]루비아가 투덜거렸지만 허주는 개의치 않았다. 이성민은 허주의 말에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육체의 부조화. 그것이 일어난 것은 얻은 심득을 무공으로 제대로 체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심이 앞선다. 부족한 기는 검은 심장 덕분에 얼마든지 불릴 수 있다. 하지만 체가, 이 몸뚱이가. 마음이 보고 겪은 것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 정신세계에서 보낸 2100년은 그 부조화를 극심하게 만들었다.
이성민은 불영대사에게 대환단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복용하지 않고, 이성민의 아공간 포켓 안쪽에 보관되어 있다. 이성민이 그를 복용하지 않는 것은 괜히 내공을 부풀렸다가 심기체의 부조화가 심해서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몸뚱이가 튼튼하다고. 심장 때문이야. 무조건 믿을 수는 없지만.’
프레스칸에게 확실한 답을 얻는다면 모를까. 허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은 없었다. 허주는 이성민의 몸에 빙의하여, 그의 육체를 빼앗으려 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허주. 당신이 잠자는 숲에서 나와 마갑에 깃든 것도 꽤 되었는데. 당신은 왜 숲에서 나가고자 했던 겁니까?’
[뭐냐 그 말은. 그 숲에서 이미 대답했을 텐데? 모른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네놈과 함께 숲을 나가야 한다는 것 뿐이었어.]‘함께 나간다는 새끼가 몸을 빼앗으려고 듭니까?’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새끼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참 요상하군.]그래도 2100년은 살았어 새끼야. 이성민은 그렇게 쏘아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이것은 강력한 암시야. 어떤 대단한 존재가 이 대요괴 허주에게 암시를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 따위는 아니겠지.]‘따위?’
[하하! 되돌아 온 자라고는 하지만 아는 것은 부족하군. 이 세계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야. 나도 하고자 했다면 신이 될 수 있었다고. 하지 않았을 뿐이지. 신이라는 것은 필멸자가 필멸의 굴레를 반쯤 벗은 것에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절대적인 것 같으면서도 미약한 존재지.]허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성민은 므쉬와 데니르를 떠올렸다. 그들이 보여 준 권능을 생각한다면 허주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었다.
‘운명은 개뿔이.’
[네놈은 운명을 믿지 않는 것이냐?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린 거야. 네놈이 죽음에서 돌아오고, 내가 네놈과 함께 숲을 나왔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 된 것이다. 그것이 인과율이고 운명이지.]운명의 신이라도 찾아봐야 하는 것일까. 이성민은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해보았다.
“음.”
하지만 생각을 길게 이어갈 수는 없었다. 육감이 발하는 경고에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장득수도 느낀 것이 있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취걸?”
장득수가 목소리를 냈다.
취걸은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취걸의 주변에는 흩어친 도플갱어의 사체가 있었다.
“아… 장대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을 보니… 후후! 사람이 맞는 것이겠지요?”
취걸은 쉰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이성민은 우두커니 서서 앉아 있는 취걸을 보았다.
“…으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장득수가 급히 취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는 커다란 손을 뻗어 취걸을 부축하려 들었으나, 취걸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독고귀검과 만났습니다. 아니, 독고귀검이 아닌가. 독고귀검과 똑같은, 독고귀검과 같은 무공을 쓰는… 그런 괴물과 만났지요.”
언제나 말이 많고 유쾌하던 취걸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통증과 피로에 찌들어 웃을 수가 없었다. 왼 팔이 잘려나간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포션은…?”
“아공간 포켓이 박살났습니다. 안에 있던 것들은 공간의 틈새로 사라져버렸지요. 그래도… 지혈은 했습니다.”
“장득수님. 포션은 안 가지고 계십니까?”
“…없네.”
당당한 대답이었다. 이성민은 제대로 준비도 갖추지 않고서 던전에 들어 온 장득수의 무식함에 경외를 느꼈다.
주변을 살펴본다. 독고귀검이었던 도플갱어의 시체는 보였지만, 잘린 취걸의 팔은 보이지 않았다.
“팔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성민이 취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취걸은 이성민을 올려 보면서 흐릿한 눈동자를 굴렸다. 그 시선을 받은 장득수가 대답했다.
“1년 전, 검귀를 죽인 귀창. 자네도 들어본 적이 잇지 않은가?”
“들어는 보았습니다만… 설마 그가?”
“우연히 나와 만나게 되어 이곳까지 동행하고 있었네.”
유명한 별호를 가지게 된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귀창이라는 별호를 듣고서 취걸은 납득하여 머리를 끄덕거렸다.
“…독고귀검은 쾌검의 고수입니다. 한 번으로 보이는 참격은 실상은 수십개의 검기가 실려 있지요. 저 살덩이 틈바구니에, 내 왼 팔이었던 살덩이들도 섞여 있을 겁니다.”
“도플갱어의 사체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무공서.”
취걸이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그는 옆에 있던 빳빳한 책을 들어 흔들었다. 살점이 묻어 있기는 했지만 무공서에 새겨진 글씨는 선명했다.
“항룡십팔장이라니. 개방도인 나에게 개방의 무공서라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물론 항룡십팔장은 뛰어난 무공이지만, 나에게는 필요가 없어요.”
“포션.”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공간 포켓에 손을 넣었다. 취걸이 움찔하고서 이성민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포션은 많이 있으니까.’
팔이 남아 있다면 엘릭서를 써서 붙여 줄 수 있겠지만, 남아 있지 않으니 귀중한 엘릭서를 쓸 필요는 없다. 적당한 포션을 먹인다면 기운은 차릴 수 있을 것이다.
포션 몇 개쓰는 것으로 개방과 인연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썩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지학은 소림의 미래로 불린다. 마찬가지로, 취걸도 개방의 미래일 것이다. 그런 취걸에게 도움을 주어 인연을 만든다면 개방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다.
개방은 유명한 정보 문파다. 거지가 없는 도시는 없고, 대부분의 거지들은 개방에 소속되어 눈과 귀의 역할을 맡고 있다. 에레브리사의 회원인 이성민은 정보에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개방의 힘이 정보뿐인 것은 아니다. 구파일방의 일방인 개방은 머릿수만 따지자면 모든 문파 중에 제일이다. 그런 거대 문파와, 그 거대 문파의 중심격인 인물과 인연을 만들어 손해 볼 것은 없다.
“…감사합니다.”
취걸은 이성민이 건네는 포션을 받으면서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러다가 손에 들고 있던 항룡십팔장의 무공서를 이성민에게 건네주었다.
“저에게는 필요가 없는 무공인데. 어떠십니까?”
“감사합니다.”
이성민은 거절하지 않았다. 항룡십팔장은 개방의 절기로 뛰어난 무공이다. 만약 저것을 얻은 것이 취걸이 아니라면 대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민이 항룡십팔장에 욕심을 낼 이유는 없었다. 백보신권도 익혀두기는 했지만 제대로 수행하지는 않았다. 그런 중에 항룡십팔장까지 익힐 이유는 없었다.
‘워낙 유명한 무공이라 팔아봤자 큰 가치는 없을 거야. 백보신권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공짜로 받는 것이니 기분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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