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133)
심득은 낯설지 않다. 여태까지 이성민은 몇 번이나 심득을 얻어왔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심 검은 심장 덕분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어쩌면 이번 심득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성민의 몸에 박힌 검은 심장이,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몸뚱이를 진화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득은 낯설지 않다고 하여도, 지금과 같은 기분은 낯설었다. 여태까지 쭉 엉켜 있던 심, 기, 체가 안정되었다. 이성민은 이전에도 한 번 환골탈태를 겪어 본 적이 있었으나, 환골탈태한 후의 육체와 지금의 육체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지금의 육체를 겪어 본 이상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일어난 거지?”
백무선이 이성민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엘릭서라도 마셨나? 포션이라는 것은 참 귀찮아… 안 그래?”
이성민이 일어나기는 했어도, 백무선은 그것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이전의 싸움을 통해 이성민이 자신보다 약하다는 것을 확인한 덕분이었다. 오히려 백무선을 짜증스럽게 하는 것은 광천마의 존재였다. 만월의 밤이라면 또 모를까, 지금의 백무선으로서는 광천마를 죽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이성민은 손에 들고 있는 창이 너무 가볍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육체도 마찬가지였다.
‘내 등을 떠민 것은 누구지?’
단순한 착각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분명하게 이성민의 등을 손으로 떠밀었다. 이것도 검은 심장인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어도 분명한 확신이었다. 이 또한 기묘하고 낯선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죽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제니엘라의 명령은 백무선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이었다. 흡혈귀가 되어 아득한 힘을 손에 넣기는 하였지만, 인간성을 포기한 대가는 확실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광천마는 무시한다. 저 놈의 팔 하나만 자르고, 기왕이면 다리도 더 자르고… 그리고 이탈하자.’
백무선은 마음을 먹었다. 그는 광천마의 우둔함을 비웃었다. 이성민을 비웃기도 했다. 둘이 합공한다면 훨씬 일이 쉬울 텐데. 왜 굳이 혼자서 싸우려는 것일까?
“도망치지도 않고 말이야…”
백무선은 킬킬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시뻘건 안개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성민은 가늘게 뜬 눈으로 백무선이 벌이는 짓을 보았다. 혈무유야공… 그 이름까지는 이성민도 알지 못했지만, 백무선이 펼치는 혈무유야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공격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참 이상하지.’
이성민은 겨누고 있는 창을 내리지 않으면서 성큼 발을 뻗어 앞으로 향했다.
‘저게 뭔지 모르는데… 무섭지가 않아.’
반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안다. 그런 것치고는 정신이 평온하다. 여태까지 익혀 온 모든 무공이 완전히 정립된 기분이었다.
2100년의 수행은 이성민이 평생을 수행해도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민에게 있어서 마냥 이익라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수행의 결과로 이성민의 심, 기, 체는 더욱 엉켰고, 210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었다. 그 덕분에 이성민은 2100년의 수행의 결과를 온전히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심, 기, 체는 안정되었고 여태까지의 경험과 심득을 한 데 모아 다시 정리하는 기연을 얻었다.
그렇기에.
백무선이 흩뿌린 붉은 안개가 덮쳐왔을 때. 이성민은 당황 없이 창을 휘두를 수 있었다. 창 전체를 감싼 기묘한 기류가 란의 수법을 통해 흐름을 바꾼다. 이성민을 덮치던 붉은 안개가 창의 회전에 따라 바깥으로 밀려났다.
백무선이 놀란 소리를 내기도 전이었다. 쭉 뻗은 발이 앞을 딛었을 때. 이성민은 이미 백무선의 코앞까지 와있었다.
“헉!”
백무선이 기겁하여 몸을 뒤로 젖힌다. 그는 오른 팔과 왼 팔을 동시에 휘두르며 이성민을 떨쳐내려 했다. 백무선의 손짓에 이성민의 몸이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이형환위!’
어디지? 백무선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았다. 판단은 옳았다. 이성민은 그곳에 있었다. 이성민의 두 눈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마주친 순간, 백무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 두 눈에게 의식이 빨려 들어간다고 느꼈다. 백무선의 몸이 움찔 굳는다. 그것은 1초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았으나, 이성민이 손을 뻗기에는 1초도 너무 길었다.
투욱.
활짝 펼친 이성민의 손이 백무선의 가슴을 밀었다. 창이 아니라 손이었다. 그것에 대해 의구심을 느낄 수도 없었다.
“쿠엑!”
백무선의 입이 쩍 벌어지며 시커멓게 죽은 피가 뿜어졌다. 뒤로 날아간 백무선의 몸이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성민은 펼친 손을 천천히 내렸다. 가슴을 붙잡고 컥컥거리며 기침을 토하던 백무선이 커다란 고함을 지르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 왜 창을 쓰지 않은 것이냐?!”
백무선이 피범벅인 입을 벌리며 사자후를 터트렸다. 이성민은 내린 손으로 다시 창을 쥐면서 대답했다.
“…아까워서.”
“뭐…?”
“해보고 싶은 것이 더 있는데… 창을 쓰면 끝나 버리잖아.”
이성민은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백무선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우습게 보였다는 뜻이겠지. 백무선의 두 눈에서 시뻘건 혈광이 터졌다. 제대로 된 장법을 펼친 것도 아닌데 이성민의 일장은 백무선의 내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수준 높은 내가중수법이었고, 이성민 본인도 자신의 손바닥에 실린 힘에 내심 놀라워 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백무선은 비명과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이성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전신에서 폭사되는 붉은 안개가 끔찍한 살의를 담아 이성민을 덮친다. 뛰어드는 백무선의 속도보다 앞선 안개가 사방을 감싸려 들었다. 이성민은 양손으로 잡은 창을 뒤쪽으로 밀었다. 쿠우웅! 자하신공과 혈환신마공의 강기가 창 전체를 감싼다. 일직선으로 뻗은 창은 추혼일살. 덮치던 안개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나는!”
백무선은 침과 피를 튀기면서 왼 팔을 휘둘렀다. 그것보다 이성민의 창이 더 빨랐다. 혈환파쇄를 담은 창을 쏘아낸다. 자색의 강기가 소용돌이치면서 백무선을 덮쳤다. 백무선은 혈환파쇄를 피하지 않고서 붉은 안개에 휘감긴 왼 팔을 내밀었다. 꽈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백무선의 왼 팔이 허공을 날았다.
“내… 팔…!”
백무선이 날아간 팔을 보며 비명을 지른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고 오른 팔을 휘두른다. 피를 마시면 된다. 무엇을 위해 흡혈귀가 되었던가? 피만 마시면 그 어떤 상처도 회복하는 불사력을 원했다. 다시는 사지를 잃어 절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또…
또 무엇을 위해 흡혈귀가 되었던가?
분뢰추살과 혈류추살이 만난다. 이성민의 창이 만들어낸 수십 개의 창영에 수십 개의 강기가 더해진다. 그것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유성군처럼, 자색의 꼬리를 만들며 백무선을 덮친다. 소천마에 대한 원한. 복수심. 그와 마찬가지로 이성민에 대한 살의들. 흡혈귀가 되면서까지 추구하였던 감정들은 제니엘라의 권속이 되며 흐려져 버렸다. 지금의 백무선은 제니엘라의 명을 따르는 인형이었다. 인간이 인외가 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결과는 똑같다.
인외가 된다면 무언가를 얻게 되지만,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잃게 된다.
백무선은 울부짖으면서 오른 팔을 휘저었다. 혈무유야공의 초식이 터져나온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분뢰추살과 혈류추살을 완전히 막아내는 초식은 없었다. 붉은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졌고, 백무선의 왼쪽 옆구리에서 피가 뿜어졌다.
“으아아악!”
백무선의 비명은 길고 높았다. 이성민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더 많은 것들.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 된 무공들을 모두 펼쳐보고 싶다는 욕구가 이성민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성민이 펼친 구룡살생은 매끄러웠고 강력했다. 백무선은 필사적으로 안개를 끌어다가 방벽을 만들려 했으나, 구룡살생은 그 안개를 충돌한 즉시 소멸시켰다. 그 다음은? 백무선은 아득한 정신줄을 붙잡고서 연이어 무공을 펼쳤다. 하지만 안 된다. 이성민은 공도를 펼쳤고, 그것은 백무선의 모든 무공을 파훼시켰다. 이성민과 백무선 사이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백무선은 펄쩍 뛰어 공중으로 도약했다.
“너 따위가!”
높은 곳으로 뛰어 오른 백무선이 하나 뿐인 손으로 땅을 내리 찍었다. 붉은 안개가 손짓을 따라 아래로 쏟아진다. 이성민은 창을 아래로 내리고서 복사백탐을 펼쳤다. 그것은 백무선과의 거리를 관통했다. 안개 너머에서 백무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래로 내렸던 오른 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내 팔, 내 팔…!”
백무선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쉼 없이 중얼거렸다. 본래라면 이 정도의 상처를 입는다면 도주하는 것이 옳다. 흡혈귀인 백무선의 생명력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기다. 제니엘라가 특별히 많은 힘을 부여한 덕분에, 피만 마신다면 치명상에서도 소생할 수 있다.
하지만 백무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제니엘라의 명령 때문이었다. 아직 백무선은 이성민을 절망시키지 못했다. 양 팔을 잃은 백무선은 다리를 허우적거리면서 공중에서 떨어졌다. 이성민은 떨어지는 백무선은 향해 창을 뻗었다. 손목에 작은 떨림을 주었을 때, 그 떨림은 창을 수십으로 나누어 백무선의 몸을 꿰뚫었다.
“끄으으…”
떨어진 백무선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떨어지는 도중에 다리 하나는 창에 꿰뚫려 뜯겨져 날아갔고, 사지 중에 그나마 남은 다리 하나도 발목이 꺾여 있었다. 몸뚱이에도 창에 꿰뚫린 상처가 많았다. 저 정도의 상처라면 죽고도 남았지만, 백무선의 목숨은 아직도 붙어 있었다.
“아… 안 돼…”
백무선은 피투성이의 몸을 질질 끌며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일어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니엘라… 여왕님의 명령을…”
하지만 죽음은 가까웠다. 이곳에는 백무선의 상처를 회복시킬 만한 피도 없었고, 만월도 아니었다. 이성민은 발목이 끊어진 다리로 땅을 밀어내면서 꿈틀거리는 백무선을 무뚝뚝한 눈으로 내려 보았다.
“저런 꼴이 되면서까지 퀸의 명령을 따르려 하는 군.”
[저 녀석은 제니엘라의 혈족이니까.]허주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뱀파이어들에게 있어서 혈족, 그 안에 있는 피의 상하관계는 절대적이야.]“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인간이 아니게 되면서까지 얻은 힘이다. 아무런 대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나?]“더 요괴가 되기 싫어졌어.”
[뱀파이어와 요괴는 근본적으로 달라. 뭐… 네가 내키지 않다는 것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지금의 너 자신을 포기하고 요괴가 된다는 것은, 너로서 가지고 있던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그게 무슨 말이냐?”
[인간으로서의 사고. 인간으로서의 행동. 네가 인간이기에 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치환된다는 뜻이다. 인간이던 네가 돼지가 된다면, 돼지의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냐?]허주가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요력을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납득해 줄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고 살아 온 너에게 요괴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말이다. 네가 추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간절하다면, 요괴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니야. 다만 방법의 차이가 있겠지. 인간으로서 추구하던 목적까지 도달하는 방법과, 요괴의 방법은 완전히 다를 테니까.]이성민은 허주의 말을 들으면서 한숨을 삼켰다. 요력이라는 것은 꺼림칙하고 불길한 힘이었고, 요괴가 된다는 것은 그 불길한 힘을 휘두르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백무선은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떠나, 제니엘라의 명령만을 수행하려 들고 있었다. 뱀파이어와 요괴는 다르다고 허주가 말했지만, 이성민이 보기에는 똑같았다. 결국에는 인간이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된 것 아닌가.
“멍청한 녀석…”
광천마가 다가왔다. 그는 바닥을 기는 백무선을 내려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인간일 적의 백무선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때의 백무선이 얼마나 재기 넘치고 야망 넘치던 무인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보내 주게.”
광천마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돌렸다.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백무선에게 다가갔다. 백무선은 다가오는 이성민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피로 물든 송곳니가 딱딱거리며 서로 부딪힌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려 들지 않았고, 이성민은 백무선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머리가 박살난 백무선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이성민은 끈적한 피에 젖은 창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냈다.
[남쪽으로 가자.]허주가 유혹하듯 말했다.
[인간성을 유지하면서 요력을 다루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으냐. 아무래도 나는 너를 남쪽으로 인도하기 위해 숲에서 나와야 했던 모양이야.]“…가야지.”
이성민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왜 제니엘라는 백무선을 통해 나를 공격한 것일까? 제니엘라가 직접 왔다면, 이성민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이성민은 의구심 어린 눈으로 트라비아를 돌아 보았다. 무너져있는 성벽 너머로 보이는 폐허와 다름없는 도시. 그곳을 응시하며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야.”
이성민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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