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259)
창이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창왕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는 다가오는 창의 모습을 보려 했으나, 이성민이 출수한 창은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한때는 창이었던, 흔들리는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창왕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섣부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흩어진 안개가 덮쳐온다. 창왕의 손에서 창이 빙글 회전했다.
진정한 의미의 신창합일을 완성한 그에게 있어서, 창은 무기이기 전에 신체의 연장이었고 창왕 자신이었다.
생각하는 대로.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창이 움직인다.
파바박!
창왕을 덮쳐오던 안개무리 전체가 창왕의 창에 갈기갈기 찢겼다.
하지만 안개에 형체는 없다. 창왕은 흐늘거리며 물러가는 안개무리를 보다가 흠칫 놀랐다. 급히 이성민이 있던 곳을 돌아보지만, 그곳에 이성민은 없었다.
‘오호라.’
창왕은 이성민이 펼친 무공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환술(幻術). 눈을 현혹하는 것은 환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이성민이 펼친 무공은 이미 환술의 영역을 아득하게 벗어났다. 저토록 명확한 살의를 담아낸 것을 어찌 환술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겠나.
창왕의 생각대로. 이성민이 펼친 구천무극창의 팔초, 환계는 극환(極幻)의 무리를 담고 있는 무공이다. 이전의 이성민이라면 제대로 펼칠 수도 없었던 무공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무공에는 어마어마한 공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이성민은 창왕을 경악하게 만들 정도로 막대한 공력의 소유자였다. 그뿐인가. 사마련주의 손길이 닿은 환계는 이전의 환계와 비교하여 완전히 다른 무공이 되었다. 이성민도 이러한 환계를 실전에서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간을 강렬히 왜곡시키는 안개는 요력이 듬뿍 가미된 강기가 만들어낸 죽음의 안개다.
그 안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이성민의 창은 눈으로 포착하는 것도, 기감으로 감지하는 것도 불가했다. 창왕 수준의 고수라 하여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잡스러운 기운이 가득 차 있군.’
이성민이 지니고 있는 요력 때문이었다. 사방을 뒤덮은 강기의 안개는 요력을 가득 담았고, 그것은 창왕의 예리한 기감으로도 이성민의 본체를 잡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 환계는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창술이되 창술의 영역을 초월한 무공이다.
스슥.
스스스슥.
창왕은 귀를 기울였다. 안개가 흐르고 있다.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는다. 소리를 쫓아서는 안 된다.
창왕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귀창 정도의 고수라면 몸을 움직이는데 저런 불필요한 소리가 날 리가 없다.
‘현혹시키려 하는군.’
창왕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어느새 사방에 안개가 가득 차 있었다. 창왕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창으로 일으켰되 창술의 영역을 뛰어넘은 무공이다. 공간 자체를 장악할 정도의 공력도 대단하지만, 그만한 공력을 쏟아냈음에도 여유가 있다는 것이 더욱 대단하구나. 불리한 싸움임을 알았기에 너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공간을 만든 것이고. 그래, 이것은 그런 무공인가.’
환술이라면 겪어 본 적이 있다. 무신 또한 환술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고, 한때 창왕은 무신에게 도전하여 그의 환술을 상대로 된통 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기억 덕분에 환술을 상대하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껄끄럽게 대할 생각은 없었다.
환술을 깨는 방법. 창왕이 아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더 강한 힘으로 정면에서 깨부수는 것. 그를 떠올리고서 창왕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꽈아앙!
그가 휘두른 창이 안개 가득한 공간을 뒤흔들었다.
스스슥.
스스스스슥.
지면을 스치는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창왕이 다시 한번 창을 휘두르려 할 때. 귀에 거슬리던 그런 소리가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푸확!
공간 한쪽이 터져나가면서 창이 파고 들어왔다. 창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를 비틀어 돌리며 창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충돌의 순간에 창이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음!’
창왕은 본능적인 위협을 감지하여 상체를 옆으로 휙 비틀었다.
피슛!
찌른 창이 창왕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방의 안개가 다시 한번 덮쳐온다.
안개 모두가 수십의 창격이 되어 창왕을 덮친다. 제대로 방어하지 않다가는 수십 번 창에 꿰뚫려 갈기갈기 찢겨져 나갈 것이다.
그 오싹한 죽음의 이미지를 그리며 창왕은 이번에도 웃었다.
“으하하하!”
커다란 웃음과 함께 창왕이 창을 붕붕 돌린다.
콰드드득!
덮쳐오던 안개가 창왕의 창이 만들어낸 회전에 휘말린다. 환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안개 너머에서 끝없이 이동하던 이성민의 손안에서 ‘진짜’ 창이 폭사했다.
“거기냐!”
창왕이 고함을 질렀다. 그는 가득 힘을 불어넣은 창을 찔렀다. 안개가 그 기세를 침범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다. 이성민의 창과 창왕의 창이 격돌했다.
창왕은 안개 너머에서 보이는 이성민의 두 눈을 보았다. 환한 금색으로 물든 그 눈을.
창끝이 흔들린다.
“헛!”
창왕이 숨을 삼켰다. 일순간이나마 그는 자신의 두 발이 딛고 있던 지면이 푹 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갑작스러운 감각은 창왕 정도의 고수도 잠깐이나마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주 잠깐의 틈. 그 틈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성민의 창이 움직인다.
푸확!
근접거리에서 쏘아진 창이 창왕의 가슴을 노렸다. 하지만 창왕은 노련했다.
그는 즉시 들고 있던 창을 둘로 나누었고, 휘청거리는 몸을 그대로 뒤로 누워 이성민의 창과 거리를 벌렸다.
따악!
창왕이 휘두른 단창과 이성민의 창이 부딪혔다. 창왕은 섬세한 동작이 불가능할 것 같은 자세에서도 멈추지 않고 공격을 거듭해서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창끝을 본 순간.
창왕은 이성민과의 거리가 길게 늘어났다고 인식했다.
환술인가? 아니면 보법? 짧은 틈에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창왕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창을 쏘았다. 멀어지던 이성민의 몸이 확 다가온다. 거리감을 어지럽혔던 것은 환술. 그렇다면 이건?
푸욱!
창왕의 창에 이성민의 몸이 관통되었다.
하지만 창왕의 손은 ‘꿰뚫었다’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피도 튀기지 않는다.
환술이다. 그를 알았을 때. 이성민의 몸이 안개가 되어 무너졌다. 무너진 안개는 안개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창격이 되었고, 이번에는 창왕이라도 완전하게 방어하거나 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크웁!”
파바바박!
급하게 창을 휘저어 창격을 흩뜨렸으나. 완전히 흩어내지 못한 창격이 창왕의 몸을 연이어 스쳐 지나갔다.
그런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상처만으로 끝낸 것이 창왕의 최선이었다.
창왕은 전신에서 올라오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희열을 느꼈다. 싸움 중에 상처를 입은 것이 얼마 만이던가. 전신에 퍼진 얇은 상처에서 핏물이 쏟아졌고 창왕은 큰 소리로 웃었다.
“좋구나!”
이성민은 아찔한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환계는 초고도의 환술과 체술을 결합시킨 것이다. 창의 움직임은 계속해서 환계의 움직임을 따라야 하고, 다른 초식을 펼치는 것은 불가하다.
창을 움직여 환술을 이어나가지 않는 한 환계는 깨져 버린다.
그만큼 위력적인 무공이었으나, 환계에는 많은 단점이 존재했다. 지속력이 부족하다. 이성민의 어마어마한 공력으로도 환계를 오래 지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내공은 바닥이 드러났고, 요력만으로 환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이 현실이었다.
“후우, 후욱…….”
이성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창왕을 노려보았다. 피투성이로 웃는 창왕은 도저히 쓰러질 것 같지가 않았다. 이렇게까지 오래 환계를 지속한 것은 처음이다.
[물러서는 것이 어떠냐.]허주가 충고했다.
[너는 지금 요력만을 쓰고 있어. 이 어르신이 네 정신세계에서 버티고는 있다만…… 지금은 꽤 위험한 상황이다. 저놈을 쓰러뜨리려면 앞으로도 한참을 더 싸워야 할 텐데, 어쩌면 그 전투 도중에 요력이 폭주하여 네 의식을 집어삼키려 할지도 몰라.]‘알아.’
[안다면 물러서라.]‘보내주지 않을 것 같은데.’
이성민은 욱신거리는 두통을 억누르고서 창왕을 보았다.
그는 상처를 돌보지 않고 미친 듯이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창이 거듭해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힘이 부풀어 올랐다. 이성민은 빠득 이를 갈며 창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쿠르르릉!
안개 속에서 자전이 끓는다. 구천무극창의 환계. 거기에 흑뢰번천의 구결이 깃든다.
단전에서 부글거리며 끓던 요력이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이성민의 창을 번쩍거리는 빛이 휘감았다.
구천무극창 팔초, 환계(幻界) 만뢰(萬雷).
공간을 뒤덮고 있던 안개가 모조리 뇌운이 되었다.
쿠르르릉!
벽력이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창왕은 즐거운 긴장을 느끼며 창을 휘둘렀다.
꽈아아앙!
뇌운이 일시에 폭발하며 연속된 자전이 창왕을 덮쳤다. 창왕은 웃음 섞인 고함을 터뜨리며 창을 휘둘렀다.
창왕의 창이 번개를 갈랐다.
‘엇.’
번개가 사라졌다. 그 커다란 벽력 소리와 덮쳐오는 번개의 위협은 거짓이었다. 환술! 창왕은 급히 쏘아낸 내공을 회수했다.
하지만 늦었다. 사방을 밝혔던 빛이 사라지고, 일순간 세상이 시커먼 밤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기다란 자색의 번개가 어둠을 둘로 나누었다.
“크륵!”
창왕은 급히 회수한 내공과 창을 휘둘러 자전을 막아냈다. 환계의 환술 세계에서 만뢰 역시 눈속임일 뿐. 진짜는 만뢰 속에 숨겨진 하나의 창격.
자전을 가득 휘감은 그것은 하늘을 가르는 번개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창왕은 목구멍 너머에서 솟구치는 핏물을 삼키며 창을 끝까지 찔러 넣었다.
찌직, 찌지지직!
번개가 찢겨 나간다. 이성민은 밀어내는 창에 전력을 불어 넣었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기혈이 꿈틀거린다. 단전에서 고약한 느낌이 들었다. 요력이 부풀어 오른다.
머릿속에서 허주가 무어라 고함을 질렀다.
이성민은 끔찍한 예감에 아랫입술을 씹었다. 하도 씹어 짓이겨진 입술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거듭해서 과하게 요력을 사용한 대가가 밀려오고 있었다. 인간의 몸이었다면 박살 났겠지만 요괴로 변이한 몸뚱이는 박살 나지는 않는다.
다만 의식이 흐려지고 귓가에 알 수 없는 귀곡성이 뒤섞여 듣기 싫은 소음이 되었다.
팟.
환계가 끝났다. 사방을 뒤덮은 안개가 언제부터 그랬냐는 듯이 깨끗하게 사라진다. 창왕은 창을 끝까지 찌르는 것에 성공했다.
번개가 흩어진다. 창왕은 머뭇거리지 않고 이성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성민은 창왕의 접근을 느끼고서 급히 창을 들어 올렸다.
꽈아앙!
공중으로 뛰어오른 창왕이 휘두른 창이 이성민의 창과 충돌했다. 이성민은 충격을 온전히 흘려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앗!”
기합 소리와 함께 창왕의 창이 폭사했다. 이성민은 흐려지는 의식의 끈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런 몸을 가지고서 창왕의 창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콰드득!
휘두른 창이 이성민의 옆구리를 때린다. 갑옷을 파고들어 온 충격이 늑골을 부러트리고 내장을 터뜨렸다. 힘없이 날아간 이성민의 몸이 멀찍이서 떨어져 땅을 뒹굴었다.
“……뭐냐.”
창왕은 휘두른 창을 천천히 내리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퉤, 하고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지친 거냐?”
창왕은 창을 붕붕 돌리면서 이성민을 향해 다가갔다. 이렇게 제대로 싸워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전신이 긴장과 열기로 뜨거웠다. 그런데 뭐냐. 조금 더 즐기고 싶고 싸우고 싶은데.
“일어서라.”
창왕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하는 이성민을 향해 재촉했다. 하지만 이성민은 끝까지 일어서지 못했다.
일어서던 중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그러자 창왕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어서란 말이다!”
‘누가 일어나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아나……!’
이성민은 노이즈 너머에서 창왕의 고함을 들었다. 결국 이성민은 일어서지 못하고 다시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그것을 보며 창왕이 성난 표정을 지으며 발을 들어 땅을 내리찍었다.
“똥 싸다가 끊긴 기분이란 말이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비유였지만, 창왕의 기분은 그 말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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