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322)
328화 77. 봉인(3)
모험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체(精神體)인 상태에서 백아를 몸에 꿰뚫는 것.
꿰뚫는 순간에는 이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일인지 알지 못했지만, 학살포식의 허탈한 외침을 통해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저지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정신의 자살. 그것으로 인해, 이성민은 무의식에서 의식 위로 올라왔던 학살포식을 자신의 정신과 함께 죽여 버릴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여러 가지 우연과 조건이 상황에 부합한 덕분이었다. 본래대로라면 학살포식으로 각성한 순간에, 이성민의 의식은 자연히 소멸하여 그 빈자리를 학살포식이 메워야만 했다.
하지만 이성민의 의식은 소멸하지 않았다. 정신체로 정신세계에 남았고, 이성민에게 없어야 할 백아마저 이성민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허주까지 개입하여 학살포식이 이성민에게서 백아를 빼앗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우연과 조건. 아니, 정말로 우연일까.
이성민은 더 이상 우연이라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우연이라는 것이 여태까지 이성민을 얼마나 휘둘렀던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군.’
여러 가지 의문이 많았다. 자신의 정신이 한 번 죽고, 지금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몸은 어떻게 되었지? 사실 그것이 이성민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의문이자 걱정이었다.
정신이 죽은 동안, 내 육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어르무리에서 이성민이 처음으로 요괴로 각성했을 때. 그때에 이성민의 몸뚱이는 멋대로 날뛰었다.
이성이 상실되고 본성만이 남아서. 그 상황에서 이성민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인외성과 싸움을 벌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인외성이 학살포식의 일부였던 것 같았다.
놈을 제압하고 육체의 주도권을 되찾았을 때, 놈은 무의식 너머로 잠기며 ‘다음에 보자’라고 말을 했었다.
그때 이성민이 인외성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점에서는 종언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종언은 이성민이 전생에서 죽은 시점의 뒤. 이성민이 전생의 돌을 손에 넣은 후부터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내 몸이 죽은 것은 아니야.’
설마 여기가 저승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내 의식이 육체를 떠난 동안, 내 육체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일까. 학살포식이 소멸하고 내 의식마저 소멸하였을 때. 내 육체는 대체 어떻게 되어 있던 것일까.
“너는 모르냐?”
“나야 모르지. 이 어르신도 혹시나 싶어서 네가 없어진 동안 네 몸뚱이를 장악하려 해보았지만…… 도저히 되지를 않더군.”
허주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죽지 않은 것은 틀림없다.”
“그 이후로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이지?”
이성민은 좀처럼 흐른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며칠 정도로 끝나지 않은 것은 틀림없었다.
데니르의 정신세계에서도 한 번 의식을 잃은 후로는 최소 몇 달이 지나고야 의식이 돌아오곤 했었으니까.
“모른다. 하지만…… 흠. 얼추 몇 년은 흐른 것 같은데?”
“……몇…… 년……?”
“최소로 잡아서 그 정도다.”
맙소사.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섬뜩해졌다. 몇 년 동안 의식을 잃은 동안 통제를 잃은 몸뚱이가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밀려왔다.
쿵, 쿵, 쿵, 쿵…….
‘이건 대체 무슨 소리야?’
이성민은 듣기 거슬리는 저 둔탁한 소음에 시선을 흘기면서 의식을 확장시켰다.
화아악!
이성민의 정신체가 크게 부풀었다.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이성민의 의식이 단숨에 이성민의 주도하에 내려왔다.
감겨진 눈이 뜨인다.
지금의 이성민의 두 눈이 보는 것은 자신의 의식 속이 아니었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어둠 속에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있어서가 아니라, 앞머리가 너무 자라서 두 눈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몸을 움직이려 해 보았지만, 철그럭 하는 쇳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수년 만에 돌아온 육체는 새하얀 백색의 굵직한 쇠사슬에 칭칭 감겨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이성민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사슬뿐 만이 아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붉은 글자가 빼곡히 새겨진 부적들이 이성민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억지로 몸을 움직이려 해본다.
강한 저항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움직이는 것에 큰 무리는 없었다.
이성민은 구속된 몸을 내버려 두고서 잠깐 동안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수년 만에 돌아온 몸뚱이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만큼 상태가 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전과 비교해서 훨씬 낫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요력이 상당히 줄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민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봉인이 완전히 사라졌어.’
그것에 안 좋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슬라가 새긴 봉인은 완전히 박살 났고, 이성민의 몸은 완전히 요괴가 되었다. 그러나 요괴가 되었을 때 깨어나야 할 학살포식이 완전히 소멸했다.
그 말인즉, 이성민은 완전히 요괴가 되었으면서도 정신은 확실하게 인간으로 남았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었기에 이전의 괴리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요력을 남용했을 때에 폭주하였던 것은, 이성민의 몸이 완전한 요괴가 아니고 어설프게 인간의 것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완전히 요괴가 되었기 때문에 요력을 사용하는 것에 그 어떤 부담이나 위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정신을 확실하게 유지하게 되었다.
[이건 오히려 너에게 득이 되었구나.]이성민의 머릿속에서 허주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였다. 김종현이 마지막에 남기고 간 반전의 마법은 이성민에게 득이 되었다.
사실 그대로 요괴가 되어 학살포식으로 각성했다면 득이라고 할 수 없었겠지만. 학살포식이 사라진 이상 반전의 마법은 이성민이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단점과 위험성을 완전히 사라지게 해주었다.
‘하지만 환골탈태는 하지 않았군.’
그건 과한 욕심이지. 이성민은 쓰게 웃었다. 오히려 환골탈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성민을 안심시켰다. 그것만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또, 환골탈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환골탈태를 통해 더 얻을 힘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꼴을 보아 하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대충 알겠다. 누군가가 요괴로 각성해 날뛰던 너를 봉인한 모양이야.]‘누구일까?’
[이건 마법이 아닌 주술이다. 아마 너와 함께 행동하던 대주술사가 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묘하군. 그녀의 힘만으로 너를 제압하고 봉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텐데?]아벨이 도왔던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성민은 씁슬한 표정을 지었다. 아벨은…… 죽었다. 학살포식이 알려주지 않았나.
아벨은 자신의 마지막 수명을 긁어모아 김종현을 시공간에서 추방시켰다.
아벨.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보다 세상을 위했고, 종언의 재앙인 김종현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내는 것에 성공했다.
쿵, 쿵, 쿵.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이성민은 천천히 호흡을 삼키며 힘을 끌어냈다.
쿠르르르릉!
이성민의 몸 안에서 벽력 소리가 울렸다. 내공과 요력이 순식간에 솟구치고 기혈을 흐르며 섞였다.
거부도 충돌도 없었다. 요력과 내공이 완전히 이성민의 의지를 따른다.
빠지지지직!
이성민의 몸에서 자색 전류가 튀어 올랐다. 그것은 이성민의 몸을 휘감고 있던 사슬을 순식간에 소멸시키고 부적마저 태워냈다.
[그건 일차적인 봉인이다. 이 봉인의 총체는 이 공간 자체로군. 너로서도 쉽게 뚫고 나갈 수는 없…… 겠지만.]허주가 말꼬리를 흐렸다.
왜 그러는 것인지, 이성민도 알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불빛이 켜진다.
자세히 보니 빛의 주변에 가느다란 균열이 있었고, 쿵 쿵 거리는 소리가 거듭될 때마다 그 균열이 더욱 번져나가며 구멍이 조금씩 커져 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너를 이곳에서 꺼내 주려 하는 모양이구나.]그리 듣고 싶지 않았던 저 소리가 이성민의 봉인을 깨기 위한 소리였던 것이다.
이성민은 천천히 구멍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에도 쿵 쿵 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너무 느려.”
이성민은 손을 들어 올렸다.
문득, 알았다. 자신의 손에 창이 없다는 것을. 그것에 이성민은 뒤늦게 당황했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성민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쿠르르릉!
자색 전류가 이성민의 양손을 휘감았다. 요력과 내공이 뒤섞여 만들어진 그 전류가, 내지르는 쌍장에 밀려 구멍과 충돌했다.
꽈아아앙!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더욱 커졌다. 이성민은 연이어 쌍장을 밀어내며 구멍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머지않아 구멍은 몸 하나 빠져나갈 만한 크기까지 확장되었다.
파지지직!
이성민의 몸이 자색 전류에 휘감겼다. 그는 흑뢰번천의 경공을 펼쳐 그 구멍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그, 그만해요!”
당아희는 우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포로로 잡힌 무림맹의 무사 중 벌써 수십 명이 죽었다.
흑마법의 제물로 바쳐져 혼만이 빠져나갔다. 당아희는 축 늘어진 이들을 보면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죽는 것에 특별한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당아희가 보기에는 그랬다. 순서 없이 마법진이 한 번 빛날 때마다 포로 중 한 명이 축 늘어져 죽어버린다.
그것이 당아희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차라리 순서라도 알면 공포가 덜할 텐데,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렵다.
“최소, 최소한 유서라도 쓸 시간을…….”
당아희의 그런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서, 죽음의 공포보다는 ‘봉인’과 ‘제물’이라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던 제갈영도. 어떻게든 포박을 풀고서 빠져나갈 틈을 노리는 황보명운도. 남몰래 점해진 혈도를 풀기 위해 애를 쓰던 모용찬도. 그리고, 주저앉아 몸을 떨고 있던 다른 포로들도.
“오.”
마법을 주관하고 있던 흑마법사들이 탄성을 지른다.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머지않은 곳에서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라이칸스로프들이 머리를 돌렸다.
흑마법사들의 곁에서 마법의 진행을 보고 있던 뱀파이어들도 두 눈을 크게 떴다.
공간의 구멍 밖으로 나온 이성민은, 모두의 주목을 받으면서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 높지 않은 허공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이 닿기까지. 이성민은 머리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10년.
이성민은 청년이 된 모용찬을 알아보지 못했고, 중년의 나이가 된 당아희를 그나마 알아보았다.
그녀가 나이에 맞지 않은 용모를 유지한 덕분이었다.
‘당아희? 왜 그녀가 이곳에?’
당아희의 곁에 있는 이들은? 그리고…… 이성민은 술을 마시고 있는 라이칸슬로프들을 보았다.
그들이 라이칸슬로프라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눈에 어린 흥미와 호승심은 읽었다. 그리고 흑마법사들도.
‘뱀파이어는 왜?’
타악.
이성민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는 우선,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창은 없었지만, 마갑은 있었다. 찌그러지거나 뜯어진 곳은 자가수복기능으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피나 살점 같은 것은 그대로 달라붙어 썩은 악취를 발하고 있었다.
이성민은 우선 그것을 무시했다. 앞머리가 너무 길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손으로 대충 앞머리를 옆으로 넘겼다. 옆머리나 뒷머리도 너무 길어져 허리까지 닿는다. 그는 한숨을 쉬며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야?’
그리 배는 고프지 않았다. 손톱도 구부러질 정도로 길게 자라나 그리 보기 좋지가 않았다. 이빨…… 도. 아니, 이빨은 요괴로 변이한 덕에 이리된 것일까. 이성민은 날카로운 이빨을 딱딱 부딪쳐 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좀 알려 주면 안 됩니까?”
딱히 누군가를 노리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대답해 주면 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성민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성민은 한숨을 쉬며 당아희를 보았다.
“오랜만입니다.”
“누…… 누…… 누구?”
“못 알아보는 겁니까? 몇 번 만났었잖습니다. 나 이성민입니다. 그, 귀창.”
“귀창!”
이성민의 말에 제갈영이 소리쳤다.
그제야 그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봉인, 제물. 그래, 설마 이곳에 봉인되었던 것이 10년 전에 미쳐버렸다는 귀창 이성민일 줄이야.
“다,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그건 내가 물어보고 듣고 싶은 말입니다만. 여기는 어디입니까?”
“게르무드.”
대답한 것은 라오셴이었다. 그는 몇 걸음 앞으로 걸어 이성민 쪽으로 다가왔다.
“설마 잊은 것은 아니겠지?”
“……게르무드…… 잊을 리가 없지.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니, 그보다.”
이성민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 게르무드에서. 그러니까…… 김종현이 게르무드에서 대학살을 벌이고.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겁니까?”
“10년.”
라오셴이 대답했다.
이성민의 입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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