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372)
378화 89. 강림(3)
선수 필승이라는 말을 무조건 믿지는 않았다. 그냥, 여왕과 딱히 나누고 싶은 말이 없었다.
강림한 직후의 여왕은 무방비했고, 짜증과 불쾌를 담아 던진 질문의 대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이성민은 빨랐다. 여왕이 선 높이까지의 거리.
그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여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가 어떠한 행동을 하기도 전에 이성민이 찌른 창이 여왕에게 쇄도했다.
쩌어엉!
공간을 찢고 들어온 창두가 보이지 않는 벽과 격돌했다. 이성민은 창을 찌른 손에서 강력한 저항감을 느꼈다.
여왕 앞을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이 출렁거렸다. 여왕은 가까이 있는 이성민의 얼굴을 들여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
누군지 알았다. 이성민을 알아본 여왕의 얼굴이 환해졌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감정을 장악하고 있던 짜증이 사라졌다.
이성민의 안에서 루비아가 경직된 몸을 웅크렸다. 여왕은 그런 루비아의 존재마저도 간파했다.
파앙!
이성민과 여왕 사이의 공간이 터졌다. 이성민은 창을 크게 휘두르며 뒤로 물러섰다.
“루비아.”
여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의 피조물. 내 손으로 만들어낸 인공정령. 네가 왜 그곳에 있는 것이냐? 네 가엾은 주인도 지키지 못하였으면서,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 있는 것이냐?”
[히익……!]여왕이 외치는 말에 루비아가 더욱 몸을 떨었다. 그 뒤에 여왕은 길쭉한 검지를 들어 이성민을 가리켰다.
“너.”
여왕의 목소리에는 환희가 담겨 있었다.
“너로구나. 그래, 너만 없었더라면. 네가 그이에게 맹세를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여왕의 목소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쉼 없이 떠들어댔다.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여왕의 눈은 예리하게 변했다. 이성민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을 쏟아내는 여왕의 목소리와 살기 가득한 눈을 통해 의미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오랜…… 정령의 언어에요.]루비아가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루비아는 자신이 알아들은 말들을 차마 이성민에게 전하지 못했다.
정령의 언어로 떠들어대는 여왕의 광기 어린 저주를 올곧이 번역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민은 여왕이 처음에 했던 말에 눈살을 찡그렸다. 너만 없었더라면. 그래, 따지고 보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엔비루스가 그런 몰골로 추락한 것은 이성민과 만났기 때문이다. 어르무리에서 이성민은 엔비루스에게 드래곤 하트를 다루어 줄 것을 부탁하였고, 엔비루스는 그 부탁을 듣고 마나에 걸고 맹세까지 했다.
이성민이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는 엔비루스를 도와 최선을 다했다. 어르무리의 결계에 침입했고, 프레스칸을 패퇴시켰으며, 아이네와 싸움을 벌였다.
오히려 잘못한 것은 엔비루스였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엔비루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성민은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였다.
당시의 엔비루스는 자신의 목숨과 교환하여 이성민을 죽일 생각이었다.
실패했을 뿐이다. 이성민은 살아남았고, 엔비루스는 마나의 맹세를 어긴 대가로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
그때 정령의 여왕이 강림하여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엔비루스의 육체는 마나의 폭주로 인해 완전히 붕괴했을 것이다.
“너만.”
정령의 언어로 저주를 쏟아냈던 여왕이, 핏발 선 눈을 희번덕거리며 내뱉었다.
“없었다면.”
솔직히. 좀 많이 억울했다. 생각해 보면 이성민이 잘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엔비루스가 멋대로 판단했고, 멋대로 배신했다.
그렇게 대가를 받았다. 그 후의 일에도 이성민이 직접 관여한 일은 없다.
오히려 엔비루스가 일을 망치지 않았나. 아벨이 남은 수명을 깡그리 긁어다 펼친 차원 연결 마법은 엔비루스로 인해 망쳐졌다.
엔비루스를 죽인 당사자도 이성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왕은 무조건 이성민을 탓하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이성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발을 아래로 뺐다.
[지금.]이라는 신호 때문이었다.
그것은, 폭발이면서도 이전까지 보았던 폭발과는 그 형태가 달랐다. 고온의 불꽃이 터지는 것도, 빛이 터지는 것도 아니었다.
정령의 여왕이 위치하고 있던 공간이 한 점으로 응축되더니 그대로 터졌다.
예고 없이 터진 폭발이 여왕의 몸을 산산 조각내었다. 그녀는 피나 내장은 쏟지 않았지만, 충분히 놀란 표정이었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폭발은 한 번 터지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불꽃이 산소를 삼키듯이 이번 폭발은 공간에서 공간으로 전염된다.
아래에 선 로이드는 양손 검지와 엄지로 직사각형을 만들고 있었다. 그가 만든 사각형 안에 정령의 여왕이 잡혀 있었다.
“터져라, 터져라, 터져라.”
로이드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내뱉었다. 공간이 계속해서 삼켜지고, 응축되고, 터졌다.
소리 없는 폭발은 여왕의 몸을 계속해서 삼켰다. 여왕의 몸이 추하게 비틀렸다. 끊어진 팔다리가 부풀어 터지고 사라졌다.
하지만 여왕은 죽지 않는다. 초월자인 그녀는 낮과 밤에 상관없이 불사의 존재였다. ‘낮은 격’을 가진 공격은 여왕의 존재를 해하지 않는다.
육체가 쉼 없이 터진다고 해도 그녀의 존재는 아무 타격을 입지 않고 이곳에 존재한다. 여왕의 눈이 로이드를 보았다.
끼기기긱!
대지가 뒤흔들렸다. 땅에서 솟구친 칼날이 로이드를 찢으려 들었다. 그 정도 공격 따위.
로이드는 묵묵히 블링크를 펼쳐 그곳에서 벗어났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틈을 스칼렛이 노린다.
그녀는 로이드와는 전혀 다른 마법을 쓴다. 장갑을 낀 손이 허공에 룬문자를 적었다.
공간 폭발로도 만족스러운 타격을 줄 수는 없다.
“염주(炎呪).”
언령과 함께 마법이 펼쳐졌다.
화르르륵!
폭발로 터져 흩어진 여왕의 살점이 모조리 불에 삼켜졌다.
시커먼 불길은 여왕의 살점을 시커먼 재로 바꾸었다. 머리만 남은 여왕은 불꽃 속에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불꽃은 여왕의 존재를 소멸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귀찮고 불쾌하다.
그녀는 정령의 여왕이었다. 이곳이 정령계가 아니고, 충성을 바칠 정령들이 없다고 해도.
조건이 좋지 않다고 하여 여왕이 초월자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불꽃?
여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여왕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랐다.
촤아아악!
여왕의 몸뚱이가, 그녀의 존재가 거대한 물방울이 되었다. 출렁거리는 물 덩어리가 허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여 거대한 파도를 만들었다. 숲 한가운데에 성난 파도가 몰아쳤다. 로이드와 스칼렛이 대응하기 전이었다.
“하하하!”
창왕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훌쩍 도약해서 로이드와 스칼렛의 앞으로 떨어졌다.
그는 머리 위로 붕붕 휘두르고 있던 창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꽈아앙!
땅이 크게 흔들리며 갈라진 지면이 위로 솟구쳤다.
모두를 집어삼킬 듯 덮치던 파도가 높이 솟구친 지면에 가로막혔다. 출렁거리며 튀어 오른 파도가 여왕의 몸으로 변화했다.
창왕은 물로 이루어진 여왕의 몸을 보며 두 눈을 번뜩였다.
“와라!”
창왕이 고함을 지르며 양손을 들었다. 어느새 그는 장창을 반으로 나누어 두 자루의 단창을 쥐고 있었다.
창왕이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출렁거리던 여왕이 짜증스러운 눈으로 창왕을 보았다.
물러서는 것은 굴욕이었다. 여왕은 본래 몸으로 형태를 바꾸어 창왕을 맞이했다.
파바바박!
창왕의 양팔이 고속으로 움직였다. 그가 휘두르는 단창은 찌르고 휘두르고 때리며 온갖 방위에서 온갖 공격법으로 여왕을 압박했다.
여왕의 공격법은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오히려 단순하고 무식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초월자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격 떨어지는 공격으로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회피는 최소한이다. 마찬가지로 방어도 최소한이었다.
애초에 여왕에게 있어서 치명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머리가 없어진다면 잠깐이나마 보지 못한다. 다리가 없으면 잠깐이나마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그 외에는 전부. 창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무시한다. 애초에 내장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상처라고 할 수도 없다. 앞으로 뻗는 손이 창에 박살 난다. 개의치 않고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팔은 금세 재생한다.
활짝 펼친 손이 창왕에게 향하고, 창왕의 창이 그 팔을 다시 박살 내려 할 때. 그보다 조금 이르게 여왕의 손이 빛을 발했다.
위험.
창왕은 급히 자세를 낮추었다.
팟.
빛이 한 번 반짝였다.
콰르릉!
창왕의 등 뒤에 있던 공간이 폭발했다. 나무며 지면이며, 그곳에 있던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왕이 추가적인 공격을 취하려 할 때였다.
흑룡협의 발이 여왕의 몸을 걷어찼다. 걷어차인 여왕의 몸이 공중으로 날았다.
팽그르르 돌던 여왕은 빠르게 균형을 잡았다. 땅을 박차 도약하는 흑룡협을 향해 여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꾸드드득!
지면이 꿈틀거리더니 위로 솟구쳤다. 토사가 크게 확장되어 흑룡협의 몸을 집어삼켰다.
이런 식의 합공은 처음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성민은 끼어들 틈을 제대로 노리지 못했다.
사실 무조건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다들 그만한 강함을 갖추고 있었다.
서로의 틈을 보완한다. 틈이 있다면 노릴 수 있는 쪽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공격한다.
흑룡협이 압박하는 토사를 찢었고, 창왕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 순간에 이성민도 여왕을 향해 뛰었다.
전투가 시작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왕은 그사이에 어마어마한 양의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귀찮게 하는 이들 중에서 특별히 위협적인 이들은 없었다.
인간 중에서 정점에 오른 마법사와 무인이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일 뿐이다.
숫자만 많을 뿐이다. 위협적인 것을 따져보자면 단신으로 정령계에 쳐들어왔던 위지호연만도 못하다.
오히려 그 시점에서 위지호연은 인간의 영역을 초월해 있었다. 그렇기에 정령계에서 싸웠음에도 여왕은 위지호연을 죽이지도, 압도하지도 못했다.
열흘 밤낮의 싸움은 정령계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고, 여왕은 급하게 강림을 시도해 정령계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지금은 그런 위기감을 느끼고 있지 않다. 저들의 공격이 그녀의 존재를 해할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귀찮다. 짜증 난다.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창왕을 여왕은 미치광이라고 인식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큰 소리로 웃는 놈은 두 자루의 창을 수족처럼 다루었다.
창은 빠르고 무거웠다. 파고드는 창을 피해 상체를 비틀었다.
충분히 피하지 못해 가슴이 찢어져 사라졌지만 개의치 않는다. 닿으면, 죽일 자신이 있었다.
펼친 손을 앞으로 뻗었을 때였다.
퍼억!
여왕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이성민은 여왕의 머리에 박아 넣은 창을 뽑았다.
“내 싸움이다!”
“우리의 싸움이지.”
창왕이 지르는 고함에 이성민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기우뚱 넘어지던 여왕의 몸이 바르르 떨린다.
여왕의 몸이 꿈틀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쉬이익…… 쉬이익…….
머리가 재생하지 않은 목에서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터졌다.
폭발한 몸에 꽉 눌려 있던 바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창왕도, 이성민도 바람에 놀라 물러서지는 않았다.
뒤늦게 난입한 흑룡협조차 쌍장으로 바람을 찢어 길을 열어가며 안으로 들어왔다.
로이드와 스칼렛이 손을 들어 위를 겨누었다. 서로 다른 마법이 폭풍 속의 여왕을 노렸다.
“고작해야 인간…….”
여왕이 내뱉는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호전적인 창왕이 무식하게 뛰어들었다.
그는 하나의 창으로는 바람을 찢고 다른 하나의 창은 주의 깊게 들어 여왕의 몸을 겨누었다.
투창, 창을 던졌다. 던진 창이 푸른빛을 발하더니 터졌다.
파지지직!
창에서 터진 강기의 폭풍이 진로를 방해하는 바람을 모조리 소멸시켰다. 무식하게 연 길을 통해 창왕이 뛰어든다.
흑룡협은 괜한 힘을 쓰기보다는 창왕이 연 길을 따라서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달렸다.
여왕은 힘을 모아 한 번에 쓸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 강림을 끝내고 다른 정령의 보조를 받지 못하는 그녀는 순간적인 화력이 부족했다.
차이는 단순하고 쉬웠다. 여왕은 혼자였고, 적은 많았다.
[네가 이런 입장에 선 것은 처음 아니냐?]허주가 킬킬거리며 이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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