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385)
391화 91. 침략(9)
절망하고 있냐는 질문에.
이성민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계속 싸우면 제니엘라의 마력을 소모시켜, 그녀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만이었다.
뻥 뚫린 복부의 상처는 재생된다. 찢긴 내장도, 근육도, 피부도, 뼈도.
제니엘라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 광경을 내려 보았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이성민의 배를 어루만졌다.
제니엘라의 손끝이 갈라진 복근 사이를 훑었다.
“부족해요?”
제니엘라가 큭큭 웃으며 물었다. 무엇이 부족하다는 걸까. 이성민의 어깨를 잡은 제니엘라의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부드러웠던 손길이 끔찍한 악력으로 이성민의 어깨를 짓이겨 부쉈다.
“지금도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사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당신이 진짜로 절망했을 때에 내가 더 기분이 좋을 것 같아.”
제니엘라의 얼굴을 노려본다. 그래, 이렇게 쉽게 될 리가 없지. 정령의 여왕 때가 너무 쉬웠던 것이다.
“더 해 봐요.”
제니엘라가 이성민의 어깨를 놓아 주었다. 지금까지가 희망을 주기 위한 놀이였음을 증명하듯, 제니엘라의 몸에서 치솟은 마력이 이전과 비교가 안 되는 밀도를 가지고 있다.
박살 난 어깨가 재생된다. 텅 빈 손을 움켜쥔다.
셀게루스 님에게 또 한 소리 듣겠군. 지금 상황에서 이성민은 그런 생각을 했다. 엄청 공을 들여서 만들어주셨는데.
[너…… 괜찮냐?] [괜찮으세요……?]박살 난 어깨가 재생이 잘 되었나 움직여 본다. 허주와 루비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성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희망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할 수 있다고,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짓밟혀서 멍해진 것도 사실이다.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소곤거리던 제니엘라에게 순간이나마 위압되었다.
여태까지 제니엘라를 압도한 이유가 그녀의 의도대로였다는 사실에 허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의 여왕이 이렇게 약할 리가 없다.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상대한다고 해도, 그녀를 압도할 리가 없다. 운명력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고난만을 겪었던 여태까지와는 다르다.
손에 모인 요력이 기다란 창이 되었다. 쓸 창이 없으니 이것을 대신 써야 했다.
희망이 짓밟혔다고 해도 절망하지는 않았다. 제니엘라는 생각했던 것보다 약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생각했던 것만큼의 강함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발악해야 했다. 이성민은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바로 섰다.
제니엘라는 이성민의 표정을 보며 입꼬리를 바르르 떨었다. 그녀는 진한 쾌감을 느끼면서 달뜬 호흡을 삼켰다.
아직 즐거움이 남았다. 몰아붙여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을 사랑했다. 필사적으로 발악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것이 완전히 부러지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낀다. 미래를 보는 마안을 잃었음에도 제니엘라는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당신의 절망은 최고로 즐거울 거야.’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여태까지 혈족으로 삼았던 모든 이들에게서 보았던 절망을 합친 것보다.
당신이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게 하고 싶어. 제니엘라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이렇게까지 갈증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정말로, 먹고, 마시고 싶어졌다. 송곳니가 가려웠다.
여태까지 많이 참았다. 몇 번이고 죽일 기회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 후에도, 그리고 지금도. 제니엘라는 언제나 이성민을 죽일 수 있었다.
그랬음에도 죽이지 않았던 것은, 보다 감미롭게 숙성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때가 되었으니,
참을 필요는 없었다. 제니엘라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붉은 마력을 몸에 휘감은 제니엘라는 유성과 같은 모습으로 이성민을 향해 추락했다.
밀도가 다르다.
이성민은 그것을 염두에 두며 의식을 확장시켰다. 제니엘라는 환계의 구조를 파악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환계에서 쓸 수 있는 무공이 제니엘라에게 무조건 무력한 것은 아니다.
이성민은 떨어지는 제니엘라를 향해 뛰어오르며 손에 쥔 무형창을 휘둘렀다.
등 뒤에서 왜곡을 일으킨 공간이 창격을 쏘아냈다. 수백 다발의 분뢰추살이 위로 치솟았다.
제니엘라의 마력이 넓게 퍼졌다. 분뢰추살은 충돌 전에 흩어졌다. 그렇게 하게 두었다.
견제로 삼아 잠깐 제니엘라의 행동을 제한하고, 그 틈에 손에 쥔 무형창을 앞으로 찔렀다.
꽈지직!
자색 전류가 사방으로 튀었다. 흩어진 마력 속에서 제니엘라의 몸이 불쑥 튀어나왔다.
빠르게 뻗은 손이 이성민의 목을 잡으려 들었다. 복사백탐 역뢰가 창의 궤적을 위로 비틀었다.
제니엘라의 손이 이성민에게 닿기 전에 치솟은 창끝이 제니엘라의 손끝을 박살 냈다.
꽈지직!
그리고 이성민의 몸은 제니엘라의 마력과 부딪혀 뒤로 밀려났다. 충격의 격이 다르다.
요정의 빛은 더욱 엷어졌고 흉갑이 우그러졌다. 몸 안으로 스며든 충격이 내장을 뒤흔들었다.
버텨냈다. 이성민은 양손으로 잡은 창을 횡으로 휘두르며 제니엘라의 접근을 떨쳐내려 했다.
제니엘라는 피하지 않고 몸을 들이밀었다.
콰드득!
제니엘라의 몸이 둘로 나누어졌다. 그 즉시 그녀의 몸은 안개로 무너져 내렸고 이성민 바로 옆에서 육체를 재구성했다.
재생속도는 건재했다. 이성민은 창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놓고 제니엘라를 향해 일장을 갈겼다.
혈환신마공의 혈아육탐이 제니엘라의 마력과 충돌했다. 하지만 그를 뚫고 들어온 제니엘라의 손이 이성민의 손을 붙잡았다.
꽈드득!
손목 채로 뜯겼다. 오른손이 뜯겼지만, 이성민은 비명을 지르지 않고 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이 정도 상처도 재생한다. 무영탈혼의 일보무영이 수십의 잔영을 만들었다. 잔영과 함께 생겨난 뇌운이 제니엘라의 주변을 뒤덮었다.
“더.”
제니엘라가 소곤거렸다. 그녀의 양손이 움직였다.
콰르르르!
휘몰아친 붉은 마력이 뇌운을 모조리 찢었다. 이성민은 재생한 양손으로 무형창을 쥐었다.
절명섬이 제니엘라의 몸을 꿰뚫……. 지 못했다. 휘몰아친 마력이 무형창을 흩뜨렸다.
“더.”
제니엘라가 달뜬 목소리로 재촉했다. 요력과 내공을 압축한다. 서로 다른 형질을 가진 두 힘이 새로운 무형창을 만들었다.
소용돌이치며 모인 힘을 한계까지 충전했다. 관천을 쏘았다. 제니엘라는 큰 소리로 웃으며 관천을 향해 뛰었다.
꽈지지직!
제니엘라의 몸이 관천을 두 갈래로 나누며 가까이 다가왔다.
“더.”
초조해하지 마. 두려워하지 마. 이성민은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새로운 무형창을 쥐었다.
개벽의 빛이 창을 가득 채운다. 환계 속 세상이 요력으로 가득 찬다. 만뢰와 개벽의 무리가 공간 전체를 휘감는다.
상대는 괴물이야. 나도 괴물이야.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라진 두통이 다시 밀려왔다.
뇌세포가 죽고 재생하는 것을 반복했다. 아득해진 의식과 각성한 오성이 활로를 찾는다.
구결을 바꾸고 더 강하게, 완벽하게. 제니엘라가 가까웠다.
제니엘라의 등 뒤에서 마력이 펼쳐졌다. 그것은 마치 빛으로 만든 거대한 날개처럼 보였고, 해가 저물기 직전의 황혼처럼 보였고, 뿜어지는 핏물처럼 보였다.
펼쳐진 빛이 접힌다. 어마어마한 밀도를 가진 마력의 파도가 만뢰와 개벽으로 가득 찬 세상을 뒤덮었다.
“더.”
창을 찔렀다. 이성민은 부릅뜬 눈으로 앞을 보았다. 자신이 찌른 창의 끄트머리가 소멸하는 것을 보았다.
버텨! 허주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요력이 더해졌다. 수백 년 전에 뒈졌으면서. 제니엘라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혼만 남아 뭘 하려고?”
제니엘라가 이죽거렸다.
개벽과 만뢰가 흩어졌다. 범람하는 마력의 파도에 이성민의 몸이 밀려났다.
요정여왕의 가호가 발악하듯 큰 빛을 냈다. 반짝거리는 빛이 이성민의 몸을 휘감았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고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제니엘라의 몸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히죽 웃으며 활짝 펼친 손을 앞으로 뻗었다.
환계를 뒤덮은 마력이 모조리 그녀의 손으로 모였다. 그리고 자그마한 구체로 응축되었다.
“자아.”
제니엘라가 익살맞게 웃었다. 천천히 밀어낸 구체가 이성민을 향해 둥실 날았다.
쿵.
구체가 커졌다.
쿵.
더 커졌다.
쿵, 쿵, 쿵.
완전히 커진 구체는 공간 전체를 채울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이성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것을 보았다.
더…….
제니엘라가 소곤거렸던 그 말을, 이제는 이성민이 중얼거리고 있다.
압도적.
격이 다른 마력을 상대로 이성민이 할 수 있는 수단은 한정되어 있다. 이성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무형창을 꽉 쥐고서 앞으로 뛰었다. 그는 구천무극창의 일초부터 팔초까지 쉬지 않고 펼쳤다.
혈환신마공도 무영탈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니엘라가 쏘아낸 구체는 그 외곽만 닳아 없어질 뿐 근원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무극을 써야 하나? 탈진은? 무영탈혼의 최후절초를…….
행동이 늦었다.
환계가 박살 났다. 이성민이 만든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하늘은 새카만 밤으로 되돌아왔고 커다란 보름달이 밤하늘 한가운데에 떴다.
제니엘라는 보름달을 등지고 서서 아래를 내려 보았다. 이성민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흔들리는 눈으로 제니엘라를 보았다.
피로 젖은 시야의 정중앙에 서 있는 제니엘라를 보면서.
‘내가 늦었어.’
이성민은 무덤덤하게 자신의 실책을 파악했다. 욱신거리는 두통이 강해진다.
조금 늦게, 방금 전의 상황을 이해했다. 닥치는 위험에 조급했던 탓이다.
무극을 섣불리 쓸 수 없어서 초조했고 제니엘라의 공격이 가진 위력에 당황했다.
막무가내로 펼친 무공은 위협을 밀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영탈혼의 최후절초도 마찬가지다. 쓰려면 확실하게, 늦지 않게 써야 했다.
‘오슬라 님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위험했어.’
이성민은 추락 중에 몸을 뒤집었다. 파문이 인 호수가 보였다. 환계 속에서의 싸움은 호수의 정경을 파괴하지 않았다.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오슬라와 눈이 마주친다. 이성민은 오슬라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웃고 싶었지만,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각성한 오성이 승산을 점친다. 저 말도 안 되는 괴물과의 싸움에서 활로를 찾는다. 도망은 무리다.
이성민이 그렇게 마음먹고 행동에 나선다면 제니엘라는 절대로 이성민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오슬라의 지원은?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제니엘라가 오기 전부터 오슬라와 이야기를 끝냈다.
오슬라의 무력은 제니엘라와 비교가 안 된다. 그녀는 다양한 가호를 비롯해 이성민을 제니엘라의 공격에서 보호해 줄 수는 있지만, 직접 제니엘라와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슬라가 가진 권능으로 제니엘라를 이 숲에 묶어 둔다면? 그것도 한계가 있다.
오슬라는 자신이 제니엘라를 묶어 둘 수 있는 시간을 최대 사흘로 예상했다.
결국 사흘 후에는 제니엘라가 이 숲에서 풀려나온다는 뜻이다.
사흘 뒤 제니엘라는 보름달의 가호를 받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녀에게는 보름달을 강제로 띄워내는 마안이 있다.
이곳에서 도망친다고 해서 이성민이 유리한 상황에 서게 될 일은 없다.
오히려 사흘 뒤에 싸우게 된다면, 보름달 아래에서 오슬라의 가호를 받지 못하고 싸우게 된다.
[이렇게 된 이상 네 마지막 노림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보느냐?]허주가 물었다. 공중에 멈춘 이성민은 내상을 점검했다. 데미지는 없다. 재생했고, 오슬라의 가호가 새로이 어린 덕분이다.
‘도박이지.’
승산이 낮은 도박.
아이네를 포식하면서 검은 심장을 강화했다. 이성민의 노림수는 이 전투 도중에, 검은 심장의 능력으로 몸뚱이를 진화시키는 것이다.
여태까지 이성민은 그런 진화 덕에 몇 번이나 목숨을 건졌고, 승리해 왔다.
‘아직 할 수 있어.’
그 불확실한 것을 제외하고서 승산을 점쳐 보았다.
아직 0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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